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말(2024) / 김민홍 제 7시집 (4)
제3부
51. 중년
일종의 모욕들이 터널처럼 지나갔다.
지나가며 허약한 신경의 핏줄들을
터뜨렸다, 순전히 허약한 신경들 때문이다.
결국, 나는 터진 핏줄들을 꿰매기 위해
시를 써 온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중년이 되어있었다.
52. 배가 고프다
"나는 노래하리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노래"
라고 노래했던 가수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곡명도 잊어버렸다
기억하려 할수록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신 편지하지 않겠다"
라고 쓴 시인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멕시코 시인이었던가 페루 시인이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경도인지장애라고?
하지만 잊어버릴 수 있어
버틸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시방 나는
바람만 쌩쌩 부는
겨울 강가에 혼자 서 있다
아직 배가 고프다
53. 아비의 집
흐르고 흐르다 잠시 멈춘 곳이 다 아비의 집이다. 그러니까 아비의 집은 길 위에 있고 한 번도 한 곳에 뿌릴 내린 적이 없다. 흘러가고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마라. 슬픔은 기쁨의 다른 이름. 구태여 기뻐하지도 마라. 기쁨은 슬픔의 다른 얼굴. 나무는 나무끼리 돌멩이는 돌멩이끼리 그 안에 목숨 들을 기르고 목숨 들을 파먹고 스스로 목숨 들의 식량이 되어 새들을 기른다. 봄을 기르고 여름을 기르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스민다. 겨울 숲을 보아라. 숲이 너의 집이다. 아이야 네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뿐 . 나무는 옆의 나무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웃 숲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야 , 아비를 그리워하지 말고 어미도 그리워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땐 숲에 들거라. 웃고 싶을 땐 겨울 숲을 기억하거라.
54. 모니터
오래 앓아 온 지병인
악몽에 시달리다 잠이 깬
새벽 3시
죽은 백남준이 걸어온다
주름진 얼굴이 수십 개의
모니터에 사기처럼 투사된다
임종 직전의 인터뷰에서
무얼 제일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휠체어에 앉아서 어눌한 어조로
“연애!”라고 대답하던 그
<동물의 왕국> 배경 화면 속
해만 내리쬐는 아프리카 황토 먼지 날리며
새벽 3시 30분, 31분, 32분 -----
사자가 달려간다
인근 유선 채널에선
동물 가죽 쇼파를 팔고 있다
쇼파 있어요? 새벽을 팔고 있다
누군가가 당신을 모니터링해 팔고 있다
당신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모니터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지만 모니터 없이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도 난
일종의 달콤한 절망,
모니터에 의지해 산다
새벽 5시, 1분, 2분, 3분 ----
죽은 서정주 시인의 오래전 인터뷰,
지방색 짙은 목소리와
주름진 얼굴이 부활 중이다
55.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만났던 사람
실제 얼굴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때 읽은 만화책
<엄마 찾아 삼만 리>*처럼
사람 찾아 삼백만 리
돌고 돌아 폭삭 늙은
사람을 찾습니다.
*만화가 김종래의 만화(1960)
56. 불안에 대해
그의 말 속에는 항상
가시가 숨어 있다
조심하거라
자칫하다간 살이 찢긴다.
그의 눈빛 속에는 항상
슬픔이 묻어있다.
조심하거라.
잘못 따라가다간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는
불안한 자동차를 타고
불안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불안한 커피를 마시고
불안한 애인을 점검한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얼굴 좀 보여주라
그 얼굴에 숨어있는 불안을 꺼내
생생하게 보여주겠다.
불안은 일용할 양식
그러므로 불안을 사랑하라
사는 일은 불안한 일이다.
57. 승가사에서
승가사에 가서
부처님께
절 몇 배 드렸네
하산 길
솔숲 사이로 잠시
햇살 눈 부시고
나는 서성거렸네.
너를 보내고 돌아오던
그날 오후,
길은 좀 미끄러웠고
바람 불고 몹시 추웠지.
이젠 놓아주라고
덜컥,
노을이 걸렸네
58. 다시 그녀
다시 그녀라고 쓴다고 해서
어떤 연애를 연상하진 마시길
세상엔 그녀와 그 사내가 있고
그녀와 그 사내 사이에
다시 그녀와 그 사내가 있다
그 사이에 강아지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나무도 있고
그래, 하늘도 있고
개미로 상징되는 인생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쓰고
나는 괴롭고
나는 사랑했지만
기쁜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심각한데 당신들이 자꾸
엄살이라고 하니
정말 엄살이나 피우는
늙은이가 되고 말았다
59. 흔한 이야기
때가 되면 기울고
때가 되면 다시 일어서지
그래, 때가 문제야
흔한 이야기이지
하지만 난 이 흔한 이야기에
울고, 웃고, 흔들리고, 사랑하고,
괴로웠고, 기뻤네
이 또한 흔한 이야기이지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그대에게만은 내가
흔한 이야기로 읽히진 않길
매일 염원했다네
어리석게도!
60. 왜냐구요?
왜 자꾸 어슬렁거리냐구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왜 자꾸 변죽만 올리냐구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자꾸 목이 마르고
눈부시게 봄이 오기 때문이에요 .
61. 겨울 칸타타
내가 밟아 온 계단의 끝
피아노가 눈을 맞고 있었네.
건반을 누르며 내리는 눈
내가 들은 건 침묵의 음계.
바람이 간혹 나뭇가지에 걸려
기웃거렸네. 내가 들은 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는 적막
느닷없이 쏟아진 폭설 속
버려진 피아노와 겨울 칸타타
그리고 내가 갇혀 있었네
62. 비밀이 많군요
의지와 관계없이
내 속을 훑고 가는 바람
생각할 틈도 없이
나를 스쳐 가는 것들
내가 잡을 수 없거나
포기한 것들이
서랍 속에 그득하다
주기적으로 서랍을 비우지만
금새 가득 차는 기억들에 치여
우울했구나!
드디어 나는 서랍에 못을 친다
꽈~꽝꽝! 쾅쾅!
결코, 녹슬거나 뽑히지 않을 못,
어디 없을까?
"비밀이 많군요 "
스캔들에 민감한 그가 물었고
“세상 그리워하는 일에 시달렸을 뿐이네”
내가 대꾸를 했지만
남의 스캔들 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겠지
하지만 구태여
비밀일 것까지야 없다네
63. 단상 短想
창틈, 햇살 눈 부시다.
내 작은 서재,
커피 한 잔 놓는다.
아직 살아있구나.
더는 훼손되고 싶지 않다.
여기저기 뒹구는 외로움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다.
64. 어느 날 나는
매혹되었었지
흑백 티브이 시절
'주말의 명화'가 방영되기 직전
마음을 설레게 하던 곡
<로드리고의 아람페지오 협주곡 2악장>
곡의 제목도 작곡가도 연주자도 모르던
그때부터 나는 기타를 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로드리고는 엄두도 못 낸다네
매혹되었었지
눈매가 이쁜 이웃집 누나
아마 중학생 때쯤
말도 못 붙여 보았지만!
선천성 고질병과
갑자기 몰아닥친 스산한 시련들로
행동은 거칠고 괴팍해졌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기가 죽어 있던
청년 시절
목소리가 예쁜 목사님 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 했지
흘려듣곤 하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귀에 들어온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그 노래를 틈만 나면
<봄날은 간다>와 함께 레퍼토리 삼아 불렀지
다만,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날 매료시키던 것들이 시들해지고
툭하면 눈물이 나왔지
요즘은 음악을 들어도
시를 읽어도
노래 할 때에도
눈물이 흐르더군
늙으면 오는 홀몬 이상증세라더군
65. 후회
말과 행동 사이엔
꽃이 지고 바람 불고 비 내린다
행동과 말 사이엔
별이 뜨고 해가 뜨고 눈이 내린다
우리 사이엔
우주가 몇 개 놓여 있다
나와 나 사이에도
허물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왜 진작에 일러주는 사람은 없었는지
왜 진작에 난 그걸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
후회해도 소용없다고
책상에 놓인 낡은 스탠드가 웅얼거린다
너는 고장도 나지 않니?
내가 빈정대어 주었다
당신은 나보다도 오래 살지 못해
낡은 책상 서랍이 내게 경고했다
그래 넌 천 년 만 년 허리 휘게 살아라
내가 저주했다
스탠드와 나 사이에도
몇 광년의 거리가 있었고
매일 밤 날 조롱하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모두 들 내 서랍 속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날 조롱하고 있었구나
내가 버거워서 떠난다고
네가 보낸 편지는 내내
가시가 되었다.
66. 귀환 歸還
물고기가 돌아오고
새들이 돌아오고
죽은 줄만 알았던
마른 가지에 싹이 돋았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 할 수 있는 것은
간여하지 않은 일뿐
간여하고자 하는 인간들을
속으로 미워한 일뿐이다.
67. 좌우명
"죽을 때도 웃자"가 그의 좌우명
그는 하염없이 웃었다
웃다가 죽는 게 그의 꿈
만나면 웃고
안 만나도 그는 웃고 있었다
스무 살 이후 한 번도 그는
우울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다고 했다
그는 평생 직업을 갖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는 기꺼이 일을 했고,
돈도 잘 벌었다
다 그의 웃음 덕이라고 믿었다
그의 아내는 바람기 넘치는 그를
언제나 옹호했다
그의 아이들도 그를 좋아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다
언제나 겸손한
그의 웃음은 늘 쾌활하고 밝았다
그의 곁에 가면 모든 근심 들이
사소한 일로 변해버렸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장 영정 속에서도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68. 우동집
재혼한 그는 편안해 보였다
봄빛 완연한 날이었다
그의 전처는 아이와 함께
재혼한 백인 남편 따라 국적을 바꿨다
곧 퇴직하면, 새로 만난 아내와 함께
조그만 우동집을 낼 생각이라고
그가 빙그레 웃었다
점심 때 딱 세 시간, 우동만 파는 가게
물려받은 고향 집에
들어가 살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추억에 치여 죽을 것 같다고도 했다
미국 간 아이는 주소도 모르고
편지도 오지 않고 전화도 오지 않지만
아이가 보고 싶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그가 차릴 우동집이
절간으로 상상되었다
<우동 파는 암자>라고
간판을 내걸면 어떠냐고 내가 말했다
그는 피식 웃다가 말았다
창밖으로 햇살이 흥그러웠다
69. 마케팅
간혹, 대학자이면서
마케팅에도 능한 사람을 보면
경이롭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 주위를 아우라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
간혹, 마케팅에 능한 예술가와
마케팅에 안달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민망하다
혹시, 내 열등감, 혹은
시기, 질투의 나툼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보이지 않는 소리가 귀에 찰랑거렸다
"여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쯤 해서 결벽증도 좀 버려!"
70. 김민홍의 인생
인생의 마지막 설렘과
늙어가는 사소한 꿈조차
끝내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불현듯 밀려오네
젊은 나이부터 병 든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
음악도, 시도 상처투성이
사랑도 상처투성이
그러니까 ,
상처투성이로 늙어버린
김민홍은 평생 인생에 대한
소외감에 시달린 셈이군
끝내 공유할 수 없는!
71. 경계
아프다는 건
아직 인생이란 영화가
상연 중이라는 것
즐겁게 시청하시길
곧 영화는 끝나고
텅 빈 스크린만 남으리니
삶과 죽음의 경계도
이와 같다네
72. 믿고 싶은 거겠지
그는 그렇게 믿는다
아니, 믿고 싶은 거겠지
골치 아픈 건 질색,
말문이 막히면 내뱉는 말
"아, 몰라, 난 몰라!"
아니, 모르는 걸로 하고 싶겠지
아주 단순한 것도
취향에 안 맞으면 질색인 그
그런데 취향이란 게
어디서 온 거지?
몇몇 제자들 앞에서
가부좌를 꼿꼿이 틀고 앉아
"이제 나는 자연의 생몰(生沒) 속으로 스민다!"
말씀을 마치고 고요히 입적하셨다는
사명대사께서는 세수 67세셨다
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이승훈 시인께서는
75세에 숙환으로 적멸에 드셨다.
73. 프리 재즈free jazz
서로 어긋나는걸, 언제부턴가 나는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엔 불협화음이라는 것도 있고,
프리재즈라는 장르도 있다고
나 자신에게 우기고 있었다
물론 허튼소리다
세상과 코드를 맞추기보다
세상이 내 코드에 맞추어 주길 바랐던 게 분명해!
몇 번 프리재즈 공연을 관람했지만
한 번도 감동 받은 적 없다
내 정서가 자유롭지 못해서 그렇다
*프리재즈 free jazz: 모든 정통적인 규칙과 원칙이 피괴된 형태로, 조성이나 박자, 형식 같은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연주자의 느낌이나 감정에만 충실하여 즉흥적으로 표현해내는 재즈 음악의 한 갈래이다. 1950년대 후반에 생겨났으며, 미국 내의 인종적, 정치적 상황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성행하였다. 특히 뉴욕의 어느 흑인계 고등학교에서 음악수업이 유럽인들만의 협소한 역사에 근거할 뿐 흑인들의 삶이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음악수업 거부'라는 극한 조치를 취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본격적인 프리재즈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74.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 속엔
상처가 배어있지 ,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염불 외우듯 웅얼거리는 .
그래, 그렇고 말고
난 괜찮아!
75. 매너리즘
평생 한 소재, 한 주제만 그려 유명해진
화가가 있다.
대중의 귀에 익숙한 몇 곡으로
늙으막까지 부유하게 사는 가수도 있고,
한때 스타였던 가수가
궁핍하고 불우한 노후를 보내기도 한다.
평생 열 곡 안팍의 스탠다드 레파토리로
생계를 이어온 재즈 뮤지션도 있다.
세상이 사랑하는 이름 들 중
나는 에릭 클랩턴, 죠 카커, 쳇 베이커를
지금도 듣는다,
늘 진지하게 연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