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령심폭(東冷尋瀑)
조장빈 / 산악문화연구소
북한산 보현봉 남쪽의 동령폭포(東嶺 또는 東冷尋瀑)는 조선후기 도성 인근으로 최고의 유상처였던 세검정의 동쪽 계류의 시원이다. 18세기 초 공미(公美) 박창언(朴昌彦)이 그 아름다움을 알렸다고 전한다.
1720년 4월 김신겸(金信謙) 일행이 북성(北城)을 유람했을 때 동령폭을 보고 “경성이 바로 지척이다. 하지만 이 외딴곳은 그 어떤 선현이나 안목 있는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았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공미(公美, 박창언)에 의해서 그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이 샘과 바위 하나가 유명해지거나 잊어지는 것 또한 미리 정해진 것일까? 이는 참으로 기이하고 탄식할 일이다”고 하였다. 이 유람에는 정선(鄭敾)도 함께 하였고 동령폭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그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 시기 미상)에는 세검정(洗劍亭, 1747년 건립)이 놓였었던 너른 반석 위에서 바라본 보현봉 산중의 와폭이 그려졌는데 아마도 이 동령폭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휴일(5월 24일) 연구소에서는 1831년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 일행의 유산 일정을 따라 창의문에서 동령폭까지 걸으며 탕춘대성 일대의 승경을 얘기하고자 한다.
정선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 / ‘東嶺瀑布’ 바위글씨
동령심폭기(東冷尋瀑記)
신석우(申錫愚)
신묘(辛卯)년 가을 중순, 김중필은 나와 동령폭(東泠瀑)을 유람하기로 약속했다. 성문에서 십리 안에 위치한 이 폭포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옷을 떨쳐입고 창의문으로 올라갔다. 중필(仲弼), 복경(服卿) 그리고 성회(聖晦)가 문루(譙樓)에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말에서 내려 걸어 나아갔다.
비가 막 그치고 개울가에는 회나무,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매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세검정(洗釰亭)의 돌들은 수정처럼 하얗게 빛났고 물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잠시 쉬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누군가 손짓하며 "이 개울을 건너 상평고(常平廒)로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따랐다.
길은 동쪽으로 굽이져 이어지다 북쪽으로 뻗어 있었는데, 마치 실오라기처럼 좁고 나무꾼과 목동들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봉우리와 산등성이가 겹쳐져 있었고 계곡이 깊고 외딴 곳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복경이 말했다. “북한로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성회가 웃으며 말했다. “금선사로 가는 길인 것 같군” 도성 북쪽의 산세는 어디나 이런 모습이었다. 숲길은 한눈팔면 길을 잃기 쉬웠다.
조금 더 가니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여전히 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서쪽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위쪽에 미타암(彌陀庵)이 있다고 하는데 폭포는 마땅히 동쪽 길로 가야 한다. 먼저 서쪽 암자부터 가보기로 했다. 낡은 암자는 적막했다. 탑상(榻上) 위에는 작은 금불상이 놓여 있었고 두 승려는 수능엄경(首楞嚴經)을 외우고 있었다. 내가 불러 “동령 폭포가 어디입니까?”하고 물으니 승려는 봉우리 북동쪽을 가리키며 “저 아래에 폭포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폭포를 찾으러 가는 동안 점심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다시 언덕 꼭대기에 올라 남쪽을 보니 시야가 더 맑았다. 큰 계곡물은 거울처럼 반짝였다.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졌고 징검다리를 건너 돌비탈 길이 나타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턱 막혀 다섯 걸음마다 쉬어야 했다. 해가 서서히 산 너머로 지고 있었고 숲길은 인적이 끊겼다. 바위와 절벽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졸졸 울렸지만 여전히 폭포를 찾을 수 없었다. 되돌아가고 싶었는데, 중익은 폭포를 찾기 전에는 종일 돌아가지 않겠노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덩굴을 부여잡고 올라갔다. 경치는 점점 더 그윽하고 깊어졌다. 그때 홀연히 중익과 성회가 바위 아래에서 “폭포가 여기야!”라고 외쳤다. 올려다보니 하얀 눈이 바람에 휘날리고 학 떼가 하늘에서 춤추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벼랑을 오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물웅덩이에 들어가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고 갓끈을 씻고 있었다. 나도 바위에 앉아 동자의 허리에 찬 술통을 풀고 한 잔 마시고 계곡의 돌길을 따라 올라가니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아 커다란 바위가 마치 얼음발이 흩뿌린 듯 물에 덮여 있었다. 거대한 폭포 아래에 다다르자 쏟아지는 물줄기와 흩날리는 물거품이 우리 옷을 흠뻑 적셨다. 폭포는 굉음을 내며 산속에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마치 눈송이들이 학과 함께 춤추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말했다. “나는 폭포를 볼 기회가 없었어. 구룡(九龍), 무봉(舞鳳), 한계(寒溪), 박연(朴淵)은 멀어서 가볼 수 없었고 가까이 있는 조계(曹溪)도 보지 못했지. 이제 드디어 소원을 이뤘어” 게다가 뜻밖에 폭포는 너무나 웅장했다. 이미 알게 되었으니 짚신과 버선이 닿도록 폭포의 근원을 더 깊이 찾아보면 분명 기이하고 그윽한 곳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지고 있었고 길은 험해서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다음에 다시 찾아 즐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서쪽 암자로 돌아오니 밥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왔던 길을 따라 돌아왔다. 임학(林壑)은 날이 저물고 거리의 종은 이미 울렸다. 이 달의 넷째 날이었다. 일기는 다음 날 기록하다. - 해장집(海藏集) 제11권,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