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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박일균
<한국선수중 4대 메이저 무대에서 가장 많은 승리와 역대 최고의 세계랭킹을 수립한 선수는 누구일까. 누구나 90년대에 활약한 한국의 대표적 여자선수 박성희를 떠올리겠지만 정답은 ‘아니오’이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의 메이저 대회 우승의 날을 염원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테니스의 메이저 대회 출전 기록을 살피는데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작년 이형택 선수가 US오픈에서 선전하고 있을 당시의 인터넷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일간스포츠였는데 <(서울=연합뉴스)이승우 기자, 2000년 9월1일 14:23입력>의 글이었습니다. <한국테니스 메이저대회 도전사>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에서 엄청나게 잘못된 정보가 게시되었더군요.
4대 메이저대회에 모두 출전한 경력이 있는 이덕희 여사님이 1981년 US오픈 한번만 출전한 것으로 되어 있고 88년 호주오픈에 출전했던 김봉수 선수도 89년으로 되어있을 뿐 아니라 박성희 선수의 출전내용도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한겨레신문 레져스포츠부의 박원식기자도 2001년 5월 2일 이형택선수에 관한 기사에서 이덕희선수의 16강진출을 1982년이라고 잘못 표기했더군요.
한 두가지의 착오라면 모를까 한국테니스의 메이저대회 출전기록이 이렇게 엉성할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다른 관련기사를 열심히 뒤졌지만 제대로 기록된 것� 찾는데 실패했습니다. 특히 한국테니스의 전설적 인물인 이덕희씨에 대해서는 테니스 코리아 2001. 5월호의 <이달에 만난 사람-이덕희>이외엔 거의 소개된 기사들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덕희 선수가 한국최초이자 유일하게 WTA 투어에서 우승한 사실이 있다는 것과 그녀가 전세계랭킹 1위이자 메이저 타이틀 12회에 빛나는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을 꺽은 사실이 있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더구나 이덕희 선수의 14회에 이르는 메이저 무대 출전, 그중 24경기에서 10승(부전승 제외)을 올려 역대 한국선수중 메이저 대회 최다경기, 최다승을 이루었던 업적이 역사속에 묻혀져 더더욱 안타깝기만 합니다.
메이저 대회에서 한국선수들이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과감한 투자, 재능있는 주니어의 양성, 테니스 인구의 저변확대, 인식의 변화, 제도적 장치의 마련 등 수많은 요소가 밑받침되어야 하겠지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는 바로 잊혀졌던 한국테니스의 역사적 기록을 발굴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자라나는 주니어 선수들에게 선배들의 발자취를 거울삼아 세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우어 준다면 우리 한국테니스의 미래 또한 밝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누군가에 의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일본만해도 자국인들의 메이저대회 출전사가 정확히 정리된 것을 보고 무척 부럽더군요.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총체적인 <한국테니스의 역사>가 쓰여질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그 작은 발걸음을 시작하려 합니다. <한국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출전의 역사(메이저대회 예선출전은 제외)>는 그 작은 발걸음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2002 호주오픈을 앞두고 수행되는 이 작업은 한국선수들이 출전했던 모든 메이저 경기의 상세기록들을 국내 최초로 망라하고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던 한국선수들의 업적들을 새로이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기록들은 주로 국제 테니스연맹의 기록을 참고했음을 알려드립니다.)
1900년대초 한국에 테니스가 처음으로 소개되고 현대적 개념의 론 테니스(Lawn Tennis)가 시작된 것도 약 7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해방후 조선테니스협회가 설립되고 1948년 국제 테니스연맹에 공식 가입한 이후 1953년 조선테니스협회의 후신인 대한테니스협회가 발족되면서부터 비로소 한국테니스의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한국테니스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60년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 첫 출전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테니스의 해외원정은 30년전인 1970년대 초에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국제대회의 꽃’이라 할수 있는 4대 메이저대회에 한국테니스가 처음으로 진출한 때도 바로 70년대 초였다.
I. 70년대;한국 테니스의 전설 이덕희, 최초의 메이저 대회 도전
70년대 초에 메이저대회에 첫발을 내딘 인물은 한국여자테니스의 간판이었던 이덕희 선수이다. 테니스에 관계하는 많은 이들은 이덕희란 이름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들은 아마도 작년 이형택선수가 US오픈 16강을 달성했을 때 각종 매체에서 “이덕희 선수이후 두번째”라는 기사, 혹은 <이덕희배 국제 주니어 대회>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덕희 선수가 만 19살 5개월의 나이로 1972년 12월 26일부터 1973년 1월1일까지 개최된 호주오픈에 -자신의 첫 국제대회(이하 국제대회라 함은 투어급 이상/페드컵을 지칭한다)이자 메이저 대회- 에 출전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한국테니스의 메이저대회 출전의 역사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덕희 선수는 또한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에서 귀중한 1승을 올려 역사적인 <한국인의 메이저대회 첫승>을 이루게 된다. 64드로로 시작된 1회전에서 호주의 팸 휘트크로스(Pam Whytcross)를 6:4, 7:5로 제압하고 2회전에 진출하게 된 이덕희 선수는 2회전 상대 카렌 크란츠케(Karen Krantzcke)를 맞아 선전하지만 3:6, 5:7로 무릎을 꿇게된다. 이후 이덕희 선수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양정순 선수와 함께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녀의 국제대회(투어급 이상)는 수년간 주로 국가대항전인 페드컵(Fed Cup)에 국한되었고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선수로 등록(한국 최초의 프로선수)한 후에서야 비로소 활발한 국제경기를 갖게 된다.
II. 80년대;이덕희, 감격의 16강 달성 /김봉수, 한국남자 첫 메이저 대회 진출
1. 1980년
프로에 입문한 이덕희 선수는 1980년 초반부터 미국의 힐튼헤드(Hilton Head)와 이태리의 페루자(Perugia) 해외원정에 나서 연속 16강에 오르는 등 활약을 보이다가 1980년 5월 26일부터 6월 8일까지 열린 프랑스오픈에 참가하게 된다. 64드로로 시작된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독일의 클라우디아 코데-킬쉬(Claudia Kohde-Kilsch, 슈테피 그라프와 함께 88년 서울올림픽 복식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를 맞아 6:3, 7:5로 승리, 자신의 두번째 메이저 대회 승리를 기록한 이덕희 선수는 2회전에서 스위스의 페트라 델헤스-야우흐(Petra Delhees-Jauch)에게 완패(1:6, 2:6)하며 메이저대회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이덕희 선수는 다음달 열리는 윔블던 대회에도 참가했다. 128드로로 시작된 80년 윔블던은 이덕희 선수에게 1회전 부전승의 행운을 주었으나 2회전에서 미국의 렐레 포루드(Lele Forood)를 넘지 못하고 4:6, 1:6으로 패하며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계속해서 이덕희 선수는 약 두달 후 열리는 US오픈에 대비하기 위해서 곧 미국으로 원정을 떠난다. US오픈의 전초전 격인 7월 말 리치몬드(Richmond) 대회 1회전에서 그녀는 한 전설적인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 인물은 메이저대회 18회 우승에 빛나는 철의 여인 나브라틸로바였다. 하지만 갓 프로에 입문한 이덕희 선수가 나브라틸로바를 꺽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과는 1:6, 1:6의 완패였다. 1980년 8월 26일 개막된 US오픈. 128드로로 시작된 1회전에서 이덕희 선수는 또 다시 부전승의 행운이 있었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캔디 레이놀즈(Candy Reynolds)에게 3:6, 4:6으로 패하게 된다. 얼마후 WTA 투어 푀닉스(Phoenix) 대회에서 그녀는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둔다.
64드로로 시작된 비교적 규모가 큰 이 대회에서 3명의 미국 선수를 차례로 꺽고 준준결승에 오른 것이다. 이때부터 점차로 랭킹이 상승하여 10월 13일에 열린 일본 나고야 대회에서는 국제대회 최초로 시드를(7번시드) 받기도 한다. 1980년 11월 24일. 그녀는 또다시 호주오픈에 참가했지만 1회전에서 일본의 사토 나오코(Sato Naoko)를 맞아 2:6, 3:6으로 패하며 한해를 마감하게 된다. 1980년은 이덕희 선수에겐 의미있는 한해였다. 한국인 최초로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덕희 선수가 이미 한국의 첫 프로 테니스 선수라는 기록과 72년 12월의 첫 메이저 대회 출전이라는 기록 외에도 80년에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진출하는 기록을 세운 것은 바야흐로 한국테니스가 세계무대에서 활약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1981년
4월에 열린 미국의 힐튼헤드 대회. 이덕희 선수는 1회전을 통과하고 2회전에서 테니스의 여왕 크리스 에버트(Chris Evert, 테니스의 전설들 참조)를 만났다. 그러나 전성기의 에버트를 꺽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과는 0:6, 0:6의 대패였다.
전년도에 모든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던 이덕희 선수는 1981년에는 호주오픈을 제외한 3대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5월의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는 체코의 마리아 핀테로바에게 1:6, 6:0, 1:6으로 패하게 되지만 2세트의 6:0 세트승은 한국인이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유일한 퍼펙트 세트승이 되었다. 다음달 윔블던에서는 1회전 부전승을 거두고 2회전에서 미국의 로잘린 니드퍼(Rosalyn Nideffer)를 맞아 3:6, 1:6으로 패배, 이덕희 선수의 메이저대회 2회전 징크스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9월 1일 개막된 US오픈에서 이덕희 선수는 한국테니스사에 길이 남을 16강 신화를 창조해낸다. 1회전에서 호주의 수잔 레오(Susan Leo)선수를 6:3, 6:4로 가볍게 일축한 뒤 2회전에서 미국의 수잔 마스카린(Susan Mascarin)선수를 3세트 사투끝에 6:7, 6:4, 7:6으로 제압, 2회전 징크스를 처음으로 떨쳐내고 3회전에 진출하였다. 이덕희 선수는 3회전에서도 1978년 프랑스오픈 우승자이자 당시 세계적 선수로 이름날리던 루마니아의 버지니아 루치치(Virginia Ruzici,78년 프랑스오픈 우승자)를 6:1, 4:6, 7:5로 꺽고 대망의 메이저 대회 16강을 달성하며 한국테니스에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8강의 길목에서 메이저대회 4회우승, 세계랭킹 3위에 빛나는 체코(후에 호주로 국적변경)의 하나 만들리코바(Hana Mandlikova)를 맞아 1:6, 0:6으로 완패당하긴 했으나 그녀의 메이저 대회 16강 달성은 2000년 이형택 선수가 US 오픈 16강에 오를때까지 19년간 한국의 메이저대회 단독 기록으로 남게되었다. 이덕희 선수는 계속해서 10월의 토쿄대회와 11월의 홍콩대회에서도 연속 8강에 오르면서 역대 한국인이 작성한 최고의 세계랭킹인 34위를 마크하게 된다.
3. 1982년
전년도에 호주오픈을 제외한 3대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고 US오픈 16강에 올랐던 이덕희 선수는 1982년에도 한국테니스의 숙원을 풀게 된다. 1982년 1월 미국의 포트 마이어(Fort Myer) 대회에서 4명의 선수를 연달아 꺽고 결승에 진출한 이덕희 선수는 남아공의 이본 베어마크(Yvonne Vermaak) 선수를 6:0, 6:3의 완벽에 가까운 스코어로 제치고 우승트로피를 안게 된다. 이는 역대 한국선수중 최초이자 유일한 국제대회(투어급 이상) 우승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해설: 필자는 이덕희 선수의 WTA 포트마이어 대회 우승에 대한 기록을 한국의 테니스관련 기사에서 본 일이 없다. 다음의 테니스 전문 사이트로 이동하면 WTA 투어 1982년 우승자목록 첫줄에서 이덕희라는 자랑스런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target=_blank>http://tenniscorner.net/archives.php>
이덕희 선수는 프랑스오픈이 시작되기 직전인 4월과 5월에 이르러 다시한번 엄청난 일을 해내고 말았다. 4월의 힐튼헤드 대회에서 메이저대회 3회(68 US오픈, 72 호주오픈, 77 윔블던) 우승자이자 전세계랭킹 2위에 빛나는 영국의 버지니아 웨이드(Virginia Wade)를 1회전에서 꺽고 2회전에서도 루마니아의 버지니아 루치치를 꺽으면서 16강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저대회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규모가 컸던 독일오픈 2회전에서도 전 세계랭킹 1위(컴퓨터 집계 이후에는 2위), 메이저대회 12회 우승에 빛나는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테니스의 전설들’12편 참조)을 2:6, 6:3, 6:2로 꺽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때는 빌리 진 킹이 노쇠의 경향을 보일 시기였긴 했지만 이는 역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전)세계랭킹 1위에 승리를 거두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독일오픈에서 이덕희 선수는 3회전 상대마저 제압하고 8강에 올랐다.
이덕희 선수의 1982년 메이저대회 출전은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 이루어진다.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부전승을 거둔 그녀는 2회전에서 헝가리의 안드레아 테메스바리(Andrea Temesvari)에게 0:6, 1:6이라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한달 후 열린 윔블던에서는 영국의 글리니스 콜레스(Glynis Coles)를 맞아 4:6, 6:4, 6:1로 신승을 거두고 2회전에 진출했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안드레아 예거(Andrea Jaeger)에게 6:4, 4:6, 5:7로 분패하였다. 그러나 US오픈에서는 전년도 16강달성에 이어 자신의 두번째 최고성적인 3회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1회전에서 호주의 안네 민터(Anne Minter)를 6:3, 4:6, 7:6으로 이기고 2회전에서는 미국의 캔디 레이놀즈(Candy Reynolds)를 6:3, 7:6으로 꺽었던 것이다. 3회전에 진출한 이덕희 선수는 그러나 아쉽게도 미국의 캐티 리날디-스툰켈(Kathy Rinaldi-Stunkel)을 넘지못하고 1:6, 2:6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4. 1983년
이덕희 선수는 1983년에도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 등 3대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녀는 5월에 개막된 프랑스오픈 1회전에서 미국의 렐레 포루드(Lele Forood)를 맞아 6:2, 6:4로 가볍게 승리를 거두며 2회전에 진출하였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파울라 스미스(Paula Smith)에 3:6, 6:1, 5:7로 분패하고 말았다. 다음달 열린 윔블던에서도 1회전 상대인 체코의 마르첼라 스쿠어스카(Marcella Skuherska)에 6:1, 4:6, 6:4로 승리를 거두지만 2회전에서 미국의 캐티 조단(Kathy Jordan)에게 1:6, 1:6으로 완패하였다. 계속해서 이덕희 선수는 81년과 82년에 그녀에게 좋은 성적을 안겨주었던 US 오픈에 참가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1회전도 통과하지 못하고(미국의 카트린 커밍스에게 1:6, 6:7 패) 결국 테니스 코트를 떠나게 된다. 이때는 그녀의 나이 만 30세였다.
이덕희 선수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4년간 프로무대에서 활동했다. 좀더 일찍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는 한국테니스의 프로진출이 여의치 않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이덕희 선수가 한국 테니스의 첫 프로선수로서 한국 테니스계의 세계진출에 포문을 열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메이저대회 14회 출전에 2회전 이상 진출한 횟수만도 11회에 이르는, 특히 US오픈의 16강달성(81년)과 3회전 진출(82년)이라는 그녀의 업적은 <한국테니스의 4대 메이저 대회 출전사>에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스포츠가 그동안 축구와 야구, 농구 등 소위 인기종목 중심으로 활성화 되었던 상황에서 테니스의 이덕희라는 인물이 과소평가되어 왔지만 이젠 그녀의 업적이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 같다.
5. 1988년
이덕희 선수의 은퇴 이후 한국테니스의 메이저 대회 출전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년 김봉수 선수가 이덕희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 한국 남자 선수로서는 첫번째로 메이저 대회 본선에 참가하는데 성공한다. 김봉수 선수는 유진선 선수와 함께 80년대 한국테니스를 주도해왔던 선수로서 한때 한국남자테니스 선수 중 최고랭킹인 세계랭킹 129위를 마크했던 인물이다. 그는 88년 1월 11일 개막된 호주오픈에 한국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출전했다. 예선을 어렵게 통과한 김봉수 선수는 1회전에서 같은 아시아권 선수인 인도의 라메쉬 크리쉬난(Ramesh Krishnan)선수를 맞았다. 1세트를 3:6으로 내준 김선수는 2세트를 6:3으로 빼앗으며 역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 첫 무대가 다소 긴장되었는지 3세트를 4:6으로 아깝게 내주고 만다. 세트 1:2로 뒤지던 김봉수 선수는 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6:4로 4세트를 마무리지으면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세트 스코어 2:2. 양선수 모두에게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5세트를 맞이한 김봉수 선수는 4세트에서 무리하게 체력을 소진한 탓에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브레이크 당하며 4:6으로 무릎을 꿇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남자의 메이저무대 첫승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잘 싸웠으나 정말 아쉬웠던 한판이었다. 국제대회(투어급 이상)경력이라곤 주로 데이비스컵 지역예선과 서울 KAL 컵 출전이 전부인 김봉수 선수는 당해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 테니스 경기 2회전에서 프랑스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앙리 르콩트(Henri Reconte, 88년 프랑스오픈 준우승자)를 꺽고 16강에 오를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갖춘 선수였다. 김봉수 선수는 93년과 94년 ATP투어 토쿄대회에서도 각각 패트릭 래프터(Patrick Rafter)와 리차드 크라이첵(Richard Krajicek)을 맞아 패하긴 했으나 한국선수들이 세계적 선수들을 상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