|
※ 안성3.1독립운동선양회 회원 여러분께서는 필독하세요.
아래 소개하는 글은
1919년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체포된 열사들의 동아일보 공판 보도 자료이다
여러곳에 게제된 내용을 다시한번 소개하고자 퍼 왔음.
• 서대문형무소 순국선열 90인 명단
가로순으로, 유공자명. 판결문. 운동계열. 출신지
1 강만형 姜萬馨 77-2239(21045) 84-43 3.1운동 강원 원성
2 강석대 姜石大 77-1434(20758) 84-49 3.1운동 강원 화천
3 강순필 姜順必 광복회 경북상주
4 강우규 姜宇奎 84-59 1920. 3. 경성지법 재등총독주살 평남 덕천
5 김경운 金景云 ? 77-2774 (공주지청) 의병 경기 통진
6 김경태 金敬泰 84-58 광복회 충남 청양
7 김기한 金起漢 7-2256(21059) 대한독립단 평남 안주
8 김도원 金道源 77-1476(20774)84-90 군자금모금 평북 선천
9 김동삼 金東三 통의부 경북 안동
10 김병일 金炳一 의병 경북 봉화
11 김선일 金善日 ?77-3426(대구지검 )의병 울산
12 김수민 金秀敏 국권P186,1909.10.14 경성지방재판소 의병 경기 장단
13 김순희 金淳熙 77-1546(20790) 학생운동 제주
14 김언세 金彦世 의병 한남 안변
15 김영권 金永權 의병 한남 갑산
16 김용원 金庸源 77-2279(21079) 군자금모금 대전 대덕
17 김원조 金遠祚 군자금모금 경기 이천
18 김종근 金鍾根 의병 강원 원주
19 김종철 金鍾鐵 의병경북 봉화
20 김태산 金泰山 77-1345(20729) 84-2의 병 함남 단천
21 김학섭 金學燮 262(가출옥명단)-언도판서:청진 대한군정서 함북 경원
22 김헌경 金憲卿 의병 강원 삼천
23 김 혁 金 赫 신민부 경기 용인
24 남상목 南相穆 의병 경기 광주
25 동풍신 董豊信 3.1운동 함북 명천
26 모인화 毛仁華 77-1456(20767) 84-67 만주방면 함북 회령
27 문창학 文昌學 62(가출옥명단)-언도판서 :청진 대한군정서 평북 온성
28 문태수 文泰洙 의병 경남 안의
29 박복인 朴福仁 의병경기 영평
30 박수찬 朴秀燦 77-2245(21049), 77-1444(20762 )3.1운동 함북 길주
31 박의송 朴義松 복심(고검):84234884-37 3.1운동 평남 안주
32 박홍석 朴弘錫 ?77-4821(21961) 의병 서울
33 박화준 朴華俊 의병 대구
34 변춘식 邊春植 대한독립단 황해 연백
35 석기호 石基浩 만주방면
36 송학선 宋學先 재등총독 주살 서울
37 신대룡 新大龍 의병 경북봉화
38 신석규 申石奎 복심(고검)84233084-4 의병 함남 갑산
39 신창룡 申昌龍 의병 경기 양주
40 신현구 申鉉九 77-2250(21053) 철원 애국단 충남 논산
41 안광호 安光浩 국내항일 평북 의주
42 안창호 安昌浩 임시정부 평남 강서
43 안철재 安喆裁 77-2243(21048)84-58 3.1운동 경기 안성
44 양한묵 梁漢默 3.1운동 전남 해남
45 엄순봉 嚴舜奉 84-124 주중일국공사 주살 경북 영양
46 오상원 吳相元 ?77-1346(20729) 84-2 의병
47 오석완 吳碩莞 77-4912(22013) 통의부 전남 장성
48 오의선 吳義善 임시정부 의혈단 경기 용인
49 우윤구 禹潤九 의병 경기 마전
50 유관순 柳寬順 77-1433(20757)3 .1운동충남 천원
51 유택수 柳澤秀 77-2313(21099) 군자금모금 경기 이천
52 윤국범 尹國範 의병 경북 예천
53 윤병구 尹炳球 의열단 충남 청양
54 윤준희 尹俊熙 84-66 북로군정서 함북 회령
55 이강년 李康秊 국권P181,1908.9.22 경성공소원 의병 경북 문경
56 이규선 李奎善 77-2237(21044), 77-1443(20761) 3.1운동 경기 수원
57 이능권 李能權 의병인천 강화
58 이명언 李明彦? 77-1463(20770)만주방면함북 명천
59 이병묵 李丙默 신민부 전남 단양
60 이병문 李丙文 77-1453(20766), 77-2243(21048) 3.1운동 경기 안성
61 이선구 李善九 국내 항일 평북 신의주
62 이성구 李成九 병인의용대 평북 선천
63 이수홍 李壽鴻 77-2313(21099) 통의부 경기 이천
64 이양섭 李陽燮 77-1453(20766), 77-2243(21048)3.1운동 경기 안성
65 이억준 李億俊 만주 방면 함북 명천
66 이원직 李元稙 7 7-2253(21053) 교통국 서울
67 이유복 李裕福 3.1운동 경기 안성
68 이은찬 李殷瓚 국권 P182, 1909.5.8 의병 강원 원주
69 이응수 李應洙 만주방면 함북 명천
70 이인영 李燐榮 국권 P173,1909.8.13 경성 지방재판소 의병 경기 여주
71 이인준 李仁俊 77-1456(20676) 만주 방면 함북 회령
72 이재명 李在明 국권 P145 친일파 제거 평남 평양
73 이제우 李濟宇 만주방면 황해 수안
74 이종활 李鍾闊 만주방면 함북 명천
75 임국정 林國楨 84-66 군자금모금 함남 함흥
76 임봉주 林鳳住 광복회 경북 영주
77 임용우 林容雨 77-2227(21037) 3.1운동 경기 김포
78 장소진 張韶鎭 77-1451(20765), 77-2243 3.1운동 경기 수원
79 정경태 鄭敬泰 의병 강원 춘천
80 정남용 鄭南用 77-2239(21045) 대동단 강원 고성
81 정용대 鄭用大 복심(고검) : 84233184-7 의병 경기 파주
82 정홍준 鄭弘俊 의병 경기 파주
83 조종대 趙鐘大 77-2250(21053) 철원 애국단 황해 금천
84 채경옥 蔡京鈺 만주방면 함북 종성
85 채기중 蔡基中 84-58 북로군정서 경북 상주
86 최경호 催京鎬 의병 함북 종성
87 한상호 韓相浩 84-66 의병 함북 경성
88 한정만 韓貞萬 만주방면 황해 평산
89 허 위 許 爲 복심(고검):84-2329국권P175,1908.9.18 경성공소원 경북 선산
90 현순을 玄淳乙 평남 개천
▲ <사진 1> 같은 신문에 실린 127열사들의 공판 모습 (자료제공 동아일보사).
• 만세운동의 발생과 전개
제국주의라는 망령이 조선반도의 하늘 위로 음울하게 떠돌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도 아랑곳없이 탐학과 부패에 젖었던 무능한 지배계급과 달리 민중들은 가열 차게 외세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 싸웠다. 구한말부터 줄기차게 이어진 독립에 대한 열망의 기운이 절정을 이룬 것은 익히 아는 바 기미년의 만세항쟁이다.
조선총독부의 온갖 만행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항거하여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했던 우리 민족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원칙 천명과 동경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이에 1919년 3월 1일을 기해 33인의 민족 대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반 민중들은 만세시위를 함으로써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평화적 독립운동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맨손으로 일제에 맞선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간 전국의 만세시위 집회는 1,500여 회가 넘어서고, 참가 인원만도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도도한 민족운동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대미문의 전 민족적 독립시위였으며, 약소민족 독립운동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다. 서울에서 촉발된 만세시위는 노도와 같이 번져나가 급기야 전국적인 민족봉기로 발전하였다.
안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11일 경 안성읍내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된 것은 3월 하순 무렵이었다. 일경(日警)의 진압으로 안성에서 잠시 주춤했던 만세의 함성은 이내 죽산시장에서, 그리고 원곡면사무소와 양성면 우편소 앞에서 웅혼한 울림으로 메아리쳤으니, 이를 일러 ‘안성3.1만세항쟁’이라 한다. 1919년 4월 1일부터 4월 2일 이틀간 벌어진 원곡 양성지역의 3.1운동은 이유석(李裕奭) 홍창섭(洪昌燮) 이근수(李根洙) 이덕순(李德順) 최은식(崔殷植) 이희룡(李熙龍) 등의 주도로 2천여 주민이 참여한 대규모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양성면 일경주재소를 불 지르고 면사무소, 우편소와 같은 식민통치기관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의 상점을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명실공히 ‘이틀간의 해방’을 쟁취해냈다. 그것은 일찍이 지역민들이 보여주었던 저 극적루(克敵樓)의 저항의식과 죽주산성의 항몽(抗蒙)정신, 홍비(紅飛) 장군과 민병들의 구국투쟁, 그리고 구한말 의병장 민승천(閔承天) 등의 지휘를 받은 안성의병들의 가슴 속에 불꽃으로 타오르던 호국혼의 극적 발현이기도 했다.
• 참가자의 검거와 재판
방화와 파괴가 수반된 이틀간의 격렬했던 만세운동이 지난 후 일경(日警)과 헌병에 의한 폭력 진압에 이어 대대적이고 가혹한 검거의 선풍이 몰아닥쳤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이로써, 순국 24명, 옥고를 치른 이가 127명에 훈계 방면자를 제외한 피검자만도 361명에 달했다. <사진 1> 기사의 상단에 보이는 명단은 이 때 체포되어 서울의 경성고등법원으로 송치된 시위지도자와 적극가담자들로, 이들의 면면을 살피면, 20대 30대가 대부분이나 10대가 16살의 이준기(李俊基) 열사를 포함 6명이고, 50대도 57살의 김시연(金時然) 열사를 포함하여 5명에 이른다.
<사진 1>는 원곡, 양성 만세운동의 공판 모습으로 옥고를 치른 127열사들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경성고등법원 법정의 모습이다. 앞서 말한 대로 1920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 3면에 게재된 사진이다. 기사는 재판이 열린 날이 바로 전날인 7월 22일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세시위가 진압된 지 1년 3개월이 지난 후이다. 멀리 뒤편으로 판사들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 피고들과 방청객들이 좌정하고 있는 장면은 90년의 시간을 일시에 뛰어 넘어 박동하는 역사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하는 동시에,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민족과 역사의 의미를 새록새록 되새기게 한다.
판사석과 방청객들 사이 흰옷을 입은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사람에 대한 심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날 의로운 분노의 함성을 목청껏 외쳤던 안성의 옛 의인들 중 한 사람이 분명하다. 이 재판에서 최은식 열사가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것을 필두로 하여, 모두 징역 1년 3개월에서 10년의 중형을 선고 받았다. 이중 서대문형무소 등지에서 복역 중 순국한 분들만도 7명에 이른다.
▲<사진 2> 1919년 4월 원곡, 양성 만세항쟁에 적극 가담한 열사들의 재판을 소개한 1920년 기사
(자료제공 동아일보사).
<사진 1>은 <사진 2>와 함께 게재된 기사이다. 일본 검찰의 기소사실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는 이 기사에는 “금일 공판 개정되는 안성사건 예심 결정서”라는 제목을 달았다. 부제로 넣은 “최은식(崔殷植) 외 127명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라는 글자도 선명하게 보인다.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기에 일본의 정책을 행하는 관청이 필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원곡과 양성면내에 있는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할 것이다’는 지도부의 시위 촉구 연설 내용을 살펴보면 이 운동이 우연히 촉발된 것이 아니라, 운동의 지도자들이 뚜렷한 목표의식과 자주정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주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사진 3> 신문 및 검증 조서에 첨부된 도면 : 1919년 당시 양성면사무소(왼쪽)와 원곡면사무소(오른쪽)의 위치를 표시하고 시위대에 의한 피해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일경(日警)이 그린 상황도 (자료제공 박환).
• 안성만세운동 참가자들의 기소사유
기사는 피고인들의 이름과 나이를 열거한 후, “우(右) 피고 최은식 외 126명에 대한 내란피고사건에 대하야 고등법원장의 명을 수(受)한 고등법원예심○조선총독부판사 … 가 제출한 소송기록 급(及) 의견서를 조사하야 고등법원검사장대리 조선총독부 검사 … 의 의견을 청(廳)하야 좌(左)와 여(如)히 결정함”으로 운을 떼고 있다. 그 아래에는 판결 주문(主文)과 기소이유를 각각 덧붙였다. 여기에는 이 시위운동에 대한 일본 측의 인식이 잘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들이 매우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 내용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 <사진 4> 일본 경찰이 작성한 문서가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소요의 수괴”로 지목된 만세운동의 지도자 최은식 선생의 학적부 (자료제공 박환).
아래는 이 판결문의 원문을 소개한 것이다. 기소사유의 내용 전문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지면이 부족하여 여기서는 그중 일부만 발췌하여 소개한다. 글의 내용이 구어체(舊語體)로 된 까닭에 다수 시민들이 읽기에 불편한 점이 있을 것으로 여겨 약간의 주석을 덧붙였는데, 괄호 안에 밑줄을 그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는 원문의 인쇄상태가 좋지 않아 인식하지 못한 글자들이다.
다이쇼(大正) 8년(1919년) 3월 1일 이래 조선 각지에서 조선인 등이 다수 합동하야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기를 희망하는 사(事)를 세상에 선전하기 위하야 조선독립만세를 화창(和唱)하야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하는 자 속발(續發)하고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양성면 등 각처에서도 면민이 회집(會集)하야 … 시위운동을 행한 자가 생(生)하얏는대 동년 4월 1일 오후 8시경 원곡면 칠곡리 이유석(李裕奭) 홍창섭(洪昌燮) 동면(同面) 외가천리 이근수(李根洙) 동면 내가천리 이덕순(李德順) 피고 최은식 급(及, 및) 피고 이희룡(李熙龍)의 선동에 의하야 시위운동을 하기 위하야 원곡면민 약 천 명은 외가천리 소재 원곡면사무소 전(前)에 집합하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동군(同郡) 양성면 동항리(구 양성 읍내)에 향하야 발족(發足)하야 한국국기(구한말 국기를 말함)를 거(擧)하고 제등(提燈) 우(又)는 거화(炬火)를 들고 만세를 연호하며 원곡면내를 횡행(橫行)하야써 치안을 방해하고 우(又) 전진하야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치(峙(성은고개 즉 만세고개를 이름)에 지(至)하자 이유석은 먼저 군중에게 대하야 금야(今夜)에 부기면회(不期面會)로 이럿케 다중(多衆)이 집합한 것은 천운이니 제군은 양성 경찰관주재소에 행(行)하야 일본인 순사와 공히 조선독립 만세를 창호(唱呼)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순사가 차(此)에 응하면 가(可)하거니와 약불연(若不然, 그렇지 않으면)한 경우에는 자기 역취(亦取, 역으로 대응할)할 바 수단이 잇다는 지(旨, 취지)의 불온한 연설을 하고 차(且)에 홍창섭 이덕순 이근수 피고 최은식 급 피고 이희룡은 번가라가며 군중에게 대(對)하야 조선은 독립국이 될 터임으로 일본의 정책을 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한 고로 오등(吾等, 우리)은 공히 원곡면 양성면 내에 재(在)한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할 것이다.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 내에 주거케 할 필요가 무(無)한 고로 피등(彼等, 그들) 일본인을 양성에 구축(驅逐, 몰아냄)할지라. 제군은 석(石) 우(又) 봉(棒)을 지참하야 성히 활동하라(돌이나 몽둥이를 들고 적극적으로 참가하라)는 지(旨)의 불온연설을 하야써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하기 위하야 관서(官署) 급 일본인의 주가(住家)를 습격하야 폭행을 하기를 선동 발○하얏더니 군중은 차(此)에 찬동하고 차 결행하기 위하야 군중은 석(石) 우(又) 봉(棒)을 휴(携)하고 해(該) 집단은 피고 최은식 이희룡 등에게 인솔되야 양성면 동항에 진입하얏더라. 그리하얏더니 동야(同夜) 9시 경 반(半)부터 양성면민 수백 명은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하기 위하야 전기(前記) 주재소에 쇄도(殺到)하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야써 치안을 방해하고 동 9시 50분 경에 퇴산(退散, 물러나 흩어짐)하얏는대 그 귀도(歸途)에 전기(前記) 원곡면 방면에서 진행하야 래(來)한 집합과 회합하야 일단(一團)이 되야 전○(前○)의 시위운동으로 공동하야 폭행을 하기 위하야 동야(同夜) 10시경에 해(該) 주재소에 쇄도하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석(石)을 투(投)하고 봉(棒)을 휘(揮)하야 유리창 기타를 파괴한 후 방화를 하야 동사무소 급(及) 부속의 순사숙사 1동 급(及) 공용서류 물품 가구 등 전부를 소각하고 차(次)에 동리(同里) 양성우편소에 쇄도하야 해(該) 사무실 급(及) 주가(住家)의 문호(門戶) 실내조작물 전화기 공용서류 물품 가구 등 전부를 파괴하고 차(且) 금고를 파괴하야 재중(在中)의 공금 17원(圓) 여(餘)를 강탈하고 상동(尙同) 우편소에서 안성에 통하는 전화선을 단절하야 동 우편소 부근의 전주 3본을 절도(切倒)하야 동리(同里) 일본인 잡화상 外里與手 방(方, 점포) 급(及) 일본인 대금업 隆秀知 방(方)을 습격하야 모다(모두) 문호를 파괴하고 가구 물품을 강탈파손 우(又)는 소훼(燒?, 불태워 손해를 입힘)하고 차에 동리 양성면사무소에 쇄도하야 사무실 내에 침입하야 공용서류 물품을 파손하고 우(又) 차(此)를 소훼(燒?)하야 최후에는 기익(其翌, 다음날) 오전 4시경에 동군(同郡) 원곡 가천리 소재 원곡면 사무소를 습격하야 방화를 하야 ○사무실동 급(及) 공용서류 급(及) 물품 전부를 소훼(燒?)하야써 소요를 행(行)하얏더라. 그리하야 전기(前記) 이유석 홍창섭 이근수 이덕순 피고 최은식 급(及) 피고 이희룡은 소요의 수괴로 군중을 지휘한 외에 … 전시(前示) 치안방해와 폭행의 ○부를 감행하고 기타 피고 등도 전현(前顯) 집단에 참가하야 전기(前記) 이유석 외 5명과 공히 … 치안방해와 폭행의 ○부를 감행하얏더라.
• 재판에 회부된 열사들의 명단
아래는 당시 재판을 받은 127열사들의 이름과 당시 나이이다. <사진 1>의 동아일보 기사 상단에 나열된 명단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같은 마을이나 이웃마을에 살던 형제친척들이 모두 참가한 탓에 비슷한 이름들이 많이 눈에 띈다.
崔殷植(22) 鄭一鳳(35) 吳益三(35) 金元順(40) 宋禹弼(22) 金重植(20) 崔昌鎔(26) 崔奇鎔(29) 鄭鳳安(18) 李承益(33) 宋在弼(33) 李完鎬(24) 李重立(37) 韓在鎬(20) 洪在義(35) 韓應敎(29) 金熙植(23) 李熙龍(47) 崔萬鐘(20) 金基聲(19) 李華榮(41) 李俊基(16) 鄭柱夏(32) 全守萬(38) 李裕元(31) 鄭容在(20) 李興吉(22) 金必然(41) 金順西(24) 崔在植(20) 南時祐(35) 張德寬(34) 李丙求(30) 洪敬云(34) 許德成(22) 張元心(32) 鄭鎬根(32) 徐炳敦(29) 李陽燮(40) 朴玉童(20) 金正元(37) 李圭哲(20) 蘇厚玉(35) 李裕吉(56) 金培寬(34) 蘇興福(29) 李鎭榮(30) 金永熙(35) 金永西(32) 朱周鳳(21) 李成烈(29) 梨漢基(29) 李聖律(26) 李相信(33) 金時然(57) 金昌燮(38) 徐完得(35) 李英雨(18) 朴龍業(27) 崔文燮(21) 姜奉돌(25) 李奎昌(21) 姜鳳世(31) 朴同돌(27) 李今哲(41) 廉萬興(미상) 崔秉宅(33) 李仁榮(31) 李鎬益(29) 李仁君(41) 李裕恒(33) 李炳烈(35) 李丙文(33) 李洪基(19) 許丙圭(23) 李裕萬(36) 梨奭根(36) 李相根(미상) 李舜基(23) 李洪烈(26) 崔瓚燮(24) 崔秉一(34) 安喆載(35) 元智成(37) 崔晩甫(42) 李鍾萬(38) 朴正武(40) 吳潤善(30) 金鍾商(31) 吳廷根(34) 吳福永(32) 金伯春(41) 吳世卿(28) 吳世鶴(22) 吳昌善(37) 李大根(50) 任成云(51) 李發榮(38) 李泰榮(31) 李世喆(26) 李國相(35) 李圭東(27) 金鳳鉉(34) 李圭完(20) 李裕稷(35) 李五榮(26) 李丙五(43) 李相玉(21) 李漢榮(20) 李燦榮(20) 高麟在(25) 吳允善(25) 崔冠吉(24) 尹鍾健(18) 鄭寅圭(31) 咸千鳳(25) 南相薰(36) 洪正杓(37) 洪炳珏(30) 朴千鳳(23) 蘇輝泰(51) 趙炳薰(26) 金永夏(25) 李富星(25) 權重玉(33) 南璋祐(28) 孫正鳳(26)
---------------------
* 물론 이곳에서도 3월 28일 무렵부터 산발적인 만세 사건들이 있었으나 면민 전체가 대규모로 봉기한
것은 4월 1일이다.
* 현장에서 순국한 사람이 3명, 안성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순국한 사람이 5명,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사람이 9명, 부상 후 순국한 사람이 7명이다.
* 이 신문기사와 사진은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상태가 조잡할
뿐 아니라, 기사의 날짜도 1919년 6월 7일자라고 잘못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