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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와 승천 ( Master and Mastery )-1
대사학은 '승천 대사(Ascended Master)들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대사에는 승천한 대사가 있는가하면 아직 승천하지 못한 대사가 있습니다.
'대사'(Master)하면 대부분 승천 대사를 말합니다. 승천하지 않은 채로 지구상에 남아있는
대사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 중에 하나가 초인 바바지입니다.
바바지같은 이는 특별한 목적 때문에 승천을 미루는 경우입니다.
승천 대사(Ascended Master)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을 마스터한 이,
그 과정에서 자아를 터득(mastery)하고 자기 카르마의 51퍼센트 이상을 갚고,
자신의 신성 계획을 완성하고, '아앰 댓 아앰'의 현존체 속으로 승천한 이; 영(Spirit)의 영역 속에 사는 이입니다.
대사들은 인생의 목적은 바로 승천이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지구는 학교입니다.
이 지구에서 우리는 학습을 합니다. 그 배움의 최종 목적지는 승천입니다. 대사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이 지구의 학교를 먼저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그럼 승천이란 뭐냐? 승천이란 것은 우리 영혼이 영, '아앰 프레젠스( I AM Presence )'와 재결합하여 불멸의 상태에 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영은 Spirit 즉 아트만을 말합니다.
승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절대불변의 영(Spirit)이면서 동시에 진화하는 영혼(Soul)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아는 영(Spirit)과 영혼(Soul)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은 불멸한 것이고 변치않는 것이지만 영혼은 진화하는 것이고 임시적인 것입니다. 영이 자신의 일부분을 물질 우주 속으로 투사한 것이 영혼입니다.
영혼은 영으로부터 나왔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은 물질계에서 진화하며 영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가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영혼은 임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의 존재로 바뀌려면 영과 결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진화의 궁극은 승천입니다.
승천은 영혼이 물질 우주에서의 자기 사명을 다하고 영과 결합하여 영구적인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부처나 도인들은 해탈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사들의 존재는 해탈 이후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해탈한 이후에도 뚜렷한 개체로서 이 우주 상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승천 대사들은 여러분의 미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는 길 말고 여러분에게 단 한 가지 선택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개체의 완전한 소멸, 그야말로 진짜 죽음이지요. 이 지구에서 여러분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모든 선택은 딱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 즉 영원히 존재하느냐 영원히 소멸하느냐. 즉 승천하여 대사들처럼 되느냐 아니면 이 우주 속에서 영원히 소멸하느냐 입니다.
흔히 말하는 악마의 길은 바로 영원한 소멸의 길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한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여기서 영생은 영혼이 승천의 비전을 거쳐 불멸한 존재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승천을 하지 못한 영혼에겐 영생이 없습니다. 승천하기 전까지 영혼은 그저 가능성일 뿐입니다. 영혼은 그 선택 여하에 따라 불멸한 존재로 바뀔 수도 있고, 아니면 영혼의 소멸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물질 우주로 여행 나온 영혼에겐 무한정의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과 기회가 소진되면 우주적인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 그 영혼은 소멸할 수도 있고 승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영혼이 윤회한다고 하지만 영겁까지 윤회하지는 않습니다. 승천대사들을 보면 모두가 똑같지 않습니다. 흔히 신과 하나가 되었다면 신은 오직 한 분이니까 모두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해탈을 했어도 그 개성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개성은 흔히들 말하는 개성과는 다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체성(individuality)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인(individual)의 의미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이 자기를 더 분할할 수 없는 데까지 쪼갠 것이 바로 개인이란 말입니다. 즉 개인은 신의 세포라고 비유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몸에서 각각의 세포가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듯이 개개인은 신이란 전체 몸중에서 각자에게 맞는 독특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개인은 이 우주 상에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신을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개성입니다. 오컬트에서는 이를 모나드(Monad)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개성은 인간적 때를 말끔히 벗어난 상태라야 그 참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성의 발현은 승천한 이후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 부처님, 마이트레야(미륵), 세인트 저메인같은 대사들은 승천 또는 해탈을 했습니다만 모두가 똑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우주의 본질)과 하나가 되었으니까 모두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더라도 각각 뚜렷이 다른 개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일도 각각 다릅니다. 이렇게 각 개인에게 독특한 개성과 역할은 애초에 그 개체가 신이란 거대한 바다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어둠을 이긴 성자들이 '새로운 이름'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승천이후에 본래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이름은 하느님과 받은 이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되어있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승천할 수 있을까요? 승천 대사의 정의를 보면 '시간과 공간을 마스터하고, 그 과정에서 자아를 터득하고, 51퍼센트의 카르마를 갚고, 자기 신성계획을 완성하여 승천한 이'라고 했습니다. 대사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인 '마스터(master)'는 주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자아를 마스터했다고 하는데 그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아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를 잘 알지 못하고는 주인인 될 수 없겠지요. 시간과 공간을 마스터했다는 건 모든 에너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선도에서 보면 기를 콘트롤하여 자기 존재를 변화시키는데 그것과 비슷한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자아와 모든 에너지를 다스릴까요? 여러분은 에고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서 자아니 에고니 '참자아'니 하는게 대체 뭐냐 하는 의문이 나올 수 있는데 그 얘긴 일단 접어두지요. 여기서는 일단 기나 에너지의 진정한 콘트롤은 오직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 따라서 대사학은 겸손과 순종을 통해 신이 우리 내면의 참 주인이 되게 하는 길입니다. 대사학의 요체는 '과학적 복종 scientific surrender'입니다. 즉 에고를 참자아 앞에 죽여가는 길이지요. 시공을 초월한다 했는데 시공의 주인이 되지 않고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신은 그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51퍼센트의 카르마를 갚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카르마는 네가티브 카르마 즉 나쁜 카르마입니다. 좋은 카르마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쁜 카르마만이 우리를 속박 속에 가두어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카르마도 우리를 구속한다고 얘기합니다만, 그런 건 참으로 좋은 카르마가 아니기 때문일 뿐입니다. 어쨌든 나쁜 카르마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를 그냥 가지고 승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남아 있는 한 승천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카르마를 갚아야만 승천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진여를 깨달았다 해도, 몇날 며칠 신과 합일의 열반에 든다해도 자기의 빚이 없어지진 않기 때문에 승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성자도 다시 태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를 거두고 설법을 했음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건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자기 카르마의 빚을 다 갚는 것이 또한 중요함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점, 한획의 카르마도 갚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카르마를 갚아야 할까요? 내가 전생에서 누구에게 해를 가했으면 그 사람이 이생이나 차생 또는 그 다음 생애 언젠가 나에게 해를 되돌려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카르마를 갚는다고 할 때 대사들은 '밸런스balance'라는 동사를 씁니다. 밸런스는 균형을 맞춘다 또는 빚을 갚는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세상에 50만큼의 해를 가했으면 50만큼의 선을 내보내서 그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즉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상쇄시켜 버리는 거지요.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실은 간단합니다. 전생에 나쁜 일 많이 한만큼 좋은 일 많이 하란 얘기지요. 그러나 대사학에서 말하는 '좋은 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쌍한 사람에게 한푼 적선한다는 식의 선행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선행도 카르마의 빚을 갚는데 도움이 됩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많은 빚을 갚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 이 자그만 몸뚱아리로 빚을 갚아야 얼마나 갚겠습니까? 여기서 대사들은 바로 신에게 일을 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신께서 일한다면 그의 명령을 따르는 모든 천사와 대천사, 대사와 고귀한 존재들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좋은 영향도 주고, 그들의 의식에 변화도 주고, 그들은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도 해줄 수 있습니다.
대사들은 신께서 우리의 명령을 가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본시 신과 하나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바가 신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신께서 우리의 명령에 동조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대사학에서 말하는 '일'의 핵심입니다. 신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대사들은 '디크리 decree'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의 에고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신께서 일하게 함으로써 자기가 모든 중생들에게 진 빚을 신속히 갚아 나가는 게 또한 대사들 가르침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대사들은 이러한 일 자체가 중요한 수행이라고 가르칩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신성 계획을 완수해야 한다고 했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각자가 서로 다른 개별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개별적 모나드는 신의 대리자로 이 지상에서 해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의사로서의 일일 수도 있고, 정치가로서의 일일 수도 있고, 예술가 또는 과학자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일이 한 생애가 아니고 여러 생애 동안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과업을 신성 계획 또는 다르마라고 합니다. 대개 그 일을 완수하는 건 카르마를 갚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쁜 카르마의 51퍼센트까지 갚게 되면 승천을 할 것인지 아니면 남아서 나머지 카르마를 다 갚을 것인지 대사가 나타나서 물어보게 됩니다.
대사들과 우리와의 관계는? 대사들은 우리들의 선생이자 조력자, 친구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나 도전들을 똑같이 경험하면서 이겨냈기 때문에 우리를 여러 면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력자는 대사들만 있는 게 아니고 천사, 대천사, 엘로힘, 정령 등 많습니다. 대사들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하는데 이러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특히 우리들과 대사들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대사의 진정한 제자가 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합당한 노력만 기울인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리는 스승을 찾아 인도로 히말라야로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준비만 되면 언제든지 대사들은 나타날 겁니다.
대사들의 등장은 새로운 현상인가? 예로부터 지구의 교실을 먼저 졸업한 이들은 선생으로 되돌아와 뒤에 남은 이들을 돕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비학파나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일입니다. 고대에는 이런 대사들의 가르침이 거의 비밀리에 전수되었습니다. 인류가 물려받은 오컬트적인 지식은 그렇게 이어져 왔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19세기말부터 대사들의 존재와 그들의 메시지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새로운 현상입니다. 이는 피시언 시대에서 아쿠아리안 시대로의 전환, 그 사이에 닥치는 암흑주기의 도래와 연관이 있습니다. 즉 이 시대에 인류가 직면할 도전들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지요. 대사들의 도움은 그들의 가르침도 있고 그들의 직접적인 도움도 있습니다.
채널링과 대사: 인터넷에 보면 채널링을 통해서 받은 대사들의 메시지란 것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제가 알고 있기로 대사들은 채널링이란 방법을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채널링은 일종의 빙의 현상인데 영매의 몸을 다른 영이 잠시 점유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자유 의지의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라서 대사들은 빙의 자체를 제자들에게 금하고 있습니다. 대사들은 'Communion'이란 방법을 통해서 접촉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친교'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나눔'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체를 Communion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친교는 대사가 제자의 몸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사와 제자가 맞대면하여 서로의 빛을 나누는 것입니다. 친교의 과정에서 제자의 의식은 생생히 깨어있습니다.
이러한 친교는 반드시 제자의 의식의 상승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를 '아스트랄 투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제자의 의식이 상승하여 '에텔계'까지 그 진동수가 올라가야 합니다. '에텔계'는 절대의 영계와 물질계가 만나는 영역으로 대사들과 제자들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빙의 현상은 아스트랄계에 떠도는 죽은 자의 영이나 악령들이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것입니다. 아스트랄계는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들을 반영하고 있는 세계로 인간의 복잡한 감정만큼이나 어지러운 곳입니다.
물질계는 육계(physical), 아스트랄계, 멘탈계, 에텔계로 구분됩니다. 진동수에 따른 구분이지요 대사들은 이런 곳(아스트랄계)에 거하는 영들이 대사나 천사 또는 부처나 보살을 가장하고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또는 명상 중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해 그들이 신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시험해 보라고 가르칩니다. 승천한 대사들에게 몸이 있는가?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몸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몸을 '불사의 태양체 Deathless Solar Body'라고 부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통옷 seamless garment ' 즉 손으로 깁지 않은 옷을 입고 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그게 바로 대사들의 몸인 '불사의 태양체'를 가리킵니다.
이 몸은 선도에서 말하는 양신과 동일한 거라고 봅니다. 선도에서 양신을 기로 만드는 것처럼 이 태양체도 신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가지고 엮습니다. 선도의 가르침과 다른 점은 어느 단계부터 이 몸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 몸이 형성되어 오고 있으며 승천의 비전을 거치면서 그 몸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대사들에게 이 몸이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기구같은 것으로 물질 우주에서 일할 때 필요한 몸입니다.
어떠한 대사들이 있는가? 우리가 아는 성인들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부처, 미륵불, 관세음보살, 성모 마리아, 마호메트, 공자, 짜라투스트라 등등 모두 다 승천대사입니다. 이런 이들 말고 중요한 대사가 일곱 있는데 이 일곱은 그리스도의 일곱 광선과 각기 대응됩니다. 첫 번째 광선은 힘과 믿음, 신의 의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색은 파란 색인데 이에 해당하는 대사는 엘 모리아 대사입니다. 엘 모리아 대사는 전생이 아브라함, 동방박사 중에 하나인 멜키오르 아더왕, 악바르 대제, 토마스 모어등이었습니다. 주로 왕이나 정치가 였지요.
두 번째 광선은 지혜와 일루미네이션의 광선인데 노란색으로 이에 해당하는 대사는 로드 란토 대사입니다. 전에 이 광선의 대사는 쿠트 후미 대사였으나 쿠트후미 대사는 현재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계의 교사'라는 직책으로 옮겨갔습니다. 로드 란토는 전생이 주공이었습니다. 공자의 스승이었기도 합니다. 세 번째 광선은 사랑의 광선으로 그 색은 핑크빛, 대사는 폴 더 베네시안 대사입니다. 이 대사는 전생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파올로 베로네제였고 이 대사는 예술로써 제자를 가르칩니다. 네 번째 광선은 순결의 광선으로 그 색은 백색, 대사는 세라피스 베이 대사입니다. 세라피스 베이 대사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승천 사원의 장입니다.
다섯 번째 광선은 진리와 과학, 치료의 광선으로 그 색은 녹색. 대사는 힐라리온 대사. 이 대사는 전생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광선은 봉사와 평화의 광선으로 그 색은 심홍색. 대사는 여대사 나다입니다. 나다 대사는 아주 오래 전에 승천했지요. 일곱 번째 광선은 자유와 연금술의 광선인 바이올릿 광선으로 그 대사는 세인트 저메인 대사입니다. 세인트 저메인은 전생이 사무엘 예언자, 예수의 아버지 요셉, 아더왕에 나오는 마법사 메를린, 콜롬부스, 프란시스 베이컨 등등 다채롭지요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이지요. 거기에 프란시스 베이컨은 연금술의 비밀들을 많이 숨겨 놓았다는군요. 그리고 여덟 번째 광선이 있는데 이는 흰색으로 일곱 광선의 통합인데 이 대사는 마하 초한이라고 부르는 대사입니다. 마하 초한은 이 지구의 영혼들에게 성령을 대표하는 이입니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초한은 주님이란 뜻이지요. 전생은 시인 호머였고 마지막에는 스리랑카의 이름없는 양치기 소년. 지상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작용은 다 이 대사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일곱 대사들도 마하 초한의 지휘를 받아서 인류를 가르칩니다.
이들 대사들은 그 광선에서 제자들을 훈련시킵니다. 여덟 가지 광선은 각각 해당되는 챠크라가 있습니다. 이들 대사말고 카르믹 보드 또는 카르마의 주님들이란 대사들이 있습니다. 여기도 여덟 대사가 있습니다. 카르마의 주님들은 '우주적 그리스도'와 상의하여 모든 영혼들에게 각자의 카르마를 어떻게 펼칠 것인지 결정하는 대사들입니다. 그 대사들을 보면 '신성의 대지도자, 관세음보살, 팔라스 아테나, 자유의 여신, 엘로힘 싸이클로피아, 여대사 나다, 여대사 폴셔, 비로자나불(대일여래)'입니다.
여기서 '우주적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대사는 '미륵불'입니다. 대사들은 그를 '로드 마이트레야(미륵존여래불)' 라고 부릅니다. 로드 마이트레야의 역할은 대전수자(Great Initiator)입니다. 즉 우리들에게 비전을 주는 이입니다. 우리는 마이트레야께서 주는 비전을 매일 받습니다. 마이트레야는 우리의 카르마를 이용해서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게 마이트레야의 비전입니다. 우리의 부모와 친구, 그냥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등등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미륵불처럼 대하면 로드 마이트레야의 모든 비전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승천의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합니다. 그의 마지막 비전이 승천입니다. 마이트레야란 이름이 '친절'이란 뜻입니다.
2. 둘째 주 강의 : 아앰 프레젠스와 그리스도 자아와 하부 자아
1. 아앰 프레젠스와 코잘체
그림2) 안에는 세 개의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윗인물', '중간인물', '아랫인물'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윗인물'은 '아앰 프레젠스(I AM Presence)', 즉 '아앰 댓 아앰(I AM THAT I AM)', 지극히 높으신 이의 모든 아들딸들을 위해 개별화된(individualized) 신의 현존체입니다. 'I AM THAT I AM'은 모세가 호렙산의 타오르는 떨기나무 속에서 들은 신의 이름으로 히브리어 'YHVH 야훼 또는 여호와'의 영역입니다. 대사들은 'I AM THAT I AM'을 다시 'I AM Presence '라고 부릅니다. 'Presence'는 '현존, 있음, 임재함'의 의미가 있는 단어로 제가 볼 때 '아앰 프레젠스'는 '아앰 댓 아앰'보다 하느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다는 뉘앙스를 더 줍니다.
신의 이름의 계시는 또 다른 차원의 신의식의 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의 이름 안에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해답이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의 힘을 발현시키는 열쇠도 또한 담겨 있습니다. 신의 이름은 여럿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계시될 때마다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다3)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앰 프레젠스'는 우리와 함께 계신 신의 이름입니다.
신은 머나먼 물질 우주로 나온 그의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개별화시켰습니다. 즉 자신의 분신을 복제하였습니다. 그 분신은 신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앰 프레젠스'입니다. 이를 신의 분광(divine spark)이라고도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법신이라고 합니다. 아앰 프레젠스는 우리 모두에게 다 있지만 모두 다 동일합니다. 이러한 신의 분광을 통해서 모든 이는 하나입니다. 모 든 '아앰 프레젠스'는 우주의 대중앙 태양에 가운데 있는 신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앰 프레젠스의 심장에서 나온 실버코드는 그리스도 자아를 지나 우리의 정수리를 타고 내려와 우리의 심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대중앙 태양에 대해서 : 대중앙 태양은 우주의 핵이다. 그로부터 알파와 오메가의 로고스를 통하여 영적 창조의 대칭으로서 일체의 별세계와 물리적 창조가 생겨 나왔다. 물질 우주의 모든 것이 그 빛의 대 중심에서 나왔다.─대 중심 그 자체는 영과 물질 사이의 연결부 또는 중개자이다. 대중앙 태양은 일체 생명의 우주적 그리스도 의식의 초점이다. 당신의 그리스도 자아가 당신 영혼의 형상과 신적 계획을 담고있는 것처럼 그것은 일체의 피조물을 위한 이미지 또는 신적 형상을 담고 있다. (즉 빅뱅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 따라서 그림 상의 맨 위에 현존체 위의 빛줄기는 그리스도 자아를 통하여, '아앰 프레젠스'를 통하여 당신의 심장을 대중앙 태양 안에 계신 우주적 그리스도의 가슴으로─그리고 태양 뒤의 큰 태양, 물질적 중심의 배후에 있는 제일 원인 : 지고의 유일한 신, 전능하신 이에게로 이어주는 실버코드의 연속됨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의 신적 분광인 아앰 프레젠스는 대중앙 태양에 가운데 계신 우주적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 그리스도는 빅뱅의 이전에 계신 유일자에게 이릅니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가슴에서 마치 태양의 빛줄기처럼 무한한 분광들이 우주로 흩어져 있으니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아앰 프레젠스입니다. 이 실버코드를 타고 신의 에너지가 신의 심장으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옵니다.
우리가 신께 바치는 기도나 헌신은 다시 역으로 올라가 그리스도 자아를 지나 아앰 프레젠스로 가서 다시 신에게로 이릅니다. 이처럼 에너지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흐릅니다. 그것은 8자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앰 프레젠스'는 신의 큰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을 돕기 위해 당신 옆에 항상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위해 크나큰 선물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놀라운 선물이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모를뿐더러, 있다손 치더라도 그게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에덴을 떠나기 전에 훤히 알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망각된 기억 속에 숨어 있는 지식입니다. 대사들은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을 직접보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하기 전에는 직접 아앰 프레젠스를 보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신성의 모나드(Divine Monad)는 아앰 프레젠스와 그를 둘러싼 여러 구(공, 그림에서 색을 띤 고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여러 개의 구가 코잘체를 구성합니다. 이 코잘체는 '제일 원인'의 몸으로 그 안에 우리가 "하늘에 쌓은 보물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이 보물들은 우리의 선한 행위와 말, 생각과 느낌, 여러 가지 성취와 빛으로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 시공간에 있는 행동의 영역에서 상승한 순수한 사랑의 에너지들입니다. 그것은 프레젠스의 심장에서 그리스도 자아를 거쳐 내려와 육신을 가지고 활동하는 영혼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의 흐름을 사람이 자유의지로써 신중히 사용하고 조화있게 특질화(qualification)한 결과인 것입니다.)
코잘체와 거기에 쌓인 보물들을 설명드리지요. 아까 '아앰 프레젠스'는 동일하다고 했는데 사람마다 차이나는 것은 바로 이 코잘체입니다. 이 코잘체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모든 공덕이 쌓여 있습니다. 코잘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색깔은 그 덕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가운데 흰색은 순결, 두 번째 노란 색은 지혜, 세 번째 분홍색은 사랑, 네 번째 보라색은 자유와 자비, 다섯 번째 심홍색(퍼플)은 봉사와 희생, 여섯 번째 녹색은 치유와 과학, 일곱 번째 파란 색은 믿음과 의지를 나타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면 코잘체에서 다섯 번째 구가 커질 것입니다.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 두 번째 노란 구에 그 공덕이 쌓이겠지요.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 중에서 : 지상에서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할 때마다, 기록의 천사가 전자적 몸의 크기를 늘려 준다. 실제로 선한 행위는 당신이 가동시킨 불씨이다. 그것은 세상으로 그 바이브레이션을 증폭하며, 물결쳐 나가 당신이 베푼 은혜의 수혜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축복하고 같은 류의 것을 더욱 더 낳아가는 불씨이다. (여기서 전자적 몸은 코잘체를 얘기합니다.)
덕행의 빛은 해당되는 코잘체의 고리로 자동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자아에 의해 증폭되어져 다시 또 다시 되돌아와 당신의 신적 잠재력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더욱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빛이 필요로 할 때면, 당신이 예비로 저장해둔 '천국의 보고'인 코잘체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아앰 프레젠스'로부터 내려옵니다. 그 에너지는 코잘체를 타고 내려와 심장 챠크라에 도착하여 다른 챠크라로 퍼져 나갑니다. 이렇게 내려온 에너지는 우리 맘대로 변형해서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래 신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변형하는 걸 '특질화 (qualify)'한다고 말합니다.
'특질화'는 똑같은 진흙으로 동물도 만들고 사람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동일한 에너지를 가지고 누구는 사람을 살리고 누구는 사람을 죽입니다. 그게 특질화 (qualification)입니다. 사람에겐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 에너지에 어떤 특질을 부여할 것인가는 제맘대로입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온 중생을 구제하건 온 중생을 타락시키건 맘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겁니다. 이렇게 특질화된 에너지 중에 조화스럽고 선한 것은 상승하여 코잘체에 쌓입니다. 이렇게 쌓인 덕은 그 사람이 절대로 잃어버리는 일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훔쳐갈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생에서 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꺼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조화스럽게 특질화된 에너지는 상승할 수 없습니다. 이는 밑에 쌓입니다. 이렇게 오용한 에너지가 쌓여 있는 곳을 '일렉트로닉 벨트'라고 부르는데 이는 배꼽부터 밑으로 소용돌이 형태로 되어 있는 역장(force field)입니다. 인간의 무의식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괴물들이 다 들어있는데 그게 바로 다 일렉트로닉 벨트라는 곳이 들어있는 것들입니다. 여기 쌓인 에너지들을 본래의 순수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을 변환(transmutation)이라 하는데 변환작용을 하는 에너지가 바로 '바이올릿 불꽃'입니다. (바이올릿 불꽃을 통해 그 저질화된 에너지가 변환되면 상승해서 코잘체로 올라가지요)
이 코잘체는 승천한 이후에도 계속 자라납니다. 승천한 이후에도 대사는 계속 진화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사들 중에는 지구의 일에만 관여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온 우주를 그 의식으로 덮고 활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우주적 존재(Cosmic Being)'이라고 부릅니다. 불경에도 보면 어마어마한 부처님들이 등장하는데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이 그런 경우지요. 이는 절대로 과장이 아니고 우리들의 미래 모습일 뿐입니다. 모든 부처는 똑같지만 또한 각각 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2.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 (Holy Christ self)
중간의 인물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 '참 자아' 또는 그리스도 의식이라고 불립니다. 상부 멘탈체 또는 상부 의식이라고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내면의 선생으로 하급 자아를 덮고 있습니다.
--예수의 잃어버린 가르침 중에서--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다. 신은 절대적 의미의 영 안에 있어 전적으로 완전하다. 그는 우리가 죄 또는 부정이라 부르는 것 또는 어떤 악한 진동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하여 예언자는 선포하길 "주께선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고 했다. (이 말은 이 세계의 악에 대해 신은 무지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혼이 악에 빠져 있어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선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높은 자아표현과 가장 낮은 자아표현 사이의 중간(에텔의 영역)으로 내려왔다. 당신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는 '아앰 프레젠스'께서 인간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즉 영혼에게 인간적 결함들을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뚜렷한 목적으로─낳은 이다. 그리스도 자아야말로 하느님 마음의 지성으로 당신에게 영감을 주고, 예수가 한 바와 같이, 당신의 생명흐름이 여기 아래로부터 저 위의 신적 대근원으로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당신의 선생이다. --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가 성부께 이를 수 있도록 중재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순수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그 에너지도 미약하기 때문에 신에게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여과하고 다시 증폭시켜서 '아앰 프레젠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자아입니다. (아앰 프레젠스는 그 기도를 다시 우주의 중심으로 보내겠지요. 즉 신의 가슴으로 반대로 성부로부터 오는 응답이 우리에게 이르도록 합니다. 만일 신으로부터 오는 에너지가 조절되지 않고 직접 영혼에게 이른다면 영혼은 그 엄청난 에너지를 견뎌낼 수 없을 겁니다. 그 영혼의 상태를 잘 아는 그리스도 자아에 의해서 영혼에 알맞게 조정되고, 또 이런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지요.
그리스도 자아를 내면의 선생이라 했는데 그것은 상대계와 절대계 양쪽을 다 알고 영혼의 상태를 잘 알기 때문에 영혼의 인도자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이에게 이미 스승 즉 구루가 있는데 그 구루가 바로 그리스도 자아입니다. 물론 육신을 가진 구루도 있고, 대사들처럼 육신을 떠난 구루도 있지만 이런 구루들은 나의 참자아 즉 그리스도 자아의 대변자인 것입니다. 진정한 구루는 오직 하나 신뿐입니다. 그래서 그를 구루의 대 구루라고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부르는 것은 이러한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참자아인 그리스도 자아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참자아와 영혼, 구루와 제자의 관계입니다.)
3. 하부 자아와 세줄기 불꽃
아랫인물은 하부 자아(lower self)로 물질계에서 카르마를 갚고 신성 계획의 완수하기 위해 진화하는 영혼(soul)입니다. 영혼에겐 네 가지 몸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텔체, 멘탈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육체입니다. 이 네 가지 몸은 영혼의 도구들이지 영혼 자체는 아닙니다. 에텔체에는 신성 계획이 새겨져 있고, 모든 기억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멘탈체는 사고와 인식을 담당하는 몸입니다. 아스트랄체는 감정과 느낌을 담당하고, 육체는 이러한 세 가지 몸의 초점입니다. 이 네 가지 몸은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같은 것이지 우리 자신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들의 생각이나 느낌, 감각, 기억, 우리의 육신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걸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 겁니다. 그래서 선은 정신 차리기, 즉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착각하지 않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하는 기능, 느낌, 육신 등을 무시하는 건 또 다른 바보짓입니다. 그건 자동차를 놔두고 걸어서 서울로 가겠다는 식입니다. 우리의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능력은 우리가 바르게 써야 할 연장이지 자아의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런 짐이 아닙니다. 정도는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바르게 쓰는 것입니다.
그림 상의 세 인물은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 일체와 대응됩니다. 윗인물은 성부, 중간은 성자, 아랫인물은 성신에 해당됩니다. 아랫인물은 본시 성령의 사원으로 예정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거룩한 불은 아랫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올릿 불꽃으로 나타내져 있습니다. 아랫인물은 도의 길을 가고 있는 제자인 여러분에 해당됩니다. 당신의 영혼은 존재의 비영구적인 측면으로 승천을 거쳐야만 영구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승천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카르마를 갚고 신성 계획을 완수하여 먼저 그리스도 의식과 하나가 되고, 그 다음 '아앰 댓 아앰'의 살아있는 현존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단 승천하고나면 영혼은 불멸한 존재가 되고 하느님의 몸의 영구적인 원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신성 자아의 그림'은 당신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도표입니다.
아랫인물은 또한 자신의 '생명 나무' 아래서 진화해가는 사람의 아들 또는 빛의 자녀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처럼 '아앰 프레젠스'와 '그리스도 자아' 밑에서 바이올릿 불꽃에 휩싸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늘 영상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수련입니다. 이처럼 자아는 '아앰 프레젠스'이고 '그리스도 자아'이고 또한 '영혼'입니다. '아앰 프레젠스'와 '그리스도 자아'가 극으로 따져 양극(+) 즉 남성이라면 '영혼'은 음극(-) 즉 여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건 우리 영혼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는 건 그런 이유입니다. 영혼이 볼 때 신은 신랑이고 주님이며 스승이고 아버지이며 어머니입니다.
(우리의 의식 중에는 지극히 여성적이고 예민하며 마치 아기와도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영혼 의식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자기의 영혼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예수께서 아이처럼 되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순수한 영혼의식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랫인물은 (하얀) 빛의 튜브(통)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빛의 튜브는 당신의 요청에 응답하여 '아앰 프레젠스'의 심장으로부터 투사된 것입니다. 이는 백색 빛의 원통으로 당신이 조화스런 상태를 유지하는 한 언제나 존속되는 보호의 역장(力場)입니다. 이것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디크리도 있으며, 필요에 따라 더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 이 빛의 튜브는 당신을 에워싼 커튼처럼 내려오며 군중의식(mass consciousness)이 못 들어오게 막아, 그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합니다. 대사들은 모든 수행에 앞서 '아앰 프레젠스'로부터 빛의 튜브를 불러 일으켜서 보호막을 형성할 것과 대천사 미카엘에게 그 둘레로 세 겹으로 파란 광선의 보호막을 쳐줄 것을 요청하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보호막이 미흡할 때면 외부에서 수행을 방해하는 (의식의 상승, 빛의 발현을 방해하는) 진동들이 침투해 들어와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휩쓸려 버리곤 합니다. 그리하여 애써 불러일으킨 거룩한 에너지들이 흐트러지거나 수행 자체가 중도 하차되곤 합니다.
--실버코드 또는 크리스탈 코드 --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과 당신 영혼 사이에 빛의 흐름은 실버코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빛으로 이루어진 실이며, 하느님뿐만 아니라 백색 빛 안에서 승천한 대광명 형제단(The Great White Brotherhood )의 모든 영혼들과 접촉을 가능케하는 실이다.(실버 코드와 크리스탈 코드는 동의어로 성령에 의해 이어지고 유지되는 영혼의 탯줄에 대한 묘사이다.) 실버코드는 대중앙 태양의 신성에서 유래한다. 당신은 무한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줄기가 당신의 전능한 '아앰 프레젠스'로 와서, 그리스도 자아를 거쳐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네 가지 하부체를 양육키 위해 내려옴을 그려볼 수 있다.
하느님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존재의 모습에서 가슴으로 ─ 태양과 이어 주는 장엄한 '크리스탈' 코드를 가지고 있다. (은줄이라고 하는거지요. 유체이탈하면 육체와 이어진 가느다란 줄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실버코드지요. 은줄이 끊어지면 그게 죽음입니다.) 현존체의 가슴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으며, 그것이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수정 같은 생명의 흐름을 타고 당신의 문 앞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실버코드는 정수리를 통해 네 가지 하부체로 들어온다. --
(탯속의 아기는 엄마의 실버코드와 세 줄기 불꽃에 의해 살아가다가 탄생되는 순간 실버코드가 정수리를 통해 내려와 심장 속의 밀실에 세 줄기 불꽃을 점화시킵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이 코드가 회수되는 것입니다. 이 코드가 회수되면서 심장 속의 세 줄기 불꽃도 육체의 사원으로부터 회수되고 따라서 모든 챠크라의 빛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육체는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육신을 떠난 영혼은 에텔계로 가서 머물지만 지나친 탐욕이나 욕정에 사로잡힌 자는 그 상태에 따라 하부계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보통 지옥이라 알려진 곳은 아스트랄계입니다. 이렇게 회수된 실버 코드와 세줄기 불꽃은 그리스도 자아의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랬다가 다시 그 영혼이 육신으로 태어나면 내려오지요)
---심장 속의 세줄기 불꽃---
아랫 인물의 가슴 가운데 나타난, 여기 이 조그만 원 안에 생명의 세 줄기 불꽃이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그 생명의 불꽃은 당신의 육체적 심장 내에 있고 그 높이는 16분의 일인치이다. 참으로, 세 겹의 불꽃은 신의 모든 아들들의 신적 권리이다. 그것은 그의 '의식적 신성(conscious divinity)'의 자리이다. 이 자그만 분광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체가 알려지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거룩한 불, 생명의 보존자 그리고 모든 걸 삼키는 큰 사랑의 현존(Presence)이다.
파란 깃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의지(will)가 당신의 세계에 와 닿는 정박지( the anchor point )로, 네 가지 하부체를 통해 당신의 신적 계획을 구현하기 위한 당신의 의지력, 믿음, 신적 결단 (God-determination)을 고취시킨다. 금빛의 노란 깃은 사리 분별하는 지성, 지혜, 일루미네이션 (illumination),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정박시킨다. 분홍 깃은 ─사랑, 인자함, 자비, 온화함, 그리고 영이신 하느님의 은총을, 신적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실천적 노하우와 더불어 정박시킨다. ( 다시 설명을 드리면 그 세줄기 불꽃은 세가지 색으로 타고 있는데 파란 불은 성부와 대응되는 힘, 노란 불은 성자와 대응되는 지혜, 분홍 불을 성령과 대응되는 사랑. 이 삼색은 모든 문화권에서 다 볼 수 있을 겁니다.)
---세줄기 불꽃에 관한 세인트 저메인의 가르침--
너희 심장은 참으로 하느님의 가장 선택된 선물 중에 하나이다. 그 안에 우리가 "우주적 간격 (cosmic interval) " 이라 부르는 빛과 보호의 역장(力場 forcefield)으로 에워싸인 중앙의 방이 있다. 그 방은 물질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서, 아무리 찾아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노라. 그것은 3차원과 4차원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다른 차원들을 동시에 점하고 있다. 이 중심의 방은 심장 속의 제단이라 불리는 바, 육체적 심장의 박동을 유지하고, 생명의 목적과 우주적 통합성을 주고자 너희의 신적 현존하심으로부터 내려오는 강력한 실버코드의 연결점이니라.
나는 모든 이에게 그들이 생명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같은 접촉점을 의식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소중하게 할 것을 촉구하노라. 화려한 미사여구나 과학적 공리로써 그런 활동의 이유, 양상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과 너희 안에 신성과의 접촉점, 생명의 세줄기 불꽃이라 불리는, 창조주의 가슴으로부터 나온 불의 스파크가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라. 거기에 그것은 사랑, 지혜, 그리고 권능의 삼위 일체적 정수로 타오르고 있다. 너희 심장 안의 불꽃을 매일매일 시인할 때마다, 너희 존재 안에 사랑의 힘과 일루미네이션이 증폭할 것이다.
그처럼 주의를 쏟을 때마다 너희를 위한 새로운 차원의 감각이 생기는 바, 그것이 외적으로 명료하지 않을 때도 내면적 생각의 덮개들 내에서 하부의식적으로 발현할 것이다. (내면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는 얘기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의 제단인 너희의 심장을 잊지마라. 너희 발현된 존재의 태양인 그것을 잊지마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끌어내려 그것을 너희 심장 안에서 증폭시켜라. 그런다음 이 혹성의 암흑을 이길 보루로써 그것을 이렇게 말하며 세상에 크게 내보내라!
<< 세줄기 불꽃을 위한 만트라 >> by Saint Germain
I AM the Light of the heart
Shining in the darkness of being
changing all into golden treasury
Of Mind of Christ.
I AM projecting my Love
out into the world
To erase all errors and
To break down all barriers.
I AM the Power of infinite Love
Amplifying iteself
Until it is victorious
World without end.
나는 가슴 속의 빛이다
존재의 어둠 속에 빛나며,
일체를 그리스도 마음의 황금보고로
바꾸어 가져가는 빛이다.
나는 세상으로
나의 사랑을 내보내노라.
모든 오류를 지워버리고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저.
나는 승리의 때까지
끝없이 스스로 커져가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다!
(여기서 나는 즉 '아앰'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입니다. 나는 가슴 속의 빛이다 라고 할 때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 바로 그 빛이라는 얘깁니다. 그 빛이 모든 오류를 지우고 어둠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이런 걸 힘차게 말하면 주문 즉 디크리가 되는 겁니다. 하는 요령은 심장에 정신을 집중한 채 단어에다 의식을 실어서 소리와 함께 내보냅니다. 그러면 그 말소리에는 빛이 실려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의 빛의 미사일같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해 조종되어 필요한 곳에 명중됩니다. 그 효과는 집중도와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제대로 하면 이 나라의 심각한 경제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실상 경제적 풍요의 본질은 모든 사람들에 있는 가슴 속의 빛의 발현인 것이지요. 그리고 자연의 질서란 것을 유지하는 힘도 실은 사람들의 세줄기 불꽃에서 나온 겁니다. 어째서 사람이 만물의 주인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만일 그런 불꽃이 모두 사라진다면 자연은 스스로 붕괴될 것입니다. 공산국가의 경제가 붕괴되는 건 사람들의 내면의 빛을 표현할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풍요의 근원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엘리멘탈은 정령이라고 하는 건데 이들이 실은 자연력의 조절을 담당하지요. 인간이 에너지를 남용하면 이 지구의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리는데 이걸 엘리멘탈들이 지탱해주지요. 그러나 남용이 심하면 지탱하는데 한계가 있지요. 그러면 레무리아나 아틀란티스 같은 대재앙이 닥치지요. 자연이 붕괴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 내보낸 빛은 이들 엘리멘탈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지요. 그래서 재앙을 막을 수도 있지요. 결국, 인간은 신성을 지닌 존재로 신의 대리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구세주와 동업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의 파괴에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지구의 미래는 구세주의 일에 동참하는 이들의 손에 달려 있는 거지요.)
사람에게 이 세 줄기 불꽃이 없다면 짐승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만일 인간의 육신을 그대로 복제하거나 다른 기술로 인간의 육체와 똑같은 걸 만들었다면 이 세 줄기 불꽃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로봇 인간이 사람들 속에 섞여 살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온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또 세줄기 불꽃은 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는 신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남용하면 그렇게 됩니다. 마귀는 본시 천사였으나 너무 악행을 하다보니 그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존재입니다. ( 아주 고대에 사람들의 세줄기 불꽃은 지금보다 몇 십배 컸다고 합니다. 실버코드도 사람 몸통보다 더 커서 그를 통해서 내려오는 신적인 에너지는 어머 어마 했던 거지요. 그러니 못하는게 거의 없었답니다. 창세기에 옛날 사람들이 천년씩이나 살았던 것은 그런 이유였지요.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창조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너무 에너지를 남용하니깐 그 업이 너무 커져서 일부러 그 크기를 축소시켜버렸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내려오는 에너지가 대폭 감소하고 그에 따라 수명도 단축되었답니다. 그것은 카르믹 보드 또는 카르마의 주님들이라는 일단의 대사들이 줄였습니다. 이들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흐름(사람에 대한 다른 호칭)들에 대한 카르마를 관장하는 대사들인데, 우주적 그리스도와 협의하여 각 사람에게 각자의 카르마를 어떻게 되돌려 보내 그 사람을 가르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이들 대사들이 인간의 영적 능력을 현저히 감소시킨 장본인들이지만 결국 이들은 신의 충실한 일꾼들인지라 실제 장본인은 하느님 자신인 것이지요. 그 의도는 자신의 자녀들이 에너지를 과도하게 낭비함으로써 너무 큰 카르마를 쌓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
(강의도중 받은 질문 정리)
1. 신도 인격이 있나요?
답: 세인트 저메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
신은 비인격적 비인격(Impersonal Impersaonality) : 성부(the Father)
비인격적 인격(Impersonal Personality) : 성자(the Son)
인격적 비인격(Personal Impersonality) : 성신(the Holy Spirit)
인격적 인격(Personal Personality) : 어머니(the Mother)
이 말은 신은 힘이나 법칙처럼 비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애인이나 어머니처럼 다정다감한 인격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대사들이나 천사들은 그런 인격의 발현이지요. 요기는 신을 절대공(空)으로 깨닫기도 하지만 비할바 없이 달콤한 애인으로, 때로는 엄한 스승으로 만날 때도 있습니다.
2. 외부에서 수행을 방해하는 진동들이 왜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답: 부처님 이야길보면 마장이 대각을 막으려고 애를 쓰지요 왜냐면 신성의 빛이 드러나면 어둠은 설자릴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자 사자 방해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처럼 올라가는 걸 방해하는 거지요. 어둠의 세력들은 본시 기생적이라서 사람들이 신의 에너지를 남용하여 만든 쓰레기에 기생합니다. 근데 사람들이 다 부처가 되면 쓰레기 생산이 더 이상 중단되니 기생할 데가 없지요. 잘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사람들을 자꾸 바보로 만들려고 노력하는지를.
3. 신은 천사를 완벽하게 만들었을 텐데 어떻게 타락했을까요?
답 : 이 문제는 다시 이 우주에 왜 악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카발라에서는 신의 현현인 세피롯 중에 하위 세피롯이 신의 에너지를 지탱하지 못해 균열 내지는 넘침이 생겼고 그것에서 악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시초된 세피롯은 게부라라고 하는 세피롯인데 이는 정의, 심판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악은 자비에 의해 보완되지 않은 과도한 정의, 심판이 됩니다. 이는 '내가 지배하리라'라는 말로 대표되는 악, 즉 성서에서 악의 발단이라 지목하는 루시퍼의 교만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런 얘기가 모든 의문을 완전히 풀어주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건 우주에 균열이 생겼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이를 회복하는 일이고, 그 일을 할 당사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악의 기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세상에 처한 악을 없애는 게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모든 의문을 푸는 더 빠른 길일수도 있지요.
4. 전 빨리 신적 현존(I AM PRESENCE)과 하나가 되고 싶은데 그럼 뭘 먼저하지요?
답: 그럼 먼저 되고 싶다는 욕구를 무지무지 크게 키워서 그 욕구가 온 마음을 차지하게 하면 됩니다. 그게 우선 필요하지요. 아미타불의 서원은 욕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것 말입니다.
5. 악마는 어떻게 물리치나요?
실은 많은 에스에프 소설들은 인간의 하부 의식 속에 숨은 기억들이 떠올라 와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천사도 사람처럼 신이 자기를 분할하여 생성된 건데 사람하고 다른 점은 물질우주에 환생한 적이 없고 그래서 그 순수성을 잃은 적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 천사가 어떻게 해서 타락했는가는 우주의 커다란 수수께끼지요. 그에 대한 답을 카발라에서는 나름대로 제시합니다만 어쨌든 타락의 열쇠는 '자유의지'에 있지요. 악은 우주의 균열과 같은 것으로 우리들이 악과 싸움은 그 균열을 회복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대사학에선 악이 선의 절대적 반명제로서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선이 잠시 왜곡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우주의 본질은 선Good 즉 God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대사들은 천사들보다 더 높습니다만... 전에 말씀드렸듯이 남의 카르마가 누구 맘대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스승은 제자의 카르마를 다 없앨 수 있다는 얘기는 틀린 얘기라고 봅니다.
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도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은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진 못합니다. 정의를 빙자해서 악을 자행하면 그건 나쁜 카르마를 만드는 것이지요.) 선이란 게 무슨 교범처럼 반드시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이 선이다 하는 식은 아니지요. 때로는 36계도 선일 수 있구요. 네피림이나 모든 악에 대해 방어하는 방법은 가장 절대적인 방어는 네피림이 제일 싫어하는 신에게로 피신하는 거지요. 신에게 귀의한다고 하지요. 모든 종교적 수행이 다 그런 피신입니다. 자기를 정화하는 행위 자체가 방어지요 그렇지만 네피림들로 인해 생기는 비극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도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마약으로 영혼이 파괴되고 있는데. 심판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 네피림들을 다루는 법에 대해 얘기하지요.
6. 왜 이렇게 서로 신에 대해 다르게 말하나요? 신이 없다고도 하고...
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무도 없습니다. 무신론자조차도 모든 사람에겐 나름대로의 신이 있습니다. 그걸 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문제는 그렇게 사람마다 생각하는 신이 서로 다르다는 거지요. 우리는 흔히 신이라고 하면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는 신을 연상합니다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꼭 그런 모습만은 아닙니다. 도가건 유가건 불가건 신을 부정한다고 말하지만 알고보면 다른 이름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7. 빛의 존재들이 왜 환생을 택하는걸까요?
환생이 필요한 이유는 뒤에서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만 자기의 육신을 그리스도의 성전이 되게 하여 그 그리스도 즉 말씀에 의해 악이 심판받게 하려는 것이지요. 우리가 육신을 가진채 신의식에 이르면 우리는 '육신이 된 말씀'즉 살아있는 하느님이 되는거지요. 악을 심판하는 이는 오직 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주 강의 : 카르마와 환생
카르마와 환생 문제는 다들 잘 아시는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이 탄생한다고 해서 영혼이 새로 창조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도 아닙니다. 이 물질계에서 진화하는 주체인 영혼은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완성을 향해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육체적인 환생 상태를 결정하는 건 그 영혼이 물질우주에서 얻은 여러 경험들과 카르마입니다. 우리가 이 우주로 내보낸 것은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 보낸 자에게 반드시 되돌아옵니다. 이것이 카르마의 법칙입니다. 이것이 되돌아오는 시점과 그 양상은 무척 많은 변수들이 있어서 정확히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각 사람의 그리스도 자아와 카르마의 주님들이란 대사들입니다.
환생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 그 이유로 지적합니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이 상실되는 이유는 자비 때문입니다. 만일 전생의 모든 일이 생생히 기억된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 중에 하나가 전생에 자기를 살해한 사람이고 그 사람만 보면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일이 만나는 사람마다 일어난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거의 돌아버릴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아는 전생의 기억을 차단시켜서 현생의 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 전생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면의 선생이신 '그리스도 자아'가 현재 닥친 일의 인과관계를 이해시키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 잠시 차단막을 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전생의 기억이 필요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 기억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외에는 사실상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알아봤자 도움도 안되니깐 '그리스도 자아'께서 그 기억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전생이 알고 싶으면 지금의 자기 모습을 볼 것이고, 미래의 자기 모습도 지금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때가 되어 우리가 모든 전생의 기억을 기억하고도 아무런 동요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되었을 때가 되면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겠지요.
카르마는 좋은 카르마와 나쁜 카르마가 있습니다. 좋은 카르마는 그 영혼을 성장시키고 나쁜 카르마는 그 영혼을 구속합니다. 모든 카르마는 존재를 구속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라든가 스승이라든가 도반같은 데서도 인연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 있고 스승이 있은들 인연이 없는 사람에겐 먼 나라 얘기 아닙니까? 좋은 가르침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는 인연이란게 좋은 카르마가 아니고 달리 뭐겠습니까?
좋은 카르마는 또한 좋은 모멘텀을 낳습니다. 모멘텀은 관성입니다. 습관의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어떤 일이고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꾸 하다보면 잘하게 되는 겁니다. 자꾸 하다보면 그 일에 모멘텀이 생기고 그 모멘텀 때문에 점점 수월해지고 계속 하다보면 모멘텀이 커지고 커진 모멘텀 때문에 더 잘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좋은 모멘텀을 쌓지 않고는 승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모멘텀은 좋은 습관에 의해 쌓입니다. 그래서 승천은 좋은 습관을 통해서 가는 길입니다. 수행이고 일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은 일이고 일이 수행입니다. 참선이고 주문이고 많이 해 본 사람이 잘한다는 얘깁니다. 그런 수행이 잘 안된다고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잘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하고 또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자질이니 근기같은 걸 따지는데 그건 결국 자기가 쌓은 모멘텀인 것이지요. 자질이나 근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지금부터 그걸 쌓아가는 게 최선이지요. 누구는 스승이 없는 걸 탓하는데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스승도 소용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만든 건 바로 자기 자신이고 미래의 자기 모습도 자기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아앰 프레젠스' 즉 '진여, 법신'은 일체의 카르마로부터 자유롭지만, 이곳에서 진화하는 부분은 절대적으로 카르마에 의해 규정됩니다. 나의 본질은 '아앰 프레젠스' 즉 '법신'이니깐 나는 본질적으로 카르마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의 나는 물질계에서 진화하는 '영혼'입니다. 그것은 그 선택한 결과에 따라 신처럼 될 수도 있고,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카르마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엄밀히 말해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카르마(행동, 운동)도 짓지 않을 수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이 아무런 카르마를 짓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명상 중에 일어나는 침묵이나 정지는 다른 차원의 의식에 진입함으로써 지금까지 익숙했던 소리(진동)를 잊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진동이 방사되어 나올 것이고 그 나온 진동이 역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할 것입니다. 아무런 진동도 일으키지 않으면 그건 죽음입니다. 카르마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펼쳐집니다. 하나는 보속이고, 다른 목적은 가르침입니다. 보속은 그야말로 작용/반작용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내가 보낸 에너지는 보낸 만큼 되돌아온다 이거지요.
가르침은 그 에너지를 돌려보내되 그 영혼에게 최대한 배움을 줄 수 있도록 안배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안배를 하는 이들이 카르마의 주님이고 이 대사들은 우리들 각자의 주님인 '그리스도 자아'와 협의하여 그런 안배를 계획, 시행합니다. 나쁜 카르마가 영혼을 구속한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보지요. 만일 누군가 남에 대해 독설이나 비방을 심하게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고 하면 언젠가는 벙어리나 심한 언어장애를 가진 채 태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독설이나 비방의 모멘텀을 그대로 지닌 채 정상적인 언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또 다시 독설과 비방의 카르마를 쌓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은 언어 능력으로 인해 다음 생애서도 카르마의 빚만 더 늘려갈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이럴 경우 카르마의 주님들은 그 사람의 성향을 비쳐봐서 정상적인 언어 능력 을 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전생에 자기가 욕했던 사람들로부터 다시 꾸지람이나 힐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하게 함으로써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고통이 어떤 건지 알게 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욕이나 비방을 해선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겁니다. 이처럼 독설과 비방의 카르마는 언어적 부자유를 초래할 겁니다. 여기서 작용하는 건 우리 영혼에 대한 신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진정 원한다면 나쁜 카르마를 더 이상 안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악을 짓지 않는가 하늘은 시험을 한답니다. 그 시험에 통과하면 능력이 부여됩니다. 이게 바로 비전(이니셰이션)입니다. 스승은 반드시 제자를 시험한 다음 자기의 정수를 물려줍니다. 사소한 능력도 다 해당됩니다. 새로운 이해, 시각 등도 마찬가지지요)
그리스도 자아와 카르마의 주님들은 이처럼 한 영혼을 지상으로 내보냄에 있어서 그가 최대한으로 빚을 갚을 수 있고, 가능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속으로 보냅니다. 그 사람인 잉태한 시기와 장소, 탄생한 시기와 장소는 그 사람의 카르마가 앞으로 펼쳐질 양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주란게 실은 카르마의 전개되는 양상인 것이지요. 이처럼 한 영혼의 탄생은 하늘의 주도면밀한 안배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를 낙태시켜 버리는 것은 그 안배를 엉망으로 만들게 됩니다. 한 번 낙태된 영혼은 태어날려고 했던 시기와 장소, 부모등과 비슷한 조건이 다시 창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게 몇 년이 될 지 몇 만년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카르마의 주님들이 그 영혼의 잉태와 탄생시기 등을 정할 때는 하늘의 별들의 위치같은 것까지도 고려합니다. 그래서 그와 똑같은 별들의 위치가 되돌아오려면 몇 만년이 걸리는 수도 있습니다. 낙태를 자행한 자는 남의 소중한 기회를 박탈했으니 그 대가로 자신의 기회가 박탈될 것입니다.
환생이란 것 자체가 신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진 영혼은 그 죄와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인데 아마도 영혼의 심판과 관련이 있는듯 싶습니다. 나쁜 카르마를 해결하지 않은 채 영원히 가지고 다닐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낙태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입니다. 물론 무지로 인하는 때가 많지만 몰랐다고 그 카르마가 어떻게 되지는 않습니다.)
때가 되면 영혼은 '우주적인 평가'를 받는데 이 평가 결과 나쁜 카르마가 더 많으면 그 영혼은 그 카르마와 함께 소멸되어 버립니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그런 과정을 거쳐 영원히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은 냉혹합니다. 용서를 구할 때 빼고는)
승천은 미리 심판을 앞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기회가 소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적극적으로 카르마의 빚을 갚고 자기의 다르마를 다하여 그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날의 일에 대해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행위도 실은 그날 지은 나쁜 카르마를 그날 해결하는 것으로 이것도 일종의 심판을 앞당기는 행위입니다. 환생은 심판에 서기에 앞서 빚을 청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연장해 주는 것입니다. 대사들에 의하면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환생이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물질 우주로 나온 영혼은 천년이나 이천년 정도 지구에서 학습하고는 신에게로 되돌아갔다고 그럽니다. 인류가 타락하면서 나쁜 카르마가 누적되자 이를 갚을 수 있는 기회로서 환생이 시작되었다는 얘깁니다.
또한 타락 이전에는 직접 구루(신)를 맞대면하고 배울 수 있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그 사람의 카르마가 선생 노릇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악과라는 상대적인 세계관(에너지 베일 ener -gy veil, 즉 악evil)에 빠지면서 절대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구루(신)를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구루를 떠난 인류에게 카르마는 그 구루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르마가 주는 문제와 도전들을 헤쳐나 가면서 배움을 얻어야 합니다. 집안이나 학교, 직장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자는 결코 자신의 주인(master)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보면서 상대방에 대한 나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만일 상대방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보고 내 안에 그 하느님을 공경하는 맘이 굳세다면 상대방이 뭐라고 나와도 늘 자비로 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늘은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될 때까지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우리 곁에 보낼 겁니다. 맘에 안드는 사람들 속에서 맘에 안든다고 상대방과 다투면 고통이 따라올 것입니다. 그 고통이 싫으면 그 상대방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그 자리를 외면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그와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사람과 다시 만나기 싫으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상대방과 내가 실은 하나임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 안에 계신 신에게 에고를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지요)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고 그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다시 그 사람을 태어나게 해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이 그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필요한 배움을 얻을 때까지 그는 똑같은 어려움에 거듭거듭해서 봉착할 것입니다. 이것을 '마이트레야의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은 카르마를 이용해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르마(업)가 되돌아 올 때는 항상 배울 태세가 되어 있는게 중요합니다. 업보라고 해서 두려워할 것도 못되고 배우겠다는 자세로 받아들이라는 얘깁니다.)
마이트레야(미륵존여래불)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대표자'로 우리들 각자의 '그리스도 자아'와 협의하여 우리들의 카르마를 가지고 우리 영혼에게 비전을 줍니다. 물론 그것이 전개되는 것은 '카르마의 주님'들이 하는 것이지만요. 여기서 비전(이니셰이션)에 관한 '듀알 컬' 대사의 가르침을 인 용해 보겠습니다.
비전에 관하여 ------------------by D. K
완전해지기 위해서 완전을 보아야 한다. 존재의 상승 소용돌이 위에 있는 자들의 목표는 오리지널 모나드인 '아앰 프레젠스'의 완전함이다. 완전(perfection)을 생명의 목적으로서 생명의 법칙(law)으로 받아들임은 '이니셰이션(비전 initiation-" i-niche-i-action ")'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니셰이션은 'I AM'을 시인하는 것이, 자아됨의 앎 (awareness of selfhood)을 가진 것이 '신의 일체를 보시는 눈(all-seeing-eye-of-God)'의 'niche(자리)'안에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의로운 'action행동'을 세울 목적으로 자리 잡을 때 시작된다. -----------------
이 얘기는 '인간 오라' 2부에 나오는 것으로 아직 번역되진 않았습니다. 금방 이해가 안 가시더라도 그냥 마음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대사들의 가르침을 읽는 족족 이해 하긴 어렵습니다. 즉각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일단 마음의 다락방에 넣어두고 넘어가라고 대사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둔 것은 내면의 화두로 남아서 우리가 점차 나아가다 보면 확연히 이해할 때가 이르게 됩니다. 이해가 안된다고 거기에 매달리다 보면 대사들의 가르침은 한 장도 제대로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이는 다른 경전에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도 완벽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드리지요. '아앰'을 시인하는 것 또는 '자아됨의 앎'을 가진 것은 우리들의 영혼을 말합니다. 신의 일체를 보시는 눈은 완전함을 보는 눈으로 우리의 완전한 이미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 눈의 자리는 바로 '세 번째 눈'입니다. 거기에 자리 잡는다함은 완전함을 존재의 목적이자 존재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리스도와 '아앰 프레젠스'의 영역으로 그곳에 나의 완벽한 이미지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땅은 영혼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우리의 완벽한 이미지가 표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른 행동을 세우기 위해 '신의 일체를 보시는 눈'의 자리에 자리잡음은 완전함을 향해 자신의 총력을 다함을 뜻합니다.
또한 완전함을 존재의 법칙으로 본다함을 제가 이해하기론 카르마를 통해 나를 가르치려는 구루(하느님)의 안배는 완벽한 것이기에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든 스승의 손길로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내게 불리해보이는 어려움 속에서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며 그 이면에 계 신 스승의 사랑을 보려고 할 때 거기서 진정한 비전이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비전은 단순한 교훈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상승으로 인한 자아의 확대, 그로 인한 능력의 확대가 수반되는 과정입니다. 어려움을 회피했을 때와 이겨내었을 때 사람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대사들은 보는 것은 곧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을 보면 완전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신을 보면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을 보면 신이 된다는 얘깁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그런 도전들을 주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도전들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우리세계의 실질적인 주인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신적인 미래'를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르마란 것은 사실은 자기가 구동시킨 에너지이지요. 그 에너지가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대해 대비도 할 수 있습니다. 사주니 액땜이니 하는게 다 그와 연관이 있습니다만, 대사학에서는 '우주시계 (Cosmic Clock)'란 것으로 그 양상을 예측합니다. '우주 시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소개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나쁜 카르마에 대비하는 법에 대해 얘기하지요. 카르마의 법칙은 물리적인 법칙처럼 냉혹합니다. 그야말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사소한 생각이건 느낌이건 어떤 행위건 우리가 밖으로 보낸 모든 것은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사람을 해칠 때 실질적인 가장 큰 피해자는 해친 당사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카르마의 냉혹한 법칙이 더 이상 냉혹해지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잘해보려는 영혼의 카르마를 줄여주거나 소멸시켜 주거나 그 떨어지는 시기를 연기해 주는 겁니다. 연기된 카르마는 그 영혼이 자신의 나쁜 카르마를 스스로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을 때 다시 내려오게 됩니다. 이 물질계는 우리 영혼들의 학습장이고 실험실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하다가 얼마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류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용서는 이런 실패한 실험의 결과들을 돌이킬 수 있게 하고 다시 새로 시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행착오는 우리 영혼의 특권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죄사함이라고 하는데 대개 이것은 카르마가 유예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예된 카르마는 언제고 반드시 자신이 갚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 갚아 주셨다고 하지만 갚아준 게 아니라 예수께서 그 카르마를 대신 져 준 것입니다. 그렇게 대신 져 준 카르마는 그 영혼이 성장하여 스스로 질 수 있게 되면 다시 내려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성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한 이후에 아주 고통스런 질병에 걸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죄의 용서, 즉 카르마가 없어지거나 연기되는 것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받는 비결은 먼저 내가 모두를 용서하고 그 다음에 신에게 나의 죄의 용서를 비는 겁니다. 그래서 참회는 가장 중요한 수행 중에 하나입니다.
카르마가 용해되는 죄의 용서는 성령의 작용인데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바이올릿 불꽃'입니다. 이것의 변환 작용에 의해 나쁜 카르마가 변화되어 본래의 순수한 에너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충분한 양의 카르마가 변환되면 그때는 그게 떨어져도 별 큰 어려움없이 이겨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미리 카르마를 변환시키는 것이 심판을 앞당기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이 카르마를 다루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나쁜 카르마는 우리의 몸을 이루는 전자와 원자 사이의 공간을 막고 있는 타르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 속으로 자연스런 에너지의 흐름을 차단하지요. 이래서 의식의 불명료함, 혼란스러움, 신체적 결함 등을 생기게 하지요. 바이올릿 불꽃은 이런 타르들을 태워버려서 모든 세포와 원자, 전자들이 숨쉴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쁜 카르마의 타르들이 제거되면 될수록 에너지의 유통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의식의 상승과 신체적 건강의 회복등이 따르게 되지요. 그러면서 잠재된 영적 감각들도 서서히 회복되지요. 한마디로 바이올릿 불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하느님 사이를 좁혀주는 에너지이지요. (사소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도 나쁜 카르마가 됩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에 그날의 죄에 대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중요한 거지요. 그냥 넘어가면 나쁜 카르마가 자꾸 누적되어 나중에는 산처럼 쌓입니다. 선의의 거짓말같은 행위도 카르마가 되긴 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미친 결과지요. 그래도 거짓말은 나쁜 카르마를 만듭니다만. 안락사등도 이기적 목적으로 남을 죽이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아무튼 하늘의 저울은 정밀합니다. 플러스 마이너스 정확히 계산됩니다. 피치 못해 안락사를 시켰다면 다 계산에 들어 갈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구세주인 이유는 인류의 집합적인 카르마를 자신의 빛으로 지탱해 줌으로써 사람들이 다시 계속 환생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 카르마의 짐을 덜고서 살아갈 수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전대의 화신들인 석가모니 부처나 마이트레야 등도 그렇게 사람들의 카르마의 짐을 져서 인류가 계속 환생하면서 자기 빚을 갚아 나갈 수 있게 해온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동안 그 짐을 져오고 있는데 문제는 그 짐을 더 이상 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류 전체의 카르마가 급작스럽게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암흑 주기(dark cycle)'입니다. 이때 떨어지는 카르마는 인류가 25,800년간 쌓아온 나쁜 카르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더 이상 인류 전체의 죄의 짐을 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가 유례없는 환난의 때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계시록의 예언대로 그 때는 '주의 크고 두려운 일이 임하는 때'인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이러한 '두려운 일'은 인류의 카르마가 싸이클을 따라 떨어지면서 벌어지는데 계시록에 그것은 '네 마리의 말의 기수'가 달리는 양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카르마로 지구는 온통 파괴되어 다시금 원시시대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 카르마는 엄청난 자연재해, 극심한 기근, 대규모적인 경제적 붕괴, 질병의 만연, 전쟁에 의한 대량 파괴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카르마를 예수 1인이 짐질수 있었던 것, 그게 바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신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을 떠나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지 않다고 그럽니다. 우리가 이나마 살아있어 활동하는 건 신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의 힘에 눈을 돌려 그것을 바로 사용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재 인류의 전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그런 일이 인류 전체에게 일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신성의 힘을 인류의 카르마를 변환시키는 데 쏟는다면 대규모적인 파멸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보면 최소한 열 명의 의인들만 있었다면 그 도시의 파괴를 막을 수 있었음을 알 것입니다. 그 일화에서 의인의 역할은 '빛의 기둥'인 것입니다. 의인의 역할은 스스로가 빛의 기둥이 되어 그 도시의 전체적인 카르마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신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일할 때 그 사람의 모든 챠크라에서 방사되는 신의 엄청난 에너지는 한나라 혹은 대륙 전체에 어둠의 힘을 감소시키고 빛의 작용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몇 만년간 누적된 카르마의 빚을 단숨에 갚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의 때는 기회의 때이기도 합니다. 대사들은 지금은 '물리적 비전(physical initiation)'의 때라고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때에는 고요히 자아를 성찰하여 자아의 본성을 깨우치는 때였다면 지금은 '행동'해야 하는 때란 얘기겠지요. 인류의 카르마가 떨어져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고요히 명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암흑주기가 더욱 어려운 것은 이 시기를 틈타서 어둠의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규모의 파괴로 인해 그동안 쌓아온 문명이 다 날아가 버린다면 나중에 우리가 다시 태어났을 때는 아마도 구석기 시대가 한참 진행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르침들은 아마도 다 날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가르침들을 회복하려면 아마도 다시 몇 천년이 지나야 하겠지요. 만일 이 시기를 대규모적인 파괴없이 넘긴다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르침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고 후대에 태어나는 이들은 보다 쉽게 이런 가르침들을 접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이 생애 승천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쉽사리 과거에 알았던 가르침들과 연결되겠지요. 그래서 못했던 일들을 마저 다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에게 제일 시급한 과제는 구세주의 일에 동참해서 대규모적인 파국을 저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사들은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필요 한 행동의 길인 '카르마 요가'를 제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대사들과 더불어 이웃을 돕는 이러한 일은 아마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내면에서 했던 맹세일 겁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려는 마음은 여러분들의 내면적인 충동이 되었고, 그 충동 때문에 道라는 것을 찾진 않았습니까? (카르마 요가는 행동의 요가이고 자기를 잊고 중생(그 안에 계신 신)에게 봉사함으로써 완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요. 여러분은 빛의 전사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지구를 구하시길!)
4. 넷째주 강의 : 발언의 과학 - 디크리
수행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와 명상, 그리고 주문이나 디크리를 바치는 것처럼 소리로 하는 수행입니다. 기도는 사랑을, 명상은 지혜를, 디크리는 힘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세 가지의 균형은 대사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 효능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비해 디크리의 과학 즉 '발언의 과학'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는 오해되고 있기도 하고 일부러 억제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발언의 과학'은 고대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의 사제들이 빛의 힘을 불러일으킬 때 쓰던 기술로 대사들은 이 테크닉들을 다시 복원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이 시대의 제자들이 몰라서는 안될 중요한 테크닉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수련이나 기수련은 크게 볼 때 명상수련에 들어갑니다.
'발언의 과학(the science of the spoken Word)'은 만트라, 챈트(chant), 기도문, 기원문(invocation), 시인(affirmation), 찬가, 빛의 명령 등을 바침에 있어 '목 챠크라'와 함께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긍정문으로 예를 들자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같은 것이지요. 즉 존재의 진리를 긍정하여 그것이 현현하게 하는 것 빛의 명령은 피아트(fiat)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빛이 있어라' 또는 '잠잠해져라'하는 등등의 명령문이지요. '잠잠해져라' 는 영어로 'Peace be still'인데 예수께서 바람을 잠재울 때 쓰던 명령이지요. 이는 감정을 잠재울 때 사용되는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신의 진화하는 의식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그리스도적 존재의 잠재력을 열 수 있게 해주는 자기-지식에 이르는 열쇠를 주려는 것은 신의 최고의 바램입니다. 자기 다스림의 에너지와 지성, 동기를 발출케 할 그 열쇠는 응답을 촉구하는 부름(call)입니다.
부름은 응답을 재촉한다. call compels answer.
부름은 말 그대로 신을 불러서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겠느냐?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당신의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신으로부터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함께 계신 신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계신 신은 우리를 위해 일할 만반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디크리는 그 신과 신의 일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 자신입니다. 좌우지간 신은 우리가 달라고 하면 안 주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단, 그것이 신의 뜻과 일치하는 것일 때입니다.
'발언'은 영어로는 'spoken Word'입니다. 여기서 Word는 단 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이라고 번역되는 것으로 요한은 그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그가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그가 곧 하느님이라.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 그로 인하여 지어지지 않은 이가 없더라." 이 말씀은 우주의 창조력입니다.
발언의 과학은 바로 그 말씀의 힘을 발출시키는 테크닉입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 분의 그리스도 자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성난 파도와 바람을 잠재웠습니다. 그것은 그가 말씀(그리스도)과 하나가 되었고 그의 명령은 곧 신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의 명령 앞에 모든 만물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그리스도는 예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예수께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상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일을 그가 할 것이며, 그 이상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다함은 예수와 하나가 되었고, 모든 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그리스도가 자신의 참자아이며 자신의 실체임을 받아들이며, 그가 바로 나의 구원자이며 세계의 구원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가니깐 너희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얘기는 예수께서 우리의 기도나 디크리를 하늘에서 더 증폭시켜 준다는 얘깁니다. 이런 일은 비단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대사들도 그렇게 하고 여러분이 승천한 다음에도 또 그렇게 할겁니다. 그래서 승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구 전체의 빛이 증가하여 점점 좋은 곳이 된다 이겁니다.
'발언의 과학'은 그 말씀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 세계에서 일하기 위해서 육신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세계에서 일할 초점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초점입니다. 여러분이 신의 뜻에 따를 때 여러분은 말씀의 도구가 됩니다.
디크리에 관한 세인트 저메인 대사의 가르침 --------
---사람은 디크리의 올바른 사용법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말한 일체의 사소한 말에 대해서도 심판의 날 그에 따른 응보가 주어지리라. 너희는 너희 말로 인해 의롭다함을 얻겠고, 너희 말로 인해 저주를 받으리라." 디크리는 부주의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세심한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권하는 패턴은 사람을 위해 지고의 선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것이다.
(실상 사람의 모든 말은 디크리이고 만트라(주문)입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서 신의 에너지는 항상 작용합니다. '나는 바보다'라고 말한다면 '내 안에 계신 신은 바보다'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에너지는 당신을 바보로 만드는 데 쓰일 겁니다. '나는 빛이요, 진리다'라고 한다면 '내 안에 계신 신은 빛이요 진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당신 안에 빛과 진리로 현현될 것입니다.
'너는 왜 그리도 모자르냐'고 상대방을 힐난하면 내 안에 있는 신의 에너지가 상대방을 멍청하게 만드는데 쓰입니다. 그렇게 나간 신의 에너지는 상대방의 성장을 방해하는 족쇄로 현현됩니다. 그래서 비난을 오랫동안 받게 되면 대개의 사람은 성장을 멈추고 풀이 죽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자신에게 있는 능력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말은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용한 대가는 반드시 자신이 거두게 됩니다. 내가 어리석었어. 라고 말할때, 그게 자기 반성에 그치면 되겠지만 그게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시인이라면 정말로 멍청해 질 겁니다. 그게 맨날 되풀이되면 정말로 멍청이가 됩니다. 그게 왜곡된 신의 힘 즉 마야의 힘입니다. 물론 본질은 어리석지 않겠지만요. 쓸데없는 말이 부정적인 카르마를 만들기 때문에 수행자는 침묵을 금처럼 여겨야 하는 겁니다. 필요한 말만 하고 그 외는 '예'나 '아니요' 만으로 대답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시인하는 것하고 현재의 자기 모습을 완전하다고 보는 것하고는 다른 얘깁니다. '너희는 신이다'라고 했을 때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고)을 그 자체로 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네피림적인 생각입니다. 교만과 탐욕의 덩어리인 자신의 모습을 신으로 보고 자신의 매사를 합당하다고 본다면 그 악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런 존재들이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서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다주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신성에 대한 견해는 겸손과 '자기 존재의 긍정' 사이의 균형 속에서 자리잡아야 합니다. 겸손은 자신의 현재 모습 이 결코 신이 아니라 거짓된 것이기에 드러나지 않은 신성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긍정'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신성이 자기의 본질이자 자기 존재의 법칙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한 긍정은 되풀이 될수록 존재의 참빛이 점차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흔히 만트라 또는 디크리라고 하는 것은 신성 에너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발산할 수 있도록 그 의미와 단어를 세심하게 배열해 놓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문이나 디크리를 할 때 평소보다 좀 더 집중해서 말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말보다 효과가 강한 것입니다. 세인트 저메인의 말을 계속 인용하겠습니다. )
디크리는 일반적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디크리는 신께 보내는 편지로 여겨져야 한다. (1)디크리의 인사말은 기원적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의 개별화된 신적 현존체와 영적 하이어라키를 구성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말(디크리의 서두)은 경건히 바쳐졌을 때, 하느님과 승천한 이들의 응답을 재촉하는 부름이 된다. (즉 아엠 프레젠스와 여러 대사들, 천사들의 이름을 서두 부분에 넣습니다.) 소방수가 그대의 도움요청을 거절할 수 없듯이 우리도 이러한 소환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인사말의 목적은 그대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합심하여 사랑스럽게 소리내는 신께 보내는 편지의 몸체부에 대한 응답 안으로 승천대사들의 에너지를 즉각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즉 자기의 기도에 대사나 천사들을 끼여들게 하는 겁니다.)
(2)편지의 몸체부는 자신이나 남을 위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특질들, 보통의 기도에서도 포함될 수 있는 기원들을 명시한 글귀로 구성된다. 그대의 외면적 의식과 하부의식 그리고 초의식 또는 상부 자아를 통해서 발언의 힘을 발출하게되면, 그대가 불러일으킨 승천 대사의 지고한 의식 도 그대가 간구한 것의 발현에 관여하게 된다는 점을 확신해도 좋다. (즉 대사나 천사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게끔 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들은 우리가 신의 뜻에 합당하게 요구하는 기도나 간구에 대해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이기적이거나 저질적이라면 어두운 것들이 일할 위험이 있지요).
(3)이제 디크리를 종결함에 이르러, 하느님의 가슴 안에서 편지를 봉인하는 받아들임(the acceptance)은 영의 권역으로 위임하는 마음으로 바친다. 그러면 그곳으로부터 연금술(alchemy : all-chemistry of God 하느님의 일체적 화학)과 침전의 틀림없는 법칙을 따라 발현이 물질적 형태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온다. ( 종결부분에서는 자기가 바라는 바가 꼭 발현하고 확대되길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수학에서 제곱의 힘을 이해하는 자는 집단으로 신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킴에 동참할 때 단순히 일 더하기 일 베이스로 참여자의 수만큼 그 위력이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디크리를 하는 사람 수와 디크리의 횟수로 제곱하여 발언을 실현시키기 위한 힘의 발산을 증대시켜 주는 '제곱의 옛 계약' 속으로 동참자들이 진입해 들어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두워진 세상으로 보내는 빛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의식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생명안으로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적인 디크리를 충심으로 권하고 있지만, 그룹 디크리는 소원하는 선에 대한 강력한 심상화가 동반되었을 시에는 개인적인 디크리보다 세계적 규모에서 더욱 효과적이며, 참여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신속한 응답을 초래하게 된다. ( 심상화는 시각화, 영상화 즉 visualization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여럿이 모여서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디크리를 하면 전쟁이나 재난도 막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성 주위를 돌면서 소리를 지르니까 성이 무너져 버렸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그 예지요.)
명심할 것은 누적된 필멸적 악취로 에워싸인 오늘날의 형태의 세계 속으로 선(Good: God 신)을 불러일으킬 때면 언제나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높은 데서부터 발출되어 오는 선(빛)은 (그 빛의 높은 진동수 때문에) 지구의 대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정적 바이브레이션에 의해(이들 바이브레이션의 낮은 진동수때문에) 거의 항상 자동적으로 반발된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디크리를 함에 앞서 자기 주변에 보호의 역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대사들이 주는 디크리 중에는 개인적, 세계적 악에 도전하는 디크리가 있는데 이런 것은 충분한 준비없이 하다가는 오히려 반작용에 말려들어가 버리기 쉽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버리기도 하고 갑자기 분노가 일어나거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도 반작용의 하나지요. 반작용은 대부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빛에 비례해서 나타납니다. )
디크리에 있어서 박자 또한 중요하다. 올바른 박자는 디크리를 통해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의 특질들을 혹성전체로 끌어 당겨올 영적인 바이브레이션의 가장 침투적인 투사를 만들어 낸다. 혹성체 위로 물결치는 원들을 형성하는 이들 파장의 모멘텀은 헌신자가 같은 노력을 쏟기 위해 모이는 그 어느 곳에서도 빛의 심화를 창출해낸다. "너희는 일을 명하라. (Thou shalt decree a thing.) 그러면 그 일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이사야?) 이 말은 디크리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힌 고대의 격언이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은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니 빛이 있었다."라고 했던 그 태초에 하느님이 사용한 그것을 작용케 할 수 있는 동일한 힘을 갖고 있다.
디크리를 지배하는 법칙과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우리의 모임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디크리하는 것을 접하는 사람은 어떤 부정적 세력이나 엔터티(entity)들의 영향 아래 놓일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들 세력은 자연스레 다이나믹 디크리의 사용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디크리를 하는 장소에 처음 들어가거나 디크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처음 듣게 되면 거기서 발출되는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 사람의 내면에 숨어있던 엔터티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분노나 두려움에 휩싸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들 의식 속에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온갖 종류의 엔터티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수행을 방해하고 빛의 흐름을 왜곡하는 요인들입니다. 이는 빛의 정화작용을 통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제대로 하면 그런 엔터티들이 발동을 못합니다.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로써 신성의 빛과 에너지로 변환(transmutation)시켜 버려야지요. 엔터티는 인간하부의 감정덩어리 같은게 응집되어 나름대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엔터티 중에는 알콜의 엔터티, 마리화나의 엔터티, 자살의 엔터티 같은게 있는데 술자리라면 알콜의 엔터티같은 게 형성되는 장소고 또한 이런 엔터티들이 술을 더 부추기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술을 먹고 그로 인해 발산되는 에너지가 그 엔터티들의 생명원이니까요.)
디크리의 올바른 사용은 연습을 요한다. 처음부터 우주의 완전함이 자신의 생명에 쌓인 일체의 쓰레기를 쓸어가 버릴 거라고 기대해선 안된다. 올바른 디크리는 기술이다. 좀 더 숙달됨에 따라 디크리의 속도를 높여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바치는 비율을 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속도를 높여감에 따라 어떤 일이 생기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전자적 패턴의 진동율을 고양시키는 이러한 가속은 그 사람의 세계 속에 있는 부정적 생각과 감정들을 떨쳐버리고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
뭐든지 잘하려면 꾸준한 연습을 통해서 그 모멘텀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마치 피아노같은 악기를 연습하는 것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악기 연주자는 한두 대목을 연습하고 또 하고 또 합니다. 어떤 수행도 마찬가지지요. 힘 안들이고도 쉽게 효과를 가져오는 방법을 믿지 마십시오. 생명의 에너지들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신의 모든 아들과 딸들의 그리스도적 주체 또는 상부 자아의 특권입니다. 인간적 자아는 불완전하고 미완인지라 창조적 명령을 발할 수 있는 권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디크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안에 계신 전능한 하느님의 현존이신 '아앰'과 나의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의 이름 안에서"
'In the name of Mighty Victorious Presence God I Am in me, and My Holy Christ self'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같은 원리지요. 자신의 현재의 한계와 능력을 인식하는 제자는 일체의 육적인 장벽을 극복하고 성령의 힘으로 자신의 의식을 새롭게 할 신의 전능함을 시인합니다. 성령은 제자의 심장 안에 세줄기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거룩한 불로 발현되어 있습니다.
디크리 또는 신적인 명령과 디크리하는 자, 그리고 디크리에 대한 응답 모두는 신으로 신의 삼위일체적 발현인 것입니다. 디크리하는 자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 이 디크리를 바치는 것이다. 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에너지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 발현하고 있는 '발언의 힘'에 의해 법칙을 실현하고 있는 이도 바로 하느님이다"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하급 자아)은 신의 가슴으로부터 나와 발현된 완전함으로 응집되는 빛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는 빛의 원천도 아니고, 창조의 주재자도 아니며, 빛으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할 고유의 힘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신의 빛, 신의 말씀, 신의 디크리가 자신을 통해 흘러나가 창조주의 완전한 일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살아있는 희생물로 순결에 헌정합니다. 그처럼 누가 '행위자(doer)'인지를 명심하고 제자는 아버지/어머니 하느님(아앰 프레젠스)과 성자(자신의 그리스도 자아로 현현된 만유의 그리스도)와 성령(형태와 의식에 신의 에센스인 생명을 부여하는 거룩한 불의 에너지들)의 이름으로 디크리를 바치는 거룩한 의식을 집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문이다(I AM the Door)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라고 했을 때 'door'는 'doer'입니다. 그리고 '나는'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하느님)'입니다. 즉 바로 진정한 행위자는 하느님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께선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지요. '부처가 부처를 깨닫는다'는 말하고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이런 인식이 참다운 수행의 요체입니다.)
디크리하는 장소는 잘 정돈되고, 깨끗하며, 환기도 잘되고, 조명도 적당한게 좋습니다. 먼지가 많거나 어수선한 곳, 탁한 공기, 어두운 불빛은 디크리의 효과를 떨어트립니다. 이런 것들은 빛의 흐름을 방해하고 천사들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이들 천사들은 신의 거룩한 에너지를 증폭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천사들입니다. 수행할 때 천사 또는 신장 또는 데바라고도 하는 존재들이 옆에서 수행을 돕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주변을 정돈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민감한 존재라 약간의 부조화스런 진동도 꺼려합니다. 불가에서 오채를 먹지말라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오채의 냄새나 진동이 이런 존재들을 못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음식들은 수행자의 몸속에 들어가 수행자의 부조화스런 의식의 일부가 됩니다.
이런 존재들은 수행자를 외부의 나쁜 진동에서 보호하는 일도 하지만 신의 에너지를 전달하고 수행자의 기도를 전달하는 사자 역할도 합니다. 야곱이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을 꾼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일은 안 보이는 세계에서 늘상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영상화 또는 시각화(visualization)
'아앰 프레젠스' 위에 있고, 당신의 하급 자아는 바이올릿 불꽃에 휩싸인 채 거룩한 그리스도 자아의 보살핌을 받고 있고, 심장에서는 세줄기 불꽃이 고동치고 확대됨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세줄기 불꽃 중에 파란 불꽃은 왼쪽, 핑크빛 불꽃은 오른쪽, 노란 불꽃은 중심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아엠 프레젠스'가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자기 위에 있음을 그리라는 얘깁니다.) 마음속에 어떤 선명한 이미지를 그리고 그걸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같은 이미지에 대해 오랜 동안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꾸 하다보면 그 이미지가 점차로 분명해 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면 그것은 아주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
의식과 몸이 정화되어 기가 잘 유통될 수록 시각화가 수월해집니다. 돼지고기나 술같은 것 잔뜩 먹고 마음속에 거룩한 이미지를 그리긴 어렵지요. 그 음식의 진동 때문에 이미지가 자꾸 일그러질 겁니다. 우리가 시각화한 고상한 이미지는 신의 에너지가 이 세계로 흘러나오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포하트는 이미지화 된 키(key)를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그려진 이미지를 따라 성령의 에너지가 흐른다는 말입니다. 포하트(Fohat)는 성령의 에너지를 말합니다.
이런 이미지로 흔히 사용되는 것이 빛의 구나 히란야와 같은 대칭적인 기하학적 이미지들입니다. 이런 것을 선명하게 오랜 동안 시각화할 수 있으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신성한 에너지로 인해 존재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예수나 크리슈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다보면 그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예수나 크리슈나의 에너지에 의해 수행자가 오히려 변화하게 되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디크리의 실제 수행: 편안한 의자에 앉아 척추와 머리를 곧게 세우고, 다리와 손은 서로 교차되지 않게 합니다. 발바닥은 바닥에 붙입니다. 나쁜 자세는 부정적인 힘들에게 의식을 열어 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출입구인 태양 신경총 챠크라(배꼽)가 제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부린 자세가 그렇습니다. 다리를 꼬거나 손을 마주잡으면 개인에게서 흘러 나와 모든 인류를 축복하는데 쓰일 에너지들이 그 사람 안에서만 짧게 순환하고 말게 됩니다. 발과 손을 통해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 나가게 하라는 얘깁니다. 발과 손도 하나의 챠크라입니다. (흘러나간 에너지는 아앰 프레젠스로부터 실버코드를 타고 계속 보충됩니다. 자신이 빛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대사학에서는 세줄기 불꽃이 크기가 그 사람의 수준을 말해준다고 하는데 이 불꽃을 키우는 비밀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신의 사랑의 속성 아닙니까?)
디크리가 실린 책이나 메모를 보면서 할 경우 눈높이 정도에 놓고 보도록 합니다. 그걸 보느라고 몸을 구부리는 일이 없게끔. 손에 아무것도 안 들려 있을 경우 무릎이나 탁자에 놓되 대사들을 통해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합니다. (반드시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서건 눕건 다 좋은데 구부리는 건 삼가라는 얘깁니다. 절을 하는 건 좋습니다. 그러나 엎드린 채로 오래 있으면서 주문같은 걸 외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분노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배알이 틀린다고나 할까요)
긴장하지 않은 채 디크리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또렷하게 디크리를 바칩니다. 그런 다음 리듬에 집중하면서 속도를 늘립니다. 목소리는 힘차고 당당할수록 좋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조용히 바칩니다. 호흡은 깊고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쉬는 숨과 함께 당신의 온 몸으로 빛이 투사되어 일체 생명을 축복한다고 생각하도록 합니다. (호흡은 한번에 훅하고 마시고 디크리를 바치면서 천천히 내뱉습니다.)
만일 누군가를 위해 디크리를 바친다고 할 때는 서두 부분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명시합니다. 예를 들자면 '나의 아엠 프레젠스와 그리스도 자아의 이름으로' 한 다음 '누구누구의 아엠 프레젠스와 그리스도 자아의 이름으로'라고 추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돌아가길 원하는 축복 등을 구체적으로 거명할수록 좋습니다. 좀 더 구체적일수록 그 효과가 집중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처럼 상대방의 '아엠 프레젠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그 상대방의 세계안으로 하늘의 문을 열어서 그 사람에게 빛의 축복이 흘러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 사람은 현재 나타나 있는 (정신적/육체적) 불완전한 상태들로부터 치유될 수 있습니다. (친구나 누구를 말로 설득해서 안될 때 이런 방법을 써 보세요. 틀림없이 상대방이 변하게 됨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상대방이나 구체적인 축복을 거명하지 않을 경우 디크리나 만트라로 불러 일으켜진 에너지는 승천 대사들이나 천사들에게 위임되어 필요한 아무 곳이나 아무에게나 쓰이게 됩니다. (낭비되는 에너지는 한 푼도 없습니다. 우리가 남용하는 것 말고는)
디크리가 발현하길 받아들임이 또한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의 빛이 필요한 곳은 바로 여기 육계(physical octave)이기 때문입니다. 디크리를 통해 수행자는 완전한 영역의 에너지를 끌어와서 이 세계의 불완전함을 치유하는 겁니다. (아엠 프레젠스와 그리스도 자아의 세계는 이미 완벽합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할 곳은 이 세계인 것이지요.) 디크리에 대한 응답이 발현하길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의 순수한 에너지는 물질적 형태의 세계로 붙지 않은 채 존재의 상부 영역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발언'은 하늘에서 땅으로 빛으로 끌어당기는 열쇠입니다.
예수의 경우를 보면 병자를 치유할 때에 하늘 나라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완전함을 물질계로 현현시키기 위해서 빛을 발출시키는 명령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나자로를 살릴 때 권위있고 힘찬 목소리로 '나자로, 나와라!'라고 말하자 나자로가 살아서 나왔습니다. (매직이나 연금술에 있어서도 최종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게 하려면 목소리로 크게 '나타나라'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프레젠스로부터 나오는 빛은 여러 챠크라를 통해서 발산됩니다. 디크리할 때 말씀의 힘은 목 챠크라를 통해서 흘러 나갑니다. 이 챠크라는 파란 전자 광선을 내뿜는 모습으로 시각화합니다. 심장은 세줄기 불꽃. 이마 정가운데는 에머랄드빛 녹색, 정수리에서는 그리스도의 후광인 황금빛 광채가 나갑니다. 집중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프레젠스의 에너지가 '발언된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그 사람의 '주의(attention)'의 흐름을 타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머무는 곳에 기 가 있다'(심기혈정 心氣血精)4)고 하지 않습니까. 디크리할 때 주의는 심장의 불꽃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의를 원하는 결과에 고정하고 마음의 눈으로 디크리가 발현하는 것을 그리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시작하는 처음에는 심장에 집중하고 서서히 그 결과를 심상화하란 얘기지요. 아니면 그저 자신의 챠크라로부터 빛이 나가서 세상을 축복한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디크리나 만트라의 글에 익숙해지면 눈을 감고 자신이 불러일으킨 활동이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그려봐도 좋습니다. 때로는 각각의 단어나 구절을 신의 에너지로 충전된 상념 -패턴 또는 '컵'이나 '잔'으로 그려봐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디크리하는 모습을 보니까 입에서 번쩍거리는 단어들이 튀어나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까 얘기한 엔터티중에서 이것은 빛의 엔터티라고 봐도 되지요. 이런 빛의 엔터티들이 생성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거지요.)
만곱하기 만의 힘
1961년 로드 마이트레야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 마이트레야는 오늘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승천 대사들과 대광명 형제단의 위원회들은 심사숙고 끝에 인간적 폭정이 민중의 마음을 너무 오랫동안 지배해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날의 학인들에게 '만곱하기 만의 힘'이라고 알려진 것이 주어지도록 간구하였다. 인간적 폭정이란 인간적 의식, 인간적 에고의 횡포를 말합니다. "이제 이날 이후로 너희가 바치는 모든 디크리는 '만곱하기 만의 힘'에 의해 증대될 것이다. "나, 마이트레야는 선언하노니, 이날 이후로 디크리를 바치는 자는 엄청나고도 거세며, 신속하게 움직이는 가속화를 창출하게 되리니, 그것은 인류의 지상적 의식을 쓸어버리고 이 지구에 자유를 가져다주리라. ----------
아래는 세인트 저메인의 말입니다.
--- 오, 그대는 디크리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서 그대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그대 자신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아는가! 자유에 이르는 얼마나 큰 혜택인가! 세상은 선한 쪽으로 얼마나 영광스럽게 변모할 것인가! 말씀의 힘에 의해 땅이 형성되었다. 말씀의 힘으로 인해 인간의 자유는 신의 이름 안에서 당당히 주장될 것이다. 그대는 디크리를 사용하라! 사람들의 견해를 두려워 하지마라. 하이어라키는 이미 말했으니, 듣는자는 혜택을 얻으리라.----
(이 얘기는 우리가 바치는 기도나 디크리의 힘을 승천대사들이 일억배로 증폭시켜서 우리 세계로 내보낸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디크리하면 일억명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단 얘기지요. 지금은 25800년간 인류가 쌓아온 카르마와 상대하는 시기입니다.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지요. 적어도 백여만명 정도는 매일 디크리해야 모든 위기를 완전히 넘길 수 있을 겁니다.)
(강의중 질문 모음)
1. 패턴(Pattern)이란?
패턴은 '단어나 어귀의 배열'같은 건데, 패턴이 중요한 이유는 신의 순수한 에너지가 통과되어 나오는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거룩한 이미지도 일종의 패턴이지요.
2. 하이어라키란?
하이어라키는 계층구조. 계급구조로 이 우주는 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엘로힘, 대천사, 천사, 대사 등등 큰 존재에서 작은 존재로 계층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의 에너지는 하이어라키의 계층을 타고 점점 감압되어져 이 세계에 이르게 되고 다시 우리의 기도같은 건 하이어라키를 통해서 위로 증폭되어 가지요.
3. '연금술과 침전의 틀림없는 법칙' 이란?
연금술은 비금속을 금속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알고 있지만 또한 인간적 저급한 의식을 지고한 신의식으로 바꾸는 신의 화학작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거룩한 불에 의한 세례라는 것이 바로 그런 화학작용을 말합니다. 침전의 법칙은 영적 세계의 이미지가 형태로 나타나는 법칙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4. 절하면서 디크리를 할 수 있나요?
절할 때는 호흡이 곤란해서 디크리가 잘 안될 겁니다. 간단한 진언을 외는게 좋을 것 같군요. 절할 때도 있고, 조용히 명상할 때도 있고, 큰 소리로 디크리 할 때도 있고,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또 '옴 마니 밧메 훔'같은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진언이 있지요.
5. 제곱의 옛 계약은 뭔가요?
'옛'자를 붙이는 이유는 성서하고 관련이 있는듯 싶군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신이 맺은 계약은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계약입니다. 성서의 계약은 '옛적부터 계신 이'(사나트 쿠마라)와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이지요. 이스라엘은 'Is Real' 즉 가슴속에 '세줄기 불꽃'을 가진 모든 신의 아들과 딸들을 얘기합니다. 특정한 혈연 문제는 아닙니다.
6.내부에 있는 악의 엔터티를 정화하는 방법은요?
악의 엔터티를 우리 스스로 파악하고 제거하긴 아주 어렵습니다. 때로는 그게 나자신인 것같이 보이니까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 내재된 그런 요소들을 하나 하나 거명하며 신에게 파괴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빛을 불러일으키는 진언이나 디크리를 바칩니다. 바이올릿 불꽃의 디크리나 불교 진언이 그것입니다. 불교 진언 중에는 '옴 아 훔 바즈라 구루 파드마 시디 훔'하는 진언이 있는데 이게 제일 파괴적인 것 같습니다. 이는 파드마 삼바바의 진언인데 파드마 삼바바는 악귀를 제압 잘하기로 유명하지요. 또한 아주 중요한 스승이기도 하고요
옴 아 훔 바즈라 구루 파드마 시디 훔
누워있거나 자다가 갑자기 공포가 엄습하거나 할 때가 있다면 그런건 외부의 힘이나 엔터티일 수 있습니다. 그런 힘이나 엔터티는 마치 구름처럼 떠돌다가 구미에 맞는 게 있으면 그리로 꼬입니다. 즉 그건 그 사람 내면에 그런 공포의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예를 들면 무의식속에 깊이 감추어진 과거의 비참한 사건같은 것, 그런게 기억은 안나도 알게 모르게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뜻모를 공포는 대부분은 그런 거지요. 죽어서 떠도는 영혼을 'discarnate' 엔터티라고 부릅니다. 이런 영혼은 에너지로 변화되는 게 아니라 천도된다고 그러지요. 대사들의 학교가 있는 데로 데려다가 공부시키지요. 심상화를 강하게 하려면 할수록 강한 에너지가 발산되는데 그럴수록 반발도 심해지기 때문에 먼저 보호의 역장을 형성하고 미카엘 대천사 같은 이에게 지켜달라고 하고서 하는게 안전할 겁니다.
7. 승천을 위한 일상적인 수행이 있나요?
좋은 습관이 승천의 관건입니다. 매일 그날 일을 참회하는 것과 항상 자비로써 남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 늘 정진하는 것 등등입니다.
8. 선도에서는 성명쌍수법을 지키지 않아 깨달은 자들도 병에 걸린다는데요?
진정으로 깨달은 자라면 자기 몸의 병 정도는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도 병에 걸리는 이유는 자기가 갚아야 할 카르마를 회피하지 않아서 생기는 경우도 있고, 인류의 카르마를 대신 짐으로써 병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좌우지간 그런 병은 이미 그들이 그런 정도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성명쌍수는 중요한 거지요. 몸을 내팽개치는 것은 수행의 연장을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몸에 너무 치중하는 건 본말이 거꾸로 된 거지요. 몸과 마음의 조화와 균형은 수행의 빠른 진척 및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선도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오해하고 있는 건 성명쌍수라고 해서 몸만들기를 중시하는데, 몸을 마치 금강불괴처럼 만든 다음에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하거나 기수련을 해야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간 평생 마음닦는 수행은 시작도 못하기 쉽습니다.
몸이란게 일하고 수행하기 편한 정도로 건강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 몸에 치중하는 것은 시간 낭비고 정력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몸과 정신의 구분은 원래 없습니다. 몸을 잘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며 몸을 잘 다스려야 마음도 잘 다스려지고 마음이 잘 다스려져야 몸도 잘 다스려지는 거지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요? 선사(禪師)들은 '아엠 프레젠스'를 깨달은 겁니다.
9. 음악을 듣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5)
현재 유행하는 일부음악은 명백히 사탄의 세력들이 이 문명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록뮤직. 랩뮤직. 째즈도 포함될 겁니다. 챠크라로부터 저급한 형태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만듭니다. 록비트를 들으면 힘이 나는건 챠크라에서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인데 아주 저급한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 저급한 에너지들이 지구 전체에 심각한 공해(영적, 물질적)를 유발시킵니다. 그 결과 지구에 어둠의 무게가 점점 커지지요.
챠크라에서 고상한 에너지를 발산케 하는 음악도 있지요. 바하나 베토벤과 같은 고상한 클래식들입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성모 마리아와 라파엘 대천사의 영감으로 나온 음악이지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도 실은 천상의 음악이지요. 성모 마리아의 키노트라고 하는데 키노트는 그 대사의 코잘체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으로 그 대사를 깊이 명상하면 내면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지요. 예를 들어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4악장은 석가모니의 키노트고,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사나트 쿠마라의 키노트고,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은 엘 모리아 대사의 키노트입니다.
클래식 음악 중에는 대사들이 특별한 목적으로 영감을 제공한 음악이 있습니다. 또 그런 작곡가들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음악의 사원에서 훈련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지요. 현대에 그런 음악가들이 나타나지 않는건, 그런 음악가들이 태어나는 시기도 있지만 보다 큰 원인은 종교나 사상의 타락과 연관이 깊은 것 같습니다. 현대에도 대사들의 영감을 받은 작곡가들이 있지만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