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과 졸본왕녀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 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였다. 온조는 하남을 도읍지로 하자고
하였으나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수도를 정하였다,
온조는 위례(慰禮)에 10명의 신하와 함께 정착하여 십제(什濟)를
세운다. 바닷가의 미추홀은 토지가 좋지 않고 습하고 물이 짜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비류는 온조가 다스리는 곳을 둘러보고
결국 병이 들어서 죽었다.
비류를 따라 미추홀로 갔던 사람들이 십제로 몰려들었다.
온조는 만백성이 자신을 국호를 십제에서 백제로 바꿨다.
<수서>(백제전)에 의하면 백제란 국호는 ‘백가제해(百家濟海)’란
뜻이다. 백 개의 부족집단이 바다를 건너와 세운 국가란 뜻이다.
국내외 사서에 등장한 백제의 국호는 십제(什濟)→백제(伯濟)→
백제(百濟)로 변했다. 십제란 <삼국사기> 기록대로 열 명의 산하가
보좌하여 세운 국가이다. 십제 단계일 때 백제는 열 개 정도의
부족집단이 연합해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백제란 국호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우선 <수서>(백제전)의 해석대로 백제란 수많은 부족이 바다를
건너와 세운 국가란 의미기 담겨 있다. 백제는 해상강국이었다. 백제가 상대한 국가는 일본뿐만 아니라 저 멀리는
남지나해 국가들까지 분포되어 있다. 십제는 주변의 소부족들을 흡수하면서 영역을 확대했고,
그것이 국호에 반영되어 백제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 온조란 이름에서 국호가 만들어졌다고도 추측한다. 순수한 우리 말에서 ‘온’은 백을 뜻한다.
백제는 ‘온제’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온조와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한 광명을 뜻하는 우리 말의 ‘밝’과 ‘백’을 관련시켜 태양숭배사상을 함축한 국호로 보기도 한다.
백(百)과 ‘맥(貊)의 음이 모두 ‘백’이라는 것을 근거로 맥족이 세운 나라를 의미하는 국호로 보기도 한다.
백제는 도읍지를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긴다.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 최후까지 마한세력이 남아있던 영산강 유역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이다.
반남면 자미성을 둘러싼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일대에 산재해 있는 40여기의 고분군이다.
당시 백제는 마한 연맹체의 부족국가가 된다.
온조왕 대의 초기 백제는 처음에는 마한의 한 소국으로서 마한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
온조왕이 마한을 합병하기 전에는 이런 기록들이 나온다.
10년(기원전 9년)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13년(기원전 6년) 가을 7월에 한산 아래를 따라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다고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획정하니,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까지였으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18년(기원전 1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자기 들이닥치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그들의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압송했으며
그 나머지 적도들은 모두 파묻어 버렸다.
24년(기원후 6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질책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디딜 곳조차 없어 내가 동북쪽 1백 리의 땅을 베어 안주하게 했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인데
이제 나라가 완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해 대거 성과 못을 설치해서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마한은 대체로 기원전 2~3세기에서 서기 3세기에 이르기까지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집단을 가리킨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경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 삼한이 대두했다고 한다.
이는 기원전 2~3세기 중남부 지역에 좁은 놋단검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다.
이들이 마한을 이루는 기본세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신촌리 국립박물관 예정지를 조사하던 중 발견된 유규이다.마한의 묘제의 특징은 단연 옹관묘이다.
마한에는 왕관은 없지만 옹관은 있다고 했다. 경주의 왕릉이나 부여의 능이 한 왕을 위한 능이었다면 마한의 묘제는
한 분구에서 여러 기의 옹관이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유민과 문화의 유입 철기의 보급 부여계 유이민 집단(백제)의 정착 등의 정치 문화적 변화 속에서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권이 형성됨에 따라 청동기 문화 단계의 마한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2세기 이후부터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통합할 때까지 마한 지역은
백제 중심의 소국연맹체와 목지국(目支國) 중심의 토착세력권이 병존하는 상태였다.
이후 백제가 점차 강성하여 마한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5세기 경에는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한다.
특히 247년 마한의 영주였던 목지국이 다른 연맹국(백제도 포함)과 함께 연합군을 창설하여 대방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함으로써 목지국의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고 백제가 마한 연맹체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일단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기록된 백제의 마한 복속 과정은 이렇다.
25년(서기 7년)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일자(日者)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작스레 넘치는 것은 대왕께서 우쩍 융성하실 조짐이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아우를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26년(8년) 가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아래가 딴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 형세가 오래갈 수 없으리라. 만약 마한이 다른 나라에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격이 되리니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이를 빼앗아 뒷날의 어려움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출동하면서 거짓으로 사냥을 간다 하고,
은밀히 마한을 습격해 마침내 그 국읍(國邑)을 병탄하였다.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두 성만이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년(9년) 여름 4월에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이 항복해 그 주민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멸망하였다. 34년(16년)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해 반역하였다. 왕이 몸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었는지라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식들까지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