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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송백리(松栢里)
산내면의 교통, 행정, 교육, 경제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 소재지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파출서, 보건지소, 농협, 우체국, 오일장(五日場) 등의 공공기관과 경제시설이 모여 있는 동리이다
동쪽으로 단장면 구천리와 경계를 이루었고, 서쪽으로는 봉의리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에는 곤지봉(坤支峰)을 사이에 두고 가인리와 대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건지봉(乾支峰)을 분수령으로 임고리와 경계를 지었다
마을의 동서를 관류하고 있는 동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 하천가에 넓은 들판이 전개디어 면내에서도 가장 물자가 풍성한 마을이라 할 수 있다.
국도 24호선이 4차선으로 노선이 새로이 개량되어 송백들의 남북을 시원하게 달리고 있다. 송백리에 진출입을 하려면 산내면사무소의 남쪽에 있는 용전교차로와 북쪽에 있는 가인 입구 교차로를 이용해야 한다
조선조 후기에 이 동리에 소속된 방리(坊里)로는 송포리(松圃里), 양송정리(養松亭里), 미라리(美羅里) 등이 있었으나, 그 후 백평(栢坪), 대촌(大村), 서당촌(書堂村), 옥정동(玉井洞), 용지(龍池), 노곡(蘆谷, 갈밭), 덕동(德洞, 덕걸), 대사(大沙), 팔풍(八豊) 등 여러 작은 땀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그 대표적인 마을인 양송정(養松亭)과 백평(栢坪)에서 한 자(字)씩 취하여 송백리(松栢里) 라는 법정리를 구성했다
1965년에는 송백리를 다시 3개의 행정리로 나누었는데
1동에는 면소재지인 팔풍(八豊)과 上.下 땀으로 분리된 잣들(백평 柏坪)이 소속되며,
2동에는 양송정(養松亭)의 두 땀에 해당하는 대촌(大村)과 서당촌(書堂村), 그리고 송포(松圃)의 두 땀인 옥정동(玉井洞)과 용지(龍池)가 이에 해당한다
3동에는 고방(古坊)인 미라리(美羅里)를 비롯하여 갈밭(노전 蘆田), 덕걸(덕천 德川), 대사리(大沙里) 등을 소속시켰다
또 송백리에는 구한말에 주사(主事) 장한상(蔣漢相)이 터전을 잡아 아산(牙山) 장씨(蔣氏)가 살았고, 사인(士人) 강대원(姜大源)이 입촌하여 진양(晋陽) 강씨(姜氏)도 살았다.
조선 말기에는 사인(士人) 이영선(李榮善)이 청도(淸道)에서 이 곳으로 이거하여 고성(固城 이씨(李氏)의 세거지가 되었다
(1) 팔풍(八豊, 八風)
산내면사무소의 소재지로서 옛날의 장터 거리이다. 팔도의 풍각장이가 장판을 찾아 모여들고 북적거리는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팔풍장(八豊場)이라 했다
1931년에 이웃 마을인 임고리(臨皐里) 작평(鵲坪)에 있었던 면사무소를 이 곳으로 옮긴 이후에 주민들이 시장(市場)으로서 풍족한 팔도 물산의 교류를 염원한다는 뜻에서 “팔풍(八豊)“으로 지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래는 주거지가 아닌 들판이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도로가 개설되고 5일장이 열리면서 면사무솔르 비롯하여 파출소, 산내초등학교, 농협 지소, 산내보건지소, 산내우체국 등 면내의 주요 공공기관과 문화시설이 들어섬에 따라 최근에는 산중 도시가 되었다. 행정상으로 송백리 1동에 해당한다
잣들(栢坪, 栢村, 잣마, 잣숲)
팔풍 마을의 서쪽에 잇는 들마을인데 동천가의 충적토로 이루어진 비옥한 지대이다. 위땀과 아래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옛날 이 곳에는 무성한 잣나무 숲이 있었으므로 잣마(백평) 또는 잣숲(백수)이라고도 한다
토성이 좋고 수리가 편리하여 옛날부터 면내에서도 일등호답이 이 곳에 모여 있다고 했다. 위땀에는 동강중학교(東崗中學校)가 있다. 또 아래땀에는 조선조 후기 이래 김해 김씨가 입촌하여 살고 있다.
잣들(栢坪)의 아래.위땀을 흔히 동천가에 있다 하여 아랫갱변, 웃갱변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승들
팔풍의 면사무소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장승들이 잇다. 옛날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나무 장승이 잇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덕걸들
팔풍에 있는 덕걸 앞의 들 이름이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덕걸보라고 한다
횟대배미
잣들 가운데 있는 논배미의 이름이다. 물고기 종류인 횟대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당나무껄
팔풍 구 면사무소 뒤에 잇는 당나무껄인데 나무의 수령이 수백년이 된다. 이 곳은 동신을 모시는 곳으로 해마다 당제를 지낸다
덕걸(德洞, 德川)
(팔풍에서 봉의리로 건너가는 삼거리에 있는 땀 이름이다) ?
옛날에는 갈밭(노전), 대사리와 함께 미라리에 속했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팔풍 시장걸의 일부가 되엇다. 이 곳 걸(川)이 홍수로 인하여 충적되어 이루어진 땀이다
(2) 양송정(養松亭, 兩松亭)
송백리 2동 의 중심 마을이다. 조선조 후기에 양송정리 라는 방리의 터전인데 대촌, 서당촌, 옥정동, 용지 등 네 땀을 합하여 양송정 두 땀 혹은 송포 네 땀이라 일컫는다
옛날 이 마을에는 “일직 손씨”와 “밀성 손씨”가 이거해 살면서 양 손(兩 孫)의 마을이라고 하여 양송정(兩松亭)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가 있고, 이 곳에 송포(松圃)가 있어 소나무를 기루었기(재배했기) 때문에 양송정(養松亭)이 되었다는 다른 이설도 있다. 그러므로 옛날 양송정(養松亭)의 터전인 지금의 큰마(大村)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주로 양(兩) 손씨가 집단촌을 이루어 세거지로 삼고 있다
큰마(大村, 養松亭)
송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일반적으로 양송정이라 한다. 조선ㅁ조 영조 연간(1724 ~ 1776)에 산외면 죽동에서 이 곳으로 옮겨온 “밀성 손씨”의 일문이 자리를 잡은 이래 지금까지 세거지가 되었는데 정조(1777 ~ 1800) 때에는 사인 손사홍이 입촌한 선조를 위하여 만취재(晩翠齋)라는 재사를 지었고, 1914년에는 진사 손진수 등이 확장 중수하였다
서당마
큰마(대촌) 서북쪽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옛날에 강학하던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조 현종 연간(1660 ~ 1674)에 통정 손제겸이 산외면 죽서에서 이 곳으로 이거한 후 “일직 손씨” 일파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그 후 자손들이 영구재(永構齋)라는 서당을 세워 강학을 실시하였다. 1914년에는 사인 손기덕이 다시 재호를 영언재(永言齋)로 고쳤는데, 서당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에 기인한다
옥정동(玉井洞)
큰마 남쪽에 잇는 마을이다. 마을 앞 산 밑에 있는 샘물이 말기가 옥(玉)과 같다고 하여 옛날부터 옥정동이라 했다. 또 이 우물에서서 옥으로 만들어진 바가지가 떠 올랐다는 전설이 있어서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용지마
마을 뒷산의 형상이 큰 용과 같고, 산기슭에 있는 연못에 물을 마시기 위해 용이 나타났다는 전설로 인하여 용지(龍池) 똔느 용지마 라고 하였다. 용짐마 라고도 한다
디딤말들
양송정과 팔풍 사이에 있는 들 이름이다. 옛날에 눈이 많이 와서 온 들판을 뒤덮을 때 근처 산의 이리(늑대)와 맷돼지들이 설친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짐승들은 양송정 앞에서 가인리의 인곡까지 줄을 친 것처럼 발자국을 남겨 놓았는데 동민들이 하도 이상하여 그 발자국을 따라 눈을 치웠더니 그대로 봇도랑이 되었다고 한다. 짐승들이 디딘 발자국의 들이라 하여 이러한 지명이 생겼다
화랑고개(화령 火嶺)
양송정에서 임고리의 발례동으로 통하는 고개의 이름이다. 옛날에 이 고개에는 숲이 울창하여 넘나들 수가 없엇다. 하는 수 없이 숲속에 불을 질러 고갯길을 내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끝방재(末坊嶺, 안골)
양송정에서 단장면 구천리 정승동으로 통하는 고개의 이름인데 마을의 맨 끝에 연결되는 고개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안곡이라고도 한다 (주) 레나 : 밀양의 향토사학자 손흥수 선생에 의하면 “ 고려 공민왕 때 정승(政丞)을 3번이나 한 ”김용(경기도 안성 김씨)“이 공민왕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밀양의 정승동(政丞洞)으로 귀양을 와서 23일간 유배되었다가, 계림부(鷄林府, 경주)로 끌려가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끌방재“ 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단장면 구천리 정승동의 지명 유래는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인 김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카페 밀양광장의 ”재악산(載岳山) 산명(山名) 고찰(考察)“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소동나무껄
양송정 큰마 어귀에 있었던 정자나무껄이다. 수백 년 묵은 소동나무가 서 있었는데 근처에 홈통을 설치한 봇도랑이 있어 소동나무수통껄이라고도 했다
삼봉산(三峰山)
양송정 큰마 뒤쪽으로 우뚝 솟은 산 이름인데, 세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졌다
소등산골짝
양송정 큰마 근처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소의 등줄기처럼 능선이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뒷골 골짝
양송정 큰마 근처에 있는 골짜기다.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미륵골 골짝
양송정 큰마 뒤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옛날에 이 골짜기 안에 미륵불을 모신 불당이 있었다고 한다
용짐대등
용지마 남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용지가 있는 등대배기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는 용짐보(용지미보)라고 한다
대촌못
양송정 큰마에 있는 못 이름이다. 양송정 근방에 있는 천수답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지이다
고래논
양송정 큰마 서쪽 드에 있는 논배미이다. 논의 흙이 방고래흙과 같이 새까맣고 비옥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개슴뚝
큰마(대촌) 서남쪽에 있는 꾸불꾸불한 논배미를 말한다. 논배미의 양쪽으로 물이 흘러 섬처럼 되어 있으며, 그 양 가에 둑이 쌓여 있다
기산(其山, 箕山)
양송정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키(기 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칭이산이라고도 한다
디산골
대촌 뒤쪽에 있는 산골짜기 이름이다. 뒷산골의 변음으로 디산골이 되었다. 대촌 뒤쪽에 잇는 들을 딧골들이라고 한다
바짓 가래논
대촌과 팔풍 사이에 있는 도지평(導指坪) 서쪽 논배미 이름이다. 지형이 바지 가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밭덕 가래논
대촌과 팔풍 사이에 있는 도지평 동쪽의 논배미 이름이다. 논가에 밭둑이 있기 때문에 밭둑가래논으로 했고, 밭덕가래로 변하였다
솔끝
대촌 큰마의 서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무성한 소나무밭이 이어져 있는 끝 지점이라 하여 솔끝이라 하였다. 그 곳에 솔끝 저수지가 있다
배들배미
대촌과 팔풍 사이 도지평 가운데 있는 논배미이다. 논두렁에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다리배미
대촌 아래쪽에 있는 논배미 이름이다. 논의 형상이 사다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부어배미
대촌과 팔풍 사이 도지평의 서남쪽에 있는 논배미이다. 논배미의 모양이 붕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붕어배미 또는 부어배미라 한다
시리배미
대촌과 팔풍 사이 대지평 가운데 있는 논배미의 이름인데 모양이 실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병배미
대촌의 도지평 가운데 잇는 논배미 이름이다. 논배미의 모양이 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봉답(奉畓)
대촌 서쪽에 있는 천수답 지대이다. 대촌지(大村池)의 물로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천둥지기, 봉첩답이라고도 한다
구시바위
대촌 마을 옆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소나 말의 먹이를 담는 구유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시는 구유의 사투리이다. 구시를 일명 “소구시”라 한다
눈썹바위
양송정 대촌 마을 남쪽 시루봉(일명 건지봉) 꼭대기 근처에 잇는 바위인데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마치 눈썹같이 기지런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감나무골
양송정 근처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감나무가 무성하다고 하여 붙인 지명인데, 지금도 몇 그루의 물감나무가 남아 있다
옻밭 도가리
옥정동 마을 뒤 골짜기에 있는 밭뙈기의 이름인데 옛날 이 곳에 옻칠쟁이가 살고 있었다. 목기를 다듬어 옻칠을 하여 판매하던 곳이다. 도가리는 토막밭이라는 뜻이다
사태골
양송정 뒤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옛날에 산 사태가 일어나 큰 물에 씻겨간 골짜기이다. 약 1km 정도의 언덕과 골짜기로 이루어졌는데 토질은 우수한 마사토로 이루어졌다
(3) 미라리(美羅里, 미나리)
송백리 북쪽에 위치한 주산(主山) 곤지봉(坤支峰) 아래의 고촌(古村)이다. 조선조 후기의 방리인 미라리가 바로 이 곳인데 행정상 남쪽 들판 건너의 갈밭(노전)과 팔풍 근방에 위치한 덕걸(덕천)m 대사리(대사리) 등 4개 땀으로 송백 3동을 구성하고 있다
미라리 라는 지명은 본래 이 마을의 골짜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륵사(彌勒寺) 라는 사명(寺名)에서 유래한 것으로 애초에는 미리 또는 미리로 불렀으며, 표기를 미리(美里), 미라(美羅)로 하였다. 지금도 옛날 절이 있었다는 골짜기를 미륵골 또는 미릿골(美里谷)이라 한다
조선조 숙종 연간(1675 ~ 1720)에 사인 박영권이 이 마을에 입촌한 이래 밀성 박씨가 터전을 잡고 살았으며 1915년에는 참봉 박정권이 우경재(寓敬齋)를 창건하여 그의 입향조를 기리고 있다
갈밭(노전, 갈골)
미라리의 남쪽에 있는 들 가운데의 마을이다. 지대가 낮아 옛날부터 일대에 갈대가 무성했다고 하여 노전(蘆田, 갈밭)이라 했으며, 옛날 미륵사의 가람(伽藍)이 이 곳에 있었으므로 가람터 또는 갈골이라고도 불렀다
갈밭못(야지못, 노전지, 野地池)
갈밭 마을 동쪽에 있는 못 이름이다. 갈밭에 있는 못이라 하여 갈밭못이라 햇으며, 들 가운데 있는 못이라 하여 야지못이라고도 불럿다
미릿골(미륵골)
갈밭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옛날 미라리에 있었던 절릐 미륵불을 모신 골짜기라고 하여 생긴 지명인데, 지금도 높이 6m나 되는 마애불(磨崖佛) 형식의 미륵불이 있다고 한다
미라못
미라리와 갈밭 사이 동쪽 산 기슭에 있는 저수지 이름이다. 야지못과 함께 이 일대의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미랏곡(미라고개)
미라리 동북쪽에 있는 산 고개의 이름이다. 가인리의 화봉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는 큰 길에 속한 고개였다
외지말리(야짓들, 예지말리)
미라와 갈밭 사이 서쪽 편에 있는 넓은 들 이름이다. 야지(野地)에 있는 글이라고 해서 야짓들 또는 야지말(예지마, 외지마)에 있는 들이라고 하여 외지말리, 예지말리 등의 다른 이름도 있다. 이 들에 물을 대는 보를 외지말리보라고 한다
송골(손골, 峽谷)
미라리에 있는 미릿골 동쪽의 좁다란 골짜기의 이름이다. 협소한 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문껄
미라리과 갈밭 사이에 잇엇던 지명이다. 옛날 일직 손씨로서 육형제의 만석꾼 부자가 살았는데, 이 곳에 그 부잣집 대문이 있었다고 하여 대문껄이라 하였고, 이 일대의 전답도 거의 다 손씨 부자의 소유였다고 한다. 손부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손진갑(孫鎭甲)이라는 이름이 전해 온다
말미등(주마터)
갈밭 동쪽에 잇는 지명으로 옛날 손씨의 육 형제 부잣집의 말을 묻은 산등성이라는 뜻이다. 또 손부자 자손들이 말타는 연습을 했다고 하여 말미등 옆 지명을 주마터(走馬墟)라고도 한다
땅메산(당마산, 곤지봉 坤支峯)
미라리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땅뫼 또는 땅메라고도 하며, 당마산(唐馬山), 곤지봉(坤支峰)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곤지봉은 양송정 남쪽 임고리와 경계를 짓고 있는 건지봉(乾支峰)과 대칭되는 것으로 건지는 하늘뫼이고, 곤지는 땅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곤지봉 북쪽 너머에 가인리에는 땅뫼라는 마을이 있다
수반들(水盤坪)
미라리와 갈밭 사이 외지말리 남쪽에 잇는 들이름이다. 지대가 낮아 물이 고이는 곳이라 하여 수반이라 했으며, 이 들판에 물을 대는 보를 수반보라 한다
대사(大沙)
땅뫼산 서쪽 기슭 동천변에 있는 들 마을이다. 동천의 상류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강가의 큰 마을이라 하여 대사리(大沙里)라고 했다. 큰물이 지면 많은 모래가 쌓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동천(東川) 제방이 축조되어 이런 일은 없어 졌다.
옛날 미륵사가 있었다고 해서 큰 중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사문리(大沙門里)라는 일설도 있다
낙산(落山)
땅메산 서쪽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고 하여 낙산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