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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리 스크랩 동백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고색의 절집 ~ 순천 동화사
김향중 추천 0 조회 108 13.02.07 16: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순천 개운산 동화사(開雲山 桐華寺) '
동화사 대웅전과 3층석탑


가을이 한참 그 절정을 누리던 11월의 첫 주말, 오랜만에 전남 순천을 찾았다. 그 전날 일찌감치
대전으로 내려가 식장산(食藏山)에 안긴 고산사(高山寺,☞ 후기 보기)를 둘러보고 대전역에서 무
궁화호 열차로 부산에 내려갔다. 좌석이 없어서 3시간이 넘는 그 먼 거리를 입석으로 가는데, 중
간중간 생기는 자리에 눈치껏 앉아 졸기를 반복하며, 또는 타고 내리는 계단에 종이를 깔고 앉아
차창 밖에 빠르게 흘러가는 산하를 바라보며 정말 오래간만에 입석의 향수에 젖어본다.

17시 40분 구포역에 도착하여 시내버스로 부산의 번화가인 서면(西面)으로 이동, 부산 선배를 만
나 그의 다른 후배와 더불어 연지동에서 더덕삼겹살에 곡차를 두둑히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
다. 11시가 넘도록 술을 마시니 곤죽이 되도록 취해 해롱해롱 상태로 광안동 선배 집으로 들어와
바로 잠을 청하면서 그날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의 찬란한 여명이 창밖을 똑똑 두들기며 우리를 깨운다. 이날은 순천으로 고찰
투어를 가는 날이다. 처음에는 포항 오어사(吾魚寺)로 가기로 했으나 그의 고향인 순천으로 방향
을 바꾸어 동화사를 비롯한 순천의 고찰을 가기로 했다. 차량은 1년 뒤에 그와 결혼을 했던 여인
네가 제공하여 그를 포함하여 3명이서 순천으로 길을 떠났다.

부산에서 순천까지는 300리가 넘는 먼 거리이다. 그래서 아침 7시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차를 제
공한 여인네가 늦게 와서 8시에 출발했다.막바지 단풍여행을 떠나는 수레들로 남해고속도로 시작
지점부터 마산까지 다소 막혔다. 허나 마산을 지나면서 길이 뻥 뚫려 진주를 지나서는 그 한가함
이 더욱 배가 되었다. 광양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2번 국도로 나와 순천시내 외곽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거긴 뷔페식이다. 나름대로 먹을만한 그 집 음식으로 배를 가득히 채우고 다시
서쪽으로 길을 재촉하여 구룡에서 2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대룡리 방면으로 들어간다.5분 정도
들어가니 왼쪽으로 동화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정면으로 메마른 대룡저수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들어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2km 정도 오르니 그 길의 막다른 곳에 고색이 창
연한 동화사가 중생을 맞는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점심시간을 포함하여 거의 4시간 반이 걸렸다.


▲  동화사에서 속세로 이어주는 유일한 길


 ♠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고려시대 고찰
조촐한 규모의 고색이 짙은 ~ 개운산 동화사(桐華寺)

개운산 자락에 포근히 안긴 동화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말사(末寺)
이다. 그야말로 심산유곡에 자리한 이곳은 11세기 후반 고려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이자 우리나
라 천태종(天台宗)의 시조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세웠다고 전한다.

천왕문에 걸린 '낙안군개운산동화사중수기(樂安郡開雲山桐華寺重修記, 1670년에 작성됨)'에 따르
면 의천은 1년 동안의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1086년 귀국하여 석장(錫杖)에 의지해 호남 지역을
유람하다가 낙주(樂州, 순천 낙안면)에 이르자 동쪽으로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낀 것을 보았다.
의천은 바로 그 산으로 달려가 산의 이름을 개운산(開雲山)이라 짓고, 그 산자락에 절을 지었는
데, 그곳의 지형이 오동봉서형(五桐鳳捿形)으로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든다 하여 절 이름을 동화
사라 하고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의천은 귀국 후, 1101년 죽을 때까지 고려불교의 1인자이자 불교학자로 바쁘게 살아온 인
물이다. 귀국하고 바로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했고, 선종(禪宗)인 조계종과 교종(敎宗)인 화엄종
(華嚴宗)의 단점을 보완하여 이들을 통합하고자 평생을 바쳤으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의하
여 우리나라 천태종을 개창했다. 또한 국내를 비롯하여 금(金)나라와 왜국(倭國) 등 주변 나라의
불교자료를 수집, 무려 1,010종 4,857권의 불교 서적을 수집하여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신
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원종문류(圓宗文類) 등을 편찬했다. 그가 얼마나 바쁘게 살
았던지 불과 40대의 나이에 60 넘은 노인네마냥 폭삭 늙었다고 하며, 결국은 46세의 한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동화사의 창건 설화처럼 지팡이를 짚고 전국을 주유(周遊)하던 그런 한가로운 인
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나 1970년 이곳에서 의천속장경(義天續藏經) 목판본이 발견된 적이 있어 의천과 어느 정도 연
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고려 초기에 세워진 3층석탑은 이 절의 오랜 나이를 가늠하게 해
준다. (현재 그 목판은 동화사에 없음)

고려 전기에 문을 연 동화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되어 1601년 승려 신총(信聰)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승려 영각(靈覺)이 불상 10여 구를 모셨다고 한다. 1630년 승려 계환(戒環)이 중창했으
며, 1644년(인조 23년)에 추계 유문(秋溪 有文)과 승려 육로(六老)가 호선루(護禪樓)를 세웠다.
1666년 낙안군수 조상주(趙相周)의 시주로 호선루를 중건하고 법홍대사(法弘大師)가 건물에 기와
를 새로 얹고 불상을 봉안했다. 1666년 삼신(三信)대사가 첨성각(瞻星閣)과 법당을 새로 짓고 호
선루에 단청을 했으며, 승려 의심(儀琛)이 대종(大鐘)을 조성하면서, 창건 당시의 모습을 되찾고
선풍(禪風)을 드날렸다고 한다.

그 이후 계속 법등(法燈)을 이어나가 1921년 대웅전과 승당을 중수하고 1975년에 종각을 새로 지
었으며 1994년에 대웅전을 보수하고, 1989년 3층석탑을 해체 보수하였다. 1998년에 동화사입구에
서 절까지 도로를 확장,포장하여 절로의 접근이 쉬워졌다.

▲  동화사 요사(寮舍)

▲  1994년에 세워진 삼성각(三聖閣)과
중생들의 목을 축여주는 샘터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응진전, 지장전, 요사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은 보물로 지정된 3층석탑과 지방문화재인 대웅전, 비지정문화재인 응진전과 부도, 천왕문, 경
판 37매 등이 있어 고색의 내음을 마음껏 드러낸다.

속세와 멀리 떨어진 동화사는 주변에 가을에 젖은 자연만이 있을 뿐이다. 절 주변으로 오동나무
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어 경관이 아름다우며,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여 속세의 무거운 짐을 절 밑의 대룡저수지에 모조리 던져 버리고 포근히 안기고 싶은 정
겨운 절집이다. 다만 동화사입구에서 절로 오르는 길 중간에 힐사이드라는 커다란 골프장이 경관
을 해치며 건방지게 들어앉아 있어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 동화사 찾아가기 (2010년 1월 기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순천행 고속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떠나며, 동서울터미널에서 순천
  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운행.
* 서울(용산역), 수원역, 서대전역, 익산역에서 순천행 열차가 1일 10회 정도 있으며, 광주역과
  부산(부전역), 마산역에서 순천행 열차가 드문드문 다닌다.
* 인천, 부산(노포동, 사상), 광주, 대구(서부), 수원, 진주에서 순천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순천역. 순천터미널에서 대룡리행 순천시내버스 84번을 타고 동화사입구 하차, 도보 2km
  <84번 순천(가곡동 종점) 출발시간 - 7시 30분, 10시 45분, 13시 50분, 17시 15분, 20시 20분
  / 순천역과 순천터미널은 10분 정도 추가>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 있음)
① 남해고속도로 → 순천나들목 → 순천시내 → 벌교 방면 2번국도 → 구룡에서 대룡리 방면 우
   회전 → 동화사입구 → 동화사
② 남해고속도로 → 승주나들목 → 벌교 방면 857번 지방도 → 낙안 → 내운리 → 대룡리 → 동
   화사입구 → 동화사

*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374-1 (☎ 061-742-4476)


♠  동화사 둘러보기

▲  동화사 돌담길

용안마을에서 동화사행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수레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4시간 동안
정말 고생한 수레를 잠시 쉬게 하고 코 앞에 다가온 동화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동화사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정취가 아른거리는 돌담길이다. 돌담의 길이는 100m 남짓으로 그 담을 졸
래졸래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경내로 들어서는 천왕문이 나오며, 왼쪽 길은 절을 품은 개운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 동화사 연못
1975년에 조성된 연못으로 절 아래쪽에 있다. 연못 우측에는 연못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여름에는 연꽃의 화려한 향연이 펼쳐진다.


▲  맞배지붕의 동화사 천왕문(天王門)

담장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단정한 모습의 천왕문이 나온다. 동화사는 일주문(一柱門)이 따로
없어 천왕문이 절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천왕문을 칭하고 있으면서 정작 부처
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용도로 쓰다가 천왕문으로 급작
스럽게 변경되었거나 중간에 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문 바깥쪽에는 '開雲山桐華寺'라 쓰인 현판이 있고,
안쪽에는 '鳳凰樓(봉황루)'현판이 있다. 원래는 3층석탑 가까이에 있었으나, 1992년 봉황루가 있
던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현판까지 지니게 된 것이다. 문 안에는 동화사의 연혁이 적힌 '낙
안군개운산동화사중수기(樂安郡開雲山桐華寺重修記)','낙안군개운산동화사중창기(樂安郡開雲山桐
華寺重創記))' 등이 걸려있어 절의 사적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문을 들어서면 담장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작지만 고색이 짙은 동화사 경내가 펼쳐진다.


▲  기나긴 세월을 뛰어넘으며 어깨를 나란히 한 동화사 부도(浮屠)

천왕문을 들어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오동나무 숲과 함께 오손도손 자리한 부도 3기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제일 왼쪽에 있는 팔각원당형(八角圓
堂形)부도일 것이다. 부도 삼형제 중의 맏이로 덩치도 제일 크고 맵시도 가장 아름답다. 고려 후
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몸에는 700년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중후함을 보여준다. 그
오른쪽으로 대추처럼 아주 작고 귀여운 부도가 자리해 있는데, 탑신(塔身)위에 상륜(相輪)을 올
린 형태로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그 오른쪽으로 추녀의 선이 아름다운 부도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이들 부도는 원래 산 위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며, 절 입구에 몇 기의 부도가 더 있었
으나 1980년대 후반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  동화사 대웅전(大雄殿)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61호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딱 시선이 마주치는 대웅전은 동화사의 법당(法堂)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규모는 작지만 어딘가 모르게 웅장함이 깃들여져 마음을
숙연하게 해준다. 건물 양 모서리에 배흘림의 원형 기둥을 세워 다소 안정감을 선사하며, 평방
사이로 공포(空包) 덩어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집이다.
이 불전은 조선 중기인 1601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려 영각이 불상 10여 구를 봉안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1984년에 해체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을 나오면서 불행하게도 놓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대웅전 내부이다. 절에 오면 오래된 건물
이나, 법당에는 꼭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동화
사 대웅전은 소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지극히 화려하여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우선 불단
(佛壇)은 꽃과 짐승이 가득 조각되어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 조선 후기 불
단 중 수작으로 꼽힌다.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을 모셨는데, 1662년 봉
안된 것으로 보이며, 불단 허공에 자리한 닫집은 화려함의 극치로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불
상 뒤로 든든하게 자리한 후불탱화는 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로 고운 맵시를 자랑하는데, 17세기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진귀한 것을 안보고 넘어갔으니 그저 후회가 막심할 따름이다.


▲  동화사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응진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명부전(冥府殿)이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1년에 보수했으며,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
明尊者)와 십왕(十王), 판관(判官), 시자상(侍者像) 등, 저승(명부)의 주요 식구들이 자리해 있
다.


▲  동화사 3층석탑 - 보물 831호

대웅전 앞에는 우아한 자태의 3층석탑이 고색의 내음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이 탑은 동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의 창건시기로 여겨지는 고려 초기에 세워졌다.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
층의 탑신을 올리고, 다시 그 위로 상륜부(相輪部)를 올렸는데, 상륜부의 구성원인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 등이 정연하게 남아 탑의 수려함
을 더욱 끌어올린다.

신라 탑의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높이는 3.8m이
다. 수백 년 세월의 때가 촘촘히 깃들여져 중후
함이 돋보인다.

1989년 탑을 해체보수했는데, 그때 1층 탑신에
서 원형의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서 청
자 사리함(舍利函)이 나왔는데, 거기서 사리 4
과와 금동제 3층보탑 1기, 옥구슬 대형 2개, 소
형 31개, 자수정 1개, 파손된 녹색 사리병 2개,
진주 2알, 섬유질 계통의 보물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속세를 놀라게 했다. 그중 사리 4과는 탑
을 복원하면서 다시 사리공에 넣었고, 사리함과
그 외에 유물은 동화사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동화사 경내를 모두 둘러보았다. 아쉬운 것은 앞의 대웅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웅
전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이미 저 멀리 가 버린 것을, 다음
에 이곳과 다시 인연이 된다면 대웅전 내부를 깔끔하게 눈 속에 담고 싶다. 가을의 전령 코스모
스의 환한 미소의 위안을 얻으며, 속세와 멀리 떨어진 아늑하고 고요한 산사, 동화사와 작별을
고한다. 다음으로 문을 두드릴 절은 낙안에 있는 금둔사(金芚寺, ☞ 후기 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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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0년 1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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