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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면(開寧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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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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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의 이름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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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룡리(新龍里) 개령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5km 떨어진 야산지대로 두 마을(상신. 중신)로 이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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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덕촌리(德村里)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에 속한 덕림동이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 후 총독부령에 의하여 행정구역을 대폭 통합함에 따라 산당. 자방과 통합하여 덕촌동이라 하고 신설된 개령면에 예속되었다. 1971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촌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개 령면 서단에 위치하고 면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마을이다. 터골과 독송의 두 마을이 어모 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감문산을 경계로 동부리와 접하고, 서쪽은 덕촌 분지를 벗어나면 어모면의 넓은 들이다. 남쪽은 은지들 끝 쪽으로 신룡리로 이어지고 북쪽은 취적봉(300m)이 막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터골. 기동. 대촌 덕촌리의 중심 마을이며 임진왜란 때 함안조씨가 이곳을 개척하면서 마을터를 잡았다 하여 기동 또는 대촌이라 했다 하나 지금은 보통 터골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36여 가구에 함안 조씨. 김성나씨. 밀양박씨 등이 주로 살고 있다(조광우 <52> 외 4명). ② 독술. 독송(獨松). 약송 덕촌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100년 전에 이 아무개란 선비가 이곳을 개척할 때 마을 뒷 산이 독소리 모양이며, 당시 대단히 큰 소나무가 서 있었다 하여 독소리와 소나무란 뜻을 합하여 악송이라 부르기도 했고, 고립송이라는 뜻으로 독송이로도 불렀으나, 지금은 속칭 독 슬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며 약 30여 가구에 김성나씨. 흥양이씨 등이 살고 있다(나채문 <55> 외 5명). ③ 산당(山堂) 덕촌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박 아무개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집들이 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산당이라 불렀다 하며, 10여 가구에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우춘식 <67> 외 4명). 마을에 산당이 있어 불러진 마을 이름일 것이다. ④ 자방(紫方) 덕촌리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1480년경 오식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실 짜는 방이 있었다 하여 자방이라 불렀다 하며, 28가구 정도로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오상 길 <49> 외 4명). |
(4) 서부리(西部里) 본디 부억리. 화목리. 우량리(죽전리)의 세 마을이네 마을이 커지면서 한 마을이 되었고, 조 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에 속했는데, 1914년 통합하여 서부동이라 하고 개령면에 예속시켰 다. 1988년에는 동이 리로 바뀌었다. 개령면 소재지 남쪽에 호두산 밑으로 길게 늘어진 마을로 동쪽은 감천변에 발달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남북으로 910번 지방도로(김천 -선산)가 지난다. 동쪽은 감천 넘어 아포읍 대신리가 바라보이고, 서쪽은 호두산이 가로막고 우량동(죽전동) 뒤에는 죽림이 무성하고, 북쪽은 동부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버어골. 벅골. 백골. 버골. 안동네. 부억골(夫億谷). 부엌동 현재 동사무소 서쪽 산 안쪽의 위편 마을로 고려시대 경 모씨라는 선비가 개척하였다 하며, 주민들의 생활이 넉넉하여 부엌동이라 불리어 왔다 한다. 60여 가구에 김해김씨. 수원백씨. 안동권씨와 이씨. 손씨 등이 살고 있다(이맹조 <60> 외 5명). ② 하몰골. 하묵골. 하먹골. 하목골. 화목동(和睦洞) 서부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동사무소에서 동쪽으로 뻗쳐 있으며 이웃과 친척 사이에 화목 하게 지낸다 하여 화목동이라 불렀다 하며 이씨. 김씨. 문씨 등이 35가구 정도 살고 있다(윤 석규 <61> 외 5명). ③ 우랑동. 우량동(友良洞) 주민들의 수준이 높고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화목동 동쪽에 위치한 마을 로 문씨. 전씨. 박씨. 윤씨의 7가구가 살고 있다(윤석주 <62> 외 5명). ④ 죽전동(竹田洞) 화목동 북편에 있는 마을인데 오늘날도 마을 뒷산에 대나무 밭이 많다. 대나무를 심은 연대 는 알 수 없고 죽전동이란 마을 이름은 대나무가 유달리 많아서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10여 가구이며 김해김씨. 임씨. 박씨. 문씨 등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다소 높은 지대 인 마을 중심 부분에 우물이 있어 오늘날도 많이 이용한다(이용근 <72> 외 5명). |
(5) 동부리(東部里)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이 이곳에 있었고 신라시대에는 감문주. 개령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의 중심지로서 부곡면에 속한 화전리. 교동. 구교동이었는데, 1914년에 통합하여 동부동이라 하고 신설된 개렬면에 편입되고, 1971년에 교동을 중심으로 한 비석걸. 화전리(옥전리). 와호동을 함께 나누어 동부 1동으로 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개령 면 소재지로서 여러 기관들과 중학교가 있으며, 김천 시가지에서 8km 쯤 떨어져 있다. 910번 지방도로(김천 - 선산)가 남북으로 뻗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동쪽 마을 앞은 넓 은 들이 펼쳐지고 감천이 흐르고 강을 건너 아포면과 평야로 이어진다. 남쪽은 서부리가 가 깝고 서쪽은 감문산이 막았으며 북쪽은 가까이에 양천리와 이웃한다. 삼한시대 감문국이 있 었던 곳으로 김천시에서 유적지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윗마을. 윗골. 조동. 교동. 교촌(校村) 오늘날 향교가 있는 마을로서 한자어인 교동을 속칭 조동이라 부르며, 이 교동 맞은편 산이 마치 호랑이가 오른쪽으로 누워 잠자는 형상이라 하여 호두산이라고 하는데 이 호두산 윗줄 기인 감문산 중턱에 계림사라는 고찰은 신라 눌지왕 3년 아도 화상이 산세를 진압시키려고 창건했다고 한다. 15가구 정도 살고 있으며 남평문씨. 남양홍씨. 경주이씨. 김해김씨 등이 주 로 산다(강갑석 <61> 외 5명). ② 옥전동(玉田洞) 옥지기들이 경작하던 밭으로 생각되는 동부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7가구에 진주강씨. 경주 이씨가 주를 이룬다(김덕이 <67> 외 5명). ③ 정변동(井邊洞) 동부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단위 농협 남쪽 창고 앞쪽에 샘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며 10여 가구도 안되는 조그마한 마을로 김해김씨. 경주이씨 등이 살고 있다(김영찬<63> 외 5 명). ④ 조천. 구교(舊校) 원래 동부 2리 관학산 중턱에 있었는데 1837년 개령현감 태두남이 감문산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전의 향교 자리는 지금 구교(舊校). 교천(校遷) 또는 조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곳에 유 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묘가 있는데 유성룡의 후예로 명문가의 묘를 쓰기 위해 향교를 헐 었다 하나 믿을 수 없다. 지금은 성산배씨.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배종건 <60> 외 5명). |
(6) 양천리(楊川里)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부곡면에 속했는데,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하여 신설된 개령면에 예속 되고, 1988년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개령면 소재지에서 500m 쯤 북쪽에 있고 김천시 내에 서 가장 넓은 평야를 끼고 있으며, 동쪽에 감천이 북류하고 천변을 따라 910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서쪽은 취적봉(300m)이 막고 있고, 북쪽은 광천리, 남쪽은 동부 2리와 인접하고 있 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역말. 양천. 양천역(楊川驛) 감천 냇가의 수양버들이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 양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 도 이 마을 앞 감천변을 따라 큰 수양버들이 많아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되며 양천리 중앙 부분에 조선 때 김천 도찰방에 딸린 양천역이 있었는데 고종 건양 원년에 혁파되었다 하며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이덕기 <60> 외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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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전리(藍田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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