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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화
(골로새서 2:1-3)
서론 :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말은 공개된 비밀을 뜻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비밀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비밀이며 이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에 대하여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이처럼 경종 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비밀로 하셔서 하나님을 떠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인간들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신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달았고 계시로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일로 여겼으며 빌 3장에서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였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온갖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습니다.
(1) 그 안에는 진리의 보화가 한없이 충만히 있습니다. 요 1 : 14절 말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공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사람은 예수님을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의 말을 진리라고도 말합니다. 역사상 이 세상에 존재했던 성현들의 금언을 진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란 영원불변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발견되는 차원이 높은 고상한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신령한 눈을 뜨게 합니다. 26 \ 2:1-3
생명의 주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합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는 영생의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진시 왕이 구하지 못한 불로초보다 더 온전한 생명 초가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생명수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기록한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영생의 보화가 숨겨져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의 백성이 아니면 이 비밀을 깨달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천국의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 13 : 44절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보화가 곧 그리스도이시며 이 보화야말로 하나님의 비밀로 보화의 가치를 깨달은 자만이 자신의 보화로 사서 그 보화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보화들이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듣고 깨달아 확실히 그 보화를 내 것으로 소유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 같은 보화의 가치를 알고 그 보화로 말미암아 그 보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과 이 보화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과는 생활 방식이나 그들의 인생관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차이점을 들어 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나그네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이 보화를 발견하고 그 보화의 참가치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소망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밭을 발견한 나그네가 자기의 모든 소유물로 그 밭을 산 것처럼 여러분의 생을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 그 안에서 축복 받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 \ 2:4-5
(14)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
(골로새서 2:4-5)
서론 :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해 준 일은 공교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공교한 말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나타나 성도들을 속여 미혹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에도 이런 류의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여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게 하려고 바울은 큰 염려 가운데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가르치기에 게을리 하지 아니했습니다.
1.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
공교하다는 말은 인위적으로 그럴 듯 하게 꾸민 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지혜라든가, 인간의 철학에서 나온 학문이 많은 작용을 합니다. 이 같은 일은 인간의 지혜로 믿음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간교인 것입니다. 공교한 말은 그 목적이 진실을 감추고 사람을 속이려는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탄의 일꾼들이 공교한 말로 우리를 속여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하려고 기회를 엿보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이들 공교한 자들의 형태를 보면 소위 몰몬교 라고 일컫는 말일 성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이 몰몬 경이라고 하는 그들의 경전을 받은 경위를 공교한 말로 꾸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몰몬교 경전을 읽으면 그 간교에 넘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공교한 말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한 부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경우를 든다면 통일교의 원리 강론이란 통일 교도들의 경전이 그것입니다. 이들 통일교의 윈리 강론은 인간의 타락론부터 공교한 말로 꾸몄습니다. 이들은 성경에 있는 사실적인 내용을 상징, 예표란 말로 그럴듯하게 넘기고 간교한 해석을 시도하므로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해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와 사탄과의 간음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일은 바로 간음을 의미 28 \ 2:4-5
하며 가인은 이들 가운데서 태어난 뱀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적 구원만 이루셨고 다른 구세주가 와서 육적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데 문선명 이가 바로 그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과의 피 가름이라는 끔찍한 교리가 먹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 가까이서 우리를 공교한 말로 속이는 무리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중요 교리는 모두 공교한 말로 꾸민 거짓말입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깎아 내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최대 작전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그들은 파수대라고 하는 선전 매체를 통해서 공교한 교리를 주장하는데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며 구원은 오직 여호와의 증인에게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천사 중에 하나로 우리 인간들 보다 약간 능력이 많은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돌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성경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거짓된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요즈음 들소리 신문이라고 교계 신문과 어떤 출판사를 경영하는 통합측에 속한 어떤 교회 장로는 안식교에 대해 이단이 아니라 견실한 교단이며 진리를 파수하는 교단이라고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많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공교한 말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의 주요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날로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지켜 온 토요일 안식일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에 대해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란 사실을 숨기고 다만 옛날 로마에서 태양신을 섬겼던 날이었기 때문에 그날을 주일로 섬기는 일은 비 성경적이며 구원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은 율법적인 안식일을 고집하므로 그리스도인 들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사실을 잊어 버리게 하고 율법적인 구원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올바로 모르거나 사탄이 꾸며낸 공교한 말로 우리를 너머지게 하려는 일입니다.
결론 : 이런 이단 설 외에도 우리들 주변에는 수많은 미혹의 무리들이 공교한 말로 우리에게 침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노략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무기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공교하게 하여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쑥물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 믿음이 성장하여 진리로 굳게 무장해야 합니다.
29 \ 2:6-7
(15)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일
(골로새서 2:6-6)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공교한 말로 속이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음 몇 가지 교훈을 명심할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를 주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라
바울은 6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만이 있을 뿐, 다른 일체의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다른 믿음의 대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이 사실을 뚜렷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떠나게 하려고 공교한 말로 미혹합니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는 거짓 선지자,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등장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한다고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시어 죽으셨다는 확실한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나 하늘 위에나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인 것입니다. 언제 문성명이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준 것입니까? 지난날에도 그러하고 근래에도 자칭 예수로 사칭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언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죽어 준 것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대로 2천년 전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우리의 구세주가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에 그 안에서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공교한 말로 속이는 이단자들의 교훈에 속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생활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스러운 교리를 말씀보다 30 \ 2:6-7
앞세워 그 교리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생활이나 교훈에 있어서 그리스도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이삭이 나오고 나중에 결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뿌리를 엉뚱한 곳에 박는다면 그의 신앙적인 성장이 점점 이상해지며 나중에 보면 그 열매가 전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이상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뿌리를 잘못 박은 사람은 그의 신앙생활이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그의 신앙의 뿌리가 굳어지기 때문에 공교한 그 자리에서 제 자리로 옮겨지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줄 알고 몇 번 잘못된 집회에 참석하든 것이 그곳에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이단자로 굳혀지는 것입니다. 뿌리를 잘못된 곳에 내리고 그 뿌리로부터 영생을 바라고 천국을 소망한다면 이 같은 일은 콩씨를 뿌리고 팥을 거두려는 헛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말은 믿음의 대상과 생명적인 연합 관계를 맺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은 그 분과만 생명적인 연합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2.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가 그들에게 교훈을 준대로 믿음에 굳게 설 것을 당부했습니다. 굳게 서라는 말은 누가 밀쳐도 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의 일꾼들을 보내어 가끔 우리에게 다가와 슬쩍 건드려 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교훈을 받은 그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그 유혹의 손길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만약 약간만이라도 흔들리면 계속 잡아 흔들어 받은 교훈에서 끌어내려 진실한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은 바울이 받은 계시로 그들에게 가르친 대로 그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계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는 순결한 믿음만이 복음입니다. 공교한 말에 속아 잘못된 곳에 서면 그리스도 에수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합니다.
결론 : 마지막으로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감사가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단자들,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신앙에는 주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 생활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거짓된 믿음에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1 \ 2:8
(16) 철학과 헛된 속임수
(골로새서 2:8)
서론 :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교회에 침투하여 공교한 말로 미혹하는 일은 이 철학이란 학문과 헛된 속임수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철학에 대하여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말하고 이 같은 초등 학문을 좇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순결을 지키려면 방어적이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순결을 지키는 방패로 은장도를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남자들이 모두 다 예의바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보다 남자의 순결을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경우는 요셉의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유혹의 손길이 득실거리는 거리에 서성거리고 있는 청년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복음의 순결을 지키는 일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 첫째 번 조건이 됩니다.
1, 철학을 조심하라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는 세상의 초등 학문을 조심해야 합니다. 철학이란 인간의 지혜학입니다. 모든 지식에 관한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말하자면 학문의 바벨탑이 철학입니다. 철학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근본을 캐내어 하나님의 존재와 대결하려는 인간의 지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같은 세상의 철학이란 학문에 대하여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후, 신학에서 소위 종교 철학이란 학문을 만들어 놨지만 이 종교 철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변증하거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철학에 깊이 빠지면 무신론 사상, 허무주의 사상, 신비주의 사상에 물들기 쉬운 것입니다.
2. 헛된 속임수
다음에 바울은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경계했습니다. 속임수는 결국은 진리에 의해 무너지기 때문에 헛된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학문과 이론은 헛된 속임수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이상한 판을 벌여 놓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한 후 속임수로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32 \ 2:8
그 때는 이미 생명을 노략질 당한 후인 것입니다.
(1) 박태선의 경우 (박장로 전도관) 그럴듯한 속임수로 미혹하는 데 그는 모인 군중들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신가? 아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시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그의 백성들이 마귀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데 가만히 보실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전능하신 분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2) 구인회란 자칭 예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죽었습니다. 재림 주는 구씨 성씨 가진 사람이다. 계21:17절 천국의 성곽의 길이가 144규빗, 1+4+4=9 그래서 구씨라야 한다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3) 과학자들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란 것을 증거 해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화성에 우주선이 착륙했다. 그 목적? 화성이 생명체가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아무 것도 없어서 실망하고 있다. UFO로 지금도 난리들이다. 우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구의 창조가 제일 먼저, 넷째 날에 우주를 창조하심.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했으며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창조 사역을 이루심. 인간 외에는 다른 우주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임수란 진실을 가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먹혀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일은 사탄의 작품인데 그 목적이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영 분별의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잣대를 삼으려다가 그곳에 또 미혹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 13 :11절에는 거짓된 것으로 속이는 사탄의 모습을 잘 보이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모습에 대해 생기기는 새끼 양처럼 생겼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지고 영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용의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 성령이 증거 하는 말씀은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자랑합니다.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그가 지신 십자가와 그가 흘리신 보혈과 그가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와 그를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의 진리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의 말씀에 무엇인가 이상한 토를 달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좇아야 합니다.
33 \ 2:9-11
(17) 그리스도의 할례
(골로새서 2:9-11)
서론 :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에 대하여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곧 세례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다음 12절에서 그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표식입니다. 그 당시 이 표식을 할례란 의식으로 행했는데 그 의식이 손으로 한 의식이었습니다. 이 할례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이방인과 구별되는 백성으로 성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 구별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할례는 아브라함이 행했던 것처럼 손으로 하는 할례인 것이 아니라 손으로 하지 아니할 할례라고 말하고 너희가 이 할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성별의 방법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 시대이건 신약 시대이건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별 시키는 일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적 방법이요 하나는 신약적 방법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이기 때문에 그 의식에도 그림자와 실체의 차이를 드러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육체적 할례를 받았습니다. 육적 할례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손으로 행하는 할례입니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아야 할 민족입니다. 예수님도 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육적 할례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별하는 일에 할례가 소용이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 신약 시대에는 참 할례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신약적인 할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어서도 구약적인 하나님의 계명은 율법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은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시고 그 계명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므로 구약적 계명인 율법이 원래 그 본체가 사랑임을 나타내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할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라고 했으며 육적 몸을 벗는 할례라고 한 것입니다.
34 \ 2:9-11
(1) 그리스도의 할례란 옛날 모양 손으로 행하는 육적 할례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란 절대적 조건이었습니다. 출 4 : 24에는 놀라운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주지 아니한 연고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치시려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치려 하시던 손길을 거두셨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남자아이들의 양피를 베는 일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할례는 양피를 베는 할례가 아닙니다. 요즈음 비뇨기과에 가면 위생상 이유로 이 남자아이들의 양피를 베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적인 할례도 구약적인 할례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에 의한 할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 바울은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에 대하여 죽은 생활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적인 의미의 말이 됩니다. 정욕으로 사용했던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버려 새로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로 성별시키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할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로써 양피를 베는 일로 성별시켰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별된 생활로 성별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의 의와 연관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일은 곧 세상과 구별되는 할례가 되며 이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 들은 육적 몸을 벗는 생활로 실제적인 할례의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롬 8: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 영의 생각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할례는 육적 성별은 가능했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인 영적인 성별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같이 육적 생활을 할 때 그 할례는 무 할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들의 할례는 실제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므로 성별시키셨습니다. 이 할례는 거듭날 때 성령의 임재 하심으로 성별의 그리스도의 할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몸을 벗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의의 선언을 받았기 때문에 할례자의 실제적인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할례 받은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롬 8 : 14절 말씀처럼 영으로 육을 죽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할례는 성령으로 사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별된 그리스도의 할례 받은 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5 \ 2:12-15
(18) 할례와 세례와의 관계
(골로새서 2:12-15)
서론 : 세례를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세례는 어디서 온 것이며 어떤 영적 의미가 있으며 구약의 할례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 세례 문제를 가지고 생긴 교단이 소위 침례교회이며 그 후, 일반 교회에서 실시하는 물세례를 버리고 침례 세례를 하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1. 세례의 두 가지 뜻
바울은 본문에서 세례의 깊은 뜻을 할례와 연관시켜 해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세례에 대하여 영적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으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물세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관계와 연결시키므로 세례의 참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받는 물세례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고 세례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1) 세례에는 소극적인 뜻이 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세례와 구원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구원이 그 세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위한 의식으로 받는 것이 세례입니다. 다음에 세례는 중생에 이르는 과정도 아닙니다. 세례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야 중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세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례는 의를 얻는 방편도 아닙니다. 의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세례에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세례란 방법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양심적인 신앙고백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은 비록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누구나 거절하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 랍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 36 \ 2:12-15
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세례의 참 뜻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일과 부활하신 일에 연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이 말하는 세례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세례란 물세례를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례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중생의 역사 곧 성령 세례를 의미해 줍니다. 침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몸을 담겨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물에서 올라올 때 살리시는 부활에 연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롬 6장과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례는 둘 다 그리스도인 들이 받을 물세례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의미합니다.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상징해 주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합니다. 침례 교인들처럼 물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부활하는 의식으로 집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은 구약의 정결케 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물로 씻어 정결케 했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짐승의 피를 뿌려 정결케 하는 의식으로 삼았습니다. 물은 곧 죄를 사하는 피를 말하고 이 피는 곧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해 줍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준 것은 정결케 하는 율법의 의식에 따라 회개의 상징으로 실시했던 것입니다. 침례란 말은 ‘팝디죠’란 말에서 나왔는데 그런데 이 팝디죠란 말이 물에 담근다는 침례란 말의 뜻도 있지만 물로 씻는 세례란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눅16:24 찍어, 핍디죠= 출30:20 물로 씻어, 핍디죠)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팝디죠란 단어를 침례란 해석으로 할 수도 있고 세례란 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별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영적 세례로 이루어 주시고 우리는 물세례로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별을 이룬 사람들만이 물세례의 의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 ). 죄와 무 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세례인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일을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으므로 이 모든 일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37 \ 2:16-17
(19) 폄론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사실
(골로새서 2:16-17)
서론 :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배워서 성경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좀 평이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현대인의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매월 초하루나 안식일에 관해서 아무도 여러분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이 갈 4: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 이 말씀에 나타난 대략적인 내용
우리는 먼저 본문에 나오는 말씀의 대략적인 내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먹고 마시는 것 = 율법에서 규정한 규례로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을 말하며 이것은 또 절기에 따른 금식이나 금욕적인 생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절기 = 절기는 율법에서 유대인들에게 지키기를 명하는 행사입니다. 유대인들이 큰 명절로 지키는 오순절, 이 오순절은 칠칠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유월절, 장막절, 초막절이라로도 부르며 7월15일에 지키는 유대인들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절기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율법에 명한 바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3) 월삭 = 그 달의 초하룻날을 의미하며 이 날은 제날로 나팔을 불고 안식했으며 특별한 희생제를 드렸습니다. (4) 안식일 =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이레 되는 날에 안식하는 율법적인 규례로 하나님께서 레위기 23:1절 이하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런 것들 때문에 아무에게든지 너희가 판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따위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까지 율법적인 조항으로 지켜졌던 것들이니 이제 장래 일에 그림자로 필요했던 이것들은 본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전히 폐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런 일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특히 유대교에 열심 있는 거짓 선생들로부터 판단을 받거나 좋지 않게 비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것들, 즉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과 율법적인 생활
38 \ 2:16-17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적인 생활을 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이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 태어나시고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율법의 의를 이미 얻은 것입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율법을 모두 이루어 율법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무 율법주의자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율법인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율법은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법은 율법과 모순되는 법이 아니며 오히려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어떻게 내려야 합니까? 율법에는 의식적인 조항이 있고 계명적인 조항이 있습니다. 의식적인 조항은 먹고 마시는 의식, 제사의식, 절기의식, 정결의식 등인데 이 조항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라졌습니다. 절기 의식도 유월절도 성취되었고 무교절도 성취되었으며 맥추절도, 이런 절기 의식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요는 안식일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 안식일은 10계명 중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안식일을 명시하면서 안식일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규정짓고 있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에 그 제정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은 7일 안식을 말하는 토요 안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의 그림자임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히 4:3-10) 신약 시대에는 주일이 안식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늘에서의 참 안식의 그림자로 보이신 것이기 때문에 이 조항이 비록 10계명 중에 있다고 하나 안식일은 그림자로서의 역할로 이미 그 시효가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 안식일에 얽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안식일을 어겼을 때의 저주와 심판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너져 버립니다.
결론 : 안식일은 우리의 참 안식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만약 안식일을 따라 그 규례를 지킨다면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를 헛되게 믿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안식일이 10계명에 있는 하나님의 계명인 줄 알면서도 안식일은 그림자에 속한 의식적인 규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안식일에 대하여 우리를 판단하려는 자들에게 분명한 성경적인 증거를 가지고 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39 \ 2: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