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과 밀개떡
소정 하선옥
요며칠 사이, 이른 아침 뒷베란다를 통해 바라본 다락밭에는 하얀 박꽃이 하늘거리며 돌담장을 간지럽히듯 넌출넌출 넝쿨손을 내밀고 예보란듯 피어나더니, 오늘은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동그란 박을 둥실 매달고 있다. 보고 또 보아도 정겹고 신기한 모습이다.
초여름 초가지붕에 새하얀박꽃이 피어나는 이맘 때쯤이면, 장작불에 열한 식구 밥을 지어내던 내 고향 집 부엌의 터줏대감, 가마솥이 생각난다. 아침이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밥 짓는 솥에다
밀가루에 소금을 넣고 반죽하여 동글동글하게 빚어서는 밥과 함께 쪄내던 밀개떡. 한 입 베어 물면 쫀득거리며 구수한 밀가루 향이 입안 가득 번지곤 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이 밀개떡을 아침 밥 숱가락 들기 전에 한개씩 베어물었다.
점심밥을 대소쿠리에 담을 때, 밀개떡도 우리 형제들 숫자만큼 담아 삼베보자기를 씌워 처마 밑에 걸어놓았다. 학교에 다녀와 그것을 한 개씩 꺼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곤 하던 시절, 밀개떡의 그 맛은추석 명절 송편 보다도 더 맛 났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 시대, 제과점 문을 열면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내는 각양각색의 빵들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빠르게 돌아가는 이 시대와 조금은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나는, 왜 아직도 밀개떡의 그 소박한 맛을 그리워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내게 밀개떡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낙인(烙印)이자 흔적이다. 내 나이가 어느새 할머니와 어머니가 밀개떡을 쪄내던 그 시절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나는 아직도 밥알이 듬성듬성 붙어 있던 그 밀개떡을 그리워하며 산다.
항상 지나간 것은 아쉽고 그립고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작은 먼지 알갱이들이 모여 예쁜 무지개를 만들고,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모여 백사장을 만들듯, 모든 것의 시작에는 아주 작은 시발점이 있다. 그림자는 쓸어내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 어쩌면 나의 어릴 적 기억들도 쓸어내고 쓸어내도 그 자리에 고여 있는 그림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저 연약하고 하늘하늘거리는 박꽃은 해가 뜨면 온몸을 움츠려 마음을 닫았다가, 저녁 달빛과 별빛을 받으면 다시금 하얀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어느새 커다란 박을 잉태하고는 소담스러운 웃음으로 나를 반겨준다.
오늘 문득, 마음 한구석에 부질없는 욕심이 고개를 든다.
초저녁 담장 가에 하얗게 피어나던 박꽃 같은 정겨움으로, 어머니의 거친 손으로 쪄내던 밀개떡 같은 아련함으로,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가만히 머무를 수 있을까 하는 망상에 젖어보는 것이다.
아스라히 멀어져 간 그 시절의 밤하늘처럼, 소박하지만 손톱에 물들인 봉숭화 꽃물처럼, 지워지지 않을 고운 추억의 품에서 오늘만큼은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2026-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