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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연원(淵源) |
평산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대곡군 또는 다화실이라고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영풍이라고 불렸다. 고려 초에 평주라고 불리다가 1272년(원종 13) 부흥군에 합쳐졌고 충렬왕 때 다시 복구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때 군이 되었다.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 삼중대광 태사에 오른 신숭겸(申崇謙)이다. 그의 초명은 능산으로 광해주(춘천지방) 출신으로, 태봉(궁예의 나라)의 기장이었다. 918년 배현경(裵玄慶), 홍유(洪濡), 복지겸(卜智謙) 등과 더불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가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고려개국원훈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그 후 927년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 군사와의 싸움에 태조와 함께 출정하여 포위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태조와 용모가 흡사한 신숭겸이 태조를 피신시키고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는 시신을 잘 보살펴 춘천에서 장례를 치르고 공신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아들 신보장(申甫藏)을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대구시 동구 지묘동)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다. 창성 유래 현존하는 신씨 가운데 대본으로 알려진 평산과 고령 신씨는 전체 신씨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이 두 본의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평산신씨는 현재 19개파로 나뉘어 진다.
* 평산신씨 판사공파 평산 신씨 판사공파(判事公派) 는 신숭겸 장군의 13세손인 신현(申賢)을 중시조로 그의 손자 신득청(申得淸)을 파조로 삼는다. 신득청은 영해 인량촌에 기거하던 중 신임지화(辛任之禍)로 인해 자손 양대가 안동과 원주 등지로 은둔하다가, 증손인 신지(申祉)가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현재는 임하댐 건설로 수몰)로 이거해 살았다. 5세손인 신예남(申禮男)이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고 그의 부인 민씨도 함께 순절하여, 나라에서 공조참판(工曹參判)의 벼슬을 추증하고 합강리에 쌍절비각(雙節碑閣)을 세워 그 뜻을 기렸다. 그후 신예남의 현손인 신한태(申漢泰)가 파천면 중평리로 이거하였다. 그는 조선 숙종 때 종택을 짓고 집성촌 150여호를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평산신씨 판사공파는 종가를 구성하는 종파를 포함하여 30개의 지파로 나뉘어 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