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침묵은 금이 아니다.
누가 침묵을 금이라고 했던가.......
그 며칠간 계속되었던 동료들의 침묵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사람 속을 뒤집는 희한한 고문이었다.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었다.
오해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결코 내가 먼저 해명을 할 수 없었던 오해.......
상대방이 해명할 빌미를 줄 때라야만
풀 수 있었던 오해.......
명백한 과유불급.
동료들의 지나친 배려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았다.
15여 년 전 11월 17일.
대학입학 수학능력 시험일에
우리 부부는 모처럼 청도 운문사로 나들이를 나섰다.
54세.
나이가 많다하여 뜻밖에도
수능시험감독관 차출에서 제외되었다.
하루 종일 서서 감독해야하는
중노동을 면한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나이가 많다고 면제되고 보니 기분이 묘했다.
씁쓸한 기분도 달랠 겸
평일의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브는
무르익은 만추의 풍광과 더불어 환상적이었다.
운문사 입구 매표소를 지나서
주차장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가는데
앞에서 가는 한 사람의 걸음걸이가
너무 눈에 익어 차창을 내려서 보니
바로 같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깜짝 놀라 여기는 웬 일이냐고 했더니
그 선생님은 차안의 집사람을 한번 힐끗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턱짓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앞에는 같은 학교 여선생님들과 남선생님들이
무리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전부 3학년 담임들이었다.
새벽 일찍 수능고사장에 들러서
수험생들인 본교 아이들을 격려해주고
3학년 담임들만의 운문사 나들이를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3학년 담임을 맡았기 때문에
수능감독관 차출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어머 선생님, 사모님하고 사이좋게 나들이 오셨네요?’
당연히 이런 인사말을 기대한 나는,
그러나 마치 빚쟁이를 피하는 듯한
동료들을 보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 부부에게
그저 예의바른 목례만 던지고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한참만에야 나는 동료교사들의
의문스런 행동의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 부부사이를
불륜의 관계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런 오해는 무리가 아니었다.
워낙 수줍음이 많은 집사람은
남편의 직장 동료들을 보자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돌려버렸고
한 번도 집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외면하는 집사람의 태도에서
엉뚱한 상상을 한 것이었다.
그 날 운문사 경내에서는 기묘한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서 집사람과 함께 드라이브 나왔노라고
해명하기 위해 선생님들 곁으로 다가가면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
나의 곤란한 처지를 안심시켜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급기야는 차라리 불륜이라 치고
'선생님, 혼자만 재미 보시지 말고 우리도 좀..........'
하는 식으로 수작이라도 걸어오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묘한 침묵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학교에서 마주친 선생님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선생님, 어제 재미 좋았습니까?’라고
놀려대는 인사말이라도 건네주면 좋으련만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 아닌가?
마치 ‘어제 운문사에서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주마’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어제 함께 갔던 여인은 집사람입니다’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요? 누가 의심이라도 한답디까?’
라고 되받기라도 하면 더 우스운 꼴이 아닌가........
사태의 해결은 침묵하는 쪽에서
그 놈의 지긋지긋한 침묵을 먼저 깨뜨려주어야 하였다.
‘선생님,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때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신지요?’ 는 아니더라도
‘어제 구경 잘 하셨습니까?’ 라든가,
하다못해 ‘평일은 차가 밀리지 않아서
구경 다니기가 훨씬 수월하지요?’ 라고
침묵을 깨뜨려줘야만 해명을 할 텐데,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으니........
며칠 뒤 그날 현장(?)에 없었던
한 여교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였다.
이렇고 저렇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동료들이
원망스럽다........
내심으론 그 여교사의 입을 통해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내 얘기를 듣고 난 여교사 왈,
'그건 평소 그럴 소지가 다분해 보인 샘 자업자득 아녜요?'
그야말로 혹을 떼려다 도로 갖다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