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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
천도교현대사_사건과 인물
경가파산 몇 번이며 철창영옥 몇 회런고
- 눌암 황태익(訥菴 黃泰益)
심국보_편집주간
삼진의거는 포덕60(1919)년 3.1운동 당시,
창원시 진전ㆍ진북ㆍ진동 3개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의거를 말한다. 이 의거는 화성의 제암리사건,
평안도 선천의거, 황해도 수안의거와 더불어 기미년
4대 의거로 손꼽히는 대의거이다. 삼진의거의 주역의
한 분인 눌암 황태익선생의 생애를 조명하여 본다.
황태익
17세에 동학에 들어 갑오·갑진·기미 3대운동에 참가하다
황태익은 포덕18(1877)년 4월24일 경남 고성군 고성읍 동외동488번지에서 부친 황우의(黃祐義)와 모친 김차악(金且岳)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창원시 진전면 일암면 333번지로 옮겨 살았다.
포덕 35(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진주를 비롯한 영남일대의 동학군들도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들고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때, 황태익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경남 각지의 동학군이 9월에 기포하여 일본군과 싸울 때 고성에서 진주로 진출하여 혁명군의 대열에 끼여, 하동 고성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갖은 고생을 참고 견디며 견문을 넓히고 의암성사의 설법을 들었고, 포덕40(1899)년 1월 15일 진주사람 박운기(朴雲基)의 포덕으로 동학에 정식으로 입도하였다. 포덕45(1904)년 북접 법대도주 의암성사로부터 해접주(該接主), 중정(中正), 수접주(首接主), 수창대령(首昌大領)의 도첩을 받고 포덕과 개화운동을 전개하며 동학의 재건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러일전쟁이 터지고 우리나라도 어수선한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었고, 의암성사로부터 갑진개혁운동의 명령이 내려져 전국의 동학도들은 일제히 머리를 깍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진보회를 조직하여 민중의 앞장에 서서 민권신장을 부르짖고 근대화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경남 진주에서도 진보회 지부를 설치하여 회장에 전희순(全熙順)을 뽑았고, 황태익은 부회장을 맡았다.
당시 황태익은 고성의 동학도 20여명을 이끌고 진주 관헌청사 옆 광장에 모여 낮에 등불을 밝혀 들고 밝은 정치를 호소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선생은 모인 군중에게 오랫동안 우리들 사회에 뿌리 박힌 봉건전제를 깨뜨리고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인간평등을 위한 계급타파를 내세워 억압당하고 천대받는 상민과 노예계급해방을 역설하여 모인 많은 군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호응하고 일어서게 하였다.
또한 고성군수 채범순을 찾아가 민권개혁에의 협조와 선정을 베풀 것을 호소하고 민권신장에 노력하였다. 이용구의 배신으로 진보회의 개혁운동이 친일의 누명을 덮어쓰게 되자, 의암성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고쳐서 천하에 선포하였다.
포덕교화에 전력하다
황태익은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에서 고성군 구만면까지 ‘음나무재’를 매일 넘나들면서 이상규와 함께 포덕하면서 활동지역을 넓혀다. 또한 고성군 구만면에서 고성읍까지도 매일 내왕하면서 포덕에 골몰하였다.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가산을 팔아 식량과 경비 일체를 부담하고 포덕한 결과 포덕50(1909)년, 10년의 각고 끝에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 초가 두칸 집을 사들여서 천도교 전교실을 설치하였다. 황태익은 이러한 가운데 교화사업의 정착을 위해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 논에 나가 모를 심고, 김을 메고, 땀흘려 일하면서 청수를 모시고, 오합성미(五合誠未)를 봉전하는 기도를 봉행하고 수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정심수신한 후 기울어진 가세를 회복시켰다.
진주에서 활동하던 중 ‘귀인(貴人)’ 신용구를 만나 “수운 대신사의 시천주 사상의 불망지사(不忘之詞) 신앙의 신념과, 해월신사의 경천·경인·경물의 삼경사상, 의암성사의 이신환성의 설법”을 설파하고 “보국안민·포덕천하는 천언(天言)이니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자 이에 감탄한 신용구는 포덕 55(1914)년 6월 4일 결연히 입교하였다. 황태익은 신용구와 함께 서울로 가서 의암성사를 찾아 뵙고 신용구를 소개하였다. 이때 성사께서는 “60 평생에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겸손한 말씀뿐이었다고 한다.
황태익은 성사의 신임으로 중앙총부 이사원(理事員)이 되었으며, 서울 화동의 남상필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용구와 함께 수련을 겸한 포덕교육과 정신연마에 몰두하다가, 영남 교회 재건의 사명을 띄고 고향으로 내려와 종단정립에 헌신하였다. 33세인 포덕56(1915)년, 천도교 고성교구장이 되었고, 포덕60(1919)년 3.1운동 때에는 중앙대교당 신축기금으로 논 밭을 팔아 성금을 마련하였고 교인들로부터도 성금을 거두어 헌납하였다.
세 차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 진동 고현장날 의거(1차 삼진의거), 고성읍 장터의거, 제2차 삼진의거
황태익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지니고 고향으로 돌아와 변상태·권영대·권태용·변우범 등과 밀회를 거듭한 끝에, 3월28일 창원 진동 고현시장 의거(1차 삼진의거), 4월1일 고성읍 장터의거, 4월 3일 제2차 삼진의거 등 세 차례의 연쇄적 거사를 주도하였다. 삼진의거는 황태익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인들과 또 다른 주역 변상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변상태는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하순경에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고 김관제·이시영 등과 함께 서울로 갔는데, 이들은 모두 대동청년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원이었다. 변상태 및 그와 동행한 두 사람은 3월 1일에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후, 김관제는 동부 경남 일원에서, 신상태․변상태는 통영과 창원지역의 3․1운동 확산을 담당하였다. 변상태는 서부 경남 일원에서의 만세운동을 독려하는 동시에 자기 고향인 삼진에서의 만세 의거 준비에도 구체적으로 착수하였다. 이 준비 작업에는 이수룡, 권태용, 권영조, 권영대, 변상섭, 변상헌 등 삼진면이 속해있는 창원에 살고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희석, 조태식, 이경형(혹은 이재형) 등 함안 사람들과 황태익처럼 고성에 연고를 지닌 사람도 참석하였다.
황태익 등은 거사일을 3월 28일의 장날로 정하고 당일 곳곳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백승학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제작하고, 판각 기술을 가지고 있던 권태선이 중심이 되어 격문으로 사용할 목판 제작에 나섰다. 격문의 내용은 “아왈동포 유진무퇴(曰我同胞 有進無退)”, 즉 “가로되 우리 동포는 나아감이 있으되 물러섬은 없다.”였다. 시위대가 일경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황태익, 변상태 등은 몸을 피해 재기를 도모한다.
황태익은 고성으로 몸을 피해 4월 1일의 고성읍 장터의거를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준비한다. 경남 고성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은 3월 22일로 2백여 명의 학생들이 고성읍 시장(객사마당, 현 문화의 집)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경찰의 탄압과 주동 인물들의 검거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후 4월 1일 장날에는 황태익 등 삼산면 천도교인들과 고성읍내 노동자 약 60명이 주도하며 전개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쌀시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곧이어 시위로 들어가 김진만·문상범을 선두로 하여 어시장을 돌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오후 4시 30분경 고성 읍 쌀시장에서 시위대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백 명의 군중들이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크게 연호하였다. 이에 놀란 고성 헌병분견소에서는 사천에 있는 일본군 헌병분견대원과 고성의 일본군 재향군인 분회원·소방대원들의 협력을 얻어 총검으로 탄압하였고, 이에 군중들은 해산하게 되었다. 고성읍 만세시위로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7명이 체포되어 마산으로 압송되었다.
황태익은 고성에서 체포되지 않았고, 4월 3일 창원에서 제2차 삼진의거를 주도하게 된다. 4월 3일 삼진의거 때는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삼진의거에서 순국한 지사는 김수동·변갑섭·변상복·김영환·고묘주·이기봉·김호현·홍두익 8명이며 중상자는 22명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당시 피살된 민중의 유족들이 황태익의 집 앞뜰에 시체를 놓고 “내 아들 내 남편을 살려내라”고 아우성치는 소동이 있었으나 황태익은 비통한 가운데서도 장례식을 정중하게 치루는 침착성을 보였다. 이후 황태익은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11월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창원시가 2008년 조성한 <애국지사 사당>. 황태익 선생의 신위도 봉안되어 있다.
삼진의거 때의 순국지사들은 8의사로 불리며 해방 이듬해 지방민들이 사동교 건너편 암벽에 창의비를 세웠다가 포덕104(1963)년 10월 삼진 지방민들의 발원으로 진동면 국도변의 사동교 옆, 의거 당시 8의사가 희생된 자리에 ‘8의사 창의탑’을 세워 영령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포덕109(1968)년 8의사에게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삼진 의거의 진원지인 진전면 양촌리 산자락에는 '팔의사 묘역'을 조성했다. 포덕149(2008)년 창원시는 애국지사 사당을 조성했고, 87위의 애국지사 신위에 봉안할 때 황태익도 봉안되었다.
삼진의거와 조선국권회복단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의 4대 의거로 손꼽히는 삼진의거가 일어났을 때 창원의 조선인 인구는 2만 3천여명(마산 1만 2천여명, 창원 1만 1여명)이었다. 삼진의거의 시위대의 규모는 8천명, 5천명, 3천 명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농촌 지역에서 3천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삼일운동 당시 삼진(진전·진북·진동)의 중심지역인 진동면의 인구는 1천 9백여명으로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창원에서 삼진의거라는 대의거가 일어난 것은 당시 영남일대를 아울렀던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1월 15일 대구 앞산 안일사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가지고 윤상태·서상일·이시영·홍주일·서병룡·이영국·정순영·박영모·정운일·신상태·최준 등은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조선국권회복단은 결성이후 풍기의 광복단과 연결되어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면서 조직의 활동 영역이 넓어졌고, 경상남도 일원에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과 제휴했다. 조직확대를 위해 종교조직을 적극 활용하기로 협의하고 천도교는 홍주일(대구대교구장), 기독교는 정순영, 불교측은 서상일․서병룡 등이 단원규합에 앞장섰다.
경남 마산에 지부를 두었고 지부장은 안확(安廓)이었고, 이형재·변상태·김용환 등이 활동하였다. 조선 국권 회복단 마산 지부는 마산 지역의 3·1 운동에도 이바지한 바가 크다. 삼진의거는 국권회복단의 활동의 일환으로 3․1운동 시기 남부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던 계획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단원들의 신속한 활약으로 대규모 항일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경남결사대를 조직하여 의혈투쟁에 나서다
포덕61(1920)년 1월 5일. 황태익은 교도(敎道)를 계승시키기 위해 봉수(鳳洙), 봉섭(鳳燮), 용수(龍水) 등 자식들을 천도교에 입교시키고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선다. 그해 3월 9일 진주시 옥봉리에서 천도교경남청년회장 김의진 등과 경남결사대를 조직하여 의열단의 대장이 되었다. 황태익은 광범위한 동지규합을 위하여 사천·고성·창원·산청·함안·의령·합천 등을 돌며 <배일역사서>를 배포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며 결사대의 취지를 설명하고,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락을 취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황태익은 <배일역사서>를 통해 일제에 대한 결사항전을 아래와 같이 결의하였다.
“...대신사님의 ‘한울님이 내 몸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라는 말씀과 같이 내 몸내서 국권을 찾고야 말지어다. 원수 왜놈의 굴레에서 우리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맨주먹으로 죽음을 맹서하고 국권회복의 장거를 위해 의연 결사하여 일어나 용감하게 앞장서서 이 땅에서 왜놈의 총독부 괴수들을 몰아내는데 다같이 궐기할 것을 뜻을 같이하는 동포들에게 호소하면서 일본이 침략하여 온 행위에 대하여 우리민족이 배일하여온 역사를 천하에 공개하노니 용약 일어설 지어다. 경신 3월 경남결사대 대장 황태익”
경남결사대는 3월 15일 조선총독이 경남일대를 순시 차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을 수 없어 거사를 결행하지 못했다. 5월에는 부산항 축항(築港)기념축하회에 참석코자 오는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고관을 처단하려고 동지 한 사람을 부산으로 파견하여 상황을 탐지하게 하면서,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산속에 있는 동지 노응범의 집에서 앞으로 투쟁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때 일제의 앞잡이인 노광천의 밀고로 진동 주재소 형사 이만갑이 진주에 있는 일본 경찰대를 이끌고 현장을 습격함으로써 황태익을 비롯한 8명의 결사대원 전원을 체포하였다. 진주감옥에 수감된 결사대원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경남결사대 사건에 대해 언론에서는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동아일보, 1920.6.5).
<총독암살단 체포>
- 황태익 이하 7명의 결사대, 천도교청년회당도 들었다
총독과 정무총감을 암살하려다가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고성군구만면 화림리 산중에서 결사대장 황태익 외 7인이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어 지난 1일 진주검사국으로 호송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그 사실을 자세히 들은 즉, 황태익은 작년 3월 천도교주 손병희가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당하여 정치방면에 참가하여 국가를 위하여 중대한 임명을 띄고 아무쪼록 힘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하라는 권고를 받은 이후로... 황태익 금년 3월 9일에 동지 협의하여 진주면 옥봉리에서 비밀리 의론을 하여 경남결사대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하여 결사의 목적으로 독립운동을 기이코 단행하자는 뜻으로, 황태익이 대장이 되고 결사명부록까지 만들어 진주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그 근처 고성·창원·사천·산청·함안·영산·의령·합천 등 여러 고을에 있는 유지자를 권유하며 경성 방면에도 왕림하고 또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에 금년 4월 상순에 재등총독이 남선 지방을 순시할 때에는 경계가 엄중하여 진주까지의 연도에서 경찰대를 다수 배치하였을 뿐 아니라 총독이 다니는 연도에는 많은 군대가 주둔하여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목적을 이루기 어렵다하여 일시 중지하고 다시 탐문한 결과 부산축항식 축하회에 정무총감 기타 여러 대관이 온다함을 알고 오랫동안 품어두었던 목적을 결행하려 하였으나 역시 경계가 엄중하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황태익은 부하에 있는 ***을 부산에 보내고 황태익은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산중 삼림 사이에서 다수의 천도교도와 천도교경남청년회장 김의진, 임태준의 여러 사람과 비밀리에 협의하는 중에 진주경찰서에서는 이 비밀을 탐지하고 엄중히 수색한 결과 발견되어 일동일 체포되어 지난 1일에 진주검사국으로 보내였는데 그 단원은 진주군 진전면 일암리 대장 황태익, 정촌면 관봉리 강재순(33), 진주면 비봉동 림태준(25) 동동 천도교 경남청년회장 김의진(26), 고성군 구만리 화림리 노성화(48), 동면 화락리 노응범(56) 동리 강대규(37) 의 팔명이 체포되었다더라.
“내 뼈와 살이 깎아져도 천도교를 믿겠다”
- 원수의 땅 일본에 천도교를 뿌리내리다
황태익은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1921년에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산에서 나무를 나르고 천도교 고성교인들은 나무를 다듬고 하여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에 교당을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 황태익은 포덕63(1922)년 3월 의암성사로부터 눌암( 訥菴)이란 도호를 받았고, 동래, 통영, 고성, 의성, 군위, 칠곡, 성주, 김천, 선산, 상주, 문경, 예천, 영천, 봉화, 울릉도 각 군을 관할하는 종법원 포덕사가 되어 경상도지역의 교회 정립에 기여하였다.
한편, 경남결사대 등의 의열투쟁으로 황태익을 비롯한 천도교인들에 대한 왜경의 감시와 박해는 항시적이고 엄중하였다. 심지어 왜경들이 교인들을 위협하여 천도교를 믿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받아 내었으나 장남수(고성 구만면 용와리) 동덕은 왜경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내 뼈와 살이 깍아져도 천도교를 믿겠다”고 항거하였다. 이러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포덕63(1922)년, 고성지역의 천도교인들은 고성읍으로 교당을 옮겨 군 중심지에서 집단교화사업을 펴 나갔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지속되자 황태익은 포덕 66(1925)년, 장남 봉수, 차남 봉섭, 사남 용수를 차례로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케 했다. 삼형제는 1925년 7월 15일 현해탄을 건너 교토(京都)에 정착하게 된다. 삼형제는 비록 적국이지만 감시와 억압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히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는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삼형제는 같이 일본 사람 밑에서 온갖 굴욕을 참아가면서 고용살이 3년 만에 땀과 피로 맺힌 각고의 보람으로 약간의 밑천을 마련하여 염색공장을 차리게 된다. 생활의 터전을 잡고 비로소 한숨을 돌리면서 부친 황태익을 초청했다.
경도종리원의 야외시일. 포덕78(1937)년 6월 15일. 앞줄 왼쪽 두 번째가 황태익, 앞줄 왼쪽 끝이 황용수
포덕69(1928)년 3월, 황태익은 일본으로 건너가 자식들에게 “너희가 이 땅에 온 것은 피신과 일시적인 생활의 애로를 타계하기 위해서요, 결코 치부할 욕망이 있었던 것이 아닌 만큼, 우리의 목적인 천도교의 궁을기를 적국의 심장부인 경도(京都)시에 세워, 우리의 민족적 긍지와 천도교인의 신앙을 그들에게 과시해 보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라 하였다.
삼형제는 부친의 말씀에 따라 포덕의 길에 나서게 된다. 우선 같이 일하는 직공들과 친지들 수십 명을 입교시켜 그해 중앙총부에서 경도종리원으로 인준을 받았고, 교당(京都市 中京區 御池通 堀川 西入池町 403)을 마련하여 8월 15일 입사식을 가졌다. 초대 원장에는 맏형인 황봉수가 취임하였다. 교토(경도)에 세워진 천도교당은 오사카(대판)와 고베(신호) 등 일본 관서 지역에 천도교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황태익은 천도교 특신기념장을 받았다.
한편, 황태익의 4남 황용수는 일제 말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동포들이 모두 징용으로 끌려가자 신변의 위협을 피해 포덕85(1944)년 10월 귀국하여 경남 고성에 일시 정착하였다가, 포덕89(1948)년 다시 일본 경도로 건너가 경제적 기반을 닦고 포덕 112(1971)년 경도교구를 재건하였다.
눌암 황태익은 포덕94(1953)년 1월 2일 오전11시 경남 고성 자택에서 76세로 환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황용수는 포덕 114(1973)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가사와 곡을 공모할 때 부친 황태익의 생애를 추모하는 <일편단심가>를 작사하였고 이 노래는 교서 편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듬해 송가에 수록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일편단심가
호국호도 일편심이 도산검수 팔십년에
경가파산 몇번이며 철창영옥 몇회런고
이제야 세업 닫히고 호법신이 되시어라
용담물 끌어내어 이 지경에 물대이니
메마른 겨레 심전 생명수가 넘치어라
이제야 거치른 강산 길이길이 꽃피우리
노학이 알을 까서 천하에 퍼뜨리니
비거비래 하는 아손 천일런가 만일런가
님이여 시름드소서 남긴 뜻 이루리니
참고한 자료
『눌암 황태익선생 실기』
『경남 고성군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창원시블로그(http://blog.naver.com/cwopensp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