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변사와 이조전랑 자대제
조선 초기의 정치 권력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권·의정부·육조·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비변사의 설치와 이조전랑 자대제의 실시로 중앙의 권력운영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비변사는 1517년(중종 12)에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 침입에 대비해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가 1522년에 이르러 상설기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래 비변사는 문무 고관의 합의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 정무까지도 간여하게 되었다.
비변사의 임원은 도제조(都提調)·제조·부제조·낭청(郎廳)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도제조는 전임 또는 시임(時任)의 의정이 겸임하고, 제조는 2품 이상의 국방에 밝은 재상과 이조·호조·예조·병조의 판서가 겸임하였다. 그리고 부제조는 정3품의 문신 중에서 임명되었다.
도제조·제조·부제조는 모두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이었으므로 이를 통칭해 ‘비변사당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국방 문제에 밝은 3인을 뽑아서 상임위원격인 유사당상(有司堂上)을 삼아 비변사에서 군사 기밀을 처리하게 하였다. 그 밑에서 실무를 담당한 낭청은 12인의 당하관이었다.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자 자연히 의정부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비변사의 강화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변사에 의한 문무 고관의 합의제는 고종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부 최고기관으로서의 의정부의 권위는 형식상으로나마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묘당(廟堂)이라는 이름으로 의정부와 비변사가 합칭되었다.
비변사는 의정부의 3정승과 육조의 6판서 등이 합좌해 모든 정사를 의결, 처리하였다. 그리고 삼사는 비변사에 대한 견제 기능을 계속 가졌다. 삼사 관원의 임명권은 이조전랑에게 부여했는데, 이는 삼사가 비변사의 권능에 위축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전랑의 경질은 왕권의 제약도 없이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는 자대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기에 발달한 서원(書院) 중심으로 사림(士林)들의 공론을 반영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변사의 합의제와 이조전랑 자대제에 의한 상호 견제의 권력 구조도 영조 때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으로 이조전랑 자대제가 혁파되면서 삼사의 견제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중앙의 권력운영 방식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사의 견제 기능이 없어지자 비변사의 대신중심정치는 자연히 벌열정치의 성향을 띠게 되고, 이를 견제하던 왕권마저 약화되자 마침내 파행적인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