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다(2023) / 김민홍 제6시집(3)
16) 티파니에서 아침을
추억을 소환하려고 그 영화를 본 것은 아니야. 심야에 우연히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삼십여 년 만에 다시 본 오드리 햅번 주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나는 이 영화 같은 추억은 없어. 삼십여 년 전 뉴욕 여행 중에서도 나는 카페 <티파니>를 찾을 수 없었지. 뉴욕 지하철 계단을 내리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덩치 큰 흑인 노숙자들의 노려보는 듯한 눈빛에 괜히 으스스해져서 지하철 타기를 포기했던 기억만 생생하지.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시방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야. 간밤에 본 오드리 햅번의 예쁘고 날씬한 모습과 사망하기 직전까지 마더 테레사를 닮은 얼굴로 지구 오지를 찾아 봉사활동을 하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기 때문도 아니야. 나는 한 번도 봉사활동을 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뻔하지. 나는 끝내 <티파니>에서 연인과 함께는커녕 혼자라도 아침 먹을 일은 없을 거야. 그저 동네 산책길 조그만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그 카페에 꽂혀 있는 노자의 <도덕경> 몇 페이지 읽다 접어둔 곳을 찾아 다시 몇 페이지 읽다 돌아오겠지.
17) 양미리
사람 사는 냄새 시끌벅적하고
적당히 복잡한 재래시장 모퉁이
친구 어머니 노점, 두름에 꾀어있던
양미리 두어 마리 몰래 빼 온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와
연탄불에 구워 먹던,
노랗게 알이 슨 양미리
시장 막다른 골목 끝에 있던
친구 집 개에 물려
한동안 맞으러 다니던 뼈 주사의 공포
광견병이 무서운 시절이었지
눈 오는 날이면
만삭인 배를 내밀고
산발한 머리 출렁이며 시장을 어슬렁거리던
눈매가 순한, 벙어리 아줌마
세밑 관례처럼 재래시장에 가면
유년의 문 저쪽
노점 좌판에서 세 아들 모두 대학 보낸
친구의 홀어머니 왜소한 어깨가
거대한 산처럼 떠오르곤 한다.
18) 그 눈빛 1
익숙한 눈빛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는 적막
매일매일 은밀히 꺼내보았던
그 눈빛
오늘은 12월 칼바람 부는
재래시장 입구에서
아들보다 훨씬 젊은 얼굴
당신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길을 잃고 맹하니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얼른 시선을 거두었지요
혹시, 늙스구레한 치한으로 보일까 해서
참 뒤숭숭한 세상에
아직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19) 특별시민
신산한 꿈에 시달리다 잠이 깨곤 한다
꿈속의 낯선 주차장에서 분실한 자동차를 찾아 헤맸다
꿈속에서 잃어버리는 꿈
망가진 꿈속을 내가 걷고 있었다
박근혜게이트 이후로
나는 티브이 뉴스를 보지 않기로 했다
수십 년째 습관적으로 읽는
조간신문도 <오늘의 운세>란만 읽는다
구겨진 흔적도 없이 버려지는 신문이 아깝다
신문 구독료라도 줄여 볼까
이 시대의 서울특별시민으로 산다는 것
끊임없는 악몽에 시달리는 일
심야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 최민식 주연의 영화
<특별시민>을 보았다.
20) 틈만 나면
그의 절망 속을 헤맸지
그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우울과
나의 천박한 우울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확연하게 보일 때쯤 그의 절망에서 걸어 나와
소문 따라 랭보를 읽었지
내 체질은 아니더군
소문만큼 보들레르, 릴케, 발레리, 말라르메,
엘리엇, 휠더린 등도 재미있진 않았어
원문으로 읽을 능력이 없기 때문일거야
이들이 지루해질 때쯤
네루다와 쉼보르스카가 날 매료시켰지
그리고 눈치채기 시작했어
내 문체가 자꾸 번역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그 후 한동안 번역시는 읽지 않았네
대신, 팝, 블루스, 재즈의 가사들을 열심히 들었지
편하게 귀에 들어올 때까지
내가 공부한 외국어는 이것들이 전부야
요즘도 틈만 나면
기타 들고 흘러간 이 곡들을 부르거나
연주하길 좋아한다네
별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지만
별로 읽어주는 사람이 없는 내 詩처럼
21) 詩, 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
어딜 가나 널브러져 있는 시간 들
을 줍는다, 내 것이 아닌 것들,
당신 것도 아닌 것들, 그래,
누구의 것도 아닌 널브러진 골목들
을 내가 걷는다, 내 것이 아닌 시간,
골목이 걷는다, 물론 당신 것도 아닌 골목
어딜 가나 실눈 뜨고 째려보는 시간
그래, 마음껏 노려보거라, 내 것이 아닌 절망아
물론 당신 것도 아닌, 끝내 당신 것이라고
우기는 기쁨아, 우겨라, 마음 가는 대로
詩도 아닌 것들
자꾸 시라고 우겨라
어딜 가나 널브러진 시, 언어, 부러진 문법
어긋난 사랑, 과잉된 시 낭송, 과부하(過負荷) 걸린 슬픔
시가 생긴 이래, 시만 써서 밥 먹고 산 인류는
없었다, 몇몇 스타 시인 말고는
막노동만 해서 생계를 이어온 시인
을 알고 있다 그의 이름만 알고 있다
오늘도 널브러진 시간 들이
서점에도 못 가고 버려진다,
한 번도 읽힌 적 없는
시간이 배설한 시간, 시를 주우며
내가 걷는다, 허리가 아프다,
아픈 것도 시시한 일,
詩, 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
22) 메타포
나는 시(詩)를 가르쳤지,
단지, 시란 말만 좋아했던 그에게.
난 알레고리(allegory)에 대해 설명했지,
은유(隱喩)란 단어 보다
메타포(metaphor)를 선호하던 그에게.
오늘은 가을비 내리고.
비가 환기하는 은유에 대해 말했지
비는 이제 너무 낡은 메타포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삼십 년 넘게
시를 가르쳤지만
시를 쓰는 제자를 두진 못했지.
오늘 가을비 내리고
나는 마지막 수업을 했지,
분명 시 읽기보다는
영화를 보거나 컴퓨터, 혹은
당구를 치는 걸 더 좋아하는 그에게.
영화를 보면서 혹은 당구를 치면서
또는 컴퓨터에 의지해서 시를 써도 된다고.
그리고 나는 드디어
나의 지루한 시 수업을 접기로 했지.
그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궁금하진 않았지.
23) 설렁탕과 칼국수
퇴직 후
설렁설렁 너무 쉽게 늙어간다고
그래서 요즘은
설렁탕은 안 사 먹는다고
농담처럼 자네가 한 말이 생각나네
점심 무렵,
자네 단골 설렁탕집 앞을 지나다 보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
여전하더군, 그곳도 여전하신가!
자네도 알다시피
칼국수는 내가 참 좋아하는 음식
더 살고 싶으면 절대 먹지 말라는
주치의의 말에 시달리며 몰래 사 먹곤 하는데
얼마 전 삼십 년 단골 칼국수 집 주인이
그의 아들로 세대교체가 된 후
국물도 소금기가 많이 빠졌다네
아무래도 내 당 수치도 고려하는 모양일세
그러고 보니 종업원들도 손님들도
아주 싱겁게
세대교체가 되었더군!
24)생(生)의 오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수시로
시달리고 전혀 알 수 없는 목소리의
낯선 전화에도 시달리고 평생 시 쓰는 일에
시달리다 생을 마친 스승의 시와 시론에
시달리고 아무렇지 않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시달리고 다시 별 내용 없는 불면에
시달리고 상용하는 약을 먹기 위해 식욕이 없어도
밥을 먹고 폭우로 폐허가 된 자리에
아무 일 없었던 듯 햇살 눈부시게 내리는
생(生)의 오후,
예약해 놓은 당신의 시 전집을 찾기 위해
수유리 교보문고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25) 횡성호 3월
바람을 끌고
네가 걸어왔지
걸음마다 투명하게
호수가 깨어났어
詩가 되지 못한 지난 겨울의
불면(不眠)을 지우며
찰라와 찰라 사이를
느리게 햇살이 걸어왔지
조금 추웠지만 좋았어
그래, 좋았어,
네가 와준 것만으로도
아직 시린 손은 주머니에 넣고
햇살과 바람의
음계를 밟으며 나도 걸었지
소문처럼 수런거리는
횡성호의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