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익산성지(圓佛敎益山聖地)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 344-2번지에 원불교 중앙총본부가 있다. 원불교가 처음 익산에서 발원하여나간 곳이다. 25,792㎡에 있는 8동의 건물과 석물 2기를 포함하여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는 종교재단 원불교소속이다.
원불교(圓佛敎)는 1916년 4월 28일에 소태산 박중빈에 의해 창건되었다. 교조(敎祖) 소태산 대종사(大宗師)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로 원기 9년 1924년에 현재 익산시 신용동에 중앙총부를 건설하였다. 원(圓)은 우주의 궁극적 진리라는 의미이며, 불(佛)은 깨닫는다는 의미이고, 교(敎)는 가르친다는 뜻으로 우주의 근본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도록 가르치자는 의미이다.
교조 박중빈은 1891년 3월 26일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태어났으며,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동쪽의 하늘에서 서광이 비침을 보고 대각(大覺)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어떠한 정규과정의 교육도 받지 않고 스스로 구도(求道)를 통하여 얻은 자각자수(自覺自手)는 원불교의 이념이 되었다.
초대 종법사 소태산(재임 원기 1년∼28년)은 9명의 제자를 뽑아 가르치며 교단의 기초를 다듬었고, 1917년에는 저축조합으로 생활혁신을 도모하고, 1918년에 고향 앞바다를 막아 원불교 창립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1919년 4월 원불교 대종단의 설립에 필요한 제자들의 동조인증을 얻으며, 1924년 4월까지 5년 동안 변산에서 교리의 초안을 만들게 된다.
1924년 4월 총본부를 익산시 신용동으로 이전하고, ‘불법연구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때 주경야독으로 설법과 정신훈련을 해나갔다. 1926년 ‘신정의례준칙’발표, 1935년 ‘보화당’개업, 1940년 완주 삼례에 대단위 농장을 건설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원기 28년 1943년에는 원불교의 기본 경전인 ‘불교정전’을 완성한 후 6월 1일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정산 송규(1900~1962) 2차 종법사(재임 원기28년∼47년), 제3차 대산 김대거(金大擧 1914~1998) 종법사(재임 원기47년∼79년), 4차 좌산 이광정(李廣淨 1936~ ) 종법사(재임 원기79년∼91년)가 원불교를 이끌었으며, 2006년 11월에는 제5차 경산 장응철(1940~ ) 종법사(재임 원기91∼ 현재)를 선출하여 제13대로 이어지고 있다.
원불교는 총본부인 익산에 원불교익산성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초기 설법 당시의 건물과 그를 기리는 탑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에서 대각전, 청하원, 구정원, 정신원, 본원실, 금강원, 종법실, 공회당과 대종사성탑, 대종사성비가 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밖에도 원불교익산성지에는 수도원, 보은원, 원로전, 종각, 은적당, 역사박물관 등 원불교관련 여러 기관이 존재한다.
제2대 종법사를 지낸 정산 종사의 탄생지이며 구도지인 성주성지는 성주군 조전면 소성리 464번지에 관리사무소들 두고 있다. 유적지로는 탄생가, 성장지, 박실구도지, 구도지비, 백세각, 대각전 등이 있다.
초대 종법사이며 창시자인 소태산의 탄생지이며 구도지인 영광에는 백수읍 길용리 2번지에 사무소를 둔 영산성지가 있다. 이곳에는 9인 기도봉, 탄생가, 마당바위, 대각터, 대각전, 영모전, 영산원, 구간도실 터, 제명바위 등이 있다. 이중에서 9인 기도봉은 9명의 제자들과 함께 9봉우리를 정하여 찾아다니며 기도하던 곳으로 구수산의 중앙봉, 촛대봉, 대파리봉, 공동묘지봉, 눈썹바위봉, 밤나무골봉, 설래바위봉, 옥녀봉, 마촌앞산봉이다. 훗날 촛대봉과 마촌앞산봉은 장다리꼴봉과 상여바위봉으로 변경되었고, 이에 동참한 제자들은 정산 송규,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이다.
한편 원불교가 최초로 도덕훈련을 하고 선(禪)을 행한 터전으로 초선성지라고도 부르는 만덕산성지도 있다. 이곳은 익산성지를 건설하기 직전 한 달 동안 12제자와 함께 선을 행한 곳이며,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만덕산 남쪽 기슭 바위를 중심으로 한다. 이곳에는 대산 종사의 생장가, 미륵사, 만덕초선지비 등이 있다. 중길리 산 14-1번지에 만덕산훈련원을 두고 관리하고 있다.
익산성지의 대각전은 원기20년 1935년 3월에 84평으로 건축하였으며 1955년에 107평으로 증축하였다. 현판은 강암 송성용의 부친인 송재호가 썼다. 이곳은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며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하고 소태산 대종사가 법문을 설파한 곳이다.
청하원은 원기17년 1932년 7월에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사가(私家)로 지었다가 교단에 희사한 건물이다. 청하는 아호이며 구타원은 법호, 종사는 원불교계의 덕망있는 원로에 대한 호칭이다. 초기에는 대중의 소규모 집회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감찰원장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가 원불교 감시용 이리경찰서 북일주재소를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구정원은 원기20년 1935년 3월 신영기의 개인주택으로 건축되었다가 총부에 희사하였다. 1937년 5월부터 1964년까지 교정원 사무실로 사용한 적도 있어 구정원이라 부른다. 4칸 겹집으로 별채 2칸이 따르고 도서관과 창고로 사용된 적도 있다.
정신원은 원기26년 1941년 팔타원 황정신행이 지은 사가로, 훗날 막대한 재정과 함께 이 집을 희사하였다. 초기에는 임시 익산교당으로 사용하였으며, 한국전쟁시 서울보화원 원아들이 생활하면서 이리보육원의 전신인 익산보화원이 시작된 곳이다. 그 후 정화사(正化社)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본원실 일명 도치원은 원기9년 1924년 원불교 최초로 지어진 건물이다. 불법연구회의 첫 사무소를 설치하고 ‘도치원(道治院)’이라 불렀는데 지명(地名)인 도치(盜治)를 고쳐 거듭 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내부의 동아실은 소태산 대종사가, 서아실은 팔산 등 5,6명이, 중앙의 작은 방은 정산 종사가 기거하였으며 초가가 기와로 바뀌었고 계속하여 증축되었다.
금강원은 원기13년 1928년 6월 22일 소태산 거처 목적의 4칸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이 집을 지을 때 일꾼들이 원불교의 규약과 반야심경을 주고받았다고 하여 금강원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완공 후 설법도 이루어져 설법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종법실은 원기13년 1928년 5월 15일 준공하였고, 1932년 한옥의 벽을 창문으로 바꾸었다. 4칸 방은 확장하여 주간(晝間) 다목적용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봄에 지어져서 ‘영춘원’이라고도 했었다. 지금은 소태산 대종사 영정을 모셔놓고 참배공간으로 사용한다.
공회당은 목조7칸 겹집으로 원기14년 1929년에 건립되어 대중이 모일 수 있는 집회장과 선(禪)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교단초기에는 교역자 양성소로, 현재는 종법사의 소규모 접견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종사성탑은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성해(聖骸)를 봉안한 5층탑이다. 대종사는 원기28년 1943년 6월 1일 열반 후 조실에 안치, 49재 후 북일면 금강리 공동묘지에 안장, 원기34년 1949년 4월 25일 성탑을 조성하고 이안되었다. 황등석으로 연화를 양각한 기단위에 연화대석을 받치고, 1층인 원석(圓石)을 올려놓은 후 그 안에 성해를 봉안하였다. 주변에는 소태산 대종사 십상성화와 사은 친필, 그리고 게송(偈頌)을 부조로 장엄하였다.
대종사성비는 대종사의 생애와 업적을 추모하는 기념비로 원기38년 1953년 4월 26일 성탑을 바라보는 우측에 세웠다. 성비(聖碑) 사면에는 정산 종사가 지은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병서’를 강암 송성용의 글씨로 음각하였다. 4층으로 된 기단위에 연화모양을 한 받침을 가진 비신은 오석이며, 머리에는 여러 개의 연꽃봉오리로 된 갓을 얹고 있다.
예전의 원광대학교 정문은 길 하나를 두고 원불교익산성지 입구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광대학교가 커지면서 통행이 복잡해지자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내가 통학을 하면서 바라본 원불교성지는 향나무 조경이 아름답고, 품위있는 기와집이 조화된 별천지 정원이었다. 그 시절 길게 늘어선 담장을 따라 걸어가다가 힐끗힐끗 넘겨다보면 거기에는 바깥과 다른 조용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던 곳이다. 숲이 우거져서 자동차의 흙먼지도 들어가지 않았고, 정원이 넓어서 우리들이 떠들어대던 소리도 어쩌지 못했다. 문은 항상 열려있었는데도 그곳에 자주 들어가지는 못했다. 어쩌다 한 번씩 방문해보면 조용하고 단아하면서도 오밀조밀함에 세상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이 무릉도원인가 잠시 시간이 멈추는 듯하다.
김일성이 환갑잔치를 남한에서 하겠다고 호도하던 때, 원불교창설 반백년 기념행사를 하였다. 전국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정작 원불교 세계총본부인 익산의 내 주위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대체 어느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조금 있으면 원불교창설 백주년이 되는데, 세상도 이제 원불교를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물론이며 세계 어느 곳에 가더라도 원불교의 교당을 찾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우리 군(軍)에서도 원불교에 대한 정식 군종사병(軍宗士兵)을 두었고 교당(敎堂)을 둔 정도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가 있었을까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종교란 모름지기 헌신과 희생을 먹고 자란다고 하던데...
익산사람으로서 원불교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보면 아직도 미미하기만 하다. 2008년 12월 31일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약 10%인 5백만 명이 종교를 믿고 있으며, 그중에서 원불교는 13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종교인 수 대비 2.6%이며, 총인구대비 약 0.3%에도 못 미친다. 그래도 원불교는 최근에 생긴 신흥종교로서 이제 막 뻗어가는 추세이니, 은근히 기대도 된다.
원불교 총본부의 익산성지는 아주 오래된 건물들이 있다. 그리고 근래에 지은 건물들도 많이 있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되어 보존중인 건물들은 모두 최초에 지어진 것으로 낡고 비좁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므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2010.06.30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