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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고선생문인록(朴嘯皐先生門人錄)
金中淸字淸之一字而和號苟全安東人居奉化太師宣平後僉樞夢虎子生嘉靖丙寅自童丱受業先生門好學能文先生
김중청자청지일자이화호구전안동인거봉화태사선평후첨추몽호자생가정병인자동관수업선생문호학능문선생
甚器重之撰先生行狀壬辰從柳公宗介擧義庚戌始釋褐官至承旨甲子适亂爲本縣義將嘗以千秋使書狀官赴天朝時
심기중지찬선생행장임진종유공종개거의경술시석갈관지승지갑자괄란위본현의장상이천추사서장관부천조시
有皇太后喪禮部以千秋使行係吉禮依例賜宴公呈書請免禮部雖不許而稱其文辭理勝李五峯好閔以爲公萬里之行
유황태후상례부이천추사행계길예의례사연공정서청면례부수부허이칭기문사리승이오봉호민이위공만리지행
所得多矣云公以文章經術爲儕流所推遭値昏朝無心仕宦而重遞親志僶俛祿養其自號苟全盖寓意也及至晩年優游
소득다의운공이문장경술위제류소추조치혼조무심사환이중체친지민면록양기자호구전개우의야급지만년우유
田舍敎授生徒以自樂焉崇禎己巳卒妥靈槃泉
전사교수생도이자락언숭정기사졸타령반천
박(朴)소고(嘯皐)선생 문인록(門人錄)
김중청(金中淸)은 자(字)는 청지(淸之),또 다른 자(字)는 이화(而和)이며,호(號)는 구전(苟全)이고,안동인(安東人)이다.
봉화(奉化)에 살며,태사공(太師公)선평(宣平)의 후예(後裔)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인 몽호(夢虎)의 아들로서,
가정(嘉靖:明 世宗의 年號)병인(丙寅:1566년,明宗 21년)년에 태어났으며,
어린 아이 때부터 소고(嘯皐:朴承任의 號)선생의 문하에서 수업(受業)을 받았다.
학문을 좋아하고 글이 능해 소고선생께서 그 기국(器局)을 매우 심중히 하셨다.
소고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으셨고,임진왜란 때 유종개(柳宗介)공을 따라 의병(義兵)을 일으켰었다.
경술(庚戌:1610년 광해군2년)년에 갈의(褐衣)를 벗고 벼슬길에 올라 관직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갑자(甲子:1624년,仁祖2년)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살던 현(縣)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일찍이 천추사(千秋使)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황태후(皇太后)의 상(喪)을 당했는데,
명나라 예부(禮部)에서는 의례대로 길례(吉禮)의 사절인 천추사에게 연회(宴會)를 베풀려 하자 공(公)은 글을 올려
면례(免禮)를 청했지만 예부(禮部)로부터 불허(不許)는 되었으나 그 글의 조리가 정연하고 문장이 뛰어나 칭송을 받았다.
이오봉(李五峯:好閔의 號)호민(好閔)등이 공(公)의 만리(萬里) 원행(遠行)을 위한 받은 글들이 많다.
공(公)은 문장과 경륜과 학술이 동년배로부터 받들음을 받았고,
어지러운 조정을 맞아 마음에도 없는 벼슬길이나마 자주 체직(遞職)이 되었지만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녹봉을 받아
부모 봉양을 위해 힘써 일했다.
스스로 지은 호(號)인 구전(苟全)은 대개 다른 사물에 붙여서 그 뜻을 암시한 것이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골집에서 유유자적하며 생도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겼다.
숭정(崇禎)기사(己巳:1629년,仁祖7년)년에 돌아가셔서 반천(槃泉)서원에서 위패와 제사를 모시고 있다.
[註]
*박소고(朴嘯皐)=박승임(朴承任)[丁丑1517중종12년-丙戌1586宣祖19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나주.자 중포(重圃).호 소고(嘯皐).이황(李滉)의 문인.
1540년(중종35)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내고,
소윤(小尹)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547년(명종2)예조정랑에 임명되고,그 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윤원형(尹元衡)의 세도가 더욱 심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학문에 힘썼다.
이후 풍기군수,판교(判校)등을 거쳐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1569년(선조2)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 관찰사,도승지(都承旨),춘천부사(春川府使)등을 지냈다.
1583년 대사간이 되었으나,선조의 미움을 사 창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심학(心學),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영주(榮州)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에《성리유선(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綱目心法)》과
문집《소고집(嘯皐集)》이 있다.
*문인(門人)=제자,문생(門生),문제(門弟),문객(門客)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제자를 뜻함.
*유종개(柳宗介)=[戊午1558明宗13년- 壬辰1592宣祖25년]
본관 풍산(豊山).자 계유(季裕).1579년(선조 12)진사가 되고,158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으며,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수백 명을 모집,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태백산을 근거지로 왜적을 무찌르다가 경상북도 봉화(奉化)노루재(華獐)에서
적장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군대를 만나 전투 중 전사하였다.
참의(參議)가 추증되었으며,봉화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길례(吉禮)=나라의 제사나 관례(冠禮)나 혼례(婚禮) 따위의 경사스런 예식.
*이호민(李好閔)=[癸丑1553明宗8년- 甲戌1634仁祖12년]
조선 중기의 文臣.본관 연안(延安).자 효언(孝彦).호 오봉(五峰),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 문희(文僖).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158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사관(史官)이 되고,응교(應敎),전한(典翰)을 거쳐 집의(執義)로 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조좌랑으로 왕을 의주에 호종하고,
랴오양[遼陽]에 가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에게 지원을 청해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상호군,행사직(行司直)을 거쳐 1595(宣祖28년)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기초(起草)했고,
이듬해 참찬관이 되었다.
1599년 중추부동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대제,․좌찬성을 거쳐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지고,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1608년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장남을 등극시켜야 한다고 주장,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 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4)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오봉집》이 있다.
*민면(僶俛)=僶勉=힘써 일함. 잠시 동안의 사이.
*우의(寓意)=다른 사물에 붙여서 그 뜻을 암시함.
*우유(優游)=한가롭게 지내는 모양,유유자적하는 모양,만족해 하는 모양.
*전사(田舍)=전답과 집,시골집,농가.
*타령(妥靈)=위패를 일정한 곳에 가져다 잘 섬겨 모심.
정한강선생 문인록(鄭寒岡先生 門人錄)
金中淸字而和號苟全安東人居奉化太師宣平後寶白堂係行五世孫僉樞夢虎子生於嘉靖丙寅庚戌釋褐官至承旨
김중청자이화호구전안동인거봉화태사선평후보백당계행오세손첨추몽호자생어가정병인경술석갈관지승지
自童丱受業朴嘯皐及趙月川門好學能文二先生甚器重之時寒岡先生知花府公又執贄而請學焉先生旣歸公屬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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宦牒官新安新安卽先生所居之邑由是益切親炙積年薰陶其經術之精邃禮學之純粹盖有自於淵源而龍蛇倡義之
환첩관신안신안즉선생소거지읍유시익절친자적년훈도기경술지정수예학지순수개유자어연원이용사창의지
擧昏朝守正之節昭乎諸君子之信筆嘗以千秋使書狀官赴京時有皇太后之喪而專對處變之道有李五峯好閔之稱
거혼조수정지절소호제군자지신필상이천추사서장관부경시유황태후지상이전대처변지도유이오봉호민지칭
揚晩無意仕進優游田舍敎授生徒以自樂焉卒于崇禎己巳士林俎豆于槃泉
양만무의사진우유전사교수생도이자락언졸우숭정기사사림조두우반천
정한강(鄭寒岡)선생 문인록(門人錄)
김중청(金中淸)자(字)는 이화(而和)이고 호(號)는 구전(苟全)이며,안동인(安東人)이다.
봉화(奉化)에 살며,태사공(太師公)선평(宣平)의 후예(後裔)이며,보백당(寶白堂)이신 계행(係行)공의 5세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인 몽호(夢虎)의 아들이다.
가정(嘉靖)병인(丙寅,1566년,明宗21년)년에 태어나서 경술(庚戌,1610년,광해군2년)년에 벼슬길에 올라
관직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어린 아이 때부터 소고(朴嘯皐)선생 및 월천(趙月川)선생의 문인(門人)이 되어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해
두 선생께서 그 그릇을 심히 중(重)하게 여기셨다.
한강(鄭寒岡)선생을 아신 때는 안동부사(安東府使)시절로 예물을 바치고 문인(門人)이 되어 가르침을 청했다.
선생께서 이미 다른 곳으로 가시고 공(公:苟全)이 직첩(職牒)을 받아 배속된 관아가
신안(新安:星州)현감이었으니 신안(新安)은 즉 한강(寒岡) 선생께서 사시던 고을이라 이런 연유로 더욱 절친해 져서
해가 갈수록 감화가 쌓여가고 교화 훈육되어 가서 그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져 갔으며,
예학(禮學)이 완전하여 흠이 없게 되었음은 대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그 뿌리가 있다.
어지러운 조정에서 절조를 바르게 지킴을 나타냈으니 모든 사람들을 붓 가는 대로 쓰셨다.
일찍이 천추사(千秋使)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황태후(皇太后)의 상(喪)을 당했는데 알아서 자유로이 응답하며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하여
이오봉(李五峯)호민(好閔)공 으로부터 칭찬하고 찬양함을 받았었다.
만년에는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유유자적하며 시골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숭정(崇禎)기사(己巳,1629년 仁祖7년)에 돌아가 사림(士林)들이 반천(槃泉)서원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註]
*정한강(鄭寒岡)=정구(鄭逑)[癸卯1543中宗38년-庚申1620광해군12년] 조선 중기의 文臣,學者.
본관 청주(淸州).자(字) 도가(道可).호(號) 한강(寒岡).시호 문목(文穆).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曺植),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1573년(선조6)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참봉이 되고
1578년 사포서(司圃署)주부를 거쳐 삼가(三嘉),의흥(義興),지례(知禮)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580년에야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가서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까지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1585년 교정랑(校正郞)이 되어《경서훈해(經書訓解)》간행에 참여하고
그 후 통천군수(通川郡守),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忠州)목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醫藥),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檜淵),천곡(川谷)서원,충주의 운곡(雲谷)서원,
창녕의 관산(冠山)서원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에《한강집(寒岡集)》이 있고,편저로《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
《역대기년(歷代紀年)》《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毅儀)》
《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김계행(金係行)=[辛亥1431世宗13년-辛巳1521중종16년,享壽91]조선 전기의 文臣.
본관 안동.자(字)취사(取斯).호(號) 보백당(寶白堂).시호 정헌(定獻).
1447년(세종29)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성주,충주에서 사학(四學)교수를 지냈고,1480년(성종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 업무에 힘썼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척신들의 비위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 풍산(豊山)에 은거하였다.
거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 이름짓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서 보백선생이라 불렸다.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큰 화(禍)는 면하였다.
1859년(철종10)에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안동의 사림이 호담(壺潭)위에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세우고 제향하였다.
*조월천(趙月川)=조목(趙穆)[甲申1524중종19년-丙午1606宣祖39년]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횡성(橫城).자(字)사경(士敬).호(號)월천(月川).동고(東皐).이황(李滉)의 문인.
1552년(명종7)생원시(生員試)에 합격,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이 되었다.
1571년(선조4) 이조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후에 성균관의 천거로 집현전참봉(集賢殿參奉)이 되었다가 곧 사직했다.
1576년 봉화현감(奉化縣監)을 거쳐 1594년(선조27)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이듬해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전임,
1601년 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평생을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예천(醴泉)의 정산서원(鼎山書院),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의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월천집(月川集)》,저서로《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집지(執贄)=예물을 바치고 문인이 되는 일,신하가 임금을 알현할 때 옥백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한 데서 유래함.
*훈자(薰炙)=남에게 감화를 미친다는 말.
*훈도(薰陶)=교화,훈육하는 일.불로 물건을 태워 향기를 피우고,흙을 다져 도자기를 만들 듯 인재를 교육한다는 말인데
원문의 표기가 훈(燻)자로 잘못 되어있다.
*조두(俎豆)= 제기,제사 때 음식을 담는 그릇.제사를 지냄.
《구전공13세손 김 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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