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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의 장>
문학상 수상작품을 읽다
풍성해진 문학상, 과연 좋은 흥행 카드일까?
임종욱
1. 나의 독서권(讀書權)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 필요한 책이 있어서 시내 대형 서점엘 갔다. 세계 10대 출판 시장에 진입한 우리나라답게 무수히 많은 다종다양한 책들이 진열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업화된 대형 서점은 책들도 내용별로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는데, 서가의 어디를 먼저 찾는가는 곧 그 사람의 독서 취향이나 관심사를 말해준다. 아이들이라면 아동 대상 서적이 꽂혀 있는 구역을 먼저 찾을 것이고, 주부라면 요리책이나 음식 관련 서적에 먼저 관심이 갈 것이다. 또 처세술 관련 서적이나 기술 관련 서적으로 눈길을 주는 사람도 있겠다.
나는 주업이 소설 창작이고 인문학 관련 일을 주로 하다 보니 서점에 들어서면 으레 그런 책이 있는 코너에 오래 발걸음이 머문다. 신간으로 어떤 책이 나왔는지, 또 책의 저자는 누군지 살펴보다가 흥미 있는 책이 있으면 서문이나 앞부분을 조금 읽어보고는 구입한다.(온라인 서적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책은 직접 침을 발라가며 넘겨보고 사야 뿌듯하다) 아예 작정을 하고 갔을 때는 그런 절차 없이 바로 책을 사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마다 책을 고르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시대가 소설의 시대라(사실은 처세술의 시대지만) 소설 판매 코너는 서점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고 찾기 쉬운 중앙에 자리해서 손님의 손길을 기다린다. 워낙 많은 소설이 쏟아져 나오니 이 다운타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신간도 많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소설 전문 진열대에는 근래 가장 많이 판매되는 베스트셀러가 순위에 맞춰 장기 집권 차비를 갖추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전적으로 좋은 책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야 다들 말하지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책이 여느 책에 비해 남다른 장점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베스트셀러는 대개 신간이 차지한다. 물론 오랜 기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는 책도 없진 않지만,(사실 이런 책이 많아야 한다) 유명 작가의 작품이나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시의의 적정성 등이 다량 판매라는 결과를 좌우하다보니 역시 신간이 그런 요건을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 베스트셀러 진열대에는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책들이 순위에 올라 있었다.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책이긴 했지만 한 권은 나온 지 몇 달 된 책이었고, 한 권은 몇 년 전에 나와 지금은 후미진 구석에나 꽂혀 있거나 출판사 창고에서 썩고 있을 법한 책이었다. 의외의 순위 진입에 놀란 나는 무엇이 독자의 관심을 끌었는지 궁금해 설마와 역시 사이를 방황하면서 그 책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책은 올해 1월 중순 경에 엄청난 시청률을 올리며 종영한 주간 드라마(타이틀을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것이다)에 소개된 덕분에 갑자기 판매고가 는 책들이었다. 그 두 권의 책 가운데 몇 달 전에 나온 한 권은 사두긴 했지만 읽지 않았고, 또 한 권 유통기한(?)이 지난 책은 전에 읽어본 것이었다. 읽지 못한 책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자격이 없으니 그만하고, 이미 읽어본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에는 입맛이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판단으로 그 소설은 그럴 내용도 그럴 가치도 없는 작품이었다. 드라마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해서 덩달아 책을 사 보는 게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자칫 서가의 뒤편으로 사라질 뻔한 좋은 책이 다시 생명을 얻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남들이 사서 읽으니 나도 사서 읽는다는 식의 충동 독서가 바람직한 독서 습관은 아닌 듯하다. 선거에서 지지율이 높은 후보자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도 찍겠다는 태도와 별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기 십상이다. 후보자의 성향은 어떻고 내세우는 공약은 무엇이며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 내 주관과 판단에 따라 선거를 해야 후회가 없지 않겠는가?(그러고도 손가락 자른 사람 많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갈피를 못 잡겠다고 남의 식성이나 호객 행위에 맞춰 구매한 책이 진짜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 실망하거나 충동구매답게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선거 결과야 길게는 몇 년을 후회하게 만들지만 책이야 고작 만 원 안팎의 손해를 보는 것인데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은 책 한 권, 돈 만 원의 손실로 끝나지 않는다. 충동구매도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계속 책을 구매하면 그게 타성이 되고 만다. 이런 타성은 자신에게도 손해지만 좋은 책은 뒷전으로 밀리고 가치 없는 책이 독서 시장을 잠식하는 악순환을 빚을 수도 있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갑자기 책이 많이 판매되는 예가 이번만의 일은 아니다. 때로 유명 인사(그게 대통령이면 최고다. 연쇄 살인범이 읽었다고 알려져도 효과는 비슷할 것이다)가 읽었다고 해서 판매부수가 불쑥 상승한 경우도 있었다. 뜻밖의 횡재(?)에 출판사나 저자는 즐거운 쾌재를 토해내겠지만, 독서마저 주체적인 판단과 취향에 따르지 못하고 남의 안내나 계시를 좇는다면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드라마나 유명 인사라고 해서 나의 독서권을 침해할 권한은 없는 일이고, 그래서도 안 된다. 자기주도형 학습이 절대 진리인양 북소리가 작열하는 이 시대에 이런 식의 독서는 단순암기식 학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단순암기식 학습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을 암기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주도적 학습이 이뤄지겠는가? 옛날에는 4절짜리 노래도 거침없이 외워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노래방에 가지 않으면 한 구절도 따라 부르기 힘들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일에 아무런 저항감도 갖지 않고 책을 고르는 사람들에 있다. 남이 떠먹여 줘야 생존하는 식물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섭생이 결코 사람의 정신 건강을 증진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남들은 나쁘다고 비난하는 책일지라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는 수도 있다. 자신의 소화 능력이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 책의 가치는 얼마든지 진폭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가이드의 안내에 맹목적으로 따라다닌 여행은 보편적인 경험을 남길 수는 있다. 그러나 때로 이런 여행은 꼭 봐야 할 명소의 탐방보다는 불필요한 쇼핑 코너에서 물건을 사느라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예가 허다하다. 나만의 자발적인 공간이어야 할 독서가 이렇게 수동적이 될 때 참된 의미의 독서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힘들어도 배낭여행이 얻는 것이 많듯이 스스로 좋은 책을 찾아 읽는 일은 더 큰 효과와 만족감을 준다.
왜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꺼내는가 하면 요즘 이곳저곳에서 유행처럼 개설하고 있는 문학상 제도 때문이다. 물론 문학상을 만든 취지는 좋은 작가들이 각고 끝에 써낸 책에 대해 응분의 보상을 주고 발굴해 낸다는 것이다. 상금이 5천만 원이나 1억 원쯤 되면 일확천금은 아니더라도 가난한 문생(文生)의 처지로 보면 솔깃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당선과 함께 받는 주목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리라.
달리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마케팅 효과를 염두에 아니 두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어지간한 작가도 책을 내면 2천 부 나가기가 어려운 출판 불황 속에서 독자의 시각을 자극할 동기가 필요한데, 문학상 당선작이란 타이틀만큼 알리기 쉽고(돈으로 해결되니까) 구매력을 확실히 끌어올릴(독자도 관심을 가진다) 방법이 또 있을까? 영국의 유명한 작가 서머싯 몸은 무명 시절 자기 소설이 하도 안 팔리자 기발한 판매 전략을 고안해냈다. 저명한 신문 지면에 자신은 청년 재벌인데, 신부감을 구하고 있다, 그 신부감의 조건은 서머싯 몸이란 작가가 쓴 아무개 소설에 나오는 여성 샅은 품행과 교양을 갖추면 된다는 웃기는(?) 광고를 냈다고 한다.(과연 서머싯 몸답다) 그러자 ‘청년 재벌’이란 간판에 눈이 먼 젊은 여성들이 너도나도 그의 책을 사는 바람에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도 약간의 관성이 있어서 한 번 순위에 올라가면 그냥 쭉 나간다.(그러니 출판사에서 그렇게 기를 쓰고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게 아니겠는가?) 좌우간 서미싯 몸이 그 뒷수습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다면 문학상 제도는 나쁘지 않은 마케팅 전략이라고 하겠다. 아시다시피 한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이 나오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또 민음사에서 공모한 ‘오늘의 작가상’은 오랜 기간 작가 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좋은 작품과 그에 어울리는 판매 실적을 올렸다. 지금도 예전만하지는 않지만 구매력은 여전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원의 어두운 골짜기에 숨어 붓을 갈며 내공을 쌓던 무명의 문객들이 이 관문에 통과하고자 벌떼처럼 일어나는 형국이 도래했다. 요즘 문학상은 순수문학 대상도 있지만 이른 바 장르문학 대상도 많아 문객들로 하여금 더욱 다양한 진법(陣法)을 구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그 간극이 점점 좁혀지는 현상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대개 양종교배를 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어지간한 문학상이면 약간의 과장은 있다고 해도 몇 백 편의 장편들이 응모한다고 한다. 문객들의 한탕(?)주의와 출판사의 판매 전략이 이만큼 잘 맞아떨어진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문학상 수상 작품은 출판사의 기대만큼 잘 팔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것을 떠나 그런 거금(?)을 받을 만큼 수준을 담보하고 있는 것일까? 몇 년 전 조선일보사에서 기염을 토하며 제정한 ‘뉴웨이브 문학상’ 1회 수상작이 수많은 심사위원들의 천구가 내려앉을 듯한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북극도 녹여버릴(사실 많이 녹았다) 뜨거운 지지, 새 구세주가 도래했나 싶을 만큼 눈부시고 가슴 설레는 찬사 속에 선정되었지만, 문학상 수상작으로서는 최악의 작품이라는 세간의 악평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문학상이 이상하게 변질된 데에는 이때의 공로가 무척 컸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문학상 당선작이라는 상호는 분명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도 문학상 수상작이라면 읽지는 못해도 일단 사두는 편이다. 수요가 많으면 공급도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데, 공급이 늘다보면 불량품도 늘어나는 게 역시 당연하다.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공모전에 떨어진 작품들만 모아 전람회를 열어 성공했다는 풍문도 있지만, 문학상 당선작의 실상이 과연 어떠한지 한 번 점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근래 내가 읽은 세 편의 문학상 수상작을 읽은 소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2. 제2회 네오픽션 문학상 수상작 : 살인자의 편지, 유현산, 2010, 자음과 모음
우선 이 작품은 분량이 450페이지에 이르러 예감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취향이 얇은 소설보다 두꺼운 소설을 좋아한다. 시간이 남아두는 백수라서도 아니고, 본전 생각만 앞세우는 구두쇠라서도 아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묵직한 볼륨감의 작품이 왠지 생각할 거리와 미덕을 더 많이 갖췄을 것으로 나는 막연히 짐작한다. 그래서 살인자의 편지를 집어들었을 때 페이지를 확인하고는 공연히 엄숙해졌다.
일본이나 미국, 유럽 시장에서는 연쇄살인자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나와 있지만, 우리나라 추리소설로 이런 주제(또는 소재)를 다룬 작품은 처음인 듯하다. 사실 우리나라 추리소설계는 여러 모로 위축이 되어 있고, 앞으로도 나아질 전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좋은 작가가 발굴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작품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애정과 성원으로 우리 추리소설을 사 봐주는 독자들의 정성이 부족한 점도 아쉽기는 하다. 장르소설의 성장이란 게 콩나물 키우기와 비슷하다. 잘 자라도록 자꾸 물을 부어줘야지 성장이 눈에 더디다고 내버려두면 다 고사하고 만다. 변변한 추리소설 문학상 제도조차 없는 우리나라 실정. 그러나 추리소설 독자층이 얇지는 않다. 전부 외국의 추리소설에 길들여지고 눈높이가 맞춰져 우리 추리소설이라면 괜히 가재미눈을 뜨고 보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 현실에서 본격 추리소설이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긍정적인 신호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연히 이 책의 출판과 비슷한 시기에 나는 또 한 권의 연쇄살인자를 다룬 우리 추리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미애씨의 잘 자요 엄마란 작품이다. 그녀의 매력적인 추리 단편을 읽은 나로서는 그녀가 장편 분야에서도 좋은 작품을 내기를 내심 성원하는데, 기존의 인형의 정원(이 작품도 약간은 연쇄살인자 이야기다)이나 이번 잘 자요 엄마는 솔직히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우선 이 자리를 빌어 작가 서미애가 장편 분야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내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또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와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가 같은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독자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이 책의 장점은 뒤로 돌리고 먼저 몇 가지 아쉬운 부분들을 정리해 보겠다.
(1) 이 작품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작가가 떠오른다. 물론 그 작가 이야기는 내용에서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가 두껍게 드리우고 있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 작가는 김훈이다.
김훈 투의 또는 김훈 풍의 문체가 이 소설에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소설의 중후반부쯤 가면 소방관이 어떤 집에서 일어난 화재를 진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의 2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다. 그런데 그 상황 설정이나 진행이 내가 볼 때는 완전히 김훈 판박이였다. 김훈의 소설에는 두 차례 화재 장면이 나온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과 공무도하가 그것이다.(신기한 것은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도 처음부터 화재 현장 묘사로 시작된다. 세 작가의 화재 장면 묘사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그 장면은 문체부터 상황 처리까지 여러 모로 김훈의 그것과 닮았다. 김훈의 작품 속에 슬쩍 끼워 넣어도 구별해내기 힘들 것 같다. 중간에 송수 호스 사이 노즐이 빠져 허덕거리는 장면은 내 기억에 김훈 소설 어디에서도 본 것 같다.(확인은 못했으니 장담은 할 수 없다)
이게 무슨 뜻일까? 김훈 투 문체의 냄새는 전체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배어난다.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도 없다. 아직 이 작가는 자기 문체에 대한 수련이 덜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당선자 대담을 보니 자신도 김훈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훈 투는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작품의 주무대 가운데 하나인 '영흥시'를 비롯한 여러 지명들이 실제 지명이 아니고 가상의 지명들인데, 김훈이 전형적으로 이런 기법을 쓰는 작가다. 또 등장인물의 풀네임을 다 달아주는 것도 김훈식이다.(다른 작가 중에도 그런 사람이 없진 않겠지만, 김훈이 가장 독창적이고 실감이 난다.)
(2) 다음으로 불필요한 서사가 많이 눈에 띤다. 당장 위에서 말한 화재 장면 묘사는 사실 소설의 흐름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부분이다. 열심히 불을 끄고 봤더니 연쇄살해 당한 시체 두 구가 있다는 것이다. 또 소설 앞부분에 가출한 청소년 여학생들의 원조교제 이야기도 너무 장황하게 길다. 사회의 병리현상을 밀도 있게 고발하려는 의도일 듯한데, 그렇다면 따로 그런 작품을 쓰거나 해도 좋을 듯하다. 역시 소설의 내용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 외에도 디테일한 묘사를 하려는 의욕이겠지만, 이런 과잉 묘사가 자주 눈에 띠었다. 이런 장면들은 소설에 몰입하는 데 장애가 된다. 두꺼운 소설이니 봐줘야지 한다면 오산이다. 두껍기 때문에 더 그렇다. 추리소설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긴장감을 잃지 않게 만드는 속도감이다. 불필요한 서사는 집중력도 떨어뜨리고 독자의 몰입도 분산시킨다.
(3) 이 소설은 연쇄살인자의 어떤 점에 주목하여 쓴 것일까? 잔학하고 냉혈적인 범인을 잡아내는 수사관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주는 소설은 아니다. 물론 한 수사관은 잔인하게 살해당한 희생자를 보고서 꼭 체포하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한다.(결국 그가 범인을 잡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범인과 수사관 사이의 머리싸움도 이 소설의 매력이기는 하다. 연쇄살인자는 작품 속에서 여섯 번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 동기는 일종의 응징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간 사람들을 살인자가 대신 처형함으로써 응징을 가하는 것이다. 법망을 빠져나갔다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 법망에 걸렸어도 죄가 아닌 경우도 있듯이. 또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범죄도 있다. 법이 다스리지 못하면 내(범인)가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하겠다면서 살인자는 살인을 저지른다.
이런 자세가 옳은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여섯 가지 경우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살인의 본래 동기와 다 일치하지도 않는다. 첫 번째 살인은 당연히 아니고, 네 번째 살인은 범인이 달리 있는 것처럼 끝난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소문만 듣고 애꿎은 사람(들)을 죽인 경우다. 정의의 이름을 내세워 사사롭게 형벌을 집행하는 자는 엄격하면 말하면 연쇄살인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동기를 가지고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이것은 경우가 좀 다르게 봐야하지 않을까? 더구나 희생자의 반수가 그런 동기에서 어긋나 있으니, 이것은 아무래도 작가가 작품을 치밀하게 구성하지 못한 탓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결말 부분도 어수선하다. 작가로서는 반전을 의식한 노력이겠지만, 독자들이 생각해야 할 몫까지 다 털어놓기도 했고, 너무 쉽게 범인이 범죄 사실을 자백하며, 회개하는 차원에서인지 자살을 하는 것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응징했다면 좀 더 강력하게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모습이 더 범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4) 마지막으로 범인 감추기의 문제다. 대개의 추리소설이 그렇듯이 범인은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다들 그럴듯한 가능성은 가지고 있으니 찾기가 쉽지는 않다.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설마 이 사람은 아니겠지, 일종의 미끼일 거고, 그러면 누굴까? 고심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미끼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너무 많은 사연을 드러내놓는 것도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연들을 소설이 다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화라면 결말에 다들 이렇게 저렇게 살고 있다는 설명 한 줄이면 족할 것이다. 1Q84에 보면 소설 속에 불필요한(즉 쓰이지 않을) 소품들은 등장시키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안톤 체호프의 말로 인용되는데, 경청할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보면 소품들이 너무 많다.
작품의 후반부 진행은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데, 정작 그 부분의 밀도 높은 이야기는 담아내지 못했다. 범인이 자신의 주장을 언론을 통해 당당하게(?) 주장하고 이에 동조자가 생기면서 사법 기관이 궁지에 몰리지만 결국 그 허구성을 폭로하여 통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모방범이 지닌 마력의 하나다. 그런데 정작 살인자의 편지는 핵심은 드러내지 못하고 변죽만 너무 자주 울려 작품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 더 하자면 이 소설은 10월 23일 네 번째 살인이 벌어진 시간을 기점으로 하여 선후 시간이 결정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 작가가 날짜 계산에 조금 소홀했던 느낌이 든다. 한 예로 딸의 장례식을 1주일이나 하는 경우도 있을까? 보통 3일장이 아닌가? 또 살인의 무대가 되는 ‘영흥디자인센터’는 ‘영흥시’라는 가상의 도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느닷없이 ‘경기도 용인시 동구 계로동’(소설 25쪽)에 위치했다고 알려주니 황당하다. 이처럼 선후 관계가 맞지 않는 언급이 몇 군데 있었다. 독자들이 시시콜콜 이런 오류를 잡아내지는 않겠지만, 소설의 완성도는 덩달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는 장점도 적지 않다.
경찰 과학 수사대(CSI)의 활동 장면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작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예비 조사를 충실히 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또 등장인물들의 개인사와 그것이 야기한 심리적 갈등도 잘 묘사했다. 무엇보다 450페이지에 이르는 긴 서사를 무난하게 꾸려낸 점도 작가의 역량을 기대하게 만든다. 또 편지와 같은 서사물(書寫物)을 이용해 과학적으로 범인의 윤곽을 잡아가는 장면도 아쉽기는 해도 신선한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김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문체의 힘도 있어 보인다.
3.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오수완, 2010, 뿔
작년 1회 수상작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2회 수상작이 나왔다. 그것도 2편 공동수상이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면 1회 수상작을 냈다가 2회 때는 수상작을 안 내는 것이 문학상의 풍토가 되어가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뉴웨이브 문학상’은 1회 때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1회 때는 수상작이 없었다. 또 위즈덤하우스에서 공모한 ‘멀티문학상’은 작년이 2회째인데, 정말 무책임한 심사평과 함께 수상작을 내지 않았다. 연초에 공모하는 상이니 지금쯤(2월 초순) 3회 공모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이미 나왔는데 내가 보지 못했거나 그 사이 나왔다면 양해하시기 바란다.)
공동 수상작 가운데 트렁커를 읽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는 여성들이 쓴 작품에는 자신이 없다. 두 작품 모두 버릴 수 없었기에(아니면 다 버려야 했기에?) 문학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동시 당선작을 냈겠지만 심사위원들의 자신감이 아쉽다.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소재나 기법에 있어 기존의 우리 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를 하고 있다.
책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이미지와 그것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형식에 대한 성찰, 궁극의 것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 따위를 이 작품은 비교적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조금은 차가운 문체나 서술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의문과 상황들. 그리고 그 상황들이 다음 상황을 도출하도록 만드는 장치들. 여러 가지 흥미를 끌 만한 요소들이 잘 장착되어 있다.
이 작품은 무려 56개의 챕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340페이지 분량의 책이니 챕터 당 안배된 분량은 평균 6페이지도 안 된다.(중간에 회색 종이로 각각 15페이지, 31페이지씩 차지하는 챕터를 빼면 더 줄 것이다.) 소설의 형식이 주인공이자 서술자의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따져보면 수많은 메모들로 짜인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메모란 것이 무엇인가? 핵심적인 내용만 적어놓는 것이다. 과정이나 동기, 결과, 영향 등등을 자세하게 메모에 적을 수는 없다. 그래서 메모는 타인의 눈으로 보면 암호처럼 보인다.(시간이 지나면 당사자에게조차 그렇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 메모와 소설은 다르다. 메모를 모아둔다고 소설이 될 리 없고 소설을 아무리 잘게 쪼갠들 메모가 되어서도 안 된다.
출판 파동이나 분서, 국민대행동 등등 이 소설이 전개시키는 정황은 마치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여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알레고리라고 보기엔 방향성이 일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세계의 책이라고 하는 한 서적을 손에 넣기 위한 보물찾기가 이 소설의 주제는 아닐 듯한데 마지막까지 소설은 그런 문제에 대해 툭툭 궁금증과 단서를 던지다가도 적당히 덮어버린다.
앞서 메모 형식의 소설이라 했는데 ‘반디’라는 주인공이자 서술자는 아홉 권의 책을 찾아나가면서 앞서 발견한 책이 다음 책을 찾는 단서를 담았다고 했지만 그게 뭔지는 조금도 설명하지 않는다. 메모라서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참 곤란하다. 소설은 분명 긴장감도 주고 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 궁금증도 불러일으키며, 오랜 기간 창작 수련을 한 작가답게 자기만의 개성적인 문체도 가지고 있는데, 소설의 진행만은 철저하게 자기만족적이다. 작가만 알고 있을 뿐 독자에게는 시치미를 딱 뗀다.(알아서 상상하라는 배려일까? 아니면 진짜 없는 걸까?)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대개 평이했다. 심오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고, 때로는 너무 진부해서 실소를 자아내게도 만들었다.
서울 어딘가에 일제 말기 때 만들어진 81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방공호?(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예전에 읽었던 황당한 소설 건축무한육각면체의 비밀이 연상되었다. 건축기사 이상이 설계해서 완성했다고 하는 서울 시청 아래 지하에 조성된 거대한 건축물.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상상이 일탈하여 망상에 이르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대한 방공호가 서울 시내 모처에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내용으로 볼 때 가로 세로 각각 9개씩 81개의 방이 될 텐데 공간적으로도 넓은 구역을 차지하지만 무슨 방공호를 그렇게 건설할까? 휘발유통 하나 때문에 그 거대한 방공호가 전소해버린다는 것도 실상보다는 소설의 줄거리에 꿰맞춘 느낌이다.
또 아홉 권의 책을 통해 완성해낸 방공호 미로찾기의 단서는 결국 마방진(魔方陣)의 행태를 띠었다고 했고, 그 단서를 근거로 최후의 인물을 지하 방공호에서 찾아낸다. 나도 전에 소설에 써먹어 볼 까 싶어 마방진에 대해 공부하다 하도 골치가 아파 포기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의 작가라면 당연히 마방진이 뭔지는 알 것이다. 빈 칸 속에 숫자가 모두 채워진 마방진이 어떻게 81개의 방마다에서 앞쪽과 왼쪽, 오른쪽에 설치된 문 가운데 안전한 한 쪽 문을 지시하는 것일까? 떡떡 다 찾아갔으니 뭔가 비밀의 열쇠는 있겠지만 작가는 ‘마방진’이란 말만 던져놓았을 뿐 그 비결에 대해 알려주는 데는 너무 인색하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들려주는 비밀은 또는 책은 그 길고 긴 어드벤처와 탐색의 과정을 등가적으로 보상하는 내용이 아닌 것 같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공의 책과 저자들의 프로필, 또 그런 책들이 담은 내용이나 성격 등에 대한 진술은 분명 대단히 흥미 있고 이 소설의 백미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결코 실패한 작품은 아니고, 문학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솔직히 이 소설이 방대한 문헌을 섭렵한 결과로 얻어진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약간만 관심을 가지면 얻을 수 있는 단편적인 지식을 잘 버무렸다는 점에서 노고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국문학을 조금만 깊이 전공했으면 알만한 내용인데, 그런 정보를 적절하게(?) 배치했으니 그것도 작가의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근래 읽은 소설 가운데 그래도 수작에 속한다고 애써 위안은 삼지만 너무 많은 부분이 함량 미달로 보이는 것도 숨길 수 없다. 어쨌거나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해본다.
4. 제4회 뉴웨이브문학상 수상작 : 굿바이 욘더, 김장환, 2011, 김영사
이 소설은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소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정확하게 연도는 나오지 않지만 2047년 전후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김홀’은 2017년생이고, 2043년 차이후와 결혼했다.(소설 59쪽) 그리고 얼마 뒤 아내는 암으로 죽고, 절망한 주인공은 2년 동안 술독에 빠져 아픔을 삭이다가 정신을 차린다. 결혼하고 2년 뒤에 아내가 죽었다면 2047년쯤이 될 것이다.
왜 이렇게 소상하게 날짜를 따지는가 하면 이 소설은 앞으로 46년 후인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도배된 미래 한국 사회(여기서는 통일이 된 것으로 나온다) 뉴서울(New Seoul)이 배경이다. 그때까지 내가 생존해 있을 확률은 1%도 되지 않지만, 내 아이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아갈지 궁금하기는 하다.
잠깐 내 개인 이야기를 하나 하자.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를 다니던 시절, 우리 사회를 주문처럼 홀렸던 구호가 ‘천 불 소득, 백억 불 수출’이었다. 그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 세상은 지상낙원이 될 것처럼 언론과 정부는 떠들었다.(그때는 남이나 북이나 선전의 외형은 달라도 내용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조잡한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학교 담장에 붉은 글씨로 이 구호가 굵직하게 쓰여 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등굣길과 하굣길마다 그 구호를 읽으면서 어린 나는 아마도 아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천 불 소득이 되고 백억 불을 수출해도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시 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심복의 총에 맞아 낙원으로 가는 해괴한 사건이 몇 년 뒤에 벌어지고, 신군부에 의해 또 다른 지옥은 왔지만 지상낙원은 도래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2만 불을 오락가락하고 수출액은 몇 천 억 달러에 이른다. 분명 1970년대 초반과 비교할 때 2010년대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40년이 흘러 지금이 왔고, 지금으로부터 40년 뒤의 이야기를 이 소설은 하고 있다. 중앙 관리 센터 비슷한 곳에서 전국민의 생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척척 확인해내는 기술력의 시대를 살게 된다. ‘핸디’에 대고 말만 하면 알아서 택시가 날아온다.(콜택시와 비슷하긴 한데 뭔가 더 세련되어 보인다) 휘황한 불빛들이 밤거리를 장식하고, 가상공간을 넘나들며 실제 인물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도 아이 때 잔영이 남아 있듯이 40년 뒤의 미래도 현재의 잔영 속에 고도 기술 사회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40년 뒤 미래 사회의 일을 상상하며 이 소설을 썼겠지만 읽는 나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생명 공학 연구의 수준은 2011년 현재에서 더 진행된 것이 없다. 냉동인간 프로젝트도 아직 ‘진보하고’ 있는 상태고, 줄기세포 연구는 여전히 상용화되지 않았으며,(소설 211쪽) 은행 모기지 문제로 사람들은 고민하고 있다. 또 소설 속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로우 테크’ 수준의 일들은 그때 가도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암시로 보인다. 작가가 지금 현재의 공간에 몇 가지 하이테크가 현실화된 소재들을 덧붙여 미래를 세팅해 놓은 것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다. 솔직히 말한다면 작가는 막연하게 미래 사회를 묘사했을 뿐이지 미래 사회가 어떤 식으로 현실화될지 충분히 고민하거나 상상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런 탓인지 소설을 읽으면서도 사건의 내용이 그다지 40년 뒤 미래의 일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 많은 부분들이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도 실현될 수 있는(보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이었다. 14장에 길게 서술되고 있는 ‘사이보그 타운’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상투적이라 낯설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사실 단순하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남자가 그녀의 뇌기억이 다운로드되어 있는 가상의 공간 ‘욘더’에 가서 아내와 재회했지만, 그곳이 아내를 진정하게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닫고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보내 안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겁탈을 피해 달아나다 뱀에 물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사랑과 음악의 힘으로 저승에서 구원해 돌아오지만 금기를 어기고 아내를 돌아보았다가 영원히 잃고 말았다는 오르페우스 신화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이 소설은 영원한 상실이 곧 구원이라는 다른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은 비극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피엔딩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차라리 비극이었으면 작품의 의미가 좀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더구나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와 함께 죽음(영원한 소멸)의 길로 가지 않고 ‘김홀’만 현실로 되돌아오는 설정은, 그것이 복선도 있었고 반전을 노린 장치라고 해도 영 마땅치 않다. 소설이 지속시켰던 긴장을 너무 쉽게 와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왜 남자가 그렇게 아내를 사랑했고 잊지 못하는가에 대해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는 문제와 맞물려(소설은 그렇게 독자들도 감정이입하기를 바랄 뿐 주인공의 숭고한 사랑의 감정을 유기적으로 입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작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실감나는’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쏟아야 할 노력들은 외면하고 있다.
이 간단한 줄거리를 장편으로 엮기 위해 작가는 그 공백을 많은 부수적인 이야기들로 채워 넣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심 이야기가 되어야 할 ‘김홀’과 ‘차이후’의 이별과 재회, 재이별의 플롯은 배경처럼 밀려나고 말았다. 이야기는 결국 그쪽으로 매듭지었지만, 독자로서는 읽으면서 그 사실을 자주 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욘더’ 속에 구현되고 있는 공간도 너무 현실(그것도 2010년 현실)과 다를 것이 없어 평범해 보인다. 평범하니까 자연스럽고 성공한 묘사가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작가가 그런 공간을 새롭게 고안하는 일에 자신이 없었거나 안이하게 대응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또 아내 ‘차이후’가 ‘욘더’ 공간 속에서 갑자기 불행을 느끼는 계기도 엉성해 보인다. 현실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그들의 ‘아기’가 성장하지 않고 계속 아기로 남아 있는 것의 단조로움과 무변화성에서 그녀의 불행은 기인했다. 현실의 물리적 시간으로 따지면 죽고 2년 이상이 지난 뒤 두 사람은 ‘욘더’에서 재회했다. 그럼 ‘아기’는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일까? 두 사람의 현실 세상에서의 희망이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고 했으니 그녀가 ‘욘더’로 막 갔을 때부터인지, ‘김홀’이 ‘욘더’에 왔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그 중간 어정쩡한 시간인지, 소설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기가 자라지 않는 것에 놀라고 불행을 느끼는 것으로 보아 ‘김홀’이 막 ‘욘더’에 막 왔을 때 생겼어야 정성인데(2년 전부터 아기가 있었다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진작 알았을 것이다), 성장하지 않는 것을 깨달을 만큼 시간이 많이 경과하지 않았다. 불행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하니 궁여지책으로 ‘아기’를 등장시킨 것이 아닐까? 그리고는 소설 속에서도 애교스럽게 ‘민담이나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 같’(소설 254쪽)다고 말하는, ‘욘더’를 떠나고 싶다면 ‘난 이걸 원하지 않아!’를 세 번 외치면 된다는 고안은 참으로 심경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는 여러 명의 부수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김홀’이 인터뷰한 두 인물, 고대문학 전공자에서 반미래학자로 변신한 ‘장진호 박사’(앞에서는 고대문학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뒤에 가서는 갑자기 ‘인공지능 개발 분야에서 특출한 아이디어로 평판이 높은 프로그래머’(소설 235쪽)로 전력이 바뀐다), 신종 유사 종교의 지도자격인 인물로 등장하는 ‘부흥사 K’(이 사람도 뒤에 가니 장진호 박사의 안드로이드가 되어 버린다).(그러니 두 사람의 어투가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치라는 여자아이의 자살 현장에서 만나 갑자기 섹스까지 하게 된 너스 프렉티셔너 ‘조은’, 사이보그 타운에서 만나 ‘미하일’, 먼저 죽은 가족들의 뒤따르기 위해 ‘욘더’로 가는 자살 행렬에 동참한 ‘최사장’, 그리고 ‘조은’의 동생 ‘조금’. 이런 인물들과 ‘김홀’이 나누는 대화는 너무 관념적이다. 일상 회화라고는 보기 어려운 전문지식이나 객관화된 정보를 교환하는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해 이런 인물들로부터 개성(Personality)은 찾아내기 어렵다. 그들은 너무 소설이 진행되어야 할 방향에 필요한 정보들만 충실하게 나열한다. 물론 그런 대화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일관되면 소설이 가져야 할 리얼리티가 떨어지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많은 부수 인물 가운데 누가 얘기해도 상관없을 이야기만 하는 인물이 개성을 지니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리고 소설 중간에 보면 ‘바이앤바이’와 ‘부흥사 K’, ‘브로핀 헬멧’의 제조사 사이에 ‘거대한 카르텔’이 개재되어 있으며,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한 조직일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을 장황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 뒤로 이 음모론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독자의 호기심을 잔뜩 자극해 놓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 구성요소라면 수정 과정에서 삭제했어야 마땅하다고 판단된다.
이 소설이 무엇보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문체다. 40년 뒤 미래 사회를 상상하면 그렸다는 소설의 문체답다고 해야 할지 비문(非文)이 자주 눈에 띤다. 표현이 진부한 곳도 적지 않다. 하나씩 든다면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었다”(소설 240쪽)는 신소설에서나 볼법한 표현이고, “나의 입술에 얼굴을 가져와 마구 키스하기 시작했다”(소설 100쪽)는 완연히 번역투의 문장이다. 주관적인 판단의 문제긴 하지만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묘사든 서술이든 표현 방식이 어색해서 문장 수련을 충분히 하지 못한 티가 물씬 풍긴다. 또 아무리 미래 사회라고 하지만 영어 용어들을 지나치게 남발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긴 40년 뒤면 한국어 대신 영어가 상용어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작가의 부주의함을 확인하고 이 소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한 계기는 소설 속에 나오는 책 이름의 오류 때문이었다. 장진호 박사가 출간해 잘 팔리고 있다는 책 이름이 앞에서는『미래와의 결별』이었는데(소설 29쪽) 뒤로 가니 이름이 『미래학과의 결별』(소설 107쪽)로 떡하니 바뀌어 나오는 것이다.(두 제목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 이상일 것이다) 그새 개정판을 내고 서명을 바꾸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으니 같은 책임에 분명할 텐데, 이 무슨 조화인가? 이 소설의 초고는 분명 작가가 썼을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 책 이름을 쓰면서 앞부분과 뒷부분 두 번 인용할 때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단순한 교정상의 오자나 탈자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자신이 앞에 명명한 책 이름이 뭔지 한 번 살펴보지도 않은 것이다. 이 소설을 심사한 여러 사람들이나 ‘기기묘묘한 미래 풍경’이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신문사 측 누구도 이 우스운 오류를 찾아내지 못했다. 교정을 봤다는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글자 두 자 틀린 것을 가지고 뭐 그리 방정을 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조잡함을 웅변하는 경우임을 알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너무 이 소설을 나쁜 쪽으로만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연히 있지도 않는 먼지를 털려고 하지는 않는가?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이 다른 작품들을 제치고 수상작으로 뽑았다면 그만한 근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세기말적인 우울한 예언들로 스산한 이 시대에 미래 사회의 정체에 대한 담론을 펼쳤다는 점,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모티프를 빌려와 젊은 부부간의 애정의 문제를 패러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 또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대안과 문제점들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는 점, 아마 이런 것들이 아닐까?(더 큰 미덕에 대해서는 이 소설의 띠지 뒤편에 적혀 있다) 분명 이런 주제 또는 논의가 이 소설 속에는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소설의 완성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세계 평화를 외친 소설이라고 좋은 소설은 아닌 것이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심사위원들이 살짝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
5. 다시 생각해보는 문학상 제도
부언하지만 많이 팔린다고 좋은 소설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문학상 수상작은 많이 안 팔려야 좋은 작품일 수도 있다. 문학상은 대개 작품의 완성도나 실험 정신 등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하리파인(下里巴人, 지금 말로 하면 유행가쯤 된다)이 인기가 있고 양춘백설(陽春白雪, 굳이 따지자면 클래식이겠다)이 외면을 당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에 가까운 진리다.
세 편의 문학상 수상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아마추어리즘의 한계와 가능성이다. 세 작품 모두 실험 정신은 충분히 돋보인다. 다루고 있는 또는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만만치 않다. 이런 점에서 세 작품은 수상에 맞는 응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답게’ 써야 한다. 문체나 구성, 사건이나 상황의 호응 관계 등은 꼼꼼히 뜯어보면 문제점들이 하나둘씩 노출된다. 아직 창작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데도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치밀하고 꼼꼼한 구성과 완성된 문체를 구사하는 문제를 너무 소홀히 다룬 탓일지도 모른다.(말을 못할 뿐이지 꽤 명망이 있는 작가들에게도 한심한 작품은 나온다)
문학상 심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나는 모른다. 짧은 기간 동안 수백 편에 달하는 수준도 내용도 천차만별인 작품(그것도 장편)을 읽고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심사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수상작다운 작품을 뽑지 못하면 그 재앙은 독자와 작가, 주최하는 쪽 모두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안 좋은 작품이 수상작으로 소개되면 실망한 독자들은 문학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 기존의 전통 있는 문학상들이 자부했던 권위가 점점 바래져가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흥행을 위해 문학상을 공모하고 선정하는 상술 때문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이해관계를 가지고 공모한 문학상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그야말로 문단의 물만 흐려놓고. 많은 사람을 실망에 빠뜨린 채 사라질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문학상을 운영할 바에는 차라리 인기 있는 드라마에 슬쩍 표지가 나오고 유명 인사가 한 마디 언급해 주기를 기다리거나 공작을 펴보는 것이 훨씬 베스트셀러로 가는 첩경(捷徑)이 될 것이다.
임종욱/문학박사.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