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이다.” 이 말은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고어(Gore)가 1997년 베를린에서 열린 G7 회담서 말한 내용입니다. 이 발언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처음으로 발명했다는 사실을 국사 시간에 배워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직지]가 바로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금속활자 인쇄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지요. | |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해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간추려 보아도 [직지심체요절]이라 꽤 긴데, 줄여서 [직지]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고려 말에 국사를 지냈던 백운이라는 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입니다. 이 책은 원래 상하 두 권이었는데 현재는 하권만 남아 있고 그것도 첫 장은 없어진 상태입니다. |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
[직지]는 1377년에 인쇄되었으니, 1455년에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발명은 직지보다 훨씬 앞서서, 기록으로만 그 존재가 알려진 [고금상정예문]이라는 책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이상 앞서 있답니다. | |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였던 박병선 박사가 발견해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됩니다. 이 책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이 책이 한국의 것이며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것을 밝힌 분은 박병선 박사님입니다. 박사님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계시면서 이 책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신 혼자 노력으로 이 책이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그러는 과정에 활자를 만들다 불을 내기도 하는 등 박사님은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요? 이런 분은 우리의 문화 영웅입니다. | |
여러분은 이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강의를 할 때마다 이 질문을 하는데 항상 나오는 대답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프랑스 군대가 훔쳐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답이 둘 다 틀렸습니다. [직지]는 책이니 박물관이 아니라 도서관에 있어야 하고, 뺏어간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간 것이니 말입니다. 뺏어간 것은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침범해 그곳의 외규장각(왕실기록 보존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의궤였죠. [직지]는 한말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플랑시라는 사람이 정식으로 구매한 것입니다. 이것이 몇 단계를 거쳐 나중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직지]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 가운데 해당 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선정된 유일한 예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직지]는 우리나라 책이지만 우리나라에 있지 않았음에도 세계유산으로 인정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유네스코 관계자들이 이 [직지]를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했을 때 이 책이 한국에 있지 않아 불합격 요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네스코 당국은 이 책은 지구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소재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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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가 보관되어 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열람실. <출처 : Zubro at ko.wikipedia.com> | |
금속활자의 발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100대 사건 중 1위
그런데 이런 사실은 꽤 알려진 것 같은데 이 사건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별로 알려진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이 금속활자를 인류 역사 최초로 발명했다는 것은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항상 문화를 수입하기만 하던 중국을 제치고 금속활자를 먼저 발명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고려가 당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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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불가타 성서, 제1권, 구약성서, 성 제롬의 편지.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금속활자의 발명이 인류역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는 것은 다음의 이야기로 알 수 있습니다. 1999년인가 쯤에 미국의 유명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지난 1천 년 동안 있었던 사건 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대 사건을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1위를 한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었답니다. 종교혁명이니 산업혁명이니 하는 그야말로 굵직한 사건들을 다 젖히고 금속활자 발명이 이렇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
양피지로 만든 히브리어 성경. 부피도 크고, 만들기도 어려운 이런 양피지의 특성 때문에 지식은 수도원이나 권력이 있는 군주에게만 독점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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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금속활자와 인쇄문화의 발전이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활자란 책을 찍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책이란 게 무엇입니까? 책은 인류 문화발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전까지 책은 아주 희귀한 물건이었습니다. 특히 서양에서는 책을 만들 때 양피지를 썼는데 책 한 권 만드는 데에 엄청난 양의 비용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은 군주들 혹은 수도원에서나 소유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죠.
당시는 이처럼 책이 별로 없어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책을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자 인류의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책은 인류가 지닌 지식이나 지혜를 순식간에 공유할 수 있게 해줍니다. 책은 인쇄되자마자 도처로 전달될 수 있으니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이 나오면 금방 전 인류가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책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니 그 지식이 계속 축적될 수 있습니다. | |
금속활자와 인쇄문화, 인류 지식의 순환과 축적을 돕는 중요한 진일보
이렇게 지식이 전 지구적으로 순환되고 축적되니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로 인류의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유럽사에서 매우 큰 사건이었던 종교혁명도 그렇습니다. 루터의 생각이 그렇게 빨리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금속활자로 인쇄한 문건 덕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이나 과학혁명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래서 카알라일은 “종이와 인쇄가 있는 곳에 혁명이 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금속활자의 발명이란 인류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활자를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맨 앞에서 고어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류가 지금껏 사용해왔던 인쇄술은 고려의 것이 아니라 구텐베르크의 기술입니다. 우리나라나 중국은 금속활자 기술을 그다지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초판부터 180부의 기독교 성서를 찍었지만, 우리 기술로는 10부 정도밖에 못 찍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금속활자 기술을 더 발달시키지 않았던 것은 목판술이 발달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판은 만들기는 어려워도 인쇄하기는 아주 편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나 중국은 금속활자를 크게 발전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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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의 큰 사건이었던 종교혁명도 금속활자의 발명에 의한 영향을 받았다. <출처 : Willi Heidelbach at en.wikipedia.com> | |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라는 자부심을 느껴야
그러나 사정이 어찌 됐든 세계 최초라는 게 어딥니까? 그것도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최초 발명국이라는 게 말입니다. 이런 건 아무 나라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고려의 문화력∙경제력∙정치력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고려는 한마디로 최고의 선진국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비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조상의 높은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 |
- 직지심체요절, 프랑스로 흘러나간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 매일경제 2010-03-29
- 1972년 파리 책 역사 종합박람회에서 세계 출판역사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성경책보다 100년 앞선 금속활자본 도서가 출품된 것. 주인공은 재프랑스 역사학자 박병선 씨가 확인한 '직지심체요절'이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 '직지 교과서' 첫 발간 | 한국일보 2010-03-09
-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약칭 직지)을 다룬 교과서가 나왔다. 청주 고인쇄박물관은 학생들에게 직지의 가치 등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위대한 유산, 직지(사진)’를 발간해 청주 송절중학교에 전달했다고 9일 밝혔다...
- '직지 대모' 박병선 박사, 병마와 힘든 싸움 중 | 천지일보 2010-02-14
-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박병선(81, 여) 박사가 지난 달 7일 5시간이 넘는 대장암 수술을 받고 11일 현재 성빈센트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에 있다. 담당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박 박사의 건강은 많이 회복되고 있으며. 설 명절...
- 글∙사진∙그림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출처 - 네이버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