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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론
전성태
(1)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둔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인디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것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인디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 중에서(녹색평론선집)
(2)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시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정 양의 시 「토막말」중에서
(3)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면우의 시 「거미」전문
(4) 쟁기질 잘허는 사람은, 쟁기질 나간 길이, 꼬랭이 환허고 쌩두둑이 읎어. 근디, 쟁기질 잘못 헌 사람은 소럴 잘못 치 갖고 가다가도 요리요리 허먼 쌍 간디가 있고, 쟁기질 잘헌 사람은 쪽허니 쌍 간 디가 하나 읎이 쪽 가고. 쟁기질 잘못 헌 사람은 소가 이리 서먼, 이놈이 쟁기 끄터리가 요리 돌아가먼, 여그는 안 갈리고, 소럴 또 막 거식 험서 몰먼 쩌리 갈리고 그르먼, 기양 쌩땡이여, 쌩땅. 긍께 쟁기질 잘 허고 못 허고 다 거그서 불거져. 그렇곰 돼 갖고 있어.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 ‘농부 이봉원의 한평생’ 중에서
(5) 밤뒤를 보며 쪼그리고 앉았으려면, 앞집 감나무 위에 까치 둥우리가 무섭고, 제 그림자가 움직여도 무서웠다. 퍽 추운 밤이었다. 할머니만 자꾸 부르고, 할머니가 자꾸 대답하셔야 하였고, 할머니가 딴 데를 보지나 아니하시나 하고, 걱정이었다.
아이들 밤뒤 보는 데는 닭 보고 묵은세배를 하면 낫는다고, 닭 보고 절을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괴로운 일도 아니었고, 부끄러워 참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둥우리 안에 닭도 절을 받고, 꼬르르 꼬르르 소리를 하였다.
별똥을 먹으면 오래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주워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다. 아저씨가 한 번 메추라기를 산 채로 훔켜잡아 온, 뒷산 솔 포대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정지용의 산문 「병똥이 떨어진 곳」
(6)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어, 달은 저다지 일찍부터 먼 길을 밝히며 기다리는 걸까. 달이 구름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마중나가는 걸 보면, 만나줄 그인 노상 서쪽에서만 사나 봤다. 접때 기러기를 몰아온 바람이 여태 수수깡 울타리에 머물며 가랑잎을 줍는 게, 오늘밤도 무서리가 내릴 모양이다.
―이문구 단편 「담배 한 대」중에서
(7) 그는 자기의 결의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으며, 거의 텅 비어버린 듯한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놀랐다. 알 수 없는 강렬한 희망이 어디선가 솟아올라 그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동혁은 상대편 사람들과 동료 인부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 ―황석영 중편 「객지」중에서
(8) 노파가 경철의 무릎을 흔들었다. 아닌게아니라 여자가 경철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애 같은 표정을 보자, 경철은 바로 그 철모르는 어린애한테 놀림을 당한 것 같은,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 참을 수 없는 울화를 순간적으로 느꼈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이어서 여자가 노파를 가리키며 무어라 손짓을 해보였는데, 아마 노파를 잘 좀 부탁한다는 뜻이 분명했고, 경철은 역시 잘 알아들었다는 고개짓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안면 근육이 너그럽고 점잖은 웃음까지 짓고 있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울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창동의 단편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중에서
(9) 그란디, 워짠놈의 비만 요렇게 짜들어지게 퍼부서쌓는지 참말이제 알 수가 없구만 그랴. 멀기도 먼 물질(길) 저쪽 동네도 비만 오까? 비만 요롷게 오고 어둡기만 어두우까? 하메 달이 언간히 커졌을 긴디. 커졌을 거라고 달이―
할마씨는 삼백예순날을 울었구만 그람선 울었어. 그랬어도 물귀신은 기척도 없었고 할마씨 흘린 눈물에 바닷물만 불어설랑 세 평 모래가 더 젖기만 젖었더라고. ―박상륭 단편 「南道 1」중에서
(10) 매를 잘라내어 어깨로부터 맨살이 드러난 왼쪽 어깨엔, 고추와 숯을 꿴 외로 꼰 새끼줄을 둘렀고, 벗은 그 팔뚝은 피로 보이는 붉은색을 온통 철갑해 소름이 끼치게 하는 사내가, 누구나 다 달고 있는 그런 평범한 오른쪽 팔뚝의 오른손으론, 내놓은 자신의 음경을 잔뜩 움켜쥐고 바쁜 듯이, 골목을 통과해갔다. 밀폐 같은 눈이 밀폐로 내리고 있어, 누구 하나 내어다보는 사람도 없고, 개도 짖지 않았는데, 북쪽에선지 어디서인지, 모루를 치는 망치 소리가 한번씩 들려오긴 했지만, 그 소리는, 밀폐의 열두 겹 항아리 속에서 우는 사산아의 노래였을 뿐이고, 마을은 떠난 듯 보이지 않았다. 마을은 정말 떠난 듯했다. ―박상륭의 단편 「山北場」중에서
(11) 하늬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초원을 서서히 마르게 했다. 대기가 건조하여 콧속에 딱지가 앉곤 했다. 먼저 고사리떼가 시들면서 바람의 빗질에 풀잎새들이 서서히 황갈색으로 바뀌어갔다. 풀거미는 풀잎새를 돌돌 말아 제 몸을 감싸고, 꽁무니를 땅속에 박고 알을 싸고 난 메뚜기들은 풀밭 위에서 맥없이 비슬거리고, 죽어가는 메뚜기떼를 좇아 산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현기영 단편 「마지막 테우리」중에서
(12) 혹은 내가 투구게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고 이 한 줌 하찮은 삶도 갑자기 자갈밭을 갈고 있는 보습처럼 못 견디게 더워져서, 마침내 삶의 화두가 뻗쳐 올라와 물집투성이인 얼굴이 되었을 때 다시금 나는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윤대녕 단편 「신라의 푸른 길」중에서
(13) “아따, 목젖이 따땃해짐시러 가슴이 후끈허고 붕알 밑까지 다 노글노글헌 게 이제사 내 몸띵이가 오붓이 내 것 같네 그려.”
담벼락에 바투 지펴 올린 화톳불가로 다가선 브루스 박이 엉거주춤 자세를 잡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코피는 역시 목젖이 확 뒤집어 번지도록 따끈할 때 빨아뿌는 게 제맛이어라우.”
―김소진 단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중에서
(14) “예나 이제나 공자님 맹자님 밑에 님짜 붙이구 사는 건 매일반인디 워쩌다가 이 지경이 된겨. 당최 내가 내 동네 돌어댕기는디두 넘의 일에 내가 넘부끄러 고개를 숙이고 댕겨야 허니. 이게 사램이 짐승을 치는 동넨겨, 짐승이 사램을 치는 동넨겨? 나 원, 기가리가 맥혀서 매가리가 안 돌아가두 유분수지…”
“좌우지간 산길 들길 논길 밭길 개릴 것 없어, 신작로구 흔작로구 닥치는 대루 차가 들어가는 길이면 들어가서, 낮이구 밤이구 차만 서 있다 허면 꼭 그 지랄덜이니, 암만 더웁고 바뻐두 애덜 시켜서 물꼬 한번을 못 보게 허면서 산다면 말 다헌겨. 뭐라구 허면 수굿이 듣기나 허남. 댕신이 뭐간 챙견이냐구 뎁되 삿대질이 예사니, 이런 늙다리가 젊다리덜허구 대거리를 헌들 말루다가 이길껴, 심으로다가 이길껴. 드러워서 참말루…”
“젊다리덜만 그러간디, 보면 한 사오십씩 처먹은 중다리덜이 되려 더 허여. 아 작년 여름에 저 비각 모텡이서 해필 물가 쪽으로 세워놓구 연늠이 정신없이 거풋거리는 바람에 차가 못 젼디구 빠꾸해서 풍덩했던 것들두 건져놓구 보니께 둘 다 거진 한 오십씩이나 됐더라닝께.”
“그때 그 차처럼, 헐 때 빵꾸나 났더라면 영구차루 갈어타지나 않었지.”
“빵꾸는 제기… 아 절구질 쎄게 헌다구 절구통 밑 빠지는 거 봤어?”
―이문구 단편「長川里 소태나무」중에서
(15) 여자는 거실 바닥 가득 아이의 사진을 늘어놓고 아이가 가장 선명하게 나온 사진을 고르는 중이었다. 사진들은 유치원에서 찍어 장당 얼마씩을 받고 가정으로 보내준 것들이었다. 몇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다보니 나중에는 아이의 얼굴을 단박에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늘 맨 가장자리거나 맨 뒷줄에서 얼굴이 반쯤 잘리거나 앞에 선 아이들의 어깨 사이로 떠오르는 해처럼 반쯤 얼굴을 내놓은 채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흩어진 아이들을 정렬시키다가 맨 나중에야 외따로 떨어져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어겁지겁 아무 자리에나 끌어다 세운 듯했다.
벌써 몇 번째 수십 장이나 되는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단 한 장의 사진도 자신의 아이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것이 없었다. 점심으로 싸준 김밥을 입에 물고 있거나 붉은 흙 속에서 방금 캐낸 고구마나 무 따위를 전시물처럼 각자의 앞에 늘어놓은 사진 속에서도 아이는 가까스로 사진기를 향해 반쯤 얼굴을 돌리던 차였거나 아예 고개를 들지 않아 둥그런 이마와 가르마가 찍혀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아이가 가져온 사진을 훑어보던 남편이 볼멘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유치원 담임을 한번 만나봐. 나 몰라라 맡겨만 놓지 말고.
― 하성란 단편 「별모양의 얼룩」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