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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완 전남 고흥 출생(1945), 수필가, 서울대 언어학과 졸(1974),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죠지타운 대학원 졸(이슬람문학 및 중동관계 전공)(1984∼1986), 주 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근무(20년), 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1992∼2012), 《한강문학》(2020) 추대등단, 한강문학 편집위원, 저서:《사하라》(김영사, 1987), 현)향토사연구 및 SNS 블로거, 발표작품:〈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어우당 유몽인〉, 〈오리정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 미술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외 |
어네스트 헤밍웨이(Ⅰ∼Ⅱ)
Ⅱ. 우리는 왜 '키 웨스트'로 갔었나?
https://blog.naver.com/swlee8585/220797025515
〈Ⅰ. Key West에서 헤밍웨이 흔적을 찾아〉(36호에 게재)
Key West는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 반도의 땅 끝 섬이다. 현재 약 3만 명이 거주한다. 이 곳에는 100개의 호텔이 있고, 20개의 고급 레스토랑과 바가 있다. 매년 12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가는 곳이다.
겨울에 최저 온도가 화씨 40도이다. 섭씨 4도니까 눈이 오지 않고 물이 얼지도 않는 기온이다. 한 여름 최고 기온이 화씨 97도이다. 섭씨로는 36도이다. 아무래도 겨울에 피한지로 좋은 곳이다.
이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안 칼루사(Calusa)족이 살고 있었다. 서구인으로는 스페인 탐험가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했다. 어떤 기록에는 스페인의 ‘퐁세 드 레온’이 1513년에 발견했다고 적혀있다.
그들은 애칭으로 이 섬을 콩크 공화국(Conch Republic)이라 부르고 쿠바와 미국 대륙을 항해할 때 중간 휴게소 정도로 생각하고 자주 들렸던 곳이다.
또한 이 섬을 스페인 사람들은 까이요 우에소(Cayo Hueso)라고 불렀다. 까이요(Cayo)가 영어로는 키(Key)로, 우에소(Hueso)가 영어로는 웨스트(West)로 둔갑했다. 그러나 이 섬은 열쇠(Key)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굳이 어원을 알고 싶으면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는 게 좋다. ‘까요’는 ‘작은 섬’, ‘산호 같은 섬’을 뜻하고, ‘우에소’는 ‘뼈’, 사람 뼈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작은 섬〉으로, 또는 〈인골 섬〉으로 풀이한다. 미 대륙이 식민지 시대였을 때는 스페인 모험가들이나 해적들이 이 섬을 은신처로 삼았었다.
그런데 ‘Hueso’를 왜 ‘H’를 생략하고, ‘우에소’로 발음할까? 스페인어는 어두에 ‘H’가 묵음黙音 즉 생략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현대(Hyundai)’ 자동차를 말할 때, 스페인이나 남미 멕시코 등에서는 ‘윤다이’ 자동차라고 말한다.
미국이 독립 국가가 되고나서 〈마이애미〉를 182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500만 달라로 매입하면서 이 섬도 미국에 속하게 되었다. 1822년에 미국 해군 보급기지가 생기고 나서부터 해적은 완전히 소탕되고 쿠바, 자마이카 등에서 미국으로 오는 상품의 관문 역할을 했다. 세관도 생겨서 통관 업무를 보았다. 이 때 부터 〈키 웨스트〉는 산업화되고 발전되었다.
천경자 화백은 키 웨스트(Key West) 섬을 〈헤밍웨이 섬〉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바로 이 ‘헤밍웨의 섬’을 찾아간다.
우리나라 강원도 〈정동진〉이나, 전라남도 해남의 〈정남진〉처럼 무언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묘한 정서가 있기에 그곳이 우리의 발길을 이끈다. 굳이 그 정서가 무엇인지 따지고 보면 다음 세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이 섬을 사랑했고, 이 섬에 약 10년간 살았던 집이 있다.
-. 이 섬까지 가는 길, 42개 연육교가 만드는 아름다운 해상 고속도로는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드라이브 코스이다.
-. 트루먼 대통령이 이 섬의 〈리틀 백악관〉에서 6.25 전쟁 중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는 결정을 했다.
그리고 관심을 끄는 것은, 플로리다 남부 해상도로에서 가장 긴 다리는 ‘7마일 브릿지’이다. 키(Key)는 작은 섬 혹은 산호로 된 암초를 뜻한다.
스페인어 ‘Cayo’에서 유래했다. 플로리다 만 바깥에 수백 개의 섬이 늘어서 있다. 이걸 플로리다 키스(Keys)라 한다.
1912년, 플로리다 본토와 수많은 섬을 연결해 ‘키 웨스트’까지 가는 철길이 생겼다. 그런데 1935년, 허리케인으로 철길이 크게 손상됐고, 1950년대에 들어서야 1번 국도의 한 구간으로 길이 재탄생했다. 182㎞ 길이의 해상 고속도로는 무려 42개의 다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중 가장 긴 다리는 영화 ‘트루 라이즈’에도 나왔던 ‘7마일 브리지’로 길이는 11.2㎞에 달한다.
마이애미 육지 남단인 데일 지역에서 해상 도로를 올라 처음 들르는 섬이 ‘키 라르고(Key Largo)’ 섬이다. 본토 미국 사람들은 라고(Largo)로 부른다. 그러나 현지 스페인 계통의 사람들은 ‘라르고’라 한다. 원래 라르고(Largo)는 ‘길다, 오래가다’라는 뜻의 스페인 말이다. 아마도 ‘라르고’ 섬이 제법 길고 자동차나 걸어서도 한 쪽 끝에서 다른 쪽에 가려면 한참 오래 걸리니까 그런 이름이 생겼나보다. 산호초가 아름다워 스노클링 명소로 통한다. 특히 〈존 펜 캠프 산호초 주립공원〉은 다이버라면 한번쯤 가고파 하는 서핑 성지로 통한다.
키웨스트에서 가장 먼저 가 볼 곳은 구시가지다. 형형색색의 스페인, 캐리비언 풍 건물이 늘어선 모습만으로도 매혹적이다. 예쁜 갤러리와 박물관, 카페만 둘러봐도 몇 날 며칠이 모자란다.
미국 최남단의 조그만 바다 마을에 수많은 갤러리가 들어선 건 20세기초, 경제 대공황 때 집값 싼 곳을 찾아 많은 예술가가 몰려들면서다. 지금 키웨스트는 미국에서도 가장 집값이 비싼 도시로 통한다.
헤밍웨이가 10년간 살았던 집이 박물관으로 쓰인다. 키웨스트 구시가지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헤밍웨이 박물관〉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두 번째 부인인 폴린과 31년부터 40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헤밍웨이는 이 집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고, 바닷사람들과 어울리고 낚시를 즐기며 《노인과 바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작가는 고양이 60여 마리를 키웠다고 한다. 지금도 박물관 곳곳에서 40마리가 넘는 고양이가 관광객과 어울려 논다.
헤밍웨이 박물관 길 건너편에는 1825년에 만든 키웨스트 최초의 등대가 있다. 약 20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소담한 키웨스트의 풍경을 360도로 볼 수 있다.
키웨스트를 찾은 관광객 대부분이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 있다.
아담한 해수욕장 사우스 비치 옆, 미국 최남단임을 알려 주는 표석 앞에서다. 여기서 쿠바까지 거리는 불과 90마일(약 144㎞)이다.
키웨스트는 일몰도 아름답다. 〈맬로리 광장〉(Mallory Square)에서 보는 석양도 멋있다. 그러나 ‘선셋 크루즈’를 타 보면 더욱 장관이라고 한다. 하얀 돛을 높이 올린 배에서 라이브 생 뮤직을 들으며 램이나 댓낄라 술을 마시며 황혼의 석양을 즐긴다고 상상해 보라!
◆ 미국의 진주 목걸이 섬들, 마이애미 키 섬 열도(Keys Islands)
▲바다 위 해상 고속도로
42개 연육교를 드라브하여 헤밍웨이의 섬 Key West에 갔다.
미국에서 오래 살고 있거나 미국으로 자주 여행이나 출장을 오는 사람이라면, 시간과 경제적 사정이 허락하면 본토에서는 마이애미를, 내친 김에 바다 쪽에 있는 마이애미 반도 아래에 쭉 늘어서 있는 섬들인 키즈 열도!
커다란 동그라미 곡선을 그리며 줄지어 있는 키즈 섬들(Keys Islands)을 한번 쯤 방문해서 구경해 보면 좋을 것이다.
내 고향 선배인 천경자 화가는 그 늘어선 섬들을 〈녹색 참깨 애벌레들의 행진〉>하는 모습으로 여행 감상기에 표현했었다. 역시 화가이며 문학가적인 소양이 풍부한 그녀다운 표현이다.
▲천경자 화가가 섬[島]들에 비유한 애벌레 모습
▲42개 다리로 연결된 마이애미 ‘키 웨스트 해상 고속도로’
헤밍웨이의 섬, 천경자 화가가 본 키 웨스트
◆ 천경자 화가는 1983년 6월 Key West에서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썼나?
나는 헤밍웨이가 애완했다는 6손이 고양이의 여섯 개의 발가락을 신기해하며 한참 보다가 갑자기 천경자 화가의 고양이 그림이 생각났다.
“그래- 맞아!”
천경자 화가도 1983년인가 여름철 6월에 남미 여행을 할 때 헤밍웨이의 집을 방문하고 몇 장의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그림 중에는 야자수 숲 아래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양이들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단지 타이틀로 〈헤밍웨이 집〉이라고 되어 있어, 나는 여기에 올 때까지 만도 그 고양이들이 6손이 고양이라고는 생각하지를 못했다.
바로 천경자 화가도 이 신기한 6손이 고양이들을 보고 헤밍웨이 집 방문을 기념하려고 이들 고양이들의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천경자 화가의 그 그림에는 열대의 태양 광선을 막아주고 있는 대추 야자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대추야자 열매가 살구나 복숭아처럼 둔갑하여(?) 동그랗고 깜찍하게 그려져 있어 웃음이 나왔다. 대추야자 열매는 그렇게 크지도 않고 동그랗지도 않다. 국산 왕대추처럼 약간 길쭉한 타원형처럼 생겼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설익었을 때는 초록색이고, 잘 익으면 노랑바탕에 약간 주황색을 띄운다. 그리고 바싹 말리면 검게도 보인다. 아무튼 천경자 화백이 그린 대추 열매는 아주 귀엽게 보인다.
▲천경자 화가가 그린 대추야자 열매와 헤밍웨이 육손이 고양이들(1983년작)
▲헤밍웨이 집에 있는 육손이 고양이
▲육손이 고양이 집, 고양이 전용 타운하우스 2층집
천경자 화가는 헤밍웨이의 6손이 고양이들 그림뿐만이 아니라 헤밍웨이의 집 현관 앞뜰과 정원 풍경도 몇 장 더 그렸다.
천경자는 화가이지만 문학적 소질도 있어서, 여행기와 많은 자전적인 수필을 쓰기도 했다.
나와 천경자 화가는 서로 같은 마을 출신이다. 천경자 화기는 고흥동 초교 25회 졸업생이고 나는 46회 졸업생이다. 천경자 화가의 출생지 주소는 전남 고흥읍 서문리 10번지 이다. 우리 집 주소는 서문리 46번지이다. 천경자 화가의 집은 서문리 동정지 몰랑에서 동쪽 기슭인 북수개 골목에 있고, 우리 집은 동정지 몰랑에 있었다. 두 집 거리는 300미터에 불과했다. 천경자 화가가 동정지 몰랑에 있는 유치원을 다닐 때는 동정지 몰랑에 있는 우리 집 밭길을 항상 지나 다녔다고 한다. 천경자 화가가 어릴 때 나물 캐고, 연을 날렸다는 곳은 바로 우리 집 밭을 말한다고 천경자의 오촌 여동생인 박송희 여사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천경자는 천옥희로 알려져 있어서 한동안 동네 친구들이나 어른들도 〈천옥희〉는 알아도 〈천경자〉는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누구나 ‘천경자’가 고흥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고향 선배인 천경자 화가가 1983년에 이미 키 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 집에 와서 그림까지 그렸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 역시 이곳을 찾아 와 보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천경자 화가가 그린 곳이 헤밍웨이 집의 어느 곳인가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 역시 헤밍웨이 집을 찾아 와서 천경자 화가가 그린 것은 하나는 현관 앞 정원이고, 다른 하나는 별채 집필실 앞 고양이 집이 있는 뒷뜰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 하나는 아마도 뒷 정원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헤밍웨이의 부인이 선물로 지어 준 수영장은 왜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아마도 그 스토리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알았다면 예쁜 수영장도 그림으로 남겼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언젠가 고흥 출신인 후배가 이 키 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의 집을 방문하여 천경자 화가의 그림과 현지의 그 장소를 비교해 본다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 키 웨스트 섬에서 여행 중에 그린 천경자 화가의 그림들(1983년 작)
▲몰라리 광장과 〈슬로피 죠 바〉 사이에 있는 붉은 건물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1983년 작)
천경자 화가의 이 그림은 〈슬로피 죠 바〉 사거리에서 몰라리 광장 쪽으로 200미터 즘 올라가면 또 다른 네거리를 만나는 곳에서 왼쪽 편 코너에 있는 예쁜 붉은색 지붕의 집을 보고 그렸던 그림으로 추정된다.
나도 그 집이 너무 아름다워 단번에 비디오에 담았다. 비디오에 담았던 것을 스틸 사진으로 뽑아서 내 포스트에 올려 본다.
▲천경자 화가가 키 웨스트 시내에서 보고 그린 실제의 집 사진(캠코더에서 뺀 스틸 사진)
◆헤밍웨이의 섬, 천경자 화가가 본 키 웨스트
1983년 여름 약 3개월 동안 천경자 화가는 미국의 여러 곳과 괌도, 캬리비안, 남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을 여행하고 그 곳에서 그린 그림들과 여행담을 동아일보에 게재한 적이 있었다.
특히 플로리다 마이애미를 방문했고 이어서 자칭 〈헤밍웨이의 섬〉이라고 부르는 키 웨스트 섬도 구경하고 그림도 그렸다.
당초에는 신비한 지역인 버뮤다 삼각지대를 여행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그 곳에서는 사라져 버린다는 전설적인 괴담에 겁이 났는지 마음을 갑자기 바꾸었었다.
그 때 여행후기를 천경자 화백이 동아일보에 썼던 것들 중에서 〈헤밍웨이의 섬〉 키 웨스트 방문 소감을 여기에 소개해 보려고 한다.
바람에 푸른 열대 야자수 이파리도 정열적인 춤을 추고, 온 섬들이 스페인 풍광에 자욱한 미국의 최남단 땅 끝 섬이 바로 키 웨스트이다.
짚시처럼 지향 없이 떠돌기를 좋아하는 여류화가 천경자씨가 또 다시 훌쩍 여행을 다녀왔다.
스케치북 하나를 들고 낯선 땅의 풍물과 인간과 그들의 꿈을 만나고 그것들을 화폭에 담아 왔고, 여행담 속에 그녀의 문학적 향기가 밴 여행기를 써 왔다고 동아일보는 천 화백의 여행기가 시작되는 글머리에 여행취지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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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여행이란 무엇인가?
수양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하찮은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멀고 먼 아름다운 과거를 자유로이 헤매며 숱한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또 나는 여행을 떠난다.
어려울 때 마지막 사물에 대한 신비한 매력에 끌려 두꺼운 백과사전에 매달려 페이지를 넘겼었다.
북극권 하늘에 벨벳 커튼처럼 처져 내린 오오라, 그리고 사막의 오아시스, 신기루-
이런 것들의 사진을 보면 나는 낭만의 꿈에 취하고 만다.
현실적으로 그와 비슷한 것을 처음 본 것이 소나기 갠 어느 저녁나절 서쪽하늘에 뜬 무지개였다.
그토록 신통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러나 무지개는 허망하게도 사라져버렸다.
열풍에 하늘거리는 야자 이파리, 그리고 등꽃처럼 처져버린 노오란 꽃무늬의 황금의 비! 원색이 핵처럼 똘똘 뭉쳐서 하이비스커스와 알라만다, 갖가지 꽃들이 내 시각을 통해 온갖 시름이 깔린 가슴 속의 안개를 개운하게 거두어 준다.
워싱톤에서 어느 잠 안 오는 밤에 나는 세계 7대 불가사의한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 중에 하나인 〈마의 삼각지대〉를 지나간다는 〈버뮤다 섬〉으로 떠날 것인지의 여부를 놓고 나 혼자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일찍이 포기를 하고, 다음날 〈마이애미〉를 향하여 날아갔다.
마이애미 공항에 내리자마자 스페인어의 강한 엑센트가 내 귓전에 와 닿았다. 공항 언저리는 도떼기 시장처럼 별별 사람들이 서성대는데 남미 사람들이 밀선을 타고 마구 밀입국을 해 와서 이 곳은 쿠바 사람들이 현지인들 보다 더 많아서 골칫거리가 되어있다고 한다.
뜨거운 마이애미 바람이 피부를 스쳐 땀이 온 몸에 솟아 끈적거렸지만 나는 그 상태가 싫지는 않았다. 무슨 열대어나 열대식물의 생리라도 핏속에 가진 듯이 말이다.
키 웨스트로 가는 택시는 시가지의 꽃나무 거리를 누비며 교외로 빠져나와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어진 바다 위 다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청정한 하늘엔 태양이 눈부시게 타오르는데 멀리 앞을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은 흥건히 젖은 아스팔트길을 달리고 있었다.
앞선 곳만이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일까? 이 차도 그만큼 가면 시원한 비를 만나게 될까?
그런데 가도 가도 비는 오질 않는다. 그러나 저만큼 앞을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은 여전히 빗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나는 처음 보지만 어쩌면 바다와 태양과 아스팔트길이 그런 신기루 현상을 일으켜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비교적 번화한 〈키 라고〉라는 작은 섬에서 잠시 멈췄다.
마이애미에서 맨 끝 섬인 〈키 웨스트〉 까지는 달려서 3시간 거리라 레스토랑이라도 들려서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섬에는 새우, 바다가재, 생선 요리가 많았지만은 나는 야자 샐러드에 빵,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멕시코 사람 같은 중년의 웨이터가 친절하고 정중한 자세로 대해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서양에 나오니 비로소 어디를 가나 숙녀 대접을 받게 되는 것 같아 참 묘한 기분이었다.
〈키 라고〉!
어렴풋이 40년 전의 영화 〈키 라르고〉를 생각나게 했다. 험프리 보가트와 로런 배콜이 공연을 했다. 그건 범죄물 영화인데 당시 개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성격 배우라는 새 바람으로 일약, 스타가 된 젊은 배콜의 하얀 원피스 모습이 햇살을 받아 출렁이는 하얀 물결처럼 눈앞에 아찔거려 왔다.
나는 그와 동갑이었을 것이다.
택시는 또 하염없이 연육교를 달리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굽이져 늘어선 섬을 이은 다리들, 그 작은 섬들은 푸른 애벌레가 간격을 두고 열을 지어 가는 양 보였다.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할 무렵 ‘키 웨스트’ 섬에 당도한 나는 〈데이스 인〉이라는 호텔에서 며칠 동안 묶을 요량으로 짐을 풀었다.
내 느낌에 ‘키 웨스트’ 섬의 면적은 제주시 하나 정도의 크기인 작은 섬으로 보였다.
이 섬은 무척 더운 곳이었다. 유난히 자전거가 많은 곳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거의가 짧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키 라르고〉 |
아침에 커피 생각이 간절해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별안간 창밖 하늘은 먹구름이 덮고 바람이 검푸른 열대 야자수를 더욱 검푸르게 보이게 하면서 더욱 검푸러진 야자수 이파리들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아, 비가 오네요. 비는 진주인가요. 새벽안개 인가요. 아니면 나의 흐느낌 인가요’
옛날 읽은 어느 시구가 떠올랐지만 열대의 이 섬에 내리는 비는 그런 이슬비가 아니고 세차게 후려치고 때리는 소나기였다. 비는 쉬 개였지만은 하늘은 비구름을 노상 머금고 있었다.
스페인 풍의 분위기가 자욱한 하얀 건물들이 늘어선 시가지! 자전거가 여전히 많고 즐비한 음식점, 술집들 그리고 주로 조개껍데기로 만든 악세사리, T셔츠들이 걸려있는 선물 가게는 관광지로서의 인상을 짙게 풍겨준다.
그리고 미국 전국에서 몰려드는 동성애자들로 해서 ‘키 웨스트’는 〈게이섬〉이라고도 불리어질 정도로 ‘게이’들이 많았다. 머리를 짧게 깎고, 옛날 여인처럼 손가락을 유희나 하는 폼으로 뒤로 젖혀가며 우아하게 거니는 쌍쌍의 남성들은 모두가 다 ‘게이’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직업도 가지가지겠지만 주로 낮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벌어먹고 사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런 걸 볼 때 여자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세기말적인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그러나 오죽하면 억세게 말 잘하고, 돈을 좋아하고, 남편을 들볶는 일부 미국 여자들에게 싫증이 났고, 세상만사 귀찮아진 미국 청년들이 게이가 되는 원인의 하나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키 웨스트’가 미국 최남단의 섬이라서 바다가 출렁이는 그 곳, 제일 남단을 가 보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이티, 자메이카, 쿠바가 건너편에 있을 것이다.
그 출렁이는 바닷가에 큰 집이 하나 있었는데 집이라기보다 큰 성(캐슬)이였다. 이 성 같은 집이 명소인지는 몰라도 그림엽서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갑자기 길 건너편에서 오직 나 혼자서 치마를 두르고 쪼그려 앉아 스케치를 했다.
바로 그 때 검은 색 안경을 낀 70대 노인이 점잖게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 노인의 얼굴에서 온갖 겪은 풍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이 승화되어 오히려 그를 보스의 관록과 기풍으로 돋보이게 해주었다.
바로 이 곳이 말로리 광장에서 약간 벗어난 미국 최남단 땅 끝 지역의 풍경이다.
나는 표지석 대신에 세워진 볼링 볼 같이 생긴 부표를 한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키 웨스트섬 여행 후 동아일보에 쓴 천경자 화백의 여행기(1983년 )
◆ 천경자 화가는 Key West에서 무엇을 그렸고, 또 무엇을 썼나?
천경자 화가는 키 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 집에서 현관 앞 정원과 뒷 정원에 있는 고양이들을 그렸다. 그리고 ‘슬로피 죠 바’에서 가까이 있는 예쁜 스페인 풍의 지붕을 이고 있는 2층 집과 주변의 대추 야자수 숲을 그렸다.
천경자 화가는 그 해 미국, 괌도, 그리고 캬리비안, 남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을 구경하고 귀국하여 8월에는 동아일보에 그렸던 그림을 소개하고 여행담과 아울러 글로 발표하였다.
천경자 화가는 헤밍웨이가 단골로 다녔다는 〈슬로피 죠 바〉에 들러 그 분위기를 그림을 스케치하듯이 정감 있게 잘도 묘사하였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집 겸 박물관(당시는 기념관이었나 봄)에서 보고 느낀 소감도 소상하게 표현하였다.
다음은 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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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거리에 나가 문호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자주 가서 술을 마셨다는 〈슬로피 죠 바〉를 찾아갔다.
전자음악이 요란하게 울리는 그 술집과 지척의 거리에 헤밍웨이의 집이 있다.
넓은 홀 안 벽면에는 헤밍웨이의 노경의 사진이 걸려있다.
홀 한쪽에는 젊은이들이 디스코를 추고 있고 한쪽 원탁에는 주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었다.
나는 엎어진 맥주 컵으로 해서 흥건히 젖은 바닥을 딛고 술을 마셔야만 했지만 들떠있는 그들 가운데 악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헤밍웨이의 하얀 얼굴이 가슴 복판에 프린트된 검은 T셔츠의 뚱뚱한 사나이가 공연히 으스대고 설치며 원탁 사이를 왔다 갔다 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는 젊지만 수염을 기른 폼이 헤밍웨이의 모습을 닮으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였다.
어느 원탁 앞에 빈 의자를 찾아 앉으니 당장 여자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달려왔다.
기왕이면 그 옛날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을 술을 마시고 싶어 그가 무슨 술을 즐겨 마셨느냐고 물으니까,
“그때 내 나이는 두 살인데,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라고 말한다. 내가 허허 웃으니 그녀도 같이 따라 웃었다.
헤밍웨이가 당시 게으르고 뭔지 서투르다는 뜻이 내포된 슬로피(Sloppy)가 앞에 붙은 〈죠 바〉에서 술집주인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무명작가 시절(1930년) 바다낚시를 좋아해서 둘째 부인 〈폴린〉과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흔한 짧은 반바지를 처음으로 입기 시작해 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헤밍웨이와 폴린은 1928년에 키 웨스트에 왔음).
아버지가 외제 화장품 점포를 가진 부자였던 폴린은 저택에 오만가지 나무를 심고, 2층 서재와 별채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고(지금은 없앴다), 집안에는 풀장을 만들고 고양이 60마리를 길렀다.
고양이에게는 고용인 한 사람과 심지어 조수까지 딸렸는데, 고양이 먹이 값만도 6백 달라가 들었다고 하며, 헤밍웨이가 낚시해 온 생선은 고양이에게 먹였다고 한다.
생전의 헤밍웨이는 흡사 파란만장의 인생이라 하겠는데 즉, 19세에 고등학교 졸업 후, 1차 대전에 참전, 이탈리아에서 부상을 입어 입원 중에 연상의 여인 〈아그네스〉 간호원을 만나 구애했지만 거절당했고, 30년 스페인 전쟁 때에는 종군기자, 2차 대전 때에는 적십자 종군기자, 또 영국에 가서 종군기자 생활, 모험과 수렵을 즐겼던 늠름한 미남자 헤밍웨이는 또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사고로 추락했고, 화상을 입었다.
1953년에는 코끼리와 대결했고, 결혼 경력이 네 번 있었고, 1954년에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런 후에는 〈아이다호 주〉에서 엽총자살까지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보냈지만 그는 사후 역시 화려했다.
아그네스 간호원을 모델로 한 《무기여 잘 있거라》,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대표작들은 바로 이 ‘키 웨스트’에 있는 집에서 집필한 작품이다.
과연 어젯밤에 갔던 술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 집은 지금의 기념관이 되어 있다(현재 박물관임).
기념관 문간에 빨간 ‘포인세티아’라던가 하는 이름의 꽃잎이 떨어져 마치 주단 위를 걷는 느낌을 주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계로 보이는 몹시 얄밉고 건방진 한 중년의 남자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짧은 바지는 아니지만 야한 옷차림을 한 그의 쫄랑거리는 거동이 헤밍웨이의 사촌쯤은 되나 해서 수위 영감에게 조용히 물었더니 그는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고용원이라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2층 서재 건너편 거실에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등지에서 들여 온 가구들과 함께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피카소’가 조각한 귀여운 고양이 조각상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헤밍웨이의 사후, 21년이 지난 오늘날 고양이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잘 먹고 아름다운 정원을 유유자적으로 거닐다 심심하면 찾아오는 사람들 곁에 와서 앉는다(필자 방문 당시는 천경자 사후 22년임,1961년 별세).
헤밍웨이가 아이다호 주로 떠날 때 둘째 부인 폴린과 그의 아들에게 이 집을 넘겨주고 갔었다(1940년 이혼하고 쿠바로 떠난 후부터 폴린이 10년간 살다가 1951년에 별세함, 집은 폴린의 삼촌이 결혼기념 선물로 사 준 것임).
헤밍웨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어느 날 한 노부인이 이 집을 찾아와서 폴린과 자매처럼 도란도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함께 사진도 찍고 떠났다고 하는데, 그녀는 바로 첫째 부인이었던 〈해들리〉였다. 해들리와는 헤밍웨이가 주간신문 〈토론토 스타>의 파리 특파원으로 나갈 때 결혼했으며, 같이 스페인에서 투우를 즐겼었다.
빼앗고 빼앗긴 여인들이건만 사랑했던 자가 죽고 나서 이토록 정답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럽다.
우리 동양에도 이와 비슷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는데 두 여자가 뒷날 똑같이 여승이 되어 만나는 사이였다.(이 이야기는 필자 추측인데 작가 이광수를 한 때 각각 사랑했던 김일엽 여승과 중이 되려고 수덕사를 찾아 온 나혜석의 경우로 생각됨)
헤들리가 낳은 첫 아들은 의사가 되었고, 손녀딸은 모델 겸 여배우가 된 〈마고 헤밍웨이〉이다.
‘인터뷰어’였던 셋째 부인 〈마사〉와의 쿠바 생활은 5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동양으로 여행을 많이 했고, 〈타임〉, 〈라이프〉 기자였던 네 번째 부인 〈메리〉와는 15년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보냈는데 그녀는 지금 뉴욕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작가의 자살은 양심적이고 순수한 작가일수록 건강상태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작품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것이 필연이라 하겠다. 또 뭔지 알 수 없는 그 집안의 혈통이 미스터리적으로 만들게 한 숙명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원인으로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는 운명도 있는 것 같다. 최근 헤밍웨이의 친 동생 역시 《자살전》 한권을 써 놓고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헤밍웨이는 〈키 웨스트〉의 창이 많아 시원한 집에서 고양이들과 즐기면서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슬로피 죠 바〉에 나가 주인과 담소하며 술잔을 들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런 헤밍웨이의 얼굴이 있는 검은 T셔츠를 기념관에서 샀지만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 그걸 걸칠 것인가?
◆ 영화 〈키 라르고〉로 말 머리를 돌려서, 영화 내용의 끄트머리를 맺어 보겠다.
1948년 존 휴스턴 감독이 만든 〈키 라고〉(Key Largo)는,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이 주연을 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였다. 여배우 바칼은 1944년도 헤밍웨의 원작 소설인 《소유와 무소유》 또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변역된 타이틀 영화 〈To have and Have Not〉에 처음 데뷰를 했고, 이 영화의 남자 주연인 험프리 보카르트와 그 다음해에 결혼을 했다.
그 때 바칼(Bacall)은 나이가 20세, 남편인 보가트(Bogart)는 45세로 무려 25세의 연상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제목만 그 섬이지 내용은 그 섬에 관한 것도 아니고 현지 로케이션도 별로 없었다. 다만 〈키 라르고〉에서 동기를 얻어 범죄 영화를 만들어 본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키 라르고’를 연상시켜 주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그 섬을 알려 주었다.
▲바칼과 보가트가 공연한 영화 〈키 라르고〉 포스터(1944년작)
바칼은 1950년대는 마리린 몬로와 함께 섹시 배우로서 쌍벽을 이루었었다. 어떤 면에서 바칼이 섹시 여배우의 원조였다.
바칼은 1924년 생으로 천경자 화가도 말했던 것처럼 둘은 동갑이었다.
천경자 화가는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화가이다. 그녀의 여러 저서를 읽다보면 외국영화 이야기가 많아 나온다. 주연급 배우 이름도 상세히 알고 있어 천경자 화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에 얼마나 몰두하며 관람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천경자 화가는 〈바칼〉이 출연한 영화 〈키 라르고〉는 물론 〈소유와 무소유〉, 그리고 바칼이 마리린 몬로와 공연한 영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방법〉도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동갑쟁이였고 천경자 화가가 좋아했던 여배우 <바칼>은 2014년 6월에 뉴욕에서 향년 90세로, 천경자 화가는 작년, 2015년 8월에 향년 91세로, 역시 뉴욕에서 타계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원작 소설가 헤밍웨이와 그 영화의 여주연인 로렌 바칼이 1959년 어느 여름 날 우연히도 스페인, 어느 카페에서 만나게 되어 서로 인사도 나누고, 그 영화에 대하여 담소도하고 커피도 함께 마신적도 있었다.
◀헤밍웨이와 여배우 로렌 바칼 (1959년 스페인 카페)
◀섹시 배우의 원조 로렌 바칼(1924~2014)
◀마리린 몬로와 함께 공연한 영화 〈백만장자와 결혼하기〉(1954년작)
-. 1944년 헤밍웨이 원작소설 영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데뷰
-. 1948년 〈키 라르고〉에 남편 험프리 보카르트와 공연
-. 1954년 〈백만장자와 결혼하기〉에 마리린 몬로와 공연
하워드 혹스 감독이 1944년에 만든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와 1946년 작품인 〈빅 슬립〉(The Big Sleep)에 이어 또 다시 짝으로 나왔다.
이들은 1945년에 혼인하여 1957년에 헤어졌지만, 같이 살 때 영화에도 같이 나왔다.
영화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대충 이러하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령으로 이태리에서 싸웠던 프랭크 맥클라우드(험프리 보가트)는 죠의 집을 찾는다. 싸움터에서 죽은 죠의 아버지 템플(라이오넬 배리모어)과 아내 노라(로렌 바콜)를 만나러 온 것. 이들은 죠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라르고 호텔을 꾸려가면서 잊으려 한다.
미국의 남쪽 땅 끝에 있는 섬 ‘키 라르고’에 있는 〈라르고 호텔〉, 여기를 통째로 빌린 무리가 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탓에 미국에서 쫓겨나 쿠바에 머물고 있는 ‘로코’(에드워드 지 로빈슨) 무리다.
노래쟁이(?)로 이름을 떨쳤지만 이젠 술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게이 돈(클레어 트레버)도 이 무리에 끼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로코’를 두려워 하지만 게이는 로코를 사랑하다니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쿠바에서 ‘라르고 호텔’로 온 까닭은 미리 만들어 놓은 위조지폐를 미국 깡패들에게 팔려고 한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큰 바람인 허리케인이 불어 닥쳐 ‘키 라르고’ 섬에 있는 사람들은 꼼짝을 못하고, 자동차를 타고 뭍과 이어진 다리를 건너와서 사가려 하는 깡패들도 오질 못 했다.
바람이 멎으면 서로 주고받고는 ‘사러온 패거리’는 미국 땅으로, ‘팔러온 패거리’는 쿠바로 돌아가면 끝이다.
깡패들과 내기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로코가 프랭크한테 꿈을 묻자
바로 말한다.
“나는 당신 같은 깡패가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소”
이 말에 화가 난 로코가 바로 총을 건넨다.
“그래, 잘 되었네. 날 죽여 봐”
서부 영화처럼 둘이 총싸움을 벌여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프랭크는 총을 손에 잡았다가 내려놓는다.
“난 총을 쏘기 싫소”
이 틈에 다른 일로 호텔에 들어왔다가 깡패들한테 맞아 쓰러졌던 경찰이 잽싸게 총을 잡는다.
“로코, 꼼짝하지마! 부하들이 총을 쏘면 나는 널 쏠거야”
총을 겨누고는 천천히 문으로 나간다. 보고 있던 로코가 총을 쏜다.
탕, 탕, 탕! 문으로 나가려던 경찰은 총을 쏘지 못하고 죽는다. 총알이 안들어간 빈총이었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똑같이 했다면 먼저 죽었을 것이다. 나쁜 짓을 하는 깡패가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총알이 든 총을 줄 리가 없다.(나쁜 놈들이 달리 나쁠까? 제가 한 말을 지키지 않고 속임수를 쓰는 놈들이니 나쁘지)
아낙네들한테 점수를 따려면 깡패한테 얻어맞을 생각까지 해야 한다. 술이 없으면 어쩔 줄 모르는 게이가 술 한 잔만 마시자고 로코한테 말하자, 로코는 노래를 한 곡 부르면 술을 주겠다고 한다. 게이는 노래방 기계도 없는 곳에서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 놈의 술이 뭔지, 그런데 노래를 다 부르고 술을 달라고 하는데-
헤밍웨이에게 많은 창작 동기와 소재를 주었던 곳은 그의 단골 주점인 〈슬로피 죠 바〉였다. 그는 바다낚시를 마치고 오면 이곳에 들려서 낚시 경험과 바다에서의 무용담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친구를 가리지 않았다. 선원이나 선장도 차별하지 않고 대했다. 대화를 서로 주고받고 죽이 맞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맥주 맛을 더 올려 주는 대화의 소유자라면 더욱 환영하였다.
이 단골 주점의 주인의 이름은 ‘죠’였다. 자기 이름을 따서 ‘죠 바’라고 불렀다 한다. 그런데 〈슬로피 죠 바〉의 원조는 ‘쿠바’에 있었다. 1904년에 죠(Joe)라는 실명의 사람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의 죠는 6년간을 플로리다에서 살다가 쿠바로 가서 1917년에 허름한 창고를 빌려서 대충 장식을 하고 주점을 오픈하였다. 그 주점은 약간 더럽고 지저분하고 우중충했다. 그래서 ‘Sloppy’라는 말을 자기 이름 앞에 붙여서 〈슬로피 죠 바〉(Sloppy Joe's Bar) 라는 간판을 걸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쿠바도 미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할 준비를 하면서 3년 전에 이 〈슬로피 죠 바〉를 재개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하바나 관광공사에서 직영하고 있다 한다.
Sloppy! 하면 나도 생각나는 일이 있다. 1960년대 말, 영어회화를 배우기 위해서 서대문 홍은동 골짜기에 사시는 미국인 할머니 ‘에그네스 데이비드 킴’의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녔다. 그 때 10여명의 대학생이 영어성경과 함께 영어회화도 그 할머니한테서 배우고 있었다.
당시 영어회화에서 모음 사이에 있는 ‘t’를 굴려서 ‘r’로 발음하면 양아치 영어니 양키 영어니, 심지어 양공주식 발음이니 하여 천한 영어로 간주되었다. 미군 GI영어라 하기도 했다.
영어는 영국식으로 해야 미국에 가서도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워터(watter)를 ‘워러’라고 발음하거나, 레터(letter)를 ‘레러’라고 발음하며 그런 천박한 무식한 미군 쫄병들이 하는 영어를 어디서 주워 배웠느냐고 하면서 조롱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을지로에 있는 서울에서는 최초의 영어학원인 CCB학원에서 한국계 미국인 2세인 로버트 박 선생한테서 3개월간 영어회화를 배운 적이 있었다.
이 때 로버트 박 선생은 미국식 영어를 강조하면서, ‘t’가 모음 사이에서는 연음작용을 하니, ‘r’로 발음하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t’를 연음을 하지 않고 ‘t’ 그대로 ‘워터’, ‘레터’하고 발음하면 ‘당신은 미국에 가면 등신 영어 발음을 하고 있는거야’ 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핀잔과 창피를 주기도 하였다. 박 선생은 영어를 굴리고 줄여서 빨리해도 미국 본토인들은 단박에 알아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슬금슬금 굴리는 발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런 웃기는 농담도 잘하여 인기가 좋았다.
"여러분! 종로YMCA 앞에서 영등포나 청량리 중랑교 가는 버스 안내양들이 태울 손님들 호객하는 소리 들어 보세요.
“영~~포 가요, 영~~포”
이렇게 말해도 영등포에 갈 손님은 다 알아 듣고 잘 만 탄단 말이예요.
“차라리(청량리) 중능게(중랑교) 나요”
이렇게 해도, 잘 알아먹어요."
이렇게 청량리, 중랑교 가는 손님은 다 알아 듣고 탄다고 그는 우수개 소리도 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명이 갑자기 할머니에게 굴려서 영어를 발음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돌직구 질문을 했다. 그 때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He sounds sloppy!”
이 때 나는 처음으로 ‘sloppy’라는 영어 단어를 접했다.
오우! Sloppy! 이게 무슨 소리야? 칭찬이야, 아니면 욕이야? 처음 듣는 영어 단어였다. 나는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느낌이 칭찬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sloppy’가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어떤 숙녀가 곱게 옷을 입었는데 속치마가 겉의 드레스 밖으로 약간 보이면, ‘She is sloppy’라고 말한다”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 갔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슬로피’는 단정치 못하거나 엉성하거나 대충대충 넘어가는 상태를 말 할 때 쓰이는 것으로 그 때 파악하게 되었다.
아무튼 단정치 못하며 얼렁뚱땅 굴리고 흘려서 하는 발음으로 외국인이 잘난 척 영어발음을 원어민처럼 하려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서투른 발음이라고 약간은 비꼬는 평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벌써 40여년이 지나서 미국 최남단 ‘키 웨스트’ 섬에 와서 바로 이 〈슬로피 죠 바〉 간판에서 ‘Sloppy’라는 단어를 만나니 감개가 무량하다. 아무튼 ‘죠’라는 스페인 청년의 별명이 그래서, 가게 이름도 ‘슬로피’가 맨 앞에 붙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쿠바에서 〈슬로피 죠 바〉가 장사가 잘 되고 있다는 소문이 선원들을 통하여 키 웨스트 섬까지 전해왔다. 그 때 이 섬에도 ‘죠’라는 실명이 있었는데 그는 헤밍웨이의 술 친구였다. 조그만 바의 주인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Joe Russel’이었다.
자기 이름도 ‘Joe’ 이니까 키 웨스트에서도 간판을 ‘Sloppy Joe's Bar’로 해보라는 헤밍웨이의 농담을 웃어넘기지 않고 도로변 가게 벽면에 단박에 대문짝 크기로 간판 글씨를 써 붙였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슬로피 죠 바〉가 있게 된 것이다.
쿠바는 1904년에 〈슬로피 죠 바〉가 생겼고, 키 웨스트에 1933년에 ‘슬로피 죠 바’가 생겼다. 바로 키 웨스트 섬에서 헤밍웨이가 큰 저택도 매입하여 3년 째 살고 있었을 때였다. 말하자면 쿠바의 〈슬로피 죠 바〉는 원조이고, 키 웨스트는 ‘짜가 슬로피 죠 바’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짜가 진짜 보다 더 유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곳 키 웨스트의 〈슬로피 죠 바〉에는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많이 들린다 한다.
〈트루만〉 대통령도 키 웨스트 섬에 오면 꼭 들렸다고 한다. 그 밖에 미국인 가수, 영화배우, 소설가도 키 웨스트에 오면 이 ‘슬로피 죠 바’에 들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한다.
한국 관광객들도 키 웨스트에 가면 헤밍웨이 집과 슬로피 죠 바는 필수 방문 코스로 삼는다.
천경자 화백도 그래서 이 〈슬로피 죠 바〉에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 4명도 8월 23일 오후에 들렸다. 커피와 맥주도 시켜 마시고, 유명한 ‘키 라임 파이’도 시켜 먹었다. 대낮인데도 손님들이 득실거렸다. 무대 위에서는 기타를 맨 뮤지션이 신나게 연주를 하며 연신 노래를 불러 주었다. 벽에는 헤밍웨이가 좋아하는 엽총, 낚시대, 그리고 헤밍웨이가 주인공인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노인과 바다》 소설의 상징인 대형 청새치도 박제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낚시로 잡은 청새치를 사랑하는 헤밍웨이
가수 조용필은 왜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불렀나?
이제는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과 가수 조용필이 불러 히트시킨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1986년 가수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6분짜리 긴 노래를 불러 크게 유행시켰다.
대중가요란 통상 길이가 3분이다. 라디오 방송에서도 3분이 넘는 긴 노래는 방송을 기피하는데, 이 노래는 당시 쉬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그런데 이 노래의 타이틀이나 노랫말이 바로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인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바로 작사가로 유명한 양인자씨다.
양인자씨는 바로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김국환의 〈타타타〉 그리고 〈눈동자〉, 〈그 겨울의 찻집〉 등 여러 히트곡 노랫말을 쓴 작사가였다. 그리고 양인자씨의 남편인 작곡가 김희갑씨는 이런 노랫말에 모두 곡을 지었다.
가수 조용필도 가수 겸 작곡가이다. 그의 노래의 70, 80퍼센트는 자작곡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용필이 부산에서 무명 가수일 때부터 양인자, 김희갑 부부와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던 조용필에게 이 노래는 그를 ‘국민 가수’로 부활시키는데 크게 밑거름이 된 노래가 된 것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노래한 조용필 가수 | 이 노래가 발표되던 때, 배우 최민수도 강원도로 자동차 여행을 하다가 한계령을 오를 때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가사 내용과 영혼을 울리는 조용필의 가창력에 매료되어 자동차를 고갯 길에 멈추고 다 듣고서 재출발을 했다고 한다. 이 노래가 크게 유행되자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나라인 ‘탄자니아’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1997년 11월에 대전에서 조용필 리사이틀에 탄자니아 고위 공무원 15명이 참석을 했다고 한다. 조용필도 감격하여 무대 맨 끝에 이들을 소개했고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
이 자리에서 탄자니아 정부는 조용필 가수에게 킬리만자로 산을 한국 국민에게 크게 홍보시킨 점에 감사패를 만들어 증정했고 그를 탄자니아 ‘명예 홍보대사’로 위촉하였다.
바로 그런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노랫말은 이러하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 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 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레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건
사랑 때문이라구?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 일지라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 지라도 한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 거센 폭풍우 초목을 휩쓸어도 꺾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가 되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면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
◆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
이왕에 <킬리만자로>라는 얘기가 나왔으니,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 보고 나간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해리는 작가지만 글 쓰는 일에 몰두하는 대신 여러 여자를 만나고 현실에 안주하며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타입으로 등장한다.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 포스터(1956년 작), 주연에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 여우 주연, 요염한 에바 가드너
그는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찾아간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를 만나 죽음과 마주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죽음을 앞둔 해리의 마음에는 그 동안에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지내왔던 지나간 세월들이 망막에 스쳐간다. 그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것은 전쟁과 죽음의 공포, 가난과 술, 여자들과의 어지러운 생활뿐이다.
고통의 연속이었던 삶을 뒤로한 채 이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가 아니고 이상을 쫒다가 흰 눈 덮인 ‘신의 집’에 찾아가다 죽는 표범이 되고자 한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남자의 야망과 고독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에 오르는 표범에 비유했다.
양인자씨가 쓴 가사의 내용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의 내용을 모티브로 하여 쓰인 것인데, 거기서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은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 얘기가 나오고, 가난하지만 이상을 쫒던 인물이 결국 세상에 굴복해 돈 많은 여성과 사랑도 없이 결혼해 평생 부유하지만 알맹이 없는 삶을 살다가 죽어가며 후회하는 얘기가 나온다. 그 내용을 시적으로 잘 표현한 노랫말이 바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헤밍웨이가 쓰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쓰지 못했던 여러 상념을 회상하는 작품,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처럼 물질을 얻기 위해 이상을 포기한 타락한 예술가가 되기보다는,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은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이상을 위해 매진하다 처절히 산화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했던 것이다.
가수 조용필도 재력 있는 재미 교포와 결혼했는데 부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여러 가지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그도 가사 내용처럼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 같은 가수가 되기보다 차라리 굶어죽더라도 살아 있는 고기를 먹는 표범의 절개를 닮고, 그런 가수를 지향하고 싶었기에 그 노래에 자기의 영혼과 염원을 담아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바로 그런 열정이 애청자들의 가슴을 울려서 마침내 대 히트곡이 되고 그가 ‘국민 가수’라고 불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용필은 이 노래 덕분에 2001년 9월 26일 탄자니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원래는 중간의 나레이션을 ‘랩으로 하려 했다’고 김희갑 작곡가가 말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용필 본인이 경박해 보인다며 거절하여 장엄하고 시적으로 들리는 나레이션이 되었다.
앞부분 반주가 〈은하철도 999〉 주제가를 부른 김국환의 〈타타타〉와 매우 비슷하다고들 한다. 그렇다! 이 두곡도 작곡가 김희갑이 작곡했고 노랫말 가사는 그의 부인인 양인자씨가 썼기에 같은 느낌이 흐른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왜 자살을 했을까?
“나는 처음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 자살할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이 말은 어느 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한 말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으로 널리 알려진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다.
비극적인 내용을 냉혹할 정도로 간결한 문체로 써 내려가는 그의 문학은〈하드보일드 문학〉을 대표한다.
헤밍웨이는 자살로 삶을 마쳤으며, 그의 자살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의 자살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심리부검’이라 하는 즉, 그의 인생을 사회-심리학적 그리고 생물학적인 접근과 이해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헤밍웨이의 기분 변화를 전기 작가인 Baker(1969)는 조증-우울증(manic-depressive)으로 표현했다. 그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 문제 있는 대인관계, 알콜 중독 등도 언급했다.
Lynn(1987)과 Mellow(1992)는 Baker의 내용을 확장해 그의 가족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어머니의 일관되지 못한 성(gender)에 대한 태도와 아버지의 불처럼 욱하는 성격에 엄격한 양육태도 그리고 가족의 정신과적 과거력을 지적했다.
Yalom(1971)은 그의 정신역동에 대해 다루면서 세계대전 참전으로 겪은 트라우마와 관련된 경험으로 인한 갈등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양극성 장애와 알콜사용장애(구, 알콜의존)를 앓았으며, 인격적으로도 불안정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도 느끼는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문학에 영향을 준 것은 그의 정신질환과 이를 둘러싼 생물-사회적 요인들로 보는 것이 현대 정신의학적 설명이다.
차제에 헤밍웨이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 약간 더 언급해 본다.
헤밍웨이의 아버지(Clarence Hemingway, 의사)는 매우 엄한 독설가였다. 불같은 성격으로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았고, 화가 나면 헤밍웨이를 면도날을 벼르는 가죽 끈으로 때리곤 했다. 그리하여 헤밍웨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품게 되었고,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암살하는 환상을 가지기도 했다 한다. 그래도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편해했었다.
어머니(Grace Hemingway)는 이기적이고 남을 조종하려는 성격이었다.
헤밍웨이는 어머니에 대해 ‘모든 걸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라 묘사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 장례식에는 참석도 하지 않고 장례비용만 부담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해, “그렇게 아버지에 대해 조종하려 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며 어머니를 비난했다.
사실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아버지의 사망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오랜 분노가 형태를 바꾸어 ‘아버지의 자살은 어머니의 잘못’이라는 생각까지 갖게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헤밍웨이에게 여자 아이처럼 옷을 입히곤 했다. 심지어 빅토리아 시대 의상을 아이에게 입히는 등 또래 여자 아이들보다도 더 여성스럽게 옷을 입혔다. 그는 이런 스타일의 옷을 수년간 입을 수 밖에 없었고, 머리 스타일도 누나와 같은 스타일로 지내야 했다. 심지어 헤밍웨이의 누나인 Marcelline과 쌍둥이처럼 보이게끔 사이즈가 다른 누나의 옷을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어머니는 헤밍웨이가 좋아하는 사냥이나 낚시와 같은 남성적인 성향을 칭찬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일관적이지 못한 성(gender)에 대한 태도는 헤밍웨이의 성에 대한 정상적 인식 형성에 혼란을 주었다.
어머니가 기록한 헤밍웨이의 〈유아기 말〉을 보면, 어머니가 준 인형에 대한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등 그의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그가 의식적인 의사표현을 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인격 형성과정은 그가 성인된 후에 과도하게 남성성에 집착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실제로 죽자 부모가 죽기를 소망했던 헤밍웨이는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심리적 부담에 처하자 누군가 비난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바로 어머니에게 이러한 감정을 투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죄책감은 그의 우울증과 자살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정신건강의학에서 특정 질환이나 증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생물학적 영향을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가족력이다. 유전적 영향이 증상 혹은 질환의 발병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족들 중 이러한 것을 가졌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헤밍웨이 가족은 정신과적 질환, 증상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헤밍웨이의 정신질환이나 성격적 문제가 모두 이러한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상당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 아버지 : 예측 불가능하고 드라마틱한 기분 변화. 우울하고 예민한 기분변화를 특징적으로 가짐. 1928년 권총으로 자살.
-. 어머니 : 불면, 두통, 신경증 증상.
-. 어머니 형제, Leicester : 불면, 두통.
-. 아버지 형제, Alfred : 불면, 신경증 증상.
헤밍웨이의 형제를 살펴본다.
-. Ursula, Leicester : 자살
-. Marcelline : 우울증, 자연사했으나 가족은 자살로 의심된다.
헤밍웨이의 자녀를 살펴본다.
-. 막내아들 Gregory : 양극성 장애, 물질 의존 정신질환으로 의사면허 박탈 후 기괴한 행동을 많이 했다. 여러 차례 정신병원 입원했고, 헤밍웨이처럼 의상도착 물품음란증(transvestic fetishism)도 있었다. 성전환수술을 하기도 했다.
-. 큰 아들의 딸 Margaux : 간질, 우울증, 폭식증(bulimia nervosa), 알코올 의존. 약물 중독으로 자살했다. 이상이 가족들의 정신 병력이다.
이제 헤밍웨이의 성격을 살펴본다.
헤밍웨이는 성격 변화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관되지 못한 양육환경에서 자랐고, 여러 이유로 자아에 대한 정체성이 안정적이지 않아 보였다.
부끄러움과 자만심, 부드러움과 공격성, 자상함과 무례하고 잘 못 참는 행동과 같이 극단적인 모습을 교차하여 나타냈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극적인 성격은 경계선 인격 장애에서 보이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정말 좋은 사람’과 ‘욕먹을 정도로 나쁜 사람’ 등 극단적으로 나누어 보았고, 반복적인 자살사고, 잦은 화냄, 충동성, 감정의 불안정성으로 대인관계에 문제점을 드러내곤 하였다.
그는 결혼생활 중에도 불륜(affairs)으로 많이 힘들었으며 세 차례나 이혼으로 끝이 났다.
헤밍웨이의 친구들은 그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잔인하고 이기적이라고 묘사했다. 매우 경쟁적이면서도 자신보다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조소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멸하는 일이 잦았다고 비난했다. 또 자신의 능력은 매우 대단하고 가끔씩 전능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길게 연결되어 있는 연육교!
마이애미의 오버씨 하이웨이(Oversea Highway)!
그 위를 달리는 바다 위 고속도로! 미국 본토 마이애미 남단 해안에 42개 연육교를 이어 맨 끝 최남단 섬 Key West까지 총길이는 127마일이다. 알기 쉽게 약 200Km나 된다.
언제(When), 왜(Why), 어떻게(How) 해서 만들어졌나?
▲해상 고속도로 연육교 중에서 유명한 7마일 대교
1920년대 미국을 생각해 본다.
1914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석유, 철강, 곡물 생산이 크게 늘어날 때였다.
미국은 유럽에서 싸우고 있는 서방국가들에게 무기와 곡식을 팔아서 떼돈을 벌었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금金이 그 판매 대금으로 들어와서 그야 말로 미국은 신생 부자 국가가 된다.
그러나 장사하러 다니는 미국 상선을 독일이 함포를 쏘고 파선을 시키자 뿔이 난 미국은 1917년에 영국과 같은 편으로 참전한다. 물론 이 때 미국은 의용병이라는 명분으로 지원병을 모집하여 유럽 전선에 참전 시킨다.
이 때 헤밍웨이도 전투 지원병은 시력 때문에 거부당하고, 비전투 요원인 적십자 수송병으로 참전한다.
세계 제1차 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1919년 끝난다.
미국은 남의 승리 잔치 상에 운 좋게 숟가락을 얹어놓는 기회를 붙잡았던 것이다. 전쟁으로 앉아서 돈도 벌고, 승전국의 명예도 함께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전쟁의 결과로 많은 인명의 피해를 보았고 재산은 거의 파괴되고 식량은 부족하고, 노동력도 부족하고 산업시설도 다 파괴되고 그야말로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거지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이 유럽을 도와주어야 했다. 이른바 미국이 유럽을 한시적으로 먹여 살려주기 작전을 폈다. 바로 이것이 〈마샬 플랜〉이었다.
그런데 쏘련은 전승국이 되었지만 전쟁 통에 수백만이 희생당하였고, 재산상으로도 국가 경제적으로도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버렸다. 식량마저 절대 부족하자, 국가 정권을 뒤집어 버리는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비로 볼쉐비키 무산층의 공산혁명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로 재미를 크게 보고 있는데, 만일에 유럽 국가들에서 쏘련처럼 자본주의를 뒤집는 공산혁명이 일어난다면 바다 건너 불구경하듯이 좌시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래서 미국은 유럽의 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그간 전쟁 통에 공장이 잘 돌아가, 국내외로 장사를 잘했던 미국은 생산품은 남아도는데, 수요 부족으로 공장들이 하나 둘 씩 문을 닫더니 드디어 경제가 마비되는 〈대공황〉이 불어 닥친 것이다.
이 대공황 폭풍은 세계를 검은 구름으로 뒤엎었다. 바로 이 때 전쟁의 공포와 불안, 경제적 공포에 불안해하던 일부 부유층의 미국인들은 재산 늘리기 보다는 현재 있는 재산으로 기후 좋고 낚시나 사냥 등으로 여유도 즐길 수 있는, 그리고 땅 값도 싸고 평화로운 곳에서 살고 싶은 욕망들이 생겼다. 바로 이 때 이들의 관심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플래글러〉였다. 그는 〈록펠러〉와 동업 관계, 그리고 뉴저지에서의 지주회사인 〈스탠다드 석유회사〉도 어느 정도 정리하여 미국 남부 황무지와 늪지대인 플로리다로 이주를 하고, 이제는 그 지역의 개척과 개발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부유층 사람들이 눈길을 돌린 곳, 겨울도 없는 파라다이스 땅, 미국의 남단 바로 플로리다 마이애미였다.
1920년대 초부터 마이애미는 전국에서 땅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갑자기 토지 투기 붐이 심하게 불어 닥쳤다. 바로 이 때다. 마이애미 앞 바다에 줄서 있었던 ‘키 열도’에도 관심이 쏟아졌다.
모기떼가 우글거리고 수심이 낮아 큰 배도 정박할 수 없고, 주변에 늪지대가 많아서 겨우 수백 명 정도 어부들이 살던 여러 섬이나 무인도들이 땅 투기꾼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키 열도’에는 무인도를 포함해서 올막졸막한 섬까지 다 합치면 무려 822개의 섬이 있었다. 그 중에서 유인도는 30여개 섬인데,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연육교로 연결된 42여개의 섬들이었다.
사람이 사는 섬 중에서 큰 배가 정박할 수 있고, 인근에 쿠바, 자마이카와도 가까운 ‘키 웨스트’ 섬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그 섬에서는 담배 공장도 생기고, 라임, 파인애플 농장도 생겼다. 한동안 ‘키 웨스트’ 섬은 지금의 마이애미 보다 인구가 많았다 한다.
현재 마이애미는 인구가 42만 명이 넘어서 ‘키 웨스트’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현재 키 웨스트 인구는 약 3만 명 정도), 그 당시 인기가 높던 ‘키 웨스트’ 섬은 1912년 전에는 마이애미 해안 부두에서 페리 선박을 타고 들어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그 지역에서는 돈을 벌기위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헨리 프래글러 (Henry Frager)! 바로 그였다.
▲플로리다 개척&개발 선구자 헨리 플래글러(1830~1913)
▲1912년 해상 철로 준공 후 첫 기차 ‘키 웨스트’ 도착 기념사진
▲플래글러가 개발한 키 열도 레조트 지역 호텔
오늘날 키 웨스트를 세계적 관광지와 리조트 휴양지로 탈바꿈하게 만든 사람은 〈헨리 플래글러〉였던 것이다.
◆ ‘헨리 플래글러’ 그는 누구인가?
그는 183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이혼을 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만나서 재혼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플래글러의 부모가 일찍이 또 이혼을 하고 갈라서게 되자,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그는 학교도 8학년,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자면 중학교 2학년을 겨우 마치고 직업전선에 뛰어 들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바지선에서 허드레 일도하고, 그 후에는 삼촌 채소가게에서 점원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 후에 소금공장을 만들어 차차 자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스키 양조장에서도 일도 했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말[馬] 편자 만드는 기계를 생산하여 판매하는 사업도 했다. 이렇게 근면 성실하게 계속 저축하여 어느 정도 돈을 모았다.
그러던 중에 위스키 양조장에서 판매 대리점 권한을 얻기 위해서 찾아 온 〈록펠러〉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그 후에 록팰러와 함께〈스탠다드 석유회사〉를 동업으로 창립할 때 창립 멤버가 되었고 그도 록펠러와 함께 백만장자 그룹에 끼게 된다. 그리나 반독점법으로 석유회사가 해산을 당하자, 뉴저주지에서 〈스탠다드 석유 지주회사〉를 창립하여 주식의 25퍼센트를 소유하면서 큰 부富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에 부인인 메리가 결핵에 걸렸다. 신혼 시절에 가난하여 건강을 제대로 살피지 못 했던 것이다. 그래서 늦게서야 1878년 경 겨울에 날씨가 따뜻한 플로리다로 부인을 데리고 가서 요양치료를 하려고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다시 뉴욕에 귀환하여 부인은 48세가 되던 1881년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때 플래글러는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슬픔을 크게 맛보게 되었다.
플래글러는 재혼을 한 후 53세가 되던 1883년, 그 부인과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살기로 했다. 그리고 1910년대에 플로리다 마이애미가 장차 리조트 휴양지로 각광을 받을 것을 예견하고 미리 땅을 매입하는 등 투자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늪지대의 땅, 모기와 뱀, 그리고 악어가 득실거려 접근도 꺼려했던 땅을 플로리다 주 정부로부터 1에이커(1정보:3천평)에 단 돈 50센트, 우리 돈으로 500원에 대량으로 마구 닥치는 대로 사 들였다. 3000평을 단 돈 500원에!!
플로리다에 있는 잭슨빌에 7천명, 탬파(Tampa)가 겨우 1천명 살고 있었다. 플로리다 잭슨빌 시티는 대부분 그 때 플래글러가 한 평에 단 돈 0.16원에 샀었다. 그러니까 그 큰 땅을 1원에 약 6평의 땅을 산 것이다. 그리고 그 쓸모없는 땅을 흙과 돌로 메워서 호텔을 짓고 휴양지 등으로 개발하여 금싸라기 땅으로 변신을 시켰다. 그 버려진 땅을 금싸라기로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실천 덕분이었다.
그는 철도회사를 만들고 철로를 깔아 미국 부유층들이 겨울철에는 휴가나 휴양을 오게 하였다. 특히 미국 북부지역에서 큰 돈을 벌었던 사람들은 겨울 내내 따뜻한 플로리다의 기후는 당시 고질병인 결핵의 치료나 그 예방에 좋은 곳으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땅을 사서 겨울용 피한 별장을 짓는 것을 유행시켰다.
부자들 간에는 플로리다의 땅에 투기하는 붐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중류층들도 플로리다로 덩달아 모여들었다. 인구가 단 한명도 없었던 현 마이애미 시티는 인구가 갑자기 늘기 시작했다.
이 때 주정부는 도시의 이름을 작명하려고 고심하다가 바로 플로리다를 이렇게 전국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게 해주고 실제로 플로리다의 개발에 선구적 역할을 한 플래글러에게 그 영광을 주자고 하였다.
그래서 주 정부는 그 도시의 이름을 〈플래글러 시티〉라 명명하고, 당사자인 플래글러의 양해를 요청했으나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자기는 돈을 벌기 위해서 플로리다를 개발하는 데 앞장섰기에 ‘그럴 자격이 없다’ 하면서 오히려 아메리칸 인디안들이 그 곳에 살았을 때에 불리웠던 지명인 〈마이애미〉를 신도시 이름으로 하자고 역 제안을 했다고 한다.
마이애미 시티! ‘플래글러’로 이름표를 달 뻔 했던 도시가 〈마이애미〉로 정해진 배경에는 이처럼 플래글러의 겸양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 ‘프래글러’와 석유왕 ‘록펠러’는 어떤 사이였나?
프래글러의 사업 동반자요 친구였던 록펠러는 누구인가.
플래글러와 록펠러는 둘 다 1930년대 출생했다. 같은 시기에 출생한 것이다.
플래글러는 1830년에, 록펠러는 1939년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플래글러가 록펠러보다는 나이가 9살 더 많아서 형님뻘이었다. 사실상 사업을 할 때도 플래글러는 록펠러에게 형님처럼 조언을 많이 해 주었고, 록펠러 역시 그를 믿고 잘 따른 편이었다.
록펠러는 학력이 고등학교 졸이었다. 플래글러는 아예 고등학교 문 앞에도 가 보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중퇴가 그의 학력 전부였다. 두 사람 모두 학력이 아니라 성실, 근면과 신용, 그리고 어려서부터 익힌 사업 수단이 성공의 밑바탕이 된 사람들이다.
플래글러는 14살 때 출생지인 뉴욕을 떠나 오하이오 주에서 월급이라고 단 돈 5달라를 받고 채소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했다. 자고 먹는 것은 주인이 무료로 제공했다. 말이 무료지 잠은 카운터 테이블 아래서 새우잠을 잤다. 추운 겨울에는 담요나 이불이 없어서 신문이나 종이를 두텁게 몸에 말고, 그래도 추우면 그 위에 커튼 박스를 올리고 체온을 유지했다.
밥은 팔리다 남은 빵으로 때웠다.
마을에 서커스가 들어오거나, 축제일 또는 공휴일이 되어 가게 문을 닫을 때는 인근 숲속으로 가서 솔잎을 많이 따서 폭신한 잠자리를 만들어 그동안의 피로를 풀며 하루 종일 잠을 자며 보내곤 했다.
그는 댄(Dan)이라는 형과 함께 일했다. 그 형은 어머니는 서로 같지만 아버지가 달랐다. 우리말로 하자면 어머니의 배는 같았는데 아버지의 씨가 달랐다. 이런 때 한자로 말하자면, 동복이성同腹異姓 형이었다.
미국에서 이런 경우에는 반쪽 형제(half brother 또는 step brother)라 부른다.
그 후 두 사람은 소금 장사를 해서 한 때 돈을 모았다. 소금이란 그 당시에 물물교환을 할 때 중간 매개체인 화폐 구실을 했다. 다행히 그들이 청소년이었던 그 때는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서, 군수용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소금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소금이 잘 안 팔려서 소금 광산은 폐광되고 소금 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플래글러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오하이오 주로 돌아 왔다. 그 곳에서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는 곡물장사와 위스키 양조사업으로 꽤 돈을 벌었다. 바로 위스키 양조사업을 할 때 장차 석유왕이 될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이 바로 록펠러였다.
록펠러는 어린 점원 한명을 데리고 와서 자기가 사는 곳에 위스키 판매 대리점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려고 왔었다. 록펠러는 당시 클리블랜드에서 다른 양조회사의 판매 대리점도 운영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진짜 원료 맥아로 만든 위스키가 아니고 옥수수로 만든 가짜 위스키를 팔고, 뒷전에서는 양조 판매 총책으로부터는 코미션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받고 장사를 했었다.
그러나 플래글러를 알고 나면서 장사란 신용이 있어야하고 양심적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석유사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침이 되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플래글러와 록펠러는 그 후, 스탠포드 정유회사를 동업자로 서로 창업하게 된다.
그 후 플래글러는 23세 때 함께 양조장을 운영하는 스테펜 하크네스의 댄(Dan)의 조카인 메리(Mary)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는 록펠러가 있는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말굽을 만드는 기계를 특허를 받아 제조하여 판매하는 사업도 했다.
한편 록펠러는 16세부터 이미 석유회사에 입사하여 서기 보조원 노릇을 시작했었다. 친구인 클라크와 동업으로 석유 채굴 사업을 시작했으나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갈라섰다.
그는 석유 채굴 보다는 차라리 원유를 사서 이것들을 정유하여 파는 것이 더 이익이 남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취지에 뜻을 같이 한 사람이 바로 근간에 이사를 온 플래글러였다. 록펠러는 앤드류스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만든 정유 제조 판매회사가 바로 〈스탠다드 석유회사〉였다.
우리나라가 이 시기에 처음으로 석유 등잔을 이용했는데, 이 석유가 바로 중국 상해에 있는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판매 대리점에서 수입해 온 석유였고, 이 석유로 밤을 밝혔던 것이다.
◆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탄생!
‘스탠다드 석유회사’를 만든 3총사는 바로 록펠러, 플래글러, 앤드류스 세 사람이었다.
그 때 각자의 주식 보유율은 록펠러는 26.7%, 플래글러는 13.3%, 앤드류스는 13.3%였다.
이렇게 하여 플래글러는 록펠러의 사업 동업자 겸 친구가 되었다.
록펠러는 그의 회고록에서 ‘플래글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생 타잎’ 이었다고 그를 찬미했다.
사업 중에 하루에 세 번 이상 만나고 사무실도 같은 방에서 책상도 서로 붙여서 일했다. 그리고 사는 집도 같은 지역에서 서로 벽이 붙어 있는 이웃에서 살았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 있어 서로 상의하려면 5분 안에 만나서 결정할 만큼 두 사람은 불가분의 절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11년에 반독점 금지법에 걸려서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해체되고 34개의 자회사로 각각 분리되었다. 그 후에 뉴저지 주에 분리되어 세운 지주회사격인 뉴저지 〈스탠다드 석유회사〉(Standard Oil Trust)를 주로 플래글러가 책임지고 운영하였다.
1911년부터 록펠러와 플래글러는 자산을 분산시켜 철도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때 플래글러는 석유사업에서 관심을 돌려서 플로리다 본토와 ‘키 웨스트’ 섬까지 연결하는 철도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 때 만든 회사가 〈플로리다 동해안 철도회사〉이다. 그리고 그는 플로리다와 키 웨스트 열도를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리조트 휴양지로 개발하려는 대망의 꿈을 꾸었다.
그는 생전에 플로리다의 해상 철로 건설사업을 꿈꾸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날 보고 미친 짓하고 있다고 하겠지. 그러나 연륙교가 완성되면 후세 사람들은 〈세계 제8의 불가사의〉라고 말하겠지”
플래글러는 키 섬 열도에서 43개 다리로 32개의 섬을 연결하는 해상 철로를 1912년에 완공시키고, 첫 열차를 타고 키 웨스트 종착역에서 내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특히 〈7마일 대교〉를 기차가 지날 때는 만세를 부르고 싶은 감격을 억누를 수 없어했다.
그러나 이 철로는 1935년 9월 2일 노동절 날 몰아쳐 온 허리케인으로 여러 곳이 단절되고 파괴되었다.
◆ 플래글러와 절친 관계였던 석유왕 록펠러는 누구인가?
록펠러! 그가 석유로 떼돈을 번 석유왕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더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그에 대해 살펴본다.
그는 처음에는 석유를 팔아서 떼돈을 번 세계 최고의 부자, 석유왕이었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에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베품을 몸소 실천한 자선왕이었다.
록펠러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53세에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돈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 한 토막이 있어 곁가지로 소개하며 지나간다.
록펠러는 중년부터 머리카락과 눈썹이 빠지고 몸이 초췌하게 말라가는 이상한 병에 시달렸다. 설상가상 그의 나이 55세에 이르러서는 의사로부터 이제 1년 이상을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어느 날 최후 검진을 받기 위해서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가게 되었다.
진찰 순서를 기다리는데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에 쓰인 글자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록펠러의 마음에는 전율이 일어났고,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아둥바둥 그간 돈만 벌려고 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록펠러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그 때 저만치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 원무과 직원과 어떤 여인이었다.
딸의 퇴원비 문제로 돈이 없으니 깎아달라고 옥신각신 따지고 떼를 쓰다가 결국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원무과 직원은 입원비를 완납하지 못하면 퇴원을 할 수가 없다는 주장이고, 부인은 우선 깎아주면 퇴원해서 돈을 벌어서 갚겠다는 것이었다.
록펠러는 데리고 왔던 비서를 시켜서 아무도 모르게 병원비를 대신 지불해 주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은밀하게 도왔던 그 여인의 딸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그 후에 줄곧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다시 환원한다는 생각으로 자선사업에 기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이후로 나눔의 삶을 살았던 록펠러는 자서전을 통하여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저는 그 날까지 살아오면서 그러한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를 못했다”
“저는 인생의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아 왔다. 그렇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한 가운데 살았다”
록펠러는 버리는 마음, 비우는 마음은 바로 베푸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눈을 감고 죽을 때 편안한 마음으로 죽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제일의 재벌 총수였던 이모씨는 지금 의식이 오락가락하며 병원에서 죽음의 문턱에 있는데 마지막 의식을 차린다면,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래도 더 살아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지금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할까?
33세의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으며,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 현재 재산가치로 3360억 달라, 우리나라 돈으로는 395조 원을 남기고 그는 이 세상을 빈주먹으로 떠났다.
▲세계 최고의 갑부였던 록펠러
◆ ‘키 웨스트’ 섬까지의 〈해상 고속도로〉는 누가 건설했나?
미 본토인 플로리다 남단과 ‘키 웨스트’ 섬 간을 연결시켜 주는 해상 철로는 1912년 헨리 플래글러가 〈플로리다 동해안 철도회사〉를 창립하여 완공시켰다.
1912년! 그 때 플래글러는 나이가 82세였는데 그 다음 해에 타계했다.
이 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지 3년 째였다.
또 이 해에는 미국인 처녀 선교사 ‘쉐핑’, 한국명이 ‘서평’인 선교사가 내한, 광주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했던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5년 노동절 날인 9월 2일, 시속 320Km의 강력한 허리케인에 의해 철로는 여러 곳이 단절되고 파괴되었다. 붕괴된 길이가 무려 70Km나 되었다.
이제는 자동차도 크게 보급된 자가용 시대가 되었기에 차제에 철로 복원 보다는 해상 고속도로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쏟아져 나왔다.
플로리다는 원래 16세기 초에 스페인이 먼저 이주해 와서 정착했었다.
1565년에는 미 본토에서 처음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그래서 ‘세인트 오거스틴 시티’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들 말한다. 아무튼 플로리다는 1819년에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이 땅을 사들여 미국 영토가 된 것이다.
플로리다는 스페인어로 〈꽃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 꽃의 나라는 수도가 ‘탤러해시’이며 주요 도시는 ‘마이애미’, ‘탬파’, ‘잭슨빌’, ‘올란도’ 등이다.
플로리다 주는 우리나라 한반도 전체의 85% 정도이다. 거의 한반도 크기이니까 주 치고는 큰 땅이다. 플로리다 반도에는 산이 없다. 남산 보다 낮은 105미터의 산이 하나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 언덕을 브리튼 힐(Britton Hill)이라고 부른다.
이 플로리다의 남쪽 지역은 늪지대가 많다. 키(Key) 섬들은 플로리다 남단에 열도를 형성하고 있다. 플로리다 남단 육지에서 제일 가까운 섬이 〈키 라고〉(Key Largo) 섬이다. 라고(Largo)란 스페인어인데 그 뜻은 ‘길다’, ‘오래되다’는 뜻이다. ‘키 라고’ 섬의 길이는 대략 50Km나 된다. 이 섬은 영화 〈키 라고〉로 유명세를 타서 미국 본토와 세계에 더욱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플로리다의 해상 고속도로는 32개의 섬에 43개의 다리들로 연결 되어 있다. 플로리다 남단에서 자동차로 가면, 첫 섬이 ‘키 라고’이고 마지막 섬이 ‘키 웨스트’이다. 이 두 섬 간의 고속도로 길이는 약 100마일, 그러니까 160Km가 된다. 자동차로 두 시간은 소요되는 거리이다.
마이애미 중심부에서 ‘키 웨스트’까지는 178마일이다. 그러니까 285Km가 되는 셈이다. 자동차로 빨리 달리면 3시간 반이고, 교통이 붐비면 4시간은 잡아야 한다.
해상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면 마치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이고 어떤 때는 하늘을 달리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멋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다.
이 해상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섬마다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섬 이름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눈 앞으로 다가오는 섬들의 이름표인 사인판을 읽기에 바쁘다. 섬이 30여개가 넘으니까 섬 이름도 다 외우기가 힘이 들 정도이다.
영어로 다 외울 수가 없어 우리말로, 때로는 한자로 번역이나 작명을 장난삼아 해 보며 고속도로를 달려갔다.
◆ 그 때 생각나는 대로 지었던 작명들이다,
-. 키 라고(Key Largo) --- 뭐라고? 열쇠 섬
-. 써머랜드(Summerland Key) --- 하지도
-. 미들 토치 키(Middle Torch Key) --- 중 횃불섬
-. 빅 파인 키(big Pine Key) --- 대송도
-. 노 네임 키(No Name Key) --- 무명도
-. 마라톤 키(Marathon Key) --- 마라손도
-. 더크 키(Duck Key) --- 오리섬
-. 롱 키(Long Key) --- 긴 섬, 장도
-. 로워 마라톤(Lower Marathon) --- 저 마라손도
-. 플랜테이션 키(Plantation Key) --- 농장섬
-. 나이츠 키(Knight’s Key) --- 기사님 섬
-. 리틀 더크 키(Little Duck Key) --- 작은 오리 섬
-. 키 웨스트(Key West) --- 관서도(열쇠 서도)
마이애미 다운타운에서 ‘키 웨스트’ 섬까지의 거리는 약 150마일이 된다. 이 거리는 240Km에 해당된다. 키 웨스트 시티의 현 인구는 약 3만명이라 한다.
미국의 US-1번 하이웨이가 바로 ‘키 웨스트’에서 시작된다. 특히 US-1번 하이웨이에서 키 웨스트 - 플로리다 육지 남단까지의 고속도로가 바로 〈플로리다 해상 고속도로〉이다. 이 고속도로는 1938년 3월에 완공되었다.
1912년에 헨리 플래글러가 동해안 철도회사를 만들어서 당초에는 ‘해상 철도’가 있었는데, 1935년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으로 여러 곳의 철로가 단절되고 일부 다리는 붕괴되었다. 다시 철로 복구 여부를 두고 한 때 논쟁이 있었다.
1930년대는 자가용 시대가 도래하여 차제에 별도로 자동차용 ‘해상 고속도로’를 철로 길 옆에 건설하게 되었다. 게다가 플로리다에 토지 투기 붐이 일었는데 ‘키 열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건설 공사는 플로리다 주 정부가 맡아서 했다. 주 정부는 이 신축공사를 감독하고 추진시키는 기구를 만들었다. 일종의 해상도로 및 교량 건설 본부를 만들었다(Overseas Road and Toll Bridge District).
이 건설 본부는 42개 다리와 ‘키 웨스트’와 플로리다 육지 남단까지 총 연육교 길이가 113마일(180Km)인 차도를 신축했다.
주 정부는 플래글러가 창설했던 〈동해안 철도회사〉로부터 이미 건설되어 있는 철도의 소유권 및 통행권을 64만 달라를 주고 양도를 받아 두었다. 그래서 자동차 전용 신축 〈해상 고속도로〉를 건축하게 되었다.
이 신축 〈해상 고속도로〉는 구간별 4번의 공기를 두고 준공시켜 1892년에 완공하고 그 해에 자동차 도로가 개통되었다.
◆ 42개 연육교 중에서 가장 긴 〈7마일 다리〉(7 Mile Bridge)
플로리다 해상 고속도의 42개 다리 중에서 가장 긴 다리가 마라톤 시의〈리틀 다크 키〉(Duck Key) 섬에서 〈나이트스 키〉(Knight’s Key)를 잇는 다리이다. 바로 그 다리가 〈7마일 다리〉 또는 〈7마일 대교〉라 한다.
이 다리는 정확히 6.79마일인데 7마일로 간주해서 그렇게 부른다. 이 길이는 약 11Km에 해당된다. 이 다리는 현재 미국에서 제일 긴 다리이다.
▲플로리다 키 열도 〈해상 고속도로〉(Overseas Highway)
우리나라가 2009년에 건설한 인천대교는 길이가 18Km이다.
길이에서는 우리 것이 7Km 더 길다. 마일로는 11마일이다. 마일로는 4마일 더 길다.
미국인들이 〈세븐 마일 브릿지〉 자랑하면 우리도 〈일레븐 마일 브릿지〉를 자랑해 주자! 그러나 미국과 우리가 서로 누구의 것이 롱 다리냐고 따질 때가 아니다.
중국은 최근에 무려 64Km나 되는 〈단양 쿤샤대교〉라는 롱(long)- 롱(long) ~ 긴 다리를 2010년에 건설해 놓았다. 물론 이 다리는 자동차 도로가 아니고 고속기차용 철로 다리이다.
우리 고장 고흥과 여수에도 11개 다리를 잇는 연육교가 지금 건설 중이다. 연장 길이가 18.4Km가 된다. 오는 2020년을 완공 목표로 현재 건설 중이다. 아마도 한국판 축소형 플로리다 〈해상 고속도로〉의 풍광 과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보며 운전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 세계 까지는 몰라도 아시아권에서는 유명 관광코스나 드라이브 코스가 될 것이다.
▲한국판 〈해상 고속도로〉(고흥-여수 간 연육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