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된 조국에서 우리가 '통일'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전쟁, 이산가족, 판문점, 3·8선, 남북정상회담, 경제적 번영… 등 많은 화두가 떠오를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 통일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은 '백두산'이라고 생각한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모든 줄기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산맥을 타고, 남과 북을 아우르면서 뻗어있다. 남과 북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백두산을 가고싶어한다. 하나된 조국의 정체성를 찾고 민족의 정기를 한품으로 안아오고자 우리는 그 곳에 간다.
이런 백두산기행이 '조선대 백두산 통일연수'라는 이름으로 2002년 하계기간동안 두 차례 이루어졌다. 2만학우의 통일에 대한 신심과 열정을 담아서 백두산에 심어줄 수 있는 의미있는 행사가 개최된 것이다. 연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나는 민족의 영물인 백두산을 본다는 설레임과 함께 평소 남북한 통일과 민족의 화해협력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온 나에겐 소중한 경험을 줄 수 있는 귀한 기회인 것이다. 두 차례의 예비모임을 통해 여권발급과 연수에 필요한 정보 등을 교환하였으며 조별모임을 통해 4박 5일간의 시간을 함께 할 벗들을 알게되었다.
[통일연수 첫 번째 날]
밤 12시가 넘어서 통일연수 첫 번째 날을 시작했다. 학생과 교직원으로 구성된 연수단은 짧고 굵은 발대식을 갖고 모두 버스에 올랐다. 남에서 북동방향으로 7시간이 걸려 동해바다를 보았다. 낙산해수욕장에서 본 바다는 밤새 어둠과 좁음 속에 갖힌 연수단을 밝음과 넓음 속에 던지고도 남았다. 파도 속에 일연수 기간동안의 무사함을 빌었다. 동해의 특산물인 쫄깃쫄깃한 오징어 회무침으로 식사를 마치고 백두산으로 가는 첫 관문이 속초 항에 발을 딛었다. 우리와 함께 할 동춘호는 중국과 러시아를 왕래하는 소위 '보따리장수'라 불리우는 낯선 이방인들과 한국인 관광객을 태우고 긴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속초항을 떠났다.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그리고 나는 왜 지금의 시점에서 백두산으로 가는지를 또 왜 우리는 이렇게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통해 백두산으로 가지 못하고 '장백산'이라 불리우는 이국의 땅을 거쳐가야만 하는 지를 생각해보았다. 분단의 아픔과 불편함은 바로 이러 사소한 것에서부터 느끼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망망대해에서 느끼는 공허함만큼 나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17시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항해시간동안 서로 다른 학부사람들과의 낯선 만남을 낯익은 어울림으로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선상에서의 두 번에 걸친 식사와 조별 오락시간 그리고 학생과 교직원들이 어울려져서 서로의 만남을 확인하고 백두산과 통일을 얘기하고 학교발전에 대한 고민을 말하면서 연수의 의미를 깊이 깊이 만들어갔다. 선상에서 바라본 밤은 정말로 황홀했다. 한 인간의 고독과 슬픔을 안아주고 삶의 가치를 되새겨주는 환상적인 동반자를 나는 이곳에서 만나며 4박 5일 여정의 첫날밤을 새색씨 마냥 맞이하고 있었다.
[통일연수 두 번째 날]
먼 수평선을 붉게 물들인 일출을 보면서 연수 두 번째 날을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보다 2시간이 빠른 러시아 시간으로 아침 9시에 자루비노항에 도착했다. 여권과 비자를 검사하는 제복을 입은 러시아인을 보면서 우리가 먼 이국 땅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인이 운전하는 버스 안에는 선명하게 "DAEWOO"라는 마크가 새겨진 중고버스였으며 재미있게도 그 옆에는 "흡연금지, NO Smoking, No garbage, 벌금 30$"이라고 적혀있었다. 주로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이용함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 땅은 낯설었다. 넓고 푸른 초원에 듬성듬성 나있는 키 작은 나무들과 허름한 벽돌집들이 이국적인 정서를 물씬 풍기게 했다.
2시간 여의 시간이 지나서 중국의 훈춘에 도착했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이라는 3국의 국경이 맞닿아있는 훈춘땅은 3개의 검문소를 통과하고 2번의 세관을 거치고서야 밟을 수 있었다. 우리를 첫 맞이한 사람은 옥수수와 사과 등을 한 봉지에 담아서 우리나라 돈 천원에 판매하는 조선족이었다. 중국 땅에서 처음 만난 조선족 아니 재중동포의 첫인상은 만주벌판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후손의 모습치고는 초라한 것이었다. 씁쓸했다. 훈춘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10여 가지의 푸짐한 음식이 계속 나왔다. 특히 연변의 황소는 힘도 세고 잘생긴 걸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맛 또한 개고기 맛처럼(?) 쫄깃쫄깃했다. 중국에서는 기름기 있는 음식 때문에 차를 즐겨 마신다고 하던데 구수한 맛이 그윽한 둥글래 차는 풍족한 식사의 뒷마무리로 안성마춤이었다.
훈춘을 지나 연길방향으로 가는 길은 '눈물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두만강을 끼고 가게된다. 두만강은 생각이상으로 강폭이 좁았고 강물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또한 연변지역의 개발로 공장이 상류지역에 들어서면서 물이 오염되어 많이 혼탁했다. 도문강유람부두에서 함경북도 남양주시인 북녘의 땅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1당 5천원 하는 모터보트를 타고 넘어지면 북한땅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내 조국의 땅이지만 갈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윤동주 시인의 고향 용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선구자'라는 가곡에 나오는 비암산 일송정과 혜란강이 있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민족의 희망이자 항일독립군의 피가 어려있는 그 곳을 지나면서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작은 나의 정체를 되새겼다.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을 지나치는 우리 통일연수단의 의미와 역할을 생각하면서…
중국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소속된 중국조선족들의 문화의 발상지이자 항일투쟁의 책원지였던 용정시에 도착했다. 용이 날아오른 우물이라고 해서 용정이라고 불린 이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