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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비유는 예수님의 교훈 중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서 공관복음에 그의 교훈중 35%이상이 비유의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면 비유란 무엇인가?
종종 비유를 '도덕적 또는 종교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짤막한 허구적인 이야기'로 정의 되기도 한다. 희랍어 파라볼레(parabole-비유) 의 본래의 의미는 '비교, 대비'이다. 비교의 기본적인 두 형식은 직유와 은유인데 차이점은 은유는 은근한 비교 또는 유사(ex, 그 여우는 묘책을 생각해 냈다)가 포함되어 있는데 직유는 명백한 유사(ex, 그 도둑은 여우처럼 묘책을 생각해 냈다)가 포함되어 있다. 은유는 비교를 제시하는데 반해 직유는 그와 같은 비교를 명시적으로 서술한다. 직유가 확대될 경우 그것은 유사가 되고, 일련의 은유와 함께 등장한다면 그것은 풍유(알레고리)가 된다. 고전 희랍어의 비유 이해의 근본은 바로 이런 유비 사상에 있었다.
예수께서 규정하신 비유나 그에 대한 이해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 구약과 랍비들의 비유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 70인역에서는 두 개의 예만을 제외하고는 파라볼레(parabole)를 마샬(mashal)에서 번역하였다. 비유를 의미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용어가 마샬이기 때문에 우리는 히브리어의 마샬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에서는 마샬을 광범위하게 사용했기에 다음 어느 것이든 지칭할 수 있다.
●속담(proverb): 삼상 24:13 ->옛 속담(mashal)에 '악인은 악인에게서 난다'하였으니...
삼상 10:12; 겔 12:22~23; 16:44; 18:2~3.
●풍자(faunt), 비웃음(satire), 또는 조소의 말(word of delusion): 왕상 9:7 ->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mashal)거리와 이야기 거리(by word)가 될 것이며.
신 28:37; 민 21:27~30; 대하 7:20; 시 69:11; 사 14:4; 합 2:6
●수수께끼(riddle): 겔 17:2 ->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riddle)와 비유(allegory, mashal)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이르기를...
시 49:4; 78:2; 잠 1:6; 합 2:6
●이야기식 비유(story parable) 또는 풍유(allegory): 겔 24:2~5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allegory, mashal)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겔 20:49~21:5; 17:2~10; 삼하 12:1~4; 14:1~11; 사 5;1~7을 비교하라.
유대 랍비 문학과 구약 성경에 마샬이라는 용어가 폭넓게 사용된 예에 비추어 복음서의 파라볼레라는 용어는 다양한 다른 이야기의 형태를 언급하였다.
●은유또는 비유적인 말: 예수께서 정결법에 관해 바리새인과 논쟁을 벌이면서 하신 말씀(마 7:14~16)에 이어 17절에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parable)를 묻자온대'
●속담(parable): 눅 4:23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하는 속담(parabole)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유사(similitude): 유사는 본질상 확대된 직유이다.
유사의 많은 경우가 '너희 중의 어느 사람이'(눅 15:4), '너희 중에 누가'(눅 11:5),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눅 11:11) 등등. 이것이 유사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겠다.
●이야기식 비유(story parable): 유사와는 달리 이야기식 비유는 한 때에 발생한 흥미있는 단일의 사건을 언급한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눅 16:1),'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눅 14:16),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마 21:28),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눅 18:2) 등등. 유사와는 달이 일반적인 일화가 아니라 어떤 특수한 일화인 것이다.
마 21:28~31; 마 25:14~30; 마 25:1~13; 눅 14:16~24; 눅 15:11~32; 16:1~9; 18:2~8
●모범적인 비유(example parable): 이야기식 비유와 모범적인 비유 간에 대단히 많은 유사상이 있어 한 제목(즉 이야기식 비유)으로 혼합할 수도 있지만, 다시금 Linnemann 양의 설명에 따라 유비로 사용된 비유(이야기식 비유)와 모범으로 사용된 비유를 각각 구별하도록 하겠다.
이런 형식의 비유의 예를 눅 12:16~21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 18:23~25; 눅10:29~37; 14:7~14; 16:19~31; 18:9~14.
●알레고리(allegory) ; 알레고리에서는 주제가 상황과 세부적인 묘사에 의하여 설명되며, 이것은 주제와 상황 및 세부적인 묘사 등이 각각의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알레고리는 이야기식의 의도는 겉으로 나타난 것과는 다른 어떤 가장인 것이다. 알레고리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부적인 묘사들이 단순히 이야기를 꾸미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반드시 '해석해야'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사용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인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그의 교훈을 '외방인들'에게는 감추고자 하는 것이다.
첫 삶의 정황(the first Sitz im Leben)에서는 계속해서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의 흠을 찾아 로마와 백성의 목전에 예수님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적대자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그에 대하여 비난을 하기에 보다 어렵게 만들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칭호 대신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신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정치적, 군사적 의미가 합의 되어 있어서 오해할 소지가 많았으나 '인자'라는 칭호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역시 로마인들은 정치적 군사적인 도전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외인들'에게서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자신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셧다.
두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는 상반된 것으로 그의 메시지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계시하시고 밝히시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을 방법으로 '누가 내 이웃입니까'(눅 10:29)에 대해서, 탕자의 이야기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회개한 자들을 기쁨으로 환영하는 것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비유들은 적어도 '예시적'인 것이다. 비유의 의미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주어졌다.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마 4:34).
세 번째 이유는 청중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있다.
청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 말씀에 수긍할 수 밖에 없으며, 그 때는 이미 변명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예로써 (막 12;1~11)에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이러한 관점에서 (눅 15:1~2)과 그 후에 등장하는 세 개의 비유들을 비유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의 배경
예수께서 어디서 예증과 예화를 얻어 비유에 사용하셨는가?
비유를 읽어가노라면, 비유에 묘사된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된다. 비유의 배후에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 소년, 청년 시절에 가졌던 일상적인 경험들이다. 어떤 경우는 농부가 씨뿌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 결과가 씨가 떨어진 토양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나사렛에서 두 사람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또 백합의 아름다움을 목도하고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애로운 돌보심을 제시하였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비유와 교훈에 사용된 자료는 주로 그의 관찰과 농촌 환경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일상 생활에서의 경험에서 예화를 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바울은 예수님과는 달리 그 예화를 코스모폴리탄의 환경에서 끌어내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경주하는 자, 선한 싸움을 하는 자, 선한 군인이 되라는 내용, 법정의 법률 용어, 경기장, 장사, 해로 여행 등등에 관하여 언급하곤 하였다.
비유의 진정성
학자들이 확신하기를 예수님의 실제의 교훈을 참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여느 교훈 형태보다도 비유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비유가 후대에 수정이 있긴 하였으나 예수님에게서 기인한 것이고 초대 교회의 창작품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 하고 있다.
그 첫번째 이유는 '비유사성의 원칙'(criterion of dissimilarity)을 충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유사성 원칙이란 예수께서 행하셨다고 할 수 있는 교훈이 당대의 유대주의자나 초대 교회의 어느 곳에서도 기인한 것이 아닐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진정성이 있으며, 예수님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 비유의 진정성을 인정하는
두 번째 이유는 비유의 팔레스타인적 경향이 있다. 씨뿌리는 자와 토양의 비유(막 4:1~20), 악한 농부의 비유(포도원 비유)(막 12;1~12).
세번째 이유는 비유의 내용과 비유에 사용된 언어가 학자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말한 것이라고 의견이 모아진 예수님의 다른 어록들(sayings)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일치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비유 해석사
1) 초대 교부 시대(~A.D. 540년까지)
이 시대에는 비유들을 고전적인 희랍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으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희랍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의 전형적인 예는 호머가 올림푸스 영웅들을 취급하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또 필로는 구약 성경을 알레고리화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희랍 철학의 진수와 조화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일니우스(130년경~200년경)도 비유를 알레고리로 취급한 몇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다. 감추인 보화 비유(마 13:44)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터툴리안(160년경~220년경)은 탕자의 비유를 알레고리화 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185년경~254년경)에 와서는 알레고리적 해석법이 하나의 "학"(science)이 되었으며, 성경을 삼중적 의미로서 해석을 하였다. 마치 바울이 (살전 5:23)에 인간의 몸과 혼과 영혼을 말하고 있듯이 오리겐도 성경도 "몸"(본문의 문자적 의미), "혼"(본문의 도덕적 그 본체론적 의미), "영"(본문의 영적 의미)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겨자씨 비유(마 4:30~32)에 이 방법을 적용하며 문자적 의미에서 겨자씨는 겨자씨 그 자체, 도덕적 의미로서 믿음을, 영적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가장 극심한 알레고리화된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5)이다.
오리겐 이후에 계속해서 어거스틴도 더욱 환상적인 영감으로 이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였다. 이 비유를 오리겐이나 어거스틴은 구원 역사의 비유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 해석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이 해석으로 산출된 신학이 기독교적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진정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그 의도와 맞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눅 10:29)라고 묻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주었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은 이 비유를 본문에서 의미를 추출한 것이라기 보다는 의미를 부가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해석은 오늘날 수납되어질 수 없게 되었다. 초대 교회 시대에도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에 반대하는 자들이 소수 있었다. 그들은 안디옥의 교부들이며 대표적인 인물이 요한 크리소스톰(347년경~407년)이다.
2) 중세 시대(540~1500)
이 시대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는 성경 주석보다는 신학에 있었다. 그들은 오리겐의 삼중 의미에 신비적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이제는 오리겐의 문자적, 도적적, 영적 의미(알레고리적 해석)에 본문의 천상적 또는 종말론적 의미를 찾아내는 신비적 해석을 부가하였다.
3) 종교 개혁과 그 이후(1500~1888)
종교 개혁은 성경 해석법에 있어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 주었다.
마틴 루터(1483~1546)는 성경의 사중 의미론을 비난 하면서 알레고리적 해석자들을 '원숭이 재주를 부리는 종교적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오리겐의 주해에 대해서 루터는 '오물보다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성경은 반드시 문자적, 문법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건전하였으나 실제 주래는 항상 그의 이론에 부합했던 것만 아니다.
죤 칼빈(1509~1564)은 성경 전체뿐 아니라 비유 해석에 있어서 뛰어난 해석자 이었다. 칼빈은 초대 교회의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무익하고 어리석은 행위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칼빈과 루터의 후계자들은 선생들의 건전한 해석법을 따르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법에 계속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었다. 대감독 트렌치마저 초대 교부들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4) 현대(1888~현재)
아도프율리허는 현대적 비유 해석학의 시조이다.
1888년 발행된 그의 책<예수의 비유 강설> 제1권에서 비유는 결단코 알레고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율리허는 비유란 알레고리가 아니라 직유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비교점 또는 유사점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세세한 부분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일 것이다. 그밖에 다른 자료들은 이 하나의 요점을 밝히기 위한 보조 자료, 채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유 해석에서 율리허의 공헌은 비유와 알레고리의 차이를 잘 지적해 줌으로써 수세기 동안 교회 안에 비유 연구에 있어 만연했던 알레고리적 비유 해석법을 종식시켰다는 점이 있다.
율리허의 저서는 비유 해석학의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율리허의 첫 번째 약점은 그가 이전의 지나친 비유의 알레고리적 반동적으로 거부하여 예수의 비유에 있어 모든 알레고리적 요소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것이다.
율리허는 복음서 내의 알레고리적 요소나 해석이 있을 때마다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여 그것을 초대 교회의 산물로 돌려 버렸다. 그 이유는 비유를 구약적 관점에서 보다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마샬'이라는 용어가 잠언이나 조롱, 수수께끼, 이야기식 비유, 또는 알레고리적 요소를 하나도 포함해서는 안된다든지 또는 예수께서 비유에 알레고리적 세부 묘사를 포함시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율리허의 두번째 약점은, 그가 비유에서 발견하려는 하나의 의미를 항상 보편적인 진리와 일치시키려는 데 있다. 그러나 비유에 묘사된 예수는 도적적 보편 진리만을 제시하는 자유주의적 예수와는 달리 일단의 청중을 격동시키고, 격분케 함으로써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한 예수였다(막 12:12)
만일 예수께서 도덕적 보편 진리만을 가르쳤다면 그들은 결코 이런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율리허의 작품이 이러한 두 개의 약점(한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비유 해석을 지배했던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의 질곡을 완전히 부서 버림으로써 성서 연구 분야에 영원한 인각을 남겼다.
다드(C.H. DODD)는 비유 해석사를 일보 전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1935년에 발행한 그의 저서<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다드는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비유를 원래의 삶의 정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곧 비유는 예수님의 사역과 메시지의 문맥에서 해석되어야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자의 현 상황에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드는 '비유가 오늘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라는 물음에 앞서 비유가 최초의 청중들에게 무엇을 의미를 갖는가? 라는 물음에 앞서 비유가 최초의 청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져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①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사상들
② 예수님의 일반적 교수 경향이다.
다드는 이 통찰력과 함께 양식 비평의 결과를 사용하여 비유를 연구하였으나 그도 역시 한계점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큰 한계점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단지 '실현된 종말론'만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모든 비유를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였다는 점이다. 편집 비평의 발흥과 함께 비유 해석에 대한 또다른 통찰력이 소개되엇다.
1950년대의 한스 콘젤만(Hans Conzelman)과 빌리 마르크센(Wili Marxsen)의 저서가 나오면서부터 각 복음서 저저들의 신학적 문맥과 강조점들에 대한 탐구, 말하자면 제 3의 삶의 정황에 대한 탐구에 사람들은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비유를 연구할 때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정황(제1의 정황)뿐만 아니라 비유가 구전으로 내려오는 동안 처했던 상황(제3의 정황)에 비추어 비유를 이해해야만 한다.
제3의 삶의 정황을 보여 주는 예가 누가가 해석한 므나 비유이다(눅 19:12~27). 일반적으로 이 비유는 기독교적인 청지기의 삶을 가르쳐 주는 비유로서 해석 된다. 그러나 누가는 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자신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발생한 필요를 맞추기 위해서 재적용시킨다.
누가가 강조한 것과 이 비유가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가 서로 상충되지 않음이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확실하다.
첫째는 본래 청지기직이란 '현재'와 '완성'사이의 기간이 존재한 때만 의미가 있는 까닭이다.
예수께서 비유에서 가르치신 청지기식은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던 시간과 최종적인 완성 사이에 일종의 연기를 함의하거나 아니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가 (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이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에서 보는 바대로 마태가 번안한 비유에서도 주인이 돌아오는데 지연이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주요한 세 가지 비유 해석의 원리들을 정리하면
1) 비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요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나 비유의 상세한 부분을 반드시 알레고리로 해석해야만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 비유의 본래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1세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의 입장에서, 즉 제1의 삶의 정황에서 에예께서 하고자 하신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3) 그뿐 아니라 각 복음서 저자들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즉 우리는 저자가 처했던 제3의 삶의 정황에서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