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fare for the Common Man(평범한 사람을 위한 팡파레)
Aaron Copland, 1900 ~ 1990
Aaron Copland,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코플랜드의 생애와 음악 Aaron Copland 1900∼1990
아론 코플랜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그의 작품는 미국 작곡가 중 가장 많이 연주되어지고 있다, 그는 작곡가 뿐만 아니라
20세기 음악에 대한 많은 강의와 저서를 통해 미국의 현대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도 활달히
활동을 하였다 그의 음악은 힌데미트, 스트라빈스키, 비르톡, 스트리아빈, 쉰베르크,등의 작곡가들이 조성 체계를 탈피하여 이것
을 대체할 새로운 체계를 찾으력는 다양한 시도를 하였던 것과는 달리 온음계를 바탕으로 간결한 음악을 추구하여 폭 넓은 청중
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재즈,신고전주의의 구조, 수식된 12음 기법을 비롯하여 많은 양식과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교향
시 발레, 오페라, 라디오나 영화 음악 등 그의 성공적인 작품들은 미국적인 특징을 훌륭히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관현악곡이 많으나 그 자신이 피아니스트로도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피아노 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악흥의 한때1917 >,<파사칼
리아 1922>,<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1930>,<피아노 소나타 1941>,<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1957>,등 피아노 작품도 작곡 하였다.
그는 1900년 11월 14일 뉴욕의 부르클린에서 아버지 해리스 모리스(Haris Morris)와 어머니 사라 밋텐탈(Sarah Mittenthal) 사이
에서 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일곱살 위인 누나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실력이 향상되자 레오폴드 볼프슨
(Leopld Woflsohn), 빅터 빗트겐스타인(Victor Wittgenstein), 클라렌스 애들러 (Clarence Adler)에게 공부하였다. 그리고 부룩크린
음악학교, 담로취(Damrosch) 교수가 주관하는 뉴욕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열심히 참석하였는데, 파테레프스키(Lgnace
Paderewski, 1860~1941), 스콧트(Cyril Scot,1879~1970), 이사도라 던컨(Lsadora Duncan, 1877~1927), 디아킬레프(Dyagilev,
1872~1929)의 연주와 발레, 그리고 특히 림스키 콤사프키(Nikolay Rimskov, 1844~1908)의 (세헤라자데)>와 드뷔시(Claude
Dedussy,1862~1918)의 <목신 오후에의 전주곡>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18세기부터 골드마르크(Rudin Goldmark,1872~1936)에게 화성학,대위법 그리고 베토벤(LudWig von Beethoven,1770~1827)
이후부터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까지의 음악을 공부했으며 퓨흐(Fuchs)에게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1813~1881),드비시, 라벨(Maurice Ravel,1875~1937) 스크라아빈,스콧트(Scott)의 음악을 공부하엿다 이때 골드마
르크의 연구실에서 흘깃 본 아이브스(Charles Ives,1874~1954)의 피아노 작품<콘코드 소나타>(Concord Sonata)에 많은 감명을
받게되지만 이 작품은 너무 혁신적이어서 코플랜드를 오염시킨다고 생각한 골드마르크의 제지로 더 이상 아이브스에 대한 연구
나 연주를 하지 않게 된다. 또한 문학에 능통한 친구 샤퍼(Aaron Schaffer)의 영향으로 많은 책을 읽게 되며 프랑스로 가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된다.
Aaron Copland 1900 ~ 1990
미국의 작곡가. 두 살 연상인 거쉰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계 이민의 검소한 가정의 출신으로서 14세가 되어서야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였고 후에 보수주의적 경향이 강한 루빈 골드마크 Rubin Goldmark에게 배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당시 폴 비달 Paul
Vidal이 원장으로 있던 퐁텐블로 미국 음악원에 들어갔으나 지도에 실망하여 당시의 신진 나디아 불랑제에게 배운 뒤 불랑제의
영향으로 라벨,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미요의 작품에 몰두하게 된다.
1921년부터 1925년까지 프랑스에서 지냈으며 리카르도 비녜스 Ricardo Vines의 지도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공부를 마쳤다. 당시
그는 공식적으로는 6인조의 미학, 특히 풀랑을 상기시키는 미학을 지향했다. 즉, 바그너와 그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쇤베르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드뷔시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고 면밀하지만 어느 정도는 추상적으로 작곡하도록 힘썼다(무도
교향곡 Dance Symphony[초연 1931 필라델피아], 극장을 위한 음악 Music for the Theater[1925], 오르간 반주가 있는 교향곡[N.
블랑제를 위해 작곡, 1925]).
구겐하임 장학금을 얻고 미국에 귀국한 코플랜드는 스트라빈스키에 의해서 제공된 여러 가지 음악적 가능성을 비롯하여 재즈,
다조성,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민속음악을 연구했다. 거기에서 신고전주의의 색채가 짙은 코스모폴리트(세계주의) 양식이 생겼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1번(앞의 오르간 반주가 있는 교향곡의 개정판, 1928), 교향곡 제2번(짧은 교향곡 Short
Symphony, 1933), 교향곡 제3번(1946), 피아노 소나타(1941), 베니 굿맨에게 헌정한 클라리넷 협주곡[현악 오케스트라, 하프,
피아노를 위한](초연 뉴욕, 1950), 그리고 존 포드 J. Ford의 생쥐와 인간 Mice and Men(1939)과 윌리엄 와일러 W. Wyler의 후계
자 Heiress(1949)를 위한 영화음악들이 있으며, 또한 그의 가장 유명하고 후세에 남을 만한 네 작품, 영가인 엘 살론 멕시코 El
Salon Mexico(1936)와 대서정발레곡인 빌리 더 키드 Billy the Kid(1938), 로데오 Rodeo(1942), 그리고 미국 서부의 찬가인 애팔
래치아의 봄 Appalachian Spring(1944)이 있다.
1950년 이래 코플랜드는 쇤베르크보다 오히려 베베른에 끌리면서 어느 정도 음열음악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피아노 환상곡 Piano Fantasy(1955~57), 관현악을 위한 내포(內包) Connotations for orchestra(196162), 위대한 도시를 위한
음악 Music for a Great City(1964 런던), 인스케이프 Inscape(관현악곡, 1967), 플루트와 피아노의 2중주곡 Duo for flute and
Piano(1970~71) 등 여러 작품에 나타나 있다.
코플랜드는 현대 음악 특히 미국 현대 음악의 옹호자로서 세션즈 R. Sessions와 함께 전문콘서트협회를 창설하였고(1928~31),
이어서 뉴욕의 야크에서 아메리카 현대 음악제를 지휘했고 미국 작곡가연맹과 국제 현대 음악협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또 뉴욕으로 망명해 온 바르톡을 원조했으며, 탱글우드의 바크셔 음악센터에서 25년간 강의를 했고 또 논문·강연, 그리고
연주회를 통해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미국 음악의 위대한 아버지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그는 음악을 감상하는 법 What to Listen
for in Music(1938 뉴욕), 음악과 상상력 Music and Imagination(1952 케임브리지) 등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