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 (論語集注) - 1 - 학이(學而) - ④ |
1 | 曾子曰 吾日三省吾身하나니 爲人謀而不忠乎아 與朋友交而不信乎아 傳不習乎이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니 남을 위해 일을 꾸미면서 성실하지 못했는가? 벗들과 사귀면서 미쁘지 않았는가?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라고 했다.
○ 曾子, 孔子弟子, 名參, 字子輿. 盡己之謂忠. 증자는 공자님의 제자로서 이름은 참이고, 자는 자여다. 자신을 다하는 것을 일컬어 충이라고 말한다.
新安陳氏曰 程伯子云 發己自盡謂忠 循物無違謂信 大學章句已采之 集註乃采程叔子之說 勿齋程氏謂 叔子之言爲切 신안진씨가 말하길, “정백자(정호, 명도선생)는 자신을 드러내어 스스로를 다하는 것을 일컬어 忠이라 하고, 외물을 따라 어긋남이 없는 것을 일컬어 信이라 한다고 말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이미 이를 채택하였지만, 집주에서는 도리어 정숙자(정이, 정이천)의 학설을 채택하였다. 물재정씨는 정숙자의 말이 더욱 적절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朱子曰 忠是就心上說 信是就事上說 주자가 말하길, “忠은 마음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고, 信은 일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盡己之心而無隱 所謂忠也 以出乎內者言也 以事之實而無違 所謂信也 以驗乎外者言也 然未有忠而不信 未有信而不出於忠者 表裏之謂也 자기 마음을 다하면서 숨김이 없는 것은 이른바 忠이라는 것인데,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써 말한 것이다. 일의 실제로써 하되 어긋남이 없는 것은 이른바 信이라는 것인데, 밖에서 징험되는 것으로써 말한 것이다. 그러나 忠이면서 信하지 못한 것도 일찍이 없었고, 信이면서 忠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일찍이 없었으니, (그것이) 表裏의 관계임을 말한 것이다.
發於心而自盡 則爲忠 驗於理而無違 則爲信 忠是信之本 信是忠之發 마음에서 피어나 스스로를 다하는 것은 忠이 되고, 이치에 징험되어 어긋남이 없는 것은 信이 되니, 忠은 信의 근본이고, 信은 忠의 발현이다.
忠信只是一事 而相爲內外始終本末 有於己爲忠 見於物爲信 忠과 信은 단지 하나의 일이로되 서로 內外, 始終, 本末이 되니, 자기에게 있는 것은 忠이 되고, 외물에 발현된 것은 信이 된다.
問曾子忠信却於外面理會 曰 此是修辭立其誠之意 曰 莫是內面工夫已到 曰 內外只是一理 事雖見於外而實在內 告子義外 便錯了 누군가 묻기를, “증자는 忠과 信을 도리어 외면에서 이해한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이것은 언사를 닦아서 그 정성을 세운다는 뜻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내면의 공부가 이미 (일정수준에) 도달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안과 밖은 그저 하나의 이치일 따름이니, 일이 비록 밖으로 드러나지만, 그 실질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에서) 고자가 義는 밖에 있는 것이라고 한 말은 틀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陳氏曰 從內面發出 無一毫不盡是忠 發出外者皆以實是信 진씨가 말하길, “내면을 따라 발현되어 나오되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忠이고, 밖으로 발현되어 나온 것들이 모두 진실인 것은 信이다.”라고 하였다. |
2 | ○ 傳, 謂受之於師. 習, 謂熟之於己. 曾子以此三者日省其身, 有則改之, 無則加勉, 其自治誠切如此, 可謂得爲學之本矣. 而三者之序, 則又以忠信爲傳習之本也. 전이란 스승에게서 받은 것을 말한다. 습이란 자기에게 익숙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증자는 이 세 가지로써 매일 그 몸을 살폈(성찰)는데,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고치고, 없으면 더욱 열심히 하였다. 그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성실함과 간절함이 이와 같았으니, 학문을 하는 근본을 터득하였다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3가지의 순서에 관해서라면, 또한 충신(忠信)을 전습(傳習)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問曾子三省無非忠信學習之事 然人之一身大倫之目 自爲人謀交朋友之外 得無猶有在所省乎 朱子曰 曾子也 不是截然不省別底 只是見得此三事上 實有纖毫未到處 其他固不可不自省 特此三事較急耳 누군가 묻기를, “증자가 세 가지로 반성한다는 것에는 忠과 信, 그리고 學習의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신과 대륜의 항목에는 저절로 남을 위하여 도모하고 벗을 사귀는 일 이외에도 여전히 성찰해야 할 바가 있음이 없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증자가 다른 것은 아예 성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 가지 일 위에서 실제로 조금이라도 이르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것도 본래 스스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이 세 가지 일이 더 급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曾子三省 看來是當下便省得 纔有不是處 便改 不是事過後 方始去改 省了却休也 只是合下省得 便與他改 주자가 말하길, “증자가 세 가지로 성찰한 것은, 내가 보기에 그 당장(當下)에 바로 성찰하여 조금이라도 옳지 않은 곳이 있다면, 곧바로 고치는 것이지, 일이 지난 후에 비로소 가서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성찰했으면서도 오히려 그만두고 만 것이다. 그저 본래(合下) 성찰하였다면, 곧바로 그것과 더불어 고쳐야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易蹇卦大象曰 山上有水蹇 君子以反身修德 程傳曰 君子遇難蹇 必自省於身 有失而致之乎 有所未善 則改之 無慊於心 則加勉 集註二句之所本 蓋在此 有則改之 易知也 無則加勉 非深知曾子之心 不及此 使自省而無失 只如此而已 則三失將又生矣 豈日省勉勉不已之誠心乎 無則加勉四字 可補本文意之所未盡 신안진씨가 말하길, “주역 건괘 대상에 이르길, ‘산 위에 물이 있는 형국이니 절름발이로다! 군자는 이로써 제 몸에 돌이켜 덕을 닦는다.’고 하였고, 程傳(정이천의 주역 전)에 이르길, ‘군자가 난을 당하여 절름발이처럼 되는 상황이면, 반드시 제 몸에 스스로 살펴서,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생각하여, 아직 善하지 않은 바가 있다면 이를 고치고, 마음에 부족한 바가 없어도 더욱 노력한다.’고 하였다. 집주의 두 구절이 본받은 곳은 아마도 여기일 것이다. 잘못이 있으면 고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나, 잘못이 없으면 더욱 노력한다는 것은 증자의 마음을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성찰하여 잘못이 없다고 하여, 그저 이와 같이 할 뿐이라면, 세 가지 잘못은 장차 다시 생겨날 것이다. 이 어찌 날로 성찰하여 힘쓰고 노력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정성스러운 마음이 아닌가? 無則加勉이란 4글자는 본문의 뜻이 미진한 곳을 보완해 줄 수 있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謀不忠 則欺於人 言不信 則欺於友 傳不習 則欺於師 주자가 말하길, “도모함에 忠하지 않으면 남을 속이는 것이고, 말을 함에 信實하지 않으면 벗을 속이는 것이며, 전수한 바를 익히지 않으면 스승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省固非聖人之事 然是曾子晩年進德工夫 蓋微有這些子 査滓去未盡耳 在學者 則當隨事省察 非但此三者而已 세 가지로 반성한다는 것은 본래 성인의 일이 아니지만, 이는 증자가 만년에 덕을 증진하던 공부였다. 대체로 이러한 작은 것(些子)들이 조금이라도 있기만 하면, 渣滓(찌꺼기)가 다 제거된 것은 아닐 따름이다.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는 마땅히 일에 따라 성찰해야 하니, 단지 이 세 가지일 뿐만이 아니다.
爲人謀時 須竭盡自己之心 這箇便是忠 問如此則忠是箇待人底道理 曰 且如自家事親有不盡處 亦是不忠 남을 위하여 도모할 때는 반드시 자기의 마음을 다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忠이다. 누군가 묻기를, “이와 같다면 忠이란 사람을 대하는 도리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또한 만약 자기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다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이 역시 不忠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爲他人謀一件事 須盡自家伎倆 與他思量 便盡己之心 不得鹵莽滅裂 姑爲他謀 如烏喙 是殺人之藥 須向他道是殺人 不得只說道有毒 如火 須向他道會焚灼人 不得說道只是熱 타인을 위하여 한 건의 일을 도모함에 있어, 모름지기 자신의 기량을 다해야 한다. 남과 더불어 생각하고 헤아릴 때는 곧 자기의 마음을 다해야 하지, 거칠고(鹵莽) 엉성(滅裂)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선 타인을 위하여 도모함에 있어, 만약 烏喙(오훼)라면 사람을 죽이는 약인데, 모름지기 그를 향해 이것은 사람을 죽인다고 말해야 하지, 단지 독이 있다고만 말해서는 안 되고, 만약 불이라면, 모름지기 그를 향해 사람을 태워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해야 하지, 단지 뜨겁다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爲人謀而不忠 是主一事說 朋友交而不信是汎說 人自爲謀必盡己心 到得爲他人謀 便不仔細 致悞他事 便是不忠 若爲人謀事 一似爲己 爲盡心 남을 위하여 도모하면서 不忠하다는 것은 하나의 일에 주안점을 두고 말한 것이고, 친구를 사귀면서 미덥지 못하다는 것은 넓게(汎然히) 말한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위하여 도모할 적에는 반드시 제 마음을 다하다가, 타인을 위하여 도모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면, 곧 세밀하지 않아서 타인의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면, 이는 곧 不忠한 것이다. 만약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할 적에도, 한결같이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한다면, 마음을 다하는 것이 된다.
問爲人謀交朋友是應事接物之時 若未爲人謀未交朋友之時 所謂忠信便如何做工夫 曰程子謂舜雞鳴而起 孜孜爲善 若未接物時 如何爲善 只是主於敬 此亦只是存養此心 在這裏照管 勿差失 便是戒謹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不動而敬不言而信處 누군가 묻기를, “남을 위하여 도모하고 벗을 사귀는 것은 일에 응하고 외물에 접하는 때인데, 만약 아직 남을 위하여 도모하지 않고 벗을 사귀지 않는 때라면, 이른바 忠과 信이라는 것은 곧 어떻게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정자가 이르길, ‘순임금은 닭이 울면 일어나 부지런히 선을 행하였는데, 만약 외물에 아직 접할 때가 아니라면, 어떻게 선을 행하였는가? 그저 敬에 주안점을 두었을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역시 그저 이러한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는 것일 따름이니, 여기에서 이러한 例에 따라 관리하여 어긋나고 잘못되지 않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신이 보지 못한 바에도 경계하고 삼가는 것이고, 자신이 듣지 못한 바에도 두려워하는 것이며,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해주고 말하지 않아도 믿어주는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爲人謀則必欲實盡其心 交朋友則必欲實踐其言 講學於師則必欲實用其力 蓋曾子天資醇厚志學懇篤 其於大學旣推明誠意之旨而傳之子思 又斷以誠身之義 至其自省 又皆一本乎誠 蓋不極乎誠則凡所作爲無非苟簡滅裂 是豈足以盡人事之當然 而合天理之本然也哉 면재황씨가 말하길, “남을 위하여 도모하면 반드시 그 마음을 실제로 다하고자 하고, 벗을 사귀면 반드시 그 말을 실천하고자 하며, 스승에게서 배우면 반드시 그 힘을 실제로 쓰고자 하였으니, 대체로 증자는 천부적 자질이 순후하고 학문에 뜻을 둠이 간절하고 독실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증자는 대학에서 이미 誠意(뜻을 정성스럽게 함)의 뜻을 미루어 밝혔고, 이를 자사에게 전하였으며, 다시 몸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뜻을 단정함으로써, 스스로 성찰함에 이르면, 또한 모두 하나같이 정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무릇 행하는 바가 구차하고 간단하며 엉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그가 어찌 족히 사람의 일 중에 마땅히 행할 바를 다하면서도 天理의 본래 그러함에 부합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
3 | ○ 尹氏曰: “曾子守約, 故動必求諸身.” 윤씨가 말하길, “증자는 지킴이 요약되었기에, 행동함에는 반드시 자신의 몸에서 찾아 구하였다.” 고 말했다.
謝氏曰: “諸子之學, 皆出於聖人, 其後愈遠而愈失其眞. 獨曾子之學, 專用心於內, 故傳之無弊, 觀於子思ㆍ孟子可見矣. 惜乎! 其嘉言善行, 不盡傳於世也. 其幸存而未泯者, 學者其可不盡心乎!” 사씨가 말하길, “뭇 제자들의 학문은 모두 성인에게서 나왔지만, 그후 멀어질수록(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 참된 뜻(진의)을 잃게 되었다. 유독 증자의 학문은 오로지 안에다 마음을 썼기 때문에, 그 전수한 것에 폐단이 없었다. 이는 자사와 맹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애석하구나! 그 좋은 말과 훌륭한 행실이 세상에 전부 다 전해지지 않았으니! 그중에서 다행히 보존되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배우는 사람이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廣平游氏曰 此特曾子之誠身者而已 若夫學者之所省 又不止此 事親有不足於孝 事長有不足於敬歟 行或愧於心而言或浮於行歟 慾有所未窒而忿有所未懲歟 推是類而日省之 則曾子之誠身 庶乎可以跂及矣 古之人所謂夜以計過無憾而後卽安者 亦曾子之意 광평유씨가 말하길, “이것은 그저 증자가 자기 몸을 정성스럽게 한 것일 따름이다. 만약 무릇 배우는 자가 살펴야 할 것이라면, 또한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에 부족함이 있거나, 어른을 섬김에 있어 공경에 부족함이 있었는가? 행동한 것이 혹시라도 마음에 부끄럽고, 말한 것을 혹여 행동에 옮기지 않았는가? 욕심을 미처 막지 못한 곳이 있거나, 분노를 미처 다스리지 못한 곳이 있었는가? 이렇게 비슷한 것을 미루어서 날마다 그것을 성찰한다면, 증자의 誠身(제 몸을 정성스럽게 함)에는 거의 까치발을 딛고서 간신히 미칠 수가 있을 것이다. 옛사람이 말했던 이른바 ‘밤에 잘못을 따져서 아쉬움이 없어진 이후에 곧 편안해 한다.’는 것도 역시 증자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問三省忠信 是聞一貫之後 抑未聞之前 朱子曰 不見得 然未一貫前 也要得忠信 旣一貫後 也要忠信 此是徹頭徹尾底 누군가 묻기를, “三省의 忠과 信의 말은 一以貫之를 들은 후입니까? 아니면 듣기 전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一以貫之를 듣기 전이라고 해도, 忠과 信을 터득해야 하고, 一以貫之를 이미 들은 후라고 해도, 忠과 信은 필요한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철두철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曾子三省之事 何故只就接物上做工夫 南軒張氏曰 若是他人合省之 事更多 在曾子自省察 則只有此三者 當省也 不是下爲己篤實工夫 不能如此 누군가 묻기를, “증자의 三省의 일은 무슨 이유로 그저 외물에 접하는 위로 나아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남헌장씨가 말하길, “만약 타인과 합하여 성찰한다면, 일은 더욱 많아질 것이나, 증자가 스스로 성찰함에 있어서는, 그저 이 세 가지를 마땅히 성찰해야 할 뿐이었다. 자신을 위하여 독실하게 공부하는(下工夫: 공부하다, 공력을 쏟다) 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曾子早悟一貫之旨 晩加三省之功 愈可見其至誠不已之學 蓋其所省者 無非推己及人 因人反己之學 卽其所謂忠恕者也 或以爲一唯在三省後 非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증자는 일찍이 一以貫之의 취지를 깨달았고, 만년에 三省의 공부를 더하였으니, 더더욱 그 至誠이 그치지 않는 학문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대체로 그가 성찰했던 것에는 推己及人(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침)이나 因人反己(남으로 인해 자신을 돌이킴)의 학문이 아님이 없었으니, 곧 이른바 忠恕라고 일컫는 것들이다. 혹자는 一以貫之가 三省의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틀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吾道一貫章 及孟子時雨化之章 朱子訓釋 非不明白謂曾子於聖人泛應曲當處 已隨事精察而力行之 但未知其體之一耳 夫子知其眞積力久 將有所得 是以 呼而告之 曾子果能默契其旨 卽應之 速而無疑 孟子謂 君子之所以敎者五 其一卽有如時雨化之 如農人種植之功 其力已盡 惟待時雨之至 卽浡然奮發而收成 朱子以孔子之於顔曾當之 參二章 以觀三省章 此正是隨察力行處 其悟一貫之旨而一唯 正是人力已盡而時雨化之之時 如何 反以悟一貫爲早年事 加三省爲晩年事乎 신안진씨가 말하길, “내 道는 一以貫之한다는 장과 맹자의 때 맞춰 내리는 비가 변화시킨다는 장에 있어서, 주자가 뜻풀이한 것이 명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증자가 성인의 泛應曲當(널리 대응하고 세세한 것도 합당하게 함)의 부분에 대하여 이미 일을 따라 정밀하게 살펴서 힘써 행하고 있었지만, 다만 그 體가 하나임을 미처 알지 못하였을 뿐인데, 공자께서 그가 참된 것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 하여 장차 터득할 바가 있을 것임을 알고서, 이런 까닭으로 그를 불러서 알려주자, 증자가 과연 능히 묵묵하게 그 뜻을 알아듣고서 즉시 응답하기를 신속하게 하되 아무런 의문도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맹자는 말하길, 군자가 가르치는 것에는 5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곧바로 때맞춰 내리는 비가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예컨대 농부가 씨 뿌려 심는 功에 그 힘을 이미 다 쏟은 경우, 오직 때에 맞는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면, 농작물이 갑자기 부쩍 자라나서 성과물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다. 주자는 공자의 안회와 증자에 대한 관계를 그러한 경우에 해당시켰으니, 이 2개의 장을 참고하여 三省장을 살펴본다면, 여기는 바로 일에 따라 잘 살펴서 힘써 행한다는 곳이고, 증자가 一以貫之를 깨달아서 한 번에 ‘예(唯)’라고 대답한 것은, 바로 사람의 노력을 이미 다한 상태에서 때에 맞는 비가 내려 그것을 변화시키는 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거꾸로 一以貫之를 깨달은 것을 초년의 일로 여기고, 三省을 더한 것을 만년의 일로 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