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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김해김시의 뿌리 |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성을 갖고 있으며 그 성씨에는 반드시 본관(本貫)이 따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씨의 본관만 알아도 그 집안의 내력을 짐작하는 것이 한국성씨의 특징이다. 그러나 성씨가 대성인 경우에는 그 인구수의 방대함 때문에 그 집안의 내력을 추측하기란 어렵다. 우리나라의 대성인 김(金),이(李),박(朴)씨 중에서도 김씨가 가장 인구가 많다. 김씨성중에는 본관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김해김씨가 인구수 많기로는 으뜸이다. 몇 년 전 통계청에서 발표된 인구통계에 의하면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를 합하여 약800만 명이며 우리나라 인구의 약 20%나 된다고 하였다. 이 흔한 성씨인 김해김씨가 우리가족의 가문이니 우리집안에는 족보가 있으나 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김해김씨의 시조는 삼국시대 이전의 6가야국(伽倻國)중 가락국(駕洛國)의 건국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김수로왕은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린 황금 알에서 태어나 서기 42년(A.D)3월15일에 가락국(駕洛國)의 임금으로 즉위하셨으며 그 후 건국 7년이 되는 서기48년에 서남(西南)해상에서 배를 타고 오신 인도 아유타국(阿紐陀國)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였는데 성은 허(許)씨며 이름은 황옥(黃玉)이다. 김수로왕과 허왕비에게는 열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해김씨의 혈통을 있고 둘째와 셋째아들은 왕비의 소망에 따라 그의 성을 이어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동동칠불(洞東七佛)”로 성불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형제지간의 성인 것이다. 김해김씨와 김해허씨는 김수로왕이후 현재까지 약 2,000여년동안 72대에 이르기까지 후손이 번창되어 왔으며 현재는 한국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은 대성으로 발전하였다.
신라가 가락국을 합병하여 영토를 확장할 때 가락의 왕족은 모두 신라의 귀족으로 예우되었으며 특히 김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장군은 뒤에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때 큰 공을 세워 돌아가신 후에는 흥국왕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김해김씨의 후손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후에도 계속 조정에 충절을 다하는 명문가의 후예로 중신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와서는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찬탈을 계기로 김해김씨는 점차 벼슬을 멀리하며 향리에서 후학을 기르는 선비생활을 하게 된다.
김해김씨는 고려말에와서 여러 종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중 51세손 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 같은 형제분인 익경(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그리고 48세손인 관(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가 파생된다. 경파는 목경의 후손이 주로 서울에 살았다 해서 그 지명을 따서 경파라 하였으며, 사군파는 익경의 후손 중 학천군(鶴川君;8세손 克祚), 학성군(鶴城君;9세손 完), 해성군(海城君;10세손 汝水), 학림군(鶴林君;11세손 世器)의 네분이 대를 이어 武將으로 공을 세워 君으로 封해졌다 하여 사군파라 한다. 삼현파는 그 후손에서 삼현 즉 절효(節孝), 탁영(濯纓), 삼족당(三足堂)의 세분 현인(賢人)이 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管)자 할아버지는 고려왕조 충렬왕때 판도판서를 지낸 지조가 굳은 신하로 유명하다.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은 중시조의 5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신 분으로 성묘 때는 호랑이와 길동무를 하였다한다. 탁영공(濯纓公)은 김맹(金孟:절효공의 둘째아들)의 셋째 아들 김일손(金馹孫)이다. 조선왕조 성종때 이조정랑, 홍문관교리, 편수관, 직사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로 35세 때 억울하게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삼족당(三足堂)은 김맹(절효공의 둘째아들)의 장남인 김준손(金駿孫)의 아들 김대유(金大有:탁영공의 큰조카)이다. 조선왕조 중종때 선비로서 추앙을 받았으나 무오사화 때 부친과 같이 호남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후 다시 급제하여 칠원군수를 지내며 훌륭한 치적을 남겨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관직을 떠난 후에는 경상도 청도에 은거(隱居)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시. 서(詩.書)로 자족하였다. 그는 60이 지났으니 이제 나이도 족하고, 벼슬도 족하고, 의식도 족하므로 스스로 삼족당이라 호칭하였다 한다.
<참고사항> (1)김해허씨에서 분적(分籍)된 성씨(姓氏) <인천이씨(仁川李氏)> 신라 경덕왕조의 대관(許 0)이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당현종(唐玄宗)이 그에게 현종의 성인 이씨(李氏)성을 사성(賜姓)하였다. 그의 후손인 허겸(許謙)이 고려왕조에서 지금의 인천인 소성백(邵城伯)으로 봉(封)해짐에 따라 그의 작위를 따서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가 되었다.고려시대 이자연(李子淵),이자겸(李資謙)이 인천이씨 집안이다. <양산이씨(梁山李氏)> 시조는 이만영(李萬英)으로 아들 이전생(李全生)이 경상도 양산으로 와서 양산이씨라 했다. 이전생의 아들 이징옥(李燈玉)은 조선왕조 단종(端宗)원년 당시 함길도절제사(咸吉都節制使)로 있었는데 수양대군(首壤大君)의 정란(靖亂)으로 피살되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자원(滋源)과 차남 연원(淵源)은 아버지와 같이 피살되었고, 3남인 윤원(潤源)은 당시 8세로 경주월성으로 피신하여 살아 남았다 한다. 뒤에 이징옥의 9세손인 이진환(李震煥)이 그의 9대조인 이징옥의 사적을 왕에게 상신하는 과정에서 그의 조상이 김해허씨였음이 밝혀졌다.
(2)김해김씨지만 총친(宗親)이 아닌 성씨(姓氏) 김해김씨는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구분한다. 선김은 김수로왕의 후예인 김해김씨를 말하며, 후김은 김수로왕의 후예가 아닌 김해김씨를 말한다. 후김에는 두집안이 있다. 한 집안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렴(金濂)이 김해군(金海君)으로 봉(封)해 짐에 따라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의 6세손 김시흥(金始興)이 뒤에 김년군(金寧君)으로 봉해 짐에 따라 김영김씨(金寧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집안은 임진왜란 때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우선봉장(右先鋒將)인 사야가(沙也哥)와 그의 부하 한 사람이 조선으로 귀화(歸化)함에 왕이 이들에게 김해김씨의 성을 사성(賜姓)하였는데 전자를 김충선(金忠善)이라 이름하여 大邱에 살게 하였으며, 후자를 김성인(金誠仁)이라 이름하여 청도(淸道)에 살게 하였다 한다. 그래서 이들의 후손은 김해김씨라 하드래도 김수로왕을 시조로하는 김해김씨와는 같은 종친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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