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伽椰山)을 등에 업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는 배산망해
(背山望海)한 명당(明堂) 마동에 1600년 경 全州이씨 讓寧大君 安昌正派 10세. 상충(相忠) 공의 아들인 11세. 정옥(廷玉) 공이 여수시 삼일면 남수동에서 광양시 마동 42번지로 입촌(入村)하여 그 후 후손으로 12세. 성휘(晟徽) 13세. 동희(東羲) 14세.
덕용(德容) 15세. 규태(奎泰) 15세. 규정(奎正)까지 집성촌
(集成村)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 후 후손인 19세. 병연 에
이르러 1996년 마동 000번지에 문중에서 제당(祭堂)을 건립하고 여수시 삼일면 남수동에서 상충(相忠) 공의 묘소를 이장하여
11세. 정옥(廷玉) 12세. 성휘(晟徽) 13세. 동희(東羲) 14세. 덕용(德容) 15세. 규태(奎泰) 15세. 규정(奎正) 묘소를 안장하고
시제를 모시고 있으며, 그 후 2012년 4월 4일 15세. 성선(晟善) 15세. 하선(夏善) 15세. 익선(益善) 15세. 양선(養善) 15세. 창선(彰善) 15세. 욱선(旭善) 15세. 홍선(弘善) 15세 홍선(洪善)
여덟 분 중 성선(晟善) 하선(夏善) 익선(益善) 양선(養善) 창선
(彰善) 다섯 분의 시제를 모시고 있으며, 그 후 17세. 승(承)
아홉 분, 18세.수(秀) 열일곱 분, 19세. 병(丙)자, 20세. 기(基)자 항렬까지 새로운 유택지로 선조들이 잠들어 계시는 선영(先塋)의 묘소에 안장하여 제사를 드리며, 후손들이 숭조경모(崇租敬慕)의
위선정신(爲先情神)으로 면장(綿葬)의 대 역사(役事)를 마치고,
선조의 음덕(陰德)이 이 땅위에 편안(便安)하여 300여명의
번창하는 후손들이 그 열매이니라. 가문(家門)의 근본을 후세에게 알리고 더 나아가 가문의 발전과 영광이 면면(綿綿)히 이어지기를 기원(圻源)하며 이 비(碑)를 세운다.
상충 공 문중 일동
서기 2010년 4월 5일 全州이氏 讓寧大君 安昌正派 相忠 公
문중 문장 이 병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