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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59.3
(동학 설화소설)
제5화 백마의 여장군 이소사 이야기
채길순_ 소설가,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1
나뭇잎을 다 떨궈낸 먼 산은 칙칙했다.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빈들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집강소 마당에서 서성이던 이방언이
붉은 깃발을 들어 올리자
동구 밖에서 대기하던 소리패가 풍물을 쳐서
들판과 검은 산을 한바탕 휘저었다.
붉은 깃발 신호에 따라 농악이 멎고
날라리가 저문 하늘 속으로 울려퍼졌다.
날라리가 길고 짧게,
그리고 아주 길게 군호를 쏘아 올렸다.
이 군호에 맞춰 산에서 깃발이 솟으면서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터졌다.
산에서 들판으로 하얗게 밀려 내려오는
동군 동학농민군에 대응하여 맞은편 산에서
서군 동학농민군이 쏟아져 내려왔다.
한데 맞붙어서 한바탕 대련을 치른 동학농민군이
깃발 군호에 따라 들판에서 후퇴하여
산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방언은 어떤 상황에서도
후퇴와 공격이 잘 이뤄져야한다고 믿었고,
이를 조련해오고 있었다.
이때 동구 밖 먼 산 아래쪽에서 붉은 말이 나타나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못 보던 말이었다.
이방언은 무슨 흉한 소식을 지닌 파발마인가 싶어서
바짝 긴장이 되었다.
안 그래도 요즘 광주 화순 나주 손화중 최경선,
전주 쪽에서 전봉준 김개남의 소식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방언 접주님,
소녀는 이소사(李召史)라 하옵니다.”
말에서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스무 살 남짓 앳된 처자였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어지러운 세상에
제가 뭐 할 일이 없나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남정네들이 싸우는 싸움터에
뛰어들 생각을 하셨단 말이오?”
“사연이 있으니 더는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울님을 모시는 동학교도이며,
검이 있고 갑옷까지 갖추고 있으니
저도 한 사내 몫은 할 만합니다.”
이소사가 말 잔등에 실린 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순간 이방언은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파발이다. 오늘 저녁에 두령들이 모여서
파발을 뽑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말 못할 사연이라니 묻지 않겠소만
남원 광주 전주 동학농민군 군진에서
소식을 받아오는 파발 일을 할 수 있겠소?”
이방언의 말에
이소사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장 말했다.
“제가 애초에 작정한 일이 아니오나
그도 필요한 일이니 하겠어요.”
“고맙소. 먼저 가까운 광주 화순으로 가서
손화중 두령을 만나서
그곳 동학농민군 소식을 받아 오시오.
어쩌면 공주 쪽에서 소식이 내려와 있을 것이오.”
이방언이 주머니에서 박 껍질에 찍은
비표(祕標)를 내주면서 말했다.
“장군소끼리 통하는 비표이니 간직하시오.
절대 민보군이나 지방군이나
관군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오.”
“알겠어요.”
이소사가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를 보이자,
이방언이 좀은 편해져서 물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저는 여기서 30리쯤 떨어진 마을에 사는
이소사입니다.”
“알겠소! 저물기 전에 어서 떠나시오.”
이소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에 올라
뽀얀 먼지를 남기며 동구 밖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에 동학농민군 두령들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두령님, 금방 다녀간 저 말은 뭐며,
뭘 하는 사람이오니까?”
이방언은 잠깐 짚이는 것이 있어서
가볍게 넘겨서 말했다
“나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 잘 모르겠소.”
“붉고 키 큰 말이 어디서 본 듯 눈에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말 등에 얹힌 아이가 가벼워서인지
아주 바람 같이 잘 달립디다. 파발로 그만이오.”
사람들 눈에 이소사가 아이 정도로 보인 것이다.
“오늘 군사 조련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이제 큰 싸움이 시작 될 것이니
안으로 들어가 상의합시다.”
지난 9월 13일, 전봉준이 삼례에서 기포했다.
이때에 맞춰서 장흥 지역의 동학농민군도
일제히 기포했다. 그러나 이방언은
전봉준이 이끄는 삼례 진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성군을 결성한 장흥부 박헌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수성소의 군사 조련이 종일 있었답니다.
머지않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소.”
성안에서 벌어지는 수성군의 움직임이
장군소에 낱낱이 보고되었다.
이에 이인환 대두령이 호응했다.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준비해 왔으니
걱정할 것 없소.”
“옳소! 우리가 먼저 들이쳐서
지난 7월에 죽음을 당한 교도의 원수를 갚읍시다.
내가 제일 먼저 뛰어 들어
박헌양의 목을 따버리겠소.”
이사경 대두령이 나서서 호응했다.
문득, 아까 꿈결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이소사가
지난 7월에 박헌양의 손에 죽은
동학교도의 아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방언이 뭔가에 끌리기라도 한 듯
망설임 없이 명을 내렸다.
“좋소! 당장 벽사 역부터 들이칩시다!”
2
1894년 12월 3일,
1만의 장흥 동학농민군이 벽사 역을 점령했다.
묵촌의 이방언, 자라번지 이사경, 웅치 구교철,
고읍(관산) 김학삼, 대흥 이인환 두령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연합세력이었다.
벽사역을 사방에서 포위하자 찰방 김일원은
장흥부 성안으로 도피해 버렸고,
수성군 역시 장흥 성 안으로 철수했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장흥성을 에워쌌다.
이방언이 두령들을 급히 장군소로 소집했다.
이방언이 다급해져 말했다.
“오늘 밤을 지나, 새벽에 총공격이오!”
두령들이 각 진영으로 흩어지고
장군소에 홀로 남은 이방언은
여전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파발로 떠난 이소사를 기다리는 중에
오늘 점심 무렵에
광주에서 내려온 소장수를 만났다.
전봉준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크게 패했고,
손화중 최경선도 광주에서 패해
동학농민군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소사가 광주에서 이 소식을 가져왔다 해도
이를 동학농민군 진영에
곧이곧대로 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소사가
장군소에 나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2월 5일, 어둠이 칠흑 같이 짙고 적막했다.
동학농민군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이
성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이방언이 횃불 군호를 올렸고,
이에 맞춰 성 안으로 총포와 포사격이 시작되었다.
성 안에서도 총포로 맞대응했다.
이방언의 어산접 1천여 명은 동문,
이사경의 용반접 5백여 명은 남문,
구교철의 웅치접 1천 명은 북문에 배치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천주부적이 찍힌 수건을 머리에 둘렀고,
동학주문을 외면서 공격하도록 했다.
이방언의 지휘에 따라
동학농민군 수십 명이 거목을 들어
동문을 향해 돌진했으나
성위에서 쏘는 총포에 몇 명이 쓰러지자
통나무를 버리고 물러났다.
이방언이 예측하지 못한 일이
너무 빨리 벌어진 것이다.
이방언이 소리쳤다.
“성벽으로 총포를 집중 사격하라!
통나무를 들어 돌진하라!”
성 안으로 총포가 집중됐지만
통나무를 들어야할 동학농민군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어둠 속에서 백마가 달려 나오며 소리쳤다.
“통나무를 들어라!”
이소사였다. 이소사의 명에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들어있었다.
“돌진! 앞으로 돌진!”
백마를 탄 이소사가 앞장섰고,
동학농민군이 함성과 함께 달려들어
동문을 향해 돌진했다.
동문이 단숨에 뚫리고 동학농민군이
성 안으로 밀어닥쳤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사경이 이끄는 용반접 석대군이
남문으로 밀고 들어오고,
구교철이 이끄는 웅치접이
북문으로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나를 따르라!”
백마 탄 이소사의 외침에 따라
동학농민군이 부사가 거처하는
선회당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때 부사 박헌양은 선회당 마당에 세워놓은
망루에 올라 있다가 내려왔다.
백마가 단숨에 마당으로 가로질러
박헌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칼이 허공을 가르자
박헌양이 비명과 함께 절명했다.
“박헌양이 죽었다!”
함성과 함께 밀려들어온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수성군이 곳곳에서 쓰러졌고,
마침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백마를 탄 이소사가
마치 총포의 연기가 밤하늘로 스러지듯 사라졌다.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불태우고
지난 7월부터 동학교도를 잡아들이는데
앞장섰던 아전 집을 불태웠다.
장흥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다음날 강진으로 진출하여
장흥과 강진 경계에 있는
사인점에서 숙영했다.
큰 매듭을 풀었지만,
더 큰 근심이 가로막고 있었다.
공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내려온 동학농민군이
합류했거나 내려오는 중이고,
관 일본군이 추격하고 있었다.
여기다 손화중 최경선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소식까지 들어와 있었다.
3
12월 7일,
새벽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밀려들기 시작하자
이방언은 강진현을 들이쳤다.
현감 이규하는 구원병을 요청하러 간다는 핑계로
나주로 달아났고,
의병장 김한섭이 이끄는 민보군이 남아 있다가
제자들과 함께 동학농민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강진현에 이어
동학농민군은 강진병영 공격에 나섰다.
병사 서병무는
병영에 설치되었던 동학 집강소를 철폐하고
수성소를 설치했고, 수천 명의 민군을 모아
병영 장대에서 조련하면서
수차례 동학농민군을 잡아다 포살하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9일부터 수천 명씩 무리를 지어
병영과 10-20리 떨어진
장흥 강진 보성 쪽에 주둔하여
병영을 압박하고 있었다.
10일 새벽 2시,
동학농민군은 세 길로 나누어
병영성을 압박해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은 병영의 안산인 삼봉을 점거하여
일제히 대포를 쏘았다.
포화가 성 안으로 벼락 치듯 쏟아지고
화약연기가 밤하늘을 덮었다. 이때였다.
마치 하늘로 흩어지는 연기를 타고 내려온 듯
백마를 탄 이소사가 나타났다.
이소사가 횃불을 들고 백마를 몰아 성을 돌면서
쌓아둔 목책에 불을 질렀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먼저 불붙은 목책이 무너지자
다시 성을 돌면서 독려했다.
“성가퀴로 올라 성 안으로 들이쳐라!”
이제 동학농민군은 백마를 탄 이소사의 외침이
신이(神異)하다는 것을 알아서
명에 따라 성가퀴로 달려들었다.
병영 안의 있던 수성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병사 서병무는 겁을 집어먹고 두루마기 바람에
패랭이를 쓰고서 피난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영암 쪽으로 달아났다.
4
하늘이 하루 종일 무겁더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장군소에서
석대 들판을 내려다보고 섰던 이방언은
어쩌면 이제
마지막 전투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면서
온몸으로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이제 눈 끝에 추위가 닥칠 것이고,
동학농민군이 숙영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총포 심지가 눅어서 발사가 어려워지고,
대포 사격 위력도 떨어질 것이다.
이제 두려운 것은
신식 총으로 무장한 관 일본군이었다.
일본군과 대적한 것은 지난 12일 밤이었다.
병영 성을 점령하고 장흥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동학농민군은 3만 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공주성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과
광주 화순 나주에서 흩어진 동학농민군,
청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내려온
남원동학농민군까지 합쳐
엄청난 군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장흥 성 남문 밖과
모정 등지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늦게 장흥 성으로 들어온 일본군과
첫 접전을 벌였다.
짧은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ㅡ
동학농민군은 들판 밖으로 나와 진을 옮기며
매일 위세를 떨쳤지만 13일 새벽에는
통위대 교장 황수옥이 이끄는 관군과
접전을 벌여 또 패했다.
연일 신식무기의 위력에 밀려 퇴각 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13일 14일
이틀에 걸쳐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과시하면서
장흥 부를 포위하여 압박하고 있었다.
눈발이 굵어져 눈앞이 자욱해지자
초조해진 이방언은 영기(令旗)를 들었다.
날라리를 불고 연기를 피워 군호를 냈다.
동학농민군 진영의 대포가 성 안으로 들이쳤고,
총포대의 사격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고읍 방향에서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들어갔다.
먼저 장흥성에서
민병 수십 명이 들판으로 나와 대적했다.
민병이 몇 명의 희생을 내고 퇴각하자
동학농민군이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이를 내려다보던 이방언은 “아뿔싸!”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본군의 신식 총포가 빗발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후퇴 날라리를 불었지만 이미 늦었다.
동학농민군이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관군이 몰려나와 합세했다. 이때였다.
마치 하늘에서 눈을 타고 내려온 듯
백마가 나타났다.
앞으로 나선 이소사가 동학농민군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물러나던 동학농민군이 갑자기 돌아서면서
접선이 벌어졌다.
백마를 탄 이소사가
관 민보군 진영을 휘젓고 다니면서 휩쓸었다.
아! 이번에는 이방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백마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내 꼬꾸라졌다.
관 일본군의 새로운 사격에
백마가 총탄을 맞은 것이다.
그러면 이소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언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 나갔다.
그렇지만 이방언은
이소사와 백마가 쓰러진 곳까지는
다가 갈 수가 없어
동학농민군을 데리고 자울재 넘어 퇴각했다.
이방언의 동학농민군은
17일에 옥산리에 집결하여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1백여 명이 희생되고
20여 명이 생포되면서 항전에 막을 내렸다.
5
이소사는 처형되었다. 관 일본군 기록에는
‘거괴 이소사(李召史) 혹은 여동학(女東學)이
민보군에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져
나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고 했다.
이소사가
‘김양문(金良文) 혹은
허내원(許乃元)의 처’라 했지만
이는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다.
이방언은 12월 25일에 체포되어
나주를 거쳐 서울까지 압송되었다.
3월 21일 재판에서 풀려났으나
1895년 4월 22일
전라감사 이도재의 체포령으로
아들 이성호와 함께 체포되어
4월 25일 벽사역에서 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