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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은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
국내에 소위 풀타임(full-time) 클라이머라는 전업 산악인은 그리 많지 않다.
실내인공벽을 운영, 스포츠클라이밍을 가르치며 돈을 버는 이들은 더러 있지만, 인공벽 등반뿐 아니라 암빙벽등반에 이르기까지 등산의 각 분야에 두루 능통한 토틀클라이머는 흔하지 않다. 특히 여성 산악인은 더욱 찾기 어렵다. 이는 여자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힘들고도 위험한 등반을 가르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에 몰두하기 위해 등반 시작
전남 장흥군 대덕면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그러나 대학시험에 떨어진 다음 홀로 서울로 이사와 1년간 재수생 생활을 했지만, 끝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께 폐를 끼치기 싫었던 그녀는 힘들지만 아무런 투정을 부리지 않고 직장생활을 했다. 여러 해동안 직장생활에 얽매이다 보니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그녀는 93년 가을 어느 날 홀로 도봉산을 찾았다. 서울 생활 초기에 고모와 함께 즐겁게 산에 다녔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기대했던 대로 산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산에서 우연히 만난
집을 옮기기는 했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자 무언가 집중하면서 지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여러 차례 산행을 같이 하면서 미선의 심정을 잘 알고 있던
인공벽 등반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 선배 산악인들과 함께 도봉산 선인봉을 찾은 그녀는 얼떨결에 표범길을 올랐다. 표범길은 한때 선인봉 루트 중 가장 어려운 루트였다. 그녀에게 표범길 등반은 떨림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발밑을 내려다보지도 못한 채 등반을 끝냈다. 그러나 바위에서 내려서고 나니 느낌이 달라졌다. ‘저기를 어떻게 올라섰지’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나도 재미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그녀는 인공암벽등반에 더 열중했다. 함께 운동하는 선배들이 차근차근 가르쳐주자 더욱 재미를 느끼고, 기량도 서서히 나아졌다. 그런 열정의 결과였는지 표범길을 등반한 지 한 달만에 그녀는 표범길을 앞장서 오르는 발전을 이룩했다.
묵묵히 인공벽과 자연암벽 오르기에 열중하는 그녀를 유심히 지켜본
그녀의 등반열정은 빙벽등반으로 이어졌다. 빙벽등반을 시작한 것은 97년 말. 선배들과 함께 설악산 실폭을 찾았다. 구경만 할 생각으로 동참했다가 선배의 권유에 이끌려 빙벽에 붙었다. 등반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손이 시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주위에 뛰어난 클라이머들이 하도 많아 엄살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튿날에는 토왕빙폭으로 옮겼다.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거대한 빙폭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하단부를 중간쯤 오르는데 아이젠 끈이 풀어져 버린 것. 황당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98년 초 구곡빙폭을 선등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지만,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인공암장 관리와 강사생활에만 전념하기 시작한 98년 말에는 빙벽등반 사고를 여러 차례 목격하다보니 겁에 질려 빙벽등반에 동참하더라도 구경만 하고 돌아오곤 하던 그녀가 빙벽등반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은 99년 말이었다. 위축된 상태로 지내다보면 뛰어난 등반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편안한 마음으로 빙벽을 오르자고 다짐했다.그렇게 마음가짐을 바꾼 다음 빙벽을 오르자 오히려 자세도 잘 나왔다.
이듬해 2000년 열린 토왕빙폭 등반대회에 나가자 그녀 스스로도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대회 우승이었다. 대회를 마치고 빙벽등반을 시작하면서 목표로 삼았던 토왕빙폭을 선등하고, 그 이튿날에는 규모는 토왕빙폭이나 대승빙폭에 못 미치지만 난이도 면에서 더 어렵다는 소승빙폭 등반도 해냈다. 이어 올해 토왕빙폭 등반대회에서 우승, 2연패를 달성한 데 이어 중국에서 열린 국제 빙벽등반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선후배 여성산악인 통해 많은 것 배워
96년 가을 처음 대회에 참가한 이후 대회 때마다 순위가 조금씩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눈에 띌 만한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거벽 등반을 펼치고 있다.
99년 가을 그녀는 대전 산악인의 집에서 열린 인공등반대회에 참가했다. 거벽등반 기량을 겨루는 경기였다. 거벽등반 경험이라고는 선배 산악인들이 주도한 2박3일간의 교육이 전부였다. 때문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거벽등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도 출전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데 후배인
후배와 함께 새로운 추억이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참가한 그 대회에서 그녀는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2인1조로 열린 이 대회의 결선에서는 신장 약세를 극복하지 못해 좋은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예선에서는 남자들과 기량을 겨뤄 1위로 결선에 올라 선수와 관중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결국 이틀의 등반과 이틀의 재준비기간 등 나흘이 더 걸린 등반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재미도 있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등반이었다. 그녀가 그동안 해온 하드프리 등반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거벽등반은 파트너와 호흡도 잘 맞아야 했고, 파트너에게 배려를 많이 해야만 등반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엄청난 고도에서 수직 이상의 벽을 오르다보니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었고, 그렇게 긴장의 연속으로 지내다 보니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요세미티에서 만난 여성 산악인
요세미티 등반으로 산을 보는 눈이 한층 폭넓어진 그녀는 내년에도 요세미티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능력에 맞고 재미있는 루트를 찾아내려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언젠가 고산 거벽등반 나설 터”
그녀는 2월14일부터 18일까지 설악산 빙폭 순례를 다녀왔다. 실컷 빙벽을 오르내렸다. 그러다 보니 18일 구곡빙폭에서 열리는 빙벽대회에 참가 신청을 해놓고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대회보다는 깊숙한 골짜기에 걸려 있는 빙폭을 오르는 일이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요즘은 너무 안전 지향주의적인 등반을 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스포츠클라이밍 인구는 늘어나지만 험난함과 함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암빙벽 혼합등반을 추구하는 인구는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모험적인 등반을 펼쳤던 선배들이 보면 못마땅하겠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요세미티 여성 등반대>
세 여자가 모여 요세미티로 떠난다. 결코 접시를 깨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수다를 떨기 위해 모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 수다를 떨어댈 수는 있겠다.
수백미터의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포타레지에서 밤새 여자 셋이서 할 수 있는 일이 수다 말고는 별로 없을 테니까. 김점숙(36세·파이브텐 팀), 오경아(33세·서귀포백록산악회), 채미선씨(29세·클라이밍아카데미)가 그 주인공.
‘여성 등반가’라는 수식어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가능성이 충만한 이 세 사람은 한몸이 되어 엘캐피탄을 오를 예정이다.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은 제일 막내인 채미선씨의 꼬드김 때문이다.
작년 가을 김점숙씨와 함께 엘캐피탄의 ‘조디악(A2)’을 등반했던 채미선씨는 당시 등반에서 몇 가지 아쉬움을 안고 돌아왔다. 인디안 써머데이(가을철에 열흘정도 지속되는 무더운 여름날씨)를 계산하지 못해 식수부족으로 꼬박 하루를 허비해야 했던 일과 한 코스 정도 더하고 싶었으나 시간부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일 등이 그것이다.
돌아온 후 꼭 다시 가고 싶었고, 같이 가기로 했던 이명희씨(29세·타이탄산악회)가 ‘카라코람 멀티 4원정대’에 참가하여 파키스탄으로 떠나게 되자 함께 갈 사람을 찾던 중 김점숙씨와 오경아씨가 합류하게 된 것.
이들 세 사람이 오를 루트는 ‘텐더라인 트립(Tenderline Trip, A2/C3)’과 ‘메스까리또(Mescarito, A3)’. 이중 ‘텐더라인 트립’은 18마디로 이루어 졌으며 4박 5일간 등반할 예정이고 ‘메스까리또’는 총 26마디를 7박 8일 동안에 오를 예정이다.
루트 가이드북을 뒤지다가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고 멋지게 들려 ‘메스까리또’를 선정했다는 채미선씨는 아주 어렵지도 않고 또 쉽지도 않으며 전구간 내내 긴장감이 ‘팍 팍 팍’ 느껴질 거라며 벌써부터 등반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등반이 끝나면 다른 루트들도 둘러보고, 여기저기 쏘다녀 보기도 할 작정이라고. 김점숙씨는 이번이 세 번째 요세미티 행이다. 이미 95년 1월에 토왕성폭포를 혼자서 등반해 화제가 되었고, 각종 등반경기대회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97년 5월에는 신혼여행으로 엘캐피탄을 찾기도 했다. 이때 남편 고 최승철씨, 후배 고 김형진씨와 함께 엘캐피탄의 고난도 루트 ‘오로라(A4)’를 등반했다. 그녀에겐 거벽등반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는 김세준씨(33세·의정부샤모니), 채미선씨와 함께 ‘조디악’을 등반했다. 외동딸 ‘하나(6세)’를 키우며 의정부 샤모니 인공암장에서 ‘익스트림 라이더 거벽 등산학교’를 열어 고인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는 지금도 남편과 고 김형진씨의 체취가 서려있는 설악산 갱기폭 좌벽과 적벽, 구곡폭 좌벽 등의 루트를 즐겨 등반하고있다.
부담없고 재미있는 등반하고파
한국을 대표하던 여성 등반가 지현옥씨가 99년 4월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이후 토틀 클라이밍을 추구하는 그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등반가로 자리잡았다. 고산등반보다는 거벽등반이 자신의 체질과 등반 스타일에 맞다는 김씨에게는 업보처럼 무거운 짐이 있다. 바로 탈레이사가르 북벽.
사실 누군가 그 짐을 덜어주기를 바랬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금년 여름에 탈레이사가르를 등반할 계획이었으나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와 준비부족으로 연기했다. 좀더 철저한 준비와 자신감을 갖고 찾아가고 싶었다. 내년 가을 정도 탈레이사가르 원정을 계획하고 있지만 정확히 확정된 단계는 아직 아니다.
98년 직등루트를 그대로 올라 그때의 흔적을 하나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등반을 떠날 때마다 할머니 품에서 씩씩하게 잘 노는 하나에게 늘 고마움을 갖고 있다. 이번에도 할머니가 하나를 맡아줄 예정이라고. 이번 원정을 주도한 채미선씨는 근래 두각을 보이는 유망주. 수유리 클라이밍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스포츠클라이밍은 물론 빙벽등반과 거벽등반에까지 두루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며 최근 유망 여성등반가로 떠오르고 있다.
채씨는 2000년 11월에 열렸던 전국 인공등반대회에서 이명희씨와 한조로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빙벽등반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그녀는 소승폭과 토왕폭을 등반했고, 여러 빙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스승인 정승권씨(41세·정승권등산학교 교장)의 영향으로 그녀 역시 토틀 알피니즘을 추구한다.
한편, 제주도의 오경아씨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인물, 그러나 오씨는 지난 96년에 서울기아자동차 산악회와 함께 맥킨리 원정에 참가하여 웨스트버트레스 코스를 통해 정상을 오른 경력을 지니고 있다. 오씨는 요세미티 등반을 늘 꿈꾸고 있었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지난 3월 채미선씨의 제안을 듣고 이번 등반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아직 채미선씨나 김점숙씨와 지금껏 한번도 등반을 같이 해본 적은 없다.
단지 인수봉 등반 중 서로 알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함께 등반에 나서게 된 것. 언젠가는 꼭 K2에 오르고 싶다는 오경아씨는 앞으로 제주가 아껴야 할 유망 여성클라이머이다. ‘편안한 옷을 입는 것처럼 부담 없이 재미있게 등반하고 돌아오자’는 생각으로 떠난다는 이들 세 사람은 아직 한 자리에서 모인 적도 없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걱정하는 이는 없다. 떠나기 전 손발을 한번 맞춰보고 함께 맥주 한잔 마실 계획이다. 그걸로 충분. 이들은 6월 12일 출국해서 7월 20일경 귀국할 예정이다. <윤대훈 기자> |
[유럽 알프스]“여기서 안주 할 순 없다. 더 높이 날아야 한다” 여성 4인방, 에귀디미디·타퀼·몽블랑·그랑조라스 등반기 | ||||||||||
김점숙 대장(의정부샤모니 관장)을 비롯한 김동애(익스트림라이더 강사), 이명희(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채미선(골수회) 등 여성 빅월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익스트림라이더 원정대가 6월30일 출국, 한 달간 알프스 명봉 등반을 마치고 귀국했다.
원정대는 타퀼 삼각북벽 등반을 마친 뒤 에귀디미디 등반 도중 김동애 대원이 낙석에 맞아 헬기로 구조되는 긴박한 상황을 겪었지만, 위축되지 않고 계획대로 밀어붙여 몽블랑과 그랑조라스 북벽 등 샤모니 일원의 명봉들을 등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클라이머들다운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등반 중 낙석 맞은 김동애 대원 헬기로 후송 “와~.”
발레브랑쉬 설원으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른 칼날능선으로,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이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어 넓은 설원으로 내려서니 저 멀리 그랑조라스와 몽블랑, 에귀디미디 남벽, 그리고 우리가 내일 등반할 타퀼 삼각북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먼저 도착한 바름산악회 박종관 형이 호텔급 화장실을 만들어 선물해준다.
설원 도착 후 보금자리를 만들고 오후엔 고소적응 차 안자일렌을 하고 타퀼 삼각북벽 정찰을 나갔다. 눈앞에 보였지만 1시간 정도 걸려 벽 밑에 도착하니, 점숙 언니와 미선은 두통을 호소하고 토한다. 그나마 컨디션이 좋은 동애와 나는 만년설에 흠뻑 취해 뛰어다니며 행복감을 맛본다. 밤새 미선이 힘들어한다. 물을 끊여 주고, 품에 품고 자게 해주었다. 역시 정신력이 강해 다음날 컨디션을 회복한 미선은 함께 등반할 수 있었다. 오전 7시쯤 등반을 시작한다. 점숙 언니와 내가 동시에 출발했고, 70~80도 경사의 설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위에서 떨어지는 낙빙과 낙석이 긴장하게 할 뿐이다.
가슴이 터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발을 찰 때마다 종아리에 쥐가 났다. 점숙 언니와 미선, 나와 동애가 각각 한 조가 되어 투톱 시스템으로 번갈아 계속 오르기를 몇 차례 한 후 우측으로 트래버스하여 혼합등반으로 계속 이어졌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점점 가스가 차기 시작한다. 등반을 서둘러 오후 2시30분쯤 정상에 도착했다. 미선은 컨디션이 안 좋아 힘들어한다. 미선이 장비를 내 배낭에 넣고 하산한다. 화이트아웃으로 번개와 우박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산길을 찾아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미선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명희야~, 크레바스 지대다! 조심해.”
며칠 동안 안 좋은 날씨 덕분에 휴식을 많이 취했다. 오전 내내 에귀디미디는 한 번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걱정되고, 불안하다. 왜일까? 오후 5시쯤 에귀디미디행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고 중간역인 플랑역(2,310m)에 올랐다. 파란 초원 위, 형형색색에 들꽃 옆에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한 뒤 어프로치가 궁금해 위로 더 올라가 새벽에 갈 길을 미리 확인해두고, 저녁 8시 2인용 텐트에 4명이 함께 들어가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잠을 청한다.
새벽 2시에 기상, 간단히 배를 채우고, 3시쯤 출발한다. 어제와는 다른 날씨다. 상쾌, 통쾌하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떠 있고, 에귀디미디도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어제 봐놓은 길로 수월하게 설벽 밑에까지 도착한 후 장비를 착용하고, 설벽을 300m쯤 오르니 동이 트기 시작한다.
옆 쿨와르에선 계속 낙석이 떨어진다. 우리보다 부지런한 클라이머들이 먼저 올라가고 있고, 우리도 그들 뒤를 이어 투톱 시스템으로 등반한다. 점숙 언니와 내가 먼저 나란히 등반하고, 미선과 동애가 뒤이어 올라온다. 푸석 바위에다가 확보물 설치가 불안하여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머릿속의 개념도와 실제 등반할 때의 개념도는 달라 보였고, 넓은 벽에서 길 찾기는 어려웠다. 경험이 부족한 우리가 시행착오를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두 명이 빠르게 앞질러 오른다.
우측으로 넘어가는 길이 옳지만, 왼쪽 능선이 더 쉽다는 정보가 있어 그쪽으로 하강하여 다시 직상해 등반하던 중 점숙 언니와 미선의 로프가 낙석을 맞았다. 이후 낙석을 맞지 않은 로프만 사용하기로 하고 40m씩 끊어 등반해 나가야 했다. 그때부터 낙석 위험에 노출되었던 것 같다. 왼쪽 능선이 우측 길보다 쉬웠다. 하지만 위에서 등반하는 팀이 있으면 낙석으로 인해 위험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긴장의 연속, 하지만 등반하면서 낙석을 피할 방법은 없다. 다만 낙석이 피해 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동애야, 괜찮니!”
1시간30분 동안이나 위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미선과 점숙 언니가 소리를 질러 구조대를 불러보지만, 우리 목소리는 벽에서 맴돌 뿐이었다. 밑에 있던 나는 매트리스를 태워보라고 주문했고, 그것 역시 소용없자 결국 미선과 동애를 벽에 남겨두고, 사고 2시간만에 점숙 언니와 나는 6번의 하강에 300m를 클라이밍다운하여 구조요청을 했다.
위에서 아파하고 있을 동애를 생각하며 정신없이 내려왔다. 하강하면서 로프가 바위틈에 낄까 신경이 곤두섰고, 너덜지대를 아이젠을 신고 뛰어 내려와서인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아프다. 20분 후 헬기가 왔고, 미선과 동애를 구조해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
‘쫄지 말자! 난 할 수 있다’
▲ 그랑조라스 정상 5m 직하의 비박지. 하루 전날 정상에 올랐으나 날씨가 나빠 여기서 비박하고 다음날 하산했다. |
그랑조라스 등반을 앞두고 고소적응 차 몽블랑을 찾았다. 구테 산장으로 오르는 길은 지루했다. 너덜지대를 5~6시간 걸어가면 하늘과 맞닿은 곳에 반짝거리는 네모 모양의 산장이 구테였다. 몽블랑을 오르는 대표적인 루트라서인지 많은 클라이머들이 찾는다.
니데글역에 도착한 점숙 언니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뒤늦게 출발한다며 미선과 먼저 올라가라 한다. 구테 산장에 도착할 때쯤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라온 너덜지대가 금세 설릉으로 변해버렸다. 야영하려 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구테 산장 식당으로 들어가 눈을 피했다. 점숙 언니가 걱정된다. 어디에 있을까? 결국 언니는 밤늦도록 올라오지 못했다.
▲ 타퀼 삼각 북벽 혼합등반 구간에서 쉬고 있는 김점숙 대장(뒤쪽)과 이명희 대원. |
식당에서 잘 수 있다기에 의자와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한다. 새벽 1시쯤 기상하여 창 밖을 보니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고, 보름달이 환하게 비친다. 간단히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새벽 2시쯤 출발한다. 마치 단오에 강강술래하듯 랜턴 불빛이 줄을 지어 설릉을 감싸고 있다. 우리도 그 대열에 동참하여 첫 번째 설릉을 오를 때쯤 붉게 솟아오르는 일출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몽블랑 정상으로 향하는 산악인들. |
지루한 설릉을 몇 시간 오르자니 종아리에 쥐가 난다. 맞지 않는 고글 때문인지 눈이 어지럽다. 강한 빛 때문에 벗을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도 아파오기 시작하고, 자꾸만 눈이 감긴다.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속도 쓰리고 토하기를 몇 차례-. 이것이 내가 맞는 두 번째 고소증세다.
힘들게 정상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가슴이 벅차오른다. 미선이가 옆에 없었다면 아마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힘든 하산으로 구테 산장에 정오경 도착하자마자 매트 위에 몸을 누인다. 잠시 휴식 후 미선이가 끊여온 라면으로 배를 채우니 컨디션이 회복된다. 오후 2시쯤 너덜지대를 3분의 2 지점쯤 내려왔을 때 점숙 언니를 만났다. 이틀 동안 우리를 기다렸단다. 그 동안 굶어서일까, 우리보다 더 야위었다.
‘쫄지 말자! 난 할 수 있다.’ 몇 번을 되뇌며 머릿속에 각인을 시켰었다. 그래서일까? 첫눈에 그랑조라스를 봤을 때 며칠 후면 우린 정상 설원을 걷고 있으리라 자신했다. 레쇼산장엔 많은 클라이머들이 그랑조라스 등반을 위해 와 있다.
역시 대표적인 알파인 루트라서인지 우리를 포함해 모두 4팀이 등반했다.
북벽에서 대표적인 루트인 워커릉 기점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가 제일 마지막 등반조였다. 등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러 군데 박혀 있는 하켄 때문에 길 찾기가 꽤 어려웠고, 낙석 때문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레뷰파 크랙을 등반하고, 디에드르를 넘어 회색 슬랩 밑에까지 하루에 올랐다. 갑자기 내린 우박으로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벽 상에 물이 없어 고민했는데, 비박지 가득한 우박은 우릴 행복하게 한다. 우박을 치우며 등반하느라 손과 발이 시려 감각이 없다. 물기로 인해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등골이 오싹, 무척 신경 써 등반했다.
첫 비박을 하면서 얼마나 좋은지.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산에 다닐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함께 등반하지 못하는 동애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럴수록 동애 몫까지 등반하기 위해 우린 최선을 다했다.
다음날 회색 슬랩을 등반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한 자리에서 3시간을 보냈다. 슬랩이 아니라 이건 페이스다. 등반 흔적을 따라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 다시금 확인했다. 이후 미선과 계속 번갈아 선등을 나섰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 점숙 언니의 든든한 빌레이를 받으면서.
▲ 타퀼 삼각북벽 출발기점. 이명희 대원, 김점숙 대장, 김동애 대원. |
정상은 안개로 인해 주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6시에 도착, 안 좋은 날씨에 내려가는 것보다는 여유 있게 하루 더 지내고 안전하게 내일 아침에 하산하기로 결정하고, 설동을 파고 자고 싶은 맘에 아이스바일을 휘둘러보지만 바닥이 얼어 포기했다. 정상 5m 밑으로 다운해 비박하기로 결정했다. 비탈진 곳이라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몸을 아이젠으로 버티니 다리에 쥐가 난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차가운 바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에 반짝이는 별을 보며 미선과 난 목청껏 불러본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어휴 숨차다!
다음날 다시 오른 정상을 거쳐 길고 힘겨운 하산을 했지만, 하산 후 뒤돌아서 본 그랑조라스는 우리의 가치관에 변화를 갖게 하고,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더 멀리 날수 있게 발판을 만들어준 등반이라 생각된다.
글·사진 익스트림라이더원정대
북한산 곰바위에서
인수봉 하늘길 1피치
알프스 아줌마 원정대 훈련 중
배추흰나비의 추억 등반 중
첫댓글 첫 번째 기사는 월간 산紙에 소개된 "이 클라이머의 삶" 내용이구요 (한필석 기자) 두 번째 기사는 월간 마운틴 윤대훈 기자가 쓴 (취재) 기사, 마지막은 알프스 원정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