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길을 걸으며
한 오
하늘이 높아만 보이는 가을!
흰 구름 몇 가닥이 하늘에 수를 놓았다. 거리에서 보는 자연은 계절이 바뀌는 걸 알린다.
삼복염천에 빨갛게 핀 이웃집 능소화는 자취를 감추고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감나무는 노란 열매를 달았다.
하늘에 눈길 던질 때 그리움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쓸쓸히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나를 밖으로 내몬다.
무심천 둑길을 걷다가 벤치에 앉으니 가을 건너는 물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조금 더 걷다가
상당산성(上堂山城)을 바라보니, 며칠 전 청주사범 동문들과 만나본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고향이 그립다고 찾아온 벗들과의 해후(邂逅)! 인생의 가을에 뜻 깊은 만남으로 손잡고 상당산성을 돌아보던 그 시간,
더 없는 기쁨이었는데 회자정리(會者定離)는 어쩌지 못하는 운명인가! 팔순을 넘겨 노년에 이른 삶의 여정도 잠깐인 듯,
정담을 나누며 오래오래 걷지 못하고 바람만이 옷깃을 흔든다.
문득 고향에 가고파 신탄진행 버스를 탔다. 양촌리 입구에서 내려 바라보니 한길 가 주변에 대형 음식점이 들어서고
산을 깎고 전답을 가로질러 길을 냈다.
옛 고향 마을 산마루로 가다가 한적한 가을 숲길을 걸으니 낙엽이 뒹굴며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린다.
산정(山精)이 무한한 이 길을 그리운 이와 같이 낙엽 밟고 가는 소리 들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어진다.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풍경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옆엔 노랗게 핀
산국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정겨움에 넘친다.
산허리에 앉으니 지는 낙엽이 내 마음을 흔든다.
이 아름다운 세상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쓸쓸함이여!
이곳에서 바라보는 풀과 나무, 흙과 돌 모두는 내 사유(思惟)의 공원에서 은전(恩典)이 아닌 것이 없다.
산 능선에 취하여 앞으로 가다가 내려오는 길, 낙엽을 밟으니 사색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든다. 가랑잎을 긁어서
밥을 짓고 나무를 베어다가 방안을 따뜻이 하려고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이 산을 오르내렸던 그때가 내 인생의
봄과 여름이었다.
나는 왜 홀로 왔는가? 고향에서 아들을 낳아 기르고 아내와 함께 백년해로 하며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꿈은
일장춘몽이었던가! 삼년 전 신장병으로 타계하여 여기서 가까운 종산(宗山)으로 간 아내 생각에 슬퍼지는 마음을 토해 본다.
수곡동 뜨락에 서면/뜰 안에 핀 꽃을 보며/ 붉게 익은 감을 보느라/ 님의 얼굴에 꽃이 피던/ 그 얼굴 보고파
산의 인자한 풍모를 보면서 세상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가지만 가슴에 안은 그리움만은 내려놓지 못하고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