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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마루에 이사와서 처음 맞이하는 봄은 너무도 아름답고, 변화무쌍하여 정신이 빠질지경이었다. 50평생을 자연속에서 살았으면서도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일을 처음 경험하는 것 같다.
20대초반에 남들보다 일찍 결혼해서 가장이 되는 일은 참으로 버거웠다. 그리고 20대 중반, 시골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자로서의 자세도 가다듬기도 전에 어르신들 50여명을 모시고 목회한다고 한주간 한주간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30대에 들어서면서 시골교회 목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도시에 나와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오로지 목회자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앞만보고 달려왔다. 그러던중 교회는 부흥해서 자리를 잡아가는데 돌보지 않은 가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사명감에 살던 나에게 아내의 사랑타령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사명감 없는 아내를 원망했다. 점점 부부갈등이 심해지고 급기야 목회를 접어야 할 상황에서 얼마나 절망했던지... 아내의 배신에 대한 분노와 성직을 버리면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을 잃고 무참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얼마를 방황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다. 삶에 대한 이해와 경륜의 부족에서 온 잘못들이다. 아니 시행착오이다. 왜냐하면 매순간 나는 최선을 다해왔고 선의을 가지고 살아왔으니까.
지금 되돌아보면 그 시행착오 또한 이해가 간다. 부모의 기대, 사회문화적인 기대, 종교적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고뇌하고 절망하며 애써왔던가! 기대에 부응하려하면 할수록 능력의 한계에 부딧쳤고 그 한계는 열등감으로 내 감정을 지배하여 왔다. 주어진 사명과 기대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에서 받아보겠다고 15일 단식기도를 몇번씩하면서 몸부림쳤던 시간들이 주마등같이 흘러간다.
목회를 접으면서 시작한 그 방황이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하였다. 목회를 잘 해보겠다고 시작한 상담심리학이 었는데,... 그 상담심리학이 목회를 마감하고 방황하는 나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오로지 나자신에게 집중적으로 몰입하여 나를 만나 이해하며 수용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거품과 가면을 벗겨내고 내 내면의 실체를 만나는 작업을 얼마를 했을까. 허울 속에서 발견한 내 모습은 돌봄을 받지 못한 외로운 아이였다. 나를 직면했을 때의 그 낯설음이란! 나를 만나고, 대화하고, 수용하면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런 시간들이 지속되면서 복잡한 감정들로 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해가 점점 선명해지고 수용의 폭 또한 넓어지는 것 같다.
목회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상담자의 길에 들어섰다. 아주 미숙하고 방황하는 자리에서 출발하여 오늘 중마루에 왔다. 성장에 길에서 지금도 방황하고 있지만 새로운 도전의 발걸음을 내딧고 있다. 10년전, 스스로 판단해도 상담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미흡했지만 나처럼 삶의 대한 이해의 무지속에 헤메는 사람들과 함께 고뇌하면서 살아야 겠다고 작정하였다. 그리고 "상담심리학을 통한 인간의 이해"를 사회교육의 주제로 삼고 법인을 설립하였다. 그동안 수만명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의 경험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사회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삶을 살수 있을까를 고뇌하여 왔다. 나는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삶의 현장에서 '보다 자유롭게" "보다 평안하게" '보다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를 연습하게 하고 훈련하고 있다.
나는 지금 새로운 모험하고 있다. 목회하던 시기에는 종교적인 세계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상담자의 길에 들어서면서 철학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이해를 통해 행복과 자유를 추구해 왔다. 지금은 농부가 되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왔다. 4년전 상담자로서의 삶이 지쳐가면서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용인의 작은 전원주택에서 일손을 놓고 약 1년간을 온전히 자연에 의탁하면서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을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커지더니 결국 중마루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이다.
농부가 되어 중마루에서 맞이하는 첫 봄! 자연의 시간을 좇아 살아가는 나는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 우선 자연에 순응할 줄 모르는 미욱함을 깨닫는다. 중마루의 봄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데 거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다. 자연을 읽어야 조화를 이룰텐데 아직도 나는 내 방식과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 자연을 거스리다가 실수투성이로 이 봄을 보내고있다. 오늘도 날이 어두운 시간에 양식이 부족해 보이는 벌통이 걱정되서 벌통을 열었다가 얼굴에 두방을 쏘여서 얼굴이 이그러졌다. (순전히 내 생각대로 행동했으니 혼나는 것이 당연하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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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 맞이 하시는 올해의봄...실수투성 이라는 말씀에 정겨움과 인간애가 느껴집니다,,ㅎㅎㅎ 4월10일에 집단상담 갔을때 너무예쁜 중마루에 반했었어요 ...지금은 더욱 아름답겠죠 ... 중마루님께서 일궈노으신 터전에 여유와 자유를 찿아 또한번 떠나고 싶네요 ...
변화무쌍한 자연의 순리속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산소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우매함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셨음 하는 바램입니다 ~^^* 실수투성이의 어설푼 농부의 모습에서 순수한 소년같은 진솔한 행복이 묻어나 보여서 보기 좋아요^^
이장님에게도 기나긴 고통의 시간과 깊은 아픔이 있으셨네요ㅠ.ㅠ 항상 소년같은 미소와 장난기 가득한 모습, 벌에 쏘인 부은 눈을 보면서 마냥 해맑게 보였었는데.. 오랜시간 자신과의 힘든 시간을 감내하셨던 시간들이 있으셨군요.(어쩐지 포스가 장난 아니었어요ㅎ) 과거의 힘든시간들은 다가올 시간의 좋은 밑거름이 될 거란 확신을 가져봅니다. 벌써 중마루는 이장님이 자식처럼 생각하시고 애정을 쏟고 어루만져 주셔서 그런지 중마루 팬들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그런곳이 되어 버린것 같은데요? 성공하셨어요.. ^^수고하셨다는 의미로 박수한번 보내드릴 께염 (삼삼칠 박수 시작~ 짝 짝 짝짝짝 짝짝짝짝 짝짝---)
대자연은 내가 어0둠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밤 하늘에 별을 매달아 줄 것이고, 그 누구도 나를 쫓아와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바람을 보내 나의 발자국을 지워 줄 것이다. 대자연은 대양의 물로 나를 씻어 줄 것이며, 쓴 약초로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옥중기 中, 오스카와일드
해마다 봄은 변함없이 왔었지만 항상 새로운것이 세월때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점점 애틋함이 묻어나고 지독하게 봄을 타면서 자신이 그 봄을 지나고 있음에 황홀해하는 마음이 어떤것인지 느껴지는 고백록입니다. 자연에 젖어가는 이장님모습에서 '움트는 봄'을 느낍니다.
과수원을 정원으로 둔 중마루 주변은 산에 활엽수가 많아 봄풍경이 더 아름답습니다
침엽수는 늘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간직하는 대신
활엽수처럼 해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변화를 보여주지는 못하지요 기능의 차이랄까
구호가 높으면 (아무리 그것이 숭고한 사명이라 해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발을 헛디디게 되지요
이모님이 개척교회를 하시느라 어린 조카를 제대로 보살필 수 없었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상처와 분노가 오랜세월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선생님도 똑같은 삶을, 아픔을 상대에게 주셨네요
강의 중에 지나고 나면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다. 불륜까지도"라는 인상적인 말씀 기억나요.
상처도 아름답다 고뇌도 아름답다
아픔도 아름답다 회의도 아름답다
그러나 이세상의 모든 구호는 죽을만큼 위험하다 ^^
위험한 것들은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할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지. 꼭 희생자가 필요해
그렇긴해도 너무 안정된 방황하지 않는 삶은, 쪼금 지루할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 침엽수처럼..
"중마루에서 첫봄을 맞이하며"란 늘어지는 제목을 다시 바꾸어 써보면
"실수투성이의 봄"이 훨씬 팽팽하고 구미가 당긴다.
글 제목은 [대문]이라고도 하고 [미끼]라고 하죠. 독자들을 단번에 낚는 ^^
글도 방향이 약간 다를뿐, 심리상담과 똑같아요. 이미 갖고 있는 선생님의 강력한 무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