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신 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를 늘 업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 1926)-
*시어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만해스님이 승려이기 때문에 <님>이 부처님,깨달음이 될 수 있다. 독립운동가 한용운에<님>은 조국일 수 있다. 한 사내로 본다면 사랑의 실패자, 아내를 먼저 떠나보냄 망부의 노래일 수 있다.
만해 스님의 시에서 처럼 우리는 만남은 헤어짐을 약속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헤어져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는 말처럼 우리는 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았던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후세계는 피할 수 없는 세계이다. 때문에 무서우면서도 호기심에 이끌려 찾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달걀귀신 이야기를 무서워하면서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가고 늘 어머니 손을 잡고 화장실에 들어가고 밖에 엄마의 존재를 늘 확인하면서 일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귀신은 우리들 속담에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물건을 잊고 하는 첫 마디가 “귀신 곡할 노릇이다”는 말이있다. 날렵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귀신같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 영뚱한 말을 한다면 “김밥 옆구리 터진 소리한다”고 핀잔을 주는데 사실 이말의 원조는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한다 며 면박을 주었다. 이처럼 귀신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귀신은 우리에게 도깨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남양특집이란 이름으로 제작되는 TV연속극은 대부분 흉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연속극에는 귀신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사이에는 “지름신”“그분이 오셨다”는 말이 유행이다.
공자님은 “산 사람도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라고 했으며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말을 했다. 유가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조상의 혼백이 오는 시간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기전 대문을 열고 심지어는 조상령이 오다 걸릴지 모른다고 빨랫줄을 걷어낸다. 또 혼이 밥을 먹을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제수를 많이 차려놓고 식사하시라고 수저를 밥이나 국에 꽂아 놓고, 새로 물(국)을 떠 놓는 일들은 살아있는 부모께 평소하던 행위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다수 사람들은 “조상령이 어느곳에 머물고 있다. 제삿날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 “지금 조상 령이 다녀가셨는가”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혼령이 오는 시간도 제사는 밤에 지내면서 추석에는 낮에 차례를 지내는 등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참고:조상숭배와 차례)
한비자(한비자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비인간적으로 보여 제자백가 가운데 유일하게 아닐 ‘비(非)’를 써 ‘비자(非子)’가 됐다. 하지만 진시황 이래 한무제, 청 강희제를 거쳐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한비자 중국 제왕학의 교본역할을 했다.
“옛날 齊나라의 왕이 한 화가에게 어떤 것을 그리기가 제일 어려우냐고 물었다. 화가는 개와 말을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했다. 왕은 다시 어떤 것을 그리기가 제일 쉬우냐고 물었다. 화가는 귀신이 제일 쉽다고 했다. 왜냐하면 개와 말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기 어렵고, 귀신은 본 사람이 없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어 쉽다는 것이다.”
무척 재미있는 표현이다. 귀신은 누구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의 진위유무를 가릴 수 없다는 말이다. 퇴마사(제마사)가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이야기다.
귀신은 누구인가
귀신이란 한자인 귀(鬼)와 신(神)의 합성어다. 우리말에는 정확하게 표기되는 것은 없다 다만 손각씨·몽달·가망·골매기 등이 있다. 귀신은 인간이 죽었을때 혼백의 분리과정에서 죽은사람의 영혼을 귀신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저승에가지 못하고 우리주변에 맴돌면서 인간세계에 대한 간섭을 하는 혼령(魂靈)을 귀신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저승에 가지 못하고 우리 주변에 맴돌면서 인간세계에 대한 간섭을 하는 혼령이 있다. 이들 원귀(寃鬼) 원령(怨靈)을 귀신이라고 부른다. 죽은이의 넋은 원귀가 되는것은 恨 때문이라고 보고 무속에서는 이들을 특별히 관리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민비·최영·남이·단종·공민왕·사도세자·임경업장군 등을 모시고 있다. 무속에서 신은 대체적으로 억울하게 죽은사람이 주로 그 대상이 되는것만 본다면 한많은 원혼들을 달래주는 기능도 일부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묵자는 “옛날이나 오늘날 귀(鬼)라 하는것은 다른것이 아니다. 하늘의 귀신이 있고, 또 산과 물의 귀신(鬼神)이 있으며, 인간이 죽으면 역시 귀신이 된다”고 보고 있다.
불교에서 귀신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과 사의 중간 단계인 중유(中有)세계에서 중음신의 상태로 머물면서 생전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고, 결과에 따라 여러형태로 윤회한다고 한다. 윤회의 한 형태에 아귀도란 것이있다. 아귀란 말 그대로 배고픈 귀신이다 생전의 악업으로 말미암아 아귀가 된것이다. 이들은 인간세계와 멀리떨어진 곳에 살면서 항상 갈등과 배고픔에 시달린다고 한다. 아귀는 간혹 밤중에 인간계에 나타나는 수도 있다. 중음신 상태에서 다시 태어날 곳을 찾지못해 사람을 괴롭히는 잡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생전의 기억과 원한을 그대로 간직한채 이승을 떠도는 존재를 인정하지않고 있다. 윤회를 하며, 이 과정에서 전생의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사람의 피와 살로 연명한다는 나찰(羅刹)이나 지옥의 귀졸(鬼卒)인 야차(夜叉)를 불교의 귀신이라 할 수 있다.
이토 진사이는 『어맹자의』에서 “귀신이란 무릇 천지·산천·종묘·오사(五祀)의 신 및 일체신령으로서 인간의 화복을 결정하는것은 모두 귀신이라고 한다”라고 귀신을 정의했다.
중국에서 귀(鬼)나 귀신이라 불린것은 천지·산천 등 초 인간적인 위력을 지닌것만 아니다. 죽은사람의 영혼(靈魂)이나 괴이한 변화현상까지 포함시키므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원래뜻은 죽은사람과 그 영(靈)을 가리키는 것이다. 강시처럼 재미있는 케리터도 있다.
이르시 요시히코의 정의에 따라 귀와 귀신의 개념을 추적해보면, 처음에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에서 조령(祖靈) 즉 조상의 혼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그것이 제사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사의 대상이 되면서 다시 현세에 규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존재로 상정되었고, 마침내 산천·음양·천지 등 초인간적인 위력을 지닌것과 결합되면서 우주의 주재자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기에 이른다. 다른 한편 귀 개념의 어두운 부분으로서 원래는 죽은 사람을 의미하던것이 악마 또는 악령이라는 의미로 전환되었다가 마침내 괴이한 변화현상까지 포함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성의 도리를 다하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을 지해롭다할 수 있다.”(논어 옹야편)
“제사는 있는 것처럼 지낸다”고 할때 “있는 것처럼”이란, 문자 그대로 귀신은 단지 이름뿐인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귀신은 무엇으로 다니나.
귀신은 과거 문명이 발전하기 전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중이다. 택시기사가 한 밤중에 소복입은 여인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갔는데, 돈을 가져다 주겠다며 어떤 집에 들어가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래서 그 집 문을 두드리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오늘이 죽은 딸아이 제삿날이었다는 이야기다. 과거에 귀신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동활동을 했는데 이제는 귀신도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다. 『사랑과 영혼』에서는 지하철을 이용 목적지로 이동하는것은 물론 하루하루 소일하는 여유가 보이는 것도 문명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식구조는 결국 인간이 귀신이란 존재를 만들어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학자 소라이는 “귀신이란 성인이 정한 것”이라고 했는데 귀신이란 성인이 만든 “예(禮)”의 체계 즉, 제사체계에 따라 비로소 성립하게 된 존재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귀신은 제사를 제정하면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것이 이 분의 주장이다. 앞에서 공자와 자로의 대화에서 처럼 제사공동체가 생김으로 귀신이란 존재가 우리들 삶속에 살아 움직인 것이다.
귀신의 주거지
음침한 곳이나 울창한 덤불, 낮에도 어두운 동굴,오래된 우물, 오래된 연못, 고성,폐사,폐가,허물어져 가는 누문(樓門),산비탈,바위사이,계곡 등의 장소에 모여 살고 또한 가마솥,접시,식기,절구,절굿공이,붓 등의 가구에서부터 의복,빗,비녀 등의 파손된 가정용품 또는 오래되어서 더럽혀진 물건에 머무른다. 즉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양이 결여되었거나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음기가 차있기 때문에 동기(同氣)가 서로 모여 이런 장소에는 많은 귀신이 살고 있다. 귀신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귀신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는 장소에 접근하거나 통과하는 것을 기피한다. 만약 통과해야만 될 경우에는 종이나 천조각, 작은 돌맹이 등 무엇이든지 귀신에게 주어 그의 침투를 피한다. 또한 기물도구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등 오손(汚損)된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갖출뿐만 아니라 버리기 아까운 서화 등이 좀먹고, 파손되고, 퇴색한 것 등은 반드시 손질을 해서 수리한다. 설사 그렇게 함으로써 서화의 필치나 색채적 가치가 저하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특히 흙으로 만든 인형,조상(彫像)등이 오손 결락(缺落)된 것은 금방 귀신이 기숙한다 해서 일반적으로 가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애용하지 않고, 석상 등이 벌판에 버려져 있어도 이것에 손대는 것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애호하는 일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정의 완구, 특히 인형등 완구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신앙 때문이다.
귀신의 탄생
귀신은 본래 산이나 강,호수나 늪,산기슭,강변,숲이나 바위 사이 등 대체로 음기가 차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감을 일으키게 하는 곳에 있는 귀신으로서 이 귀신의 유래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곳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이 화(化)해서 귀신이 된다는 생각에는 자기 스스로 생물로부터 되는것과 무생물로부터 되는 두 가지가 있다. 생물 중에서도 가장 그 발생관계가 명확한 것은 사람이고, 다른 금수나 벌레, 물고기 같은 생물도 귀신이 된다. 사람이 귀신이 되는 것은 죽은 후의 일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은 세 가지로 분열된다. 즉 혼, 귀, 백이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귀는 공중에 존재한다. 이 귀는 일반적으로 신주(神主)에 의탁해서 영접되어 인가에 제사지내게 된다. 즉 사람은 사후 그 생명은 천,지,인(天地人)세 곳에 걸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삼자중의 귀와 백은 인간과 교섭을 유지하게 되는데(백은 풍수지리상 자손과 직접 중대한 교섭을 가진다.)만약에 사자를 이은 자손이나 연고자에 의해서 정성껏 조의를 받았을 때 이러한 귀나 백은 만족해서 흩어진다. 즉 백은 묘 속에 3년의 제사를 받고, 귀는 사당에서 자손 4대의 제사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눈을 감는다. 이렇게 충분히 제사를 받은 귀는 그대로 흩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그 이상 사람과 아무런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백과 귀가 정당한 조의를 받지 못하고, 제사를 받을 수 없을 경우에는 이 백과 귀의 기가 응결해서 귀신이 된다.
이 경우 백의 수명은 보통 3년이고, 이미 땅속에 묻혀있기 때문에 귀신으로서 그 다지 활동을 할 수 없지만, 귀는 그 수명이 자손 4대에 걸칠 정도로 길다.(1대를 20년으로 가정하더라도 80년이나 된다.)그리고 또 공중에 존재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존재 할 수 있고 그 활동도 자유롭다. 죽은 후에도 남아있는 것은 제사를 받지 못했거나 비명횡사,요절, 질병으로 죽거나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 또는 익사자, 추락사자, 마마로 죽은 사람, 중독사자, 살해된 사람, 모함을 당해 사형을 받은 사람 등으로 정당한 방법의 죽음을 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보다도 원한이 길기 때문에 쉽사리 위로해줄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모두가 귀신이 되어서 공중에 떠돌아다닌다. 짐승과 벌래, 물고기 등의 생물이 귀신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 수령이 높은 경우와 사람과 접촉이 많은 것, 혹은 이것에 고통을 준 경우 등으로 그 정기가 응결해서 일종의 <저주>를 미치는 힘이 있는 귀신으로 변화한다. 초목으로부터 변화하는 귀신도 대체로 그 수령이 높고, 크기가 커짐에 따라 정(精)이 화해서 귀신이 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 형태가 크고 수령이 높은 것에는 신명귀신이 쉽사리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그 훈염(燻染)이 오래되어 마침내 그 정이 응결,동화되어 귀신이 된다.
가구,가구류 등의 무생물도 변하여 귀신이 되는데, 이 또한 그 사용기간이 오래된 것 즉 나이가 높은 것, 또는 인체에 접촉한 것, 특히 그 혈액(월경의 혈흔이 빗자루에 묻으면 귀신이 되는 경우) 땀, 오물 등의 부착된 것이 변하여 귀신이 된다.
그러나 풀이나 나무 또는 기물류가 화해서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은 때때로 귀신의 탁우(托寓)가 되기 때문에 귀신이 여기에 머묾으로써 마치 이것들의 물의 정이 화해서 귀신이 되는 것처럼 잘못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정령신앙에서 본다면 우주의 존재는 모두 정령이므로 이 정령이 응결해서 일종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귀신이라 부를 수 있다면, 초목이나 기물도 모두가 귀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귀신의 생성이 이런 것들에까지 미치는 것이 결코 무리라고 할 수 없다.
귀신의 종류
1)손각씨
묘령의 나이가 되었으나 춘정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처녀의 혼이 견디다 못해 마침내 악귀가 되어 대대로 그 집을 저주하고 다른 처녀에게 해를 미친다고 전해지는 귀신이다. 처녀가 병으로 죽으면 매장할 때 남자의 옷을 입혀서 머리를 아래로 하고 다리를 위로 하여 거꾸로 묻고, 많은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를 관 주위에 묻는다. 또한 십자로 아래에 몰래 매장하여 뭇 남성이 그 위를 밝고 다니게 함으로써 그 연정을 만족시켜 악귀가 나오지 못하도록 한다. 조선시대에는 싸우는 사람간에 상대집에 일찍이 손각씨의 저주가 있었는가를 염탑하기 도 했다.
2)수귀(水鬼)
물에 빠져죽은 귀신으로 사람을 물 속으로 끌어들인다. 수귀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수 만큼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그 장소에서 익사하는 흉내를 내게 하고 음식을 바친다.
3)미명귀(未命鬼)
젊어서 죽은 아내가 이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고 후처에게 재앙을 내리는 귀이다. 후처가 병에 걸리면 무속인을 초청 굿을 하기도 한다.
4)동자보살(童子菩薩)
동자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을 때 종종 나타나서 그 형제에게 빙의하는 것
5)호귀(虎鬼)
호랑에게 물려죽은 자가 귀신된 것으로 영선은 노인이 장생해서 선인이 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6)성황(城隍)
옛날에는 지방관은 공식적으로 제사지냈다. 성황당 앞을 지날 때 돌을 던지거나 침을 빝고 가는 습관이 있다. 산아(産兒)·관리의 출생·부자가 되는 것·병의 괘유 등을 위해서 기원한다.
7)역신(疫神)
역병을 귀신의 작용으로 생각하는 것은 고대 어떤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천연두의 기세가 맹렬하고 병의 상태가 기이하기 때문에 이것을 일종의 귀신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선의 고대에는 천연두가 없었으나 전한때 무제 건원중 강건이란 사람이 서역 월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천연두에 전염되어 온 것이라고 말한다. 무속에서 배송굿이란 대목이 있는데 이굿은 마마등 역신을 보내는 의식으로 사용되었으나 근래에는 이 병의 발생이 없으므로 굿 자체도 없어졌다.
8)관제(關帝)
전내는 영웅숭배의 발단이 되는 것으로 즉 관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매년 음력 10월 19일 동묘의 관성제를 비롯 중국 광장시장, 엠베서더 호텔 건너편에 있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9)최영장군
최영장군은 고려말 명장으로 공민왕부터 신우까지 역임하였으니 16세부터 70세까지 내란과 외침 수십 회에 종군하여 크게 공을 세웠으나 이성계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였지만 생전에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10)성주(聖主)
성주라고 쓰기도 하고 상량신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 신은 대들보 위에 있어 가옥의 안전을 관할한다.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지관에게 부탁해서 방위를 보게 하고 길일을 택해서 상랑식을 행하고 연희를 축하하며 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을 초대하여 대들보 밑에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지금은 아파트 등 대단위 주거단지가 형성되고 건설업자에 의해 치러지기 때문에 당사자들과는 무관하다.
11)제석(帝席)
제석은 그집 주인인 남자의 운명을 관할하는 신으로서 집 제일 깊은 다락에 있는 신인데 형체도 없고, 신상도 없다. 단, 이 다락에는 백색의 도기항아리에 콩 한 되 세 홉과 베 일곱 자를 넣어 모시고 평소에는 손대지 않다가 매년 영등날인 먼지를 털어내는 날에 갈아넣는다.
16)업위(業位)
업위 또는 업위왕(業位王)이라고 한다. 이는 행복을 관할하는 신이라고도 하고 헛간을 관할하는 신이라고도 하는데, 집에 따라서 큰 병에 콩을 넣고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놓아 제석과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뱀이나 족제비는 이 신의 심부름꾼으로 이런 동물이 때때로 집 안에 나타날 때 흉사(凶事)가 있다고 하여 무속인을 초청 기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래도 일이 잘안 풀리는 경우에는 이사를 가기도 한다.
17)기주(基主)
대감이라고 불리는 신으로 택지를 관할하는 신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모셔지고 있는 신이다. 신체(神體)는 가옥 한 모통이에 있는 돌이다.
18)수문자(守門將)
대문을 맡아 지키는 신장이다.
19)주주(廚主)
부엌에 있는 신이다. 밥을 지었을 때 제일 먼저 사발에 담아 부엌의 가마솥 위의 선반에 바치고 이 신에게 자식의 행운을 기원한 후 삼배(三拜)한다. 이 신은 나무가 타는 냄세를 가장 싫어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20)측귀(廁鬼)
여성의 악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쫓아내기 위해서 뒷간에 갈 때 침을 뱉고 또한 기침을 하는 사람에게 병을 준다고 하여 두려워 하고있다.
21)장장(張將)
일명 천하대장군이라고 한다. 도로 수호신 겸 역려(疫癘)악귀가 부락에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장군의 연기(緣起)에는 매우 흥미있는 두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본체는 도로 신이다. 대공망의 처가 성황이 된 전설과 그것이 낙백(落魄)하여 도로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 공통된다. 이 신에게는 예배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낡았을 때에 새로 세울 뿐이다.
22)산신(山神)
산천숭배는 천연숭배의 하나로 각국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일본에서는 어신(御神)이라 하는 것도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의 속신(俗神)으로서 산에는 산신이 있다고 하여 이를 숭배한다. 산신은 대체적으로 낮은 산에 있는 신이다. 산령 또는 산신령수라고 불리는 신은 높은 산·깊은 산·명산에 있는 신으로서 그 산의 어느 장소를 영지로 정하고 제사를 지낸다. 이 신은 길흉화복을 관할하는 신으로서 장수·출산·부귀등을 기원하거나 또는 비를 희구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23)수령(樹靈)
교외 또는 비탈길이나 길 옆에 심어져 있는 작은 나무나 관목 등의 가지에 천 조각을 몇 개씩 잡아낸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신령지(神靈地)라 칭하는데 이 수목에 귀신이 머물러 있는 것으로 믿고 출산·부귀·질병의 쾌유·액땜 등을 기원한다. 산에 오르다 보면 작은 리본에 산악회 명칭을 써 놓은 것을 쉽게 보게되는데 이것을 연상 하면된다. 아울러 신목에 오색천을 매단것을 생각하면 된다.
24)까마귀의 영(靈)
까마귀에 대한 숭배는 없다. 단 마을 입구에 수살목이라 부르는 소나무 가지를 가지고 왜가리의 형태를 만들어 장대 꺽대기에 높이 올려서 질병의 침입을 막거나, 또는 왜가리가 마을에 둥지를 틀면 그 마을은 부자가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신라의 소지왕때 영오(靈烏)의 고함으로 왕이 액난을 피하였기 때문에 매년 정월(正月)에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여 약밥을 만드는 것과 까치가 기쁨을 가져다주고, 학의 알이 석화(石化)된 것으로 병자를 매만져서 병을 치유시킨다고 믿는 것, 머리가 3개 몸은 1개인 독수리 그림을 붙여서 삼재(三災)를 막는 예도 있다.
25)천체숭배(天體崇拜)
하늘을 외경하여 이를 제사지내는 것은 어느나라의 고대에 있어서나 거의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신앙이다. 고구려·신라·백제·고려 등에서도 모두 하늘에 제사를 올린 사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성단(靈星壇)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있었으며 소격서(昭格署)라는 별에 제사지내는 관청 겸 제전에 태일전(太一殿)·삼청전(三淸殿)이라는 별의 제전이 있었다. 옥황상제나 태상노군(太上老君)은 현재 민간에서는 제사지내지 않지만. 일부 무속인 사이에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혜성이 나타나면 나라에 변란이 일어난다고 두려워 하고 공포에 떨기도 했다.
부모나 남편이 중병에 걸렸을 때 목욕재계하고 그릇에 정결한 물을 담아 기도를 올리는 경우가 있다. 자녀들을 위해 장독대에서 올리던 기도도 천제숭배의 한 흔적이다. 각종 제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26)농신(農神)
농민이 제사지내는 신으로 모내기 때에 떠들썩하면 결실이 알차다 하여 5월에는 농양제를 행하고, 8월 대보름에는 햇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바치고, 10월 추수제를 행하여 농신에게 예를 올린다.
27)오방신(五方神)
역술인들이 제사지내는 신으로 정신병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28)태주귀신(胎主鬼神)
일명 사지신(死指神)이라고도 하며, 어린아이를 최악의 상태로 굶겼다가 젖을 보여줄 때 내민 손가락을 절단해서 제사지낸다는 전설이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 사지신은 무속인의 신체 일부 혹은 공중에서 발성(發聲)하고 천리안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것, 이런 종류의 무속인을 태주방(胎主房)이라고 한다.
29)영동신(嶺東神)
영동에서만 제사지내는 지방귀신으로 이 신은 영등날에서 그믐까지 집의 대들보 위에 온다고 하며 공물을 갖추어서 제사를 지낸다. 이 30일 동안 영동에서는 쌀 매매를 하지 않는다. 만약에 이를 어기면 저주를 받아 빈곤해지거나 병자가 생긴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이 신은 영동의 어부가 동해의 연인도(女人島)에 표착(漂着)해서 여자에게 염살(艶殺)되었다는 전설과 관계가 있다.
<귀신과 관련된 일화>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김유신의 혼백이 태종대왕의 능으로 가서 혼국종사를 사퇴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추왕의 혼령이 타이르다. 제14대 유리왕 당시 신라군과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친 병사가 귀신이다.)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七代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다(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왕金氏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 한다. <삼국유사 기이편>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살아생전에 흠모했던 여인을 귀신이 되어 찾아가 동침할 것을 요구하는 진지왕, 그의 아들 비형랑은 귀신을 부렸다.)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성(姓)은 김씨(金氏),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삼국유사 기이편>
*김유신(金庾信)조
(신의 현신(現身)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 여인으로 모습을 바꾸고 김유신을 구함.윤회전생담)
호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서 소명(小名)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서 소명(小名)이 아지(阿之)이다.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 595)에 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별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가 되는 임신(壬申)년에 검술(劍術)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러 해 동안 낭도(郎徒)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유신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은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고한다. "내가 공과 함께 먼저 저들 적국에 가서 그들의 실정(實情)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그를 따라와서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세 여인과 함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여인들은 맛있는 과자를 그에게 주었다. 유신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믿게 되어 자기의 실정(實情)을 말하였다. 여인들이 말한다. "공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神)으로 변하더니 말한다.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오. 지금 적국 사람이 낭(郎)을 유인해 가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는 낭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소."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골화관(骨火館)에 묵으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가지고 오도록 하자."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오자 백석을 결박해 놓고 그 실정을 물으니 백석이 말한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오(고본古本에 백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구려 사람이요, 도한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일도 보장왕寶藏王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 나라 점쟁이 추남(楸南; 고본古本에 춘남春南이라 한 것은 잘못임)이었는데, 국경 지방에 역류수(逆流水; 웅자雄雌라고도 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가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었소. 이에 추남(楸南)이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부인(夫人)이 음양(陰陽)의 도(道)를 역행(逆行)한 때문에 이러한 표징(表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했소. 이에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몹시 노했소. 이것은 필경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하여 왕에게 고하여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해서 물어 보아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라고 했소. 이리하여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쥐일 것인데 그 수가 여덟입니다 했소. 이에 그의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려 하자 그 사람은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꼭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소. 곧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소. 그제야 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 했소. 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서 그대를 유인하게 한 것이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이들은 모두 나타나서 제물을 흠향했다.
김유신의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財買谷)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럴 때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 오다가 원찰(願刹)로 삼았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공(公)을 봉해서 흥호대왕(興虎(武)大王)이라 했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왕이 죽은 후에도 호국의 대룡이 되고 싶다는 바램.)
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龍朔) 신유(辛酉; 661)에 사자수(泗차水) 남쪽 바닷속에 한 여자의 시체(屍體)가 있는데, 키는 73척, 발의 길이는 6척, 음문(陰門)의 길이가 3척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키가 18척이며 건봉(乾封) 2년 정묘(丁卯; 667)의 일이라고 했다.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왕王의 성姓이 고高씨이므로 고장高藏이라 했다. <당서唐書> 고종기高宗紀를 상고해 보면, 현경現慶 5년 경신庚申(660)에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百濟를 정벌하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大將軍 계여하契如何로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또 소정방蘇定方으로 요동도遼東道 대총관大摠管을 삼고, 유백영劉伯英으로 평양도平壤道 대총관大摠管을 삼아서 고구려를 쳤다. 또 다음해 신유辛酉 정월正月에는 소사업蕭嗣業으로 부여도扶餘道 총관摠管을 삼고, 임아상任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 총관摠管을 삼아 군사 35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8월 갑술甲戌에 소정방蘇定方 등은 고구려와 패강浿江에서 싸우다가 패해서 도망했다. 건봉乾封 원元년 병인丙寅(666) 6월에 방동선龐同善·고임高臨·설인귀薛仁貴·이근행李謹行 등으로 이를 후원케 했다. 9월에 방동선龐同善이 고구려와 싸워서 패했다. 12월 기유己酉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을 삼아 육총관六摠管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총장總章 원元년 무진戊辰(668) 9월 계사癸巳에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藏王을 사로잡았다. 12월 정사丁巳에 포로를 황제에게 바쳤다. 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국사國史>에는 이 절을 고쳐 지은 것이 조로調露 원년元年 기묘己卯(679)의 일이라고 했다).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신라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혹 효소왕孝昭王 때의 일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신라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해서 황제도 그를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에 아뢰게 했더니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냈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대왕(大王)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미(辛未; 681)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의해서 동해중(東海中)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은 평시(平時)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崇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짐승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榮華)를 싫어한 지가 오래되오. 만일 추한 응보로 내가 짐승이 된다면 이야말로 내 뜻에 맞는 것이오."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 여기에 쌓아 두니 이것이 우창(右倉)이요,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0보(步)다"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덕왕대(眞德王代)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마치고 안북하변(安北河邊)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城郭)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官吏)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그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災禍)를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인덕(麟德) 3년 병인 (丙寅;666) 3월 10일에 어떤 민가(民家)에서 길이(吉伊)라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總章) 3년 경오(庚午; 670) 정월 7일에는 한기부(漢岐部)의 일산급간(一山級干; 혹은 성산아간成山阿干)의 종이 한꺼번에 네 아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에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 상으로 곡식 200석(石)을 주었다. 또 고구려를 친 뒤에 그 나라 왕손(王孫)이 귀화(歸化)하자 그를 진골(眞骨)의 지위에 두게 했다.
어느날 왕은 그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재상이 되어 백관(百官)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하니 차득공은 말한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小臣)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남몰래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민간부역(民間賦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세(租稅)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官吏)의 청렴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아 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왕은 그 말을 좇았다. 공(公)은 승의(僧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들어 마치 거사(居士)의 모습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주春州)·북원경(北原京; 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러 두루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노라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청해다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했다.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妻妾)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 자는 자는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오"했다. 그 중에 아내 한 사람이 말한다.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거사는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 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흠모하여 변장하고 처용의 아내와 동침.)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南山)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玉刀劍)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 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가락국기(駕洛國記)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癸卯; 43)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耕作했기 때문에 신답평新畓坪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命)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聖人)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九干)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아질간(阿叱干)·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189)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이 나라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면 둘레가 300보(步)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인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사당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 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庶云잡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 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자(資)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갱世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차·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己卯; 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仇衡王)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빠뜨리기도 했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 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신라 말년에 충지잡간(忠至잡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높은 금관성(金官城)을 쳐서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아간(英規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端午)를 맞아 고사(告祠)하는데 공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 삼척(三尺)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더니,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괴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필시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크게 노하신 것인가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두려워하여, 화상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먼저는 영규가 있고 이번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이 화살을 쏘아서 7,8명이 맞아 죽으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나 버렸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길이 30여 척이나 되는 눈빛이 번개와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 남은 자들도 모두 자빠지면서 도망해 흩어졌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