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16 : 최이의 후계자 최항과 몽골의 외교적 압박
04.10.12
최이는 1249년 11월, 70을 훨씬 넘은 나이로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11월 임신년에 최이가 죽었다'라고 간략하게 끝맺고 있다. 아버지 최충헌의 죽음을 기록한 사관의 가혹한 평가가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최이는 1218년 최충헌의 권력을 세습한 이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최고권력자가 되어 임금 위에 군림하면서 고려를 통치한 인물이었다. 왕조시대 어느 국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최상급의 강력한 통치자였다.
이 점에서 그는 아버지 최충헌을 능가했다. 최충헌이 명종, 희종 두 왕을 폐위시키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 등 네 왕을 옹립한 데 비해 최이는 고종 한 왕만을 상대했다. 폐립과 옹립을 반복한 최충헌이 국왕과 적대관계에 있었다면 최이는 형식적이지만 국왕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최충헌이 힘으로만 임금을 제압했다면 최이는 고도의 정치력으로 임금을 통제했다.
최이의 강화 천도와 대몽항쟁은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강화 천도나 대몽항쟁이 철저하게 정권 안보를 위한 것이었지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몽항쟁은 정권 안보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정면대응이 아닌 회피로 일관했고, 일부 항쟁마저 백성들이나 지방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더 많았다. 강화도의 최이 정권은 몽골과 저항하고 싸운다는 항쟁의 의미보다 그들의 침략이나 요구에 그때 그때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는 정도였다.
이것은 천도를 단행한 대의명분에도 어긋난 일이었다. 내륙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방치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천도 자체가 정권 안보를 위해 강압적으로 단행되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최이 정권 내면의 의식이야 항쟁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몽골에 대한 굴욕적인 자세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자주성이 지켜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미 심하게 손상된 자주성이었고, 이마저도 정권 유지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최이 정권뿐만 아니라 뒤를 이은 최항, 최의 정권에 대해서, 그리고 무인정권이 끝날 때까지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한편, 최이의 아들 중 출가했던 차남인 만전은 한속하여 최항이라 개명하고 부친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최항은 부친이 죽자 얼마나 불안했던지 상복을 단 이틀 만에 벗고 장봉택의 사저에 은거했다. 최이로부터 물려받은 가병 5백 명으로 경비를 철저히 하고 사저에서 사태 추이를 관망했다. 당시 권력의 심장부는 임금이 있는 대궐이 아니라 최이의 사저인 진양부였다. 그곳에는 최항의 가병보다 더 많은 군사가 있어 그 진양부를 장악해야만 했다. 그것에 성공해야 명실상부히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이었다.
사택에 은거한 지 며칠 후, 최항에게 추밀원부사와 이, 병부상서, 그리고 어사대부라는 정 3품의 핵심적인 관직이 겸직으로 내려졌다. 이어서 동, 서북면 병마사와 최고 집정부인 교정도감의 장관직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니 군사와 정치, 인사권에 대한 핵심적인 요직들을 모두 겸직하게 된 셈이었다. 최항이 아버지 최이의 뒤를 이어 권력 계승에 성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핵심 요직들을 모두 차지한 최항은 추밀원의 지사와 부사로 있던 민회와 김경손, 좌승선 최환을 먼 섬으로 유배보내고, 아비의 애첩 30여 명도 쫓아내버렸다.
1250년 3월, 최이는 드디어 아버지 최이의 사저인 진양부를 접수했다. 이미 권력은 자신에게 돌아왔지만 그래도 혹시나 일어날 지 모르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옷 속에 갑옷까지 갖추어 입고 가병을 총동원하여 이끌고 왔다.
최항은 정문이 아니라 동편의 작은 문을 택해 들어가다. 불의의 변란에 대비하여 애초의 계획을 급히 변경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아무런 마찰 없이 쉽게 접수했다.
권력을 승계한 최항은 무차별 숙청을 감행했다. 자신이 출가해 있으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를 때 비난하거나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섬으로 귀양을 가야했다. 그 속에는 자신의 계모와 이복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최항이 자신에 대한 비난 중에서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출신을 거론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모친인 서련방이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미천하다는 말만 들리면 그 발설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했다. 원수가 된 자들은 이를 이용해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책을 읽다가도 천할 '천'자만 나오면 겁을 먹고 책을 덮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미천한 기생이었다는 사실은 최항에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신분제 사회의 벽이었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의 통치권은 불안했다. 그것이 고려 귀족제 사회의 기풍이었다.
최항이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는가는 다음 사건 하나만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있어 조부인 최충헌의 잔악함을 능가했다.
1251년 3월, 최항은 계모 대씨에게 기어이 독약을 먹여 죽이고 만다. 계모의 독살은 사실 최항이 처음부터 생각한 일은 아니었다. 여자이므로 작위를 빼앗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죽임을 당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항은 권력을 승계하기 전에 계모의 아들이자 자기의 이복 동생인 오승적을 야별초 군인들을 시켜 바다에 빠뜨려 죽였는데, 이 자가 용케도 살아나면서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바다에 수장당한 자가 살아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임무를 책임진 야별초 군인들의 온정이나 비호가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바다에 수장되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오승적은 금강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있었다. 오승적은 최항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품고 복수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는 강화도에 살고 있는 어머니 대씨에게 몰래 밀서를 보내 최항 제거를 모의했는데, 그만 이 사실이 그 집 종에 의해 밀고되고 만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최항은 제일 먼저 대씨를 독살하고 그 일가붙이와 노비까지 모조리 죽였으며, 오승적을 다시 찾아 강물에 확실히 수장시켜버렸다. 그리고 오승적을 바다에 빠드려 죽일 때 책임자였던 야별초 지휘관 황보준창과 수행했던 군졸들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모두 죽이고 말았다.
또 이 사건과 무관하게, 이미 각지에 유배되어 있던 사람들을 다시 소환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니, 유배된 자의 절반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 여기 저기서 모함과 무고가 난무했다. 사소한 감정만 있어도 반역죄라고 무고하였으나, 심문해보면 아무 증거도 없었다. 밀고에 의한 공포 정치였다. 이것은 최항 정권의 불안함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불안할수록 무고나 모함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오승적 사건에 연루되어 가장 안타깝게 죽은 인물이 바로 대몽항쟁의 영웅이자 고려 최고의 명장이었던 김경손이었다. 그는 오승적과 인척관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유배에 처해졌다가 오승적 밀고 사건과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최항은 장군 송길유에게 군사를 주어 김경손이 유배되어 있던 백령도에 급파했다. 그리고 김경손을 바다에 수장시켜 죽였다. 김경손은 최씨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국가에 대한 공을 다시 인정받아 유가족들에 대한 포상이 내려지고 복권된다.
아래는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언급된 그의 인품에 대한 기록이다.
- 그의 모친이 꿈을 꾸었는데, 오색구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은 아이를 옹위하여 하늘로부터 품안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태기가 있어 낳자 얼굴과 자태가 아름답고, 머리 위에는 뼈가 솟아 용의 발톱과 같았다. 성품이 장중하면서 화평하여 너그러웠고, 지혜와 용맹이 출중하여 대담함과 지략을 겸비했는데, 화가 나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이 섰다. 많은 공로가 있음에도 간사한 적들에게 해를 당하니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 했다.
1251년 10월, 몽골의 사신단이 강화도에 도착했다. 이해 7월, 몽골제국에서는 3대 칸인 구유크가 죽은 후 3년 만에 4번째 대칸으로 칭기스칸의 네번째 아들 톨루이의 장남인 몽케가 선출되었다.
이번 사신단은 몽케칸의 즉위를 고려에 알리면서 다시 고종의 친조와 개경 환도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몽케칸의 친서까지 지닌 이들의 요구는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었고, 몽케칸의 조서에 대한 답서도 보내야 했다. 관철되지 않을 경우, 몽골군의 재침략은 불을 보듯 뻔했다.
고종은 재상급 관리를 포함하여 문무 4품 이상의 모든 관리들에게 몽케칸의 요구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토록 했다. 여기서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1. 고종 대신 태자를 보낸다.
2. 다시 요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태자를 보낸다.
3. 고종의 연로함을 들어 거절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고종의 친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관리들이 고종의 친조만큼은 끝까지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고려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이듬해인 1252년 정월, 추밀원부사(정 3품) 이현을 단장으로 하는 사신단이 몽골에 파견되었다. 예전에 비하면 고위급 사신이었다. 최항은 이현에게 몽케칸이 출륙 문제를 묻거든 금년 6월이면 출륙할 것이라는 답변까지 지시했다. 아울러 국왕의 친조 문제는 국왕이 연로하여 실행하기 힘들다고 말할 것까지 일러두었다. 이때 고종의 나이는 61세였다.
그리고 장일을 서장관으로 삼아 특수 임무를 맡겨 딸려 보냈다. 이 무렵 몽골의 압박이 거세지자 최항은 몽골에 파견되는 사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몽골 조정에 들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안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그 동안 몽골에 파견된 사신들이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때로는 그들 중에서 몽골에 붙는 자들도 더러 생겨났다. 장일은 그러한 정보도 입수하기 위해 최항의 은밀한 지시를 받은 것이다.
사신을 파견한 1252년 5월, 최항은 임시 궁궐이 있는 승천부에 성곽과 부속 건물을 지었다. 출륙을 가장한 조치였다.
그리고 7월, 몽골에서는 출륙 실정을 살피려는 사신단이 다시 왔다. 이때 정월에 파견되었던 고려 측 사신단도 함께 왔고, 최항의 특명을 받은 장일도 여기에 끼여 있었다. 반면 최항의 지시대로 몽케칸에게 대답했던 이현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귀환시키겠다고 하여 억류되어 있었다.
이번 몽골 사신단 역시 승천부에 머무르면서 고종이 직접 육지로 나와 맞으라고 요구하였다. 고종이 당황하여 최항에게 대책을 묻자, 최항은 경솔하게 임금이 직접 육지까지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결국 왕족인 신안공 전을 승천부로 보내 몽골 사신단을 제포관으로 맞아들이고 고종이 사신단을 접견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몽골 사신들은 고종이 직접 육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승천부로 돌아가 버렸다.
몽골 사신단을 따라 왔던 장일의 보고에 의하면, 고려 측 사신단이 몽골에 도착하기도 전에 요양에 주둔한 아무칸과 홍복원이 고려 침략을 요청하자 몽케칸이 이미 허락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몽골군의 침략은 벌써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번 몽골 사신단은 고종의 친조와 고려 조정의 출륙 문제가 관철되지 않으면, 즉시 귀환할 것이고 이들이 귀환하는 즉시 몽골군이 고려를 향해 쳐들어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다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했지만 최항의 대응방식을 비난했다. 천박한 잔꾀를 부리다가 마침내 침략을 부르게 되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