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1897년 무렵 함경남도 원산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골프의 시초는 1900년경 함경남도 원산항의 한국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세관 안의 유목산 중턱에 6홀의 골프장을 만들어 경기한 것이 처음이다.
또 1913년 원산 근처 갈마반도(葛麻半島)의 외인촌(外人村)과 황해도의 구미포(九味浦)에도 외국인 코스가 있었고, 나무울타리로 막아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출입도 금지했기 때문에 규모는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골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영친왕(英親王)이다. 영친왕 부처는 1924년 무렵부터 일본에서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이따금 서울에 와서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
1921년 조선철도국은 미국인 댄트의 설계로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 9홀의 코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효창공원 골프장은 1923년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폐장되고 1924년 이왕가(李王家)의 육림 중심지인 청량리(淸凉里)로 옮겨 18홀이 완공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골프사상 처음으로 ‘경성골프구락부(京城俱樂部)’라는 골프클럽이 탄생하였다.
그 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골프장 건설붐이 일어났으며, 이같은 영향으로 1937년 9월 전국 골프구락부 협의기관인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가 경성골프구락부에서 열려 한국골프를 세롭게 도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연덕춘(延德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7세 때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골프수업을 받고 3년 만에 일본 오픈경기에 출전하여 8위에 드는 급성장을 보였다.
1941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일본 오픈경기에서 패권을 잡았다. 그가 배출한 수많은 프로선수 중에서 한장상(韓長相)이 1972년 일본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우승하였다. 한장상·김승학(金承學) 조는 1971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골프에 출전하여 단체 5위에 들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한장상이 한국 오픈경기를 제패하였고, 김승학은 아시아 서킷 1차전인 필리핀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하였다. 또 1974년 조태운(曺泰雲)이 한국 오픈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프로선수들은 큰 타이틀 5개를 쟁취하는 사상 초유의 ‘황금의 3년’을 맞이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최상호(崔上鎬)가 두각을 나타냈으며, 여자 프로골퍼로는 구옥희(具玉姬)가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고, 원재숙(元載淑)·고우순(高又順) 등도 일본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재일교포 김영창(金榮昌)은 1981년 미국에서 열린 제22회 세계아마시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 정상에 올랐다.
1996년에는 46개국이 출전한 제17회 세계아마추어골프팀 선수권대회에서 대회 역사상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여자 팀이 우승함으로써 세계 최강이 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세리가 미국여자프로선수권과 미국여자오픈대회에서 우승했고, 그밖에 김미현·박지은·펄신·송아리 등이 세계프로골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에 세계무대를 꿈꾸며 골프클럽을 잡는 주니어선수들이 급증하고 있어 2000년 현재 국내 프로골퍼의 수효가 남자 약 360명, 여자 140여 명으로 늘어났고 레슨 프로도 15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골프 유관단체는 골프협회를 중심으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한국시니어골프협회·한국대학골프연맹·한국중고골프연맹 등 10개 단체나 결성되어 골프 발전과 골프 대중화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전국 15개 시도지부 체육회 산하에도 골프협회가 설립됨에 따라 골프 경기도 전국체육대회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