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국에 거주하는 정복헌 동문이
<오셨으니 한말씀 ! ! !>이라는 카테고리에
올린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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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퍼옮겼습니다
청중 입학이야기 (1)
동문님 안녕하십니까.
조금 전 뉴욕 거주 최동렬 동문에게 전화를 거니
몰 커피숍에서 친구만나 커피 마시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31회 카페에 자주 접속한다고 자랑 좀 했는데..
혹시 동문들 중 이놈이 누군데
느닷없이 나타나 웬 소란이냐 궁굼하실터라,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 지기 전에
옛날이야기 좀 하겠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성군 소재 무극국민학교에서
2명이 청중에 지원했습니다.
지원 접수창구에
국가고사 (도별로 실시) 성적과 함께 서류를 디밀었더니
이 점수는 합격 안전권인데
이거는 불안하다며 다른데 알아보라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 불안한 점수 (314점)를 받은 애가
바로 나 정복헌입니다. (계속)
청중 입학이야기 (2)
합격 안정권 점수 (346점)를 받은 박문규 동문도
이왕 돈 내고 먼 길 왔으니 안전한 게 좋다고
대성중학교에도 접수시켰습니다.
대성중학교까지 철로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
책에서 배운대로
금속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를 알아본다고
두 놈이 철길에 귀를 대고 들어 보니,
쿵쿵거리며 기차 접근 소리가 느껴졌습니다.
기차지나간 후 대성중에 가서 서류접수를 하는데,
'야 늬들, 얼굴 좀 닦고 다녀 !'
발표를 보니 둘이 다 청중합격을 했는데,
그해 청중 커트라인이 284점이었습니다.
이런 점수 아직 기억하니 똑똑한 앤가?
착각입니다.
박문규는 1학4반 반장으로,
나는 6반 (7반? 병철아 맞나? ^^)
청중 입학 이야기 (3)
1학년 첫번째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국민학교 때 반장했던 애들 손들라고 했을 때,
어! 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
나도 손을 들었다.
그랬다.
나도 반장을 했고,
6학년때는 1, 2반 반장이 번갈아 가며
전체 조회때 '차렷, 교장선생님께 경롓!'하고 구령을 불렀었다.
시골에서 반장을 했던 애가 국가고사 점수는 왜 그리 낮냐?
이 질문에는 지금까지 변명할 말이 없다.
6.25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학생수가 적어
전쟁 전에 남녀 각 4개 반을 2개 반으로 재편하고
운동장에 학년 전체를 남녀 각 1렬씩 세워 놓고
딱 반으로 쪼개
키 작은 남녀는 1반,
키 큰애들은 2반,
그래서 키 작은 나는 1반 반장이 되었다.
청중 입학 이야기 (4)
소학교 때 집에 닭을 쳤는데,
학교 끝나자마자 들에 나가
개구리를 잡아다 닭 모이로 주었다.
우리 닭은 유달리 통통했다.
그 당시 시골에는 과외라는 것이 없었고,
전쟁 때라 전과서 같은 참고서적을 구하려면
음성이나 청주, 충주에 나가야했다.
국가고사 전날에도 나는 닭하고 놀았다.
한반에 남녀가 공학하다 보니
반장 하나에 남녀 부반장을 두었다.
나는 농사만 짓는 동리에 살았고,
대부분의 학생은 장터에 살았는데,
농사동리와 장터동리 애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각기 동리로 돌아가 따로 편 갈라 놀았다.
이렇게 두 집단의 애들이
서로 반목하게 된 계기는 우리 반 여부반장의 존재였다.
청중 입학 이야기 (5)
여부반장(여부)은 얼굴도 곱고 공부를 잘 해
애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장터 애들이 보기에
그녀가 자기들과 말을 할 때는 새침을 띄는데 반해
나하고 말할 때는 웃음을 띄는 것처럼 보였단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였고,
이를 남부가 주동이 되어 선동하였다.
착하던 애들이 나만 보면
'남녀 7세 부동석' 하며 등을 돌리는데,
그런 와중에도 박과 여부는 항상 내편이 되어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성적은 나은 편이라 당당했다.
어느 날 지물포 아들인 남부가
'멘탈테스트'라는 참고서적을 사다가
저희 끼리 돌려 보며 공부하더니,
국가 고사에서 여러 명이 390점이상 415점사이의
높 점수를 받아 군에서 1위였다.
청중 입학 이야기 (6)
박문규와 내 점수는 이미 말한대로 부끄러운 수준이었고,
여부의 점수가 바로 청중 커트라인인 284점이라 지금까지 기억난다.
국민학교 동기들이 거의 무극중학교에 진학하였고,
청중 2명, 청주여중 1명 (여부) 병설중학 4명만이 청주로,
1명이 경기중으로 진학했다.
이로써 나는 당시 시골에서 말하는 유학파(?)인 셈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장터아이들은 거의 서울 소재 고등학교로 갔고,
나와 박문규는 청고,
여부반장은 경기여고로 갔다.
대학은 서울로 간 아이들이
서울대에만 7명 (여부는서울대사대, 남부는 서울법대),
고대, 외대등 여러명이 진학했다.
박문규는 고2때 신병으로 휴학, 2년 후에 졸업함
청중 입학 이야기 (마치면서)
동문카페에서 여러 동문들을 다시 만나 기쁩니다.
박문규동문의 그 후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박동문은 누나와 여동생 사이에 외아들로
사진업을 하시는 부친을 따라
용담동에 이사하여 살았습니다.
중1때는 반장도 하고 건강했는데,
사업의 부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고1부터 관절염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고2에 들어서서는 아예 휴학을 하고
2년 후인가 겨우 졸업장만 받았습니다.
그 후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청주맹아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건강 악화로 대구 동산병원에 장기 요양을 합니다.
당시 나는 대구에서 군 생활 때라
틈나면 자주 문병을 했는데,
그때 마다
오히려 나는 친구의 밝고 희망적인 투병 모습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청중 입학 이야기 (마치면서 끝)
어느날 병실을 찾았더니,
못 보던 간호사가 있기에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자기를 정성껏 간호해 주는 천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 간호사가 나간 후 친구는 나더러
세상에 보기 드문 천사 같은 분이니 결혼을 권했습니다.
멀쩡한 놈까지 염려해 주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때가 1968년경입니다.
미국와서 1976년 첫 크리스마스때
동산병원 간호실로
박문규환자의 근황을 묻는 카드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고,
몇 해 계속 보냈지만 끝내 회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친구는 지금 고통없는 곳에서
영민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첫댓글 머리가 좋기는 무척 좋구만.....국민학교 졸업 무렵 중학교를 가기 위해 치렀던 국가고시 ! ! !
나도 그것은 기억하는데 내가 도대체 몇점을 맞았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는 이 현실 !!!
그런데 정복헌 동문은 자기것은 고사하고 친구들 점수까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놀라 자빠질 지경입니다. <존경스러워~~~~>
이승렬, (정복헌 답글)
'오셨으니 한 말씀'에는 300자 글자 제한이 있어서 여 부반장을 여부, 남 부반장을 남부로 줄였고 박문규를 그냥 박이라고만 하였는데, 지금 일반 아이디로 접속 가능하여 글자 제한을 받지 않으니 격세지감을 느끼네.
쓰잘 데 없는 글을 하나 하나 퍼 날라 준 노고에 감사드리네.
반갑소, 잘 읽었소, 한참동안 옛 생각 하게되는 이글 감사하오.
양현국 동문,
금년 동창회장을 맡아 수고하시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오늘에서야 댓글을 발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복헌
후배가 정말 흥미(?) 있게 읽고 갑니다.
글 중에 휴학후 2년인가 후에
졸업장만 받으 셨다는데
혹시 저희 졸업때(33회) 아닐까요?
정말 기억력이 좋으신 것 같아요.
좋은글 읽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정복헌
후배님, 박문규동문은 2년후에 졸업을 했다니까 33회 졸업이 맞을 것입니다. 아마 출석을 못하였으니 졸업앨범은 찍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박동문은 영어를 매우 잘 했습니다. 고등학교때 AFKN 방송을 듣고 이해 했고, 청주맹아학교 교사로 있을 때나, 대구 동산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항상 영어책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던 외국인 의사들과 즐겨 대화를 했습니다.
이까운 친구를 이렇게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