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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람들 / 너빠퉁 (정택진)
잠귀신인 동생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반대쪽으로 돌아눕는데 또 찔러댄다. 짜증을 내며 일어나 눈을 비비니 할머니가 봉창문에 붙은 작은 유리 쪽(유리쪼가리. 조그만 유리 쪽을 봉창문에 붙여 문을 안 열고도 밖을 내다 볼 수 있게 했다.)에 눈과 귀를 바짝 붙이고는 밖을 주시하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은데, 갑자기 잔방(작은방) 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속치마 차림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문고리에 달린 줄을 잡은 채 잔방 쪽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이 팔 하나씩을 잡아 아버지를 끌어내려 하고 있고, 아버지는 문턱에 발을 뻗대며 안 나오려고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다. 물을 건너기가 무서워 네 발로 버티는 송아지 같다. 토방(=토지, 물리. 방 앞에 널로 만든 공간으로, 밥도 먹고, 걸터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는 등 여러 용도로 쓰인다.)을 내려선 사람이 뒤로 돌더니 아버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고삐 끌 듯 잡아챈다. 아버지가 코뚜레에 꿰인 소가 된다. 고삐에 끌려 문턱을 넘은 아버지가 다시 토방 널에 버팅기자, 앞에 섰던 사람이 다시 머리채의 고삐를 잡아채 버린다.
할머니가 나무벼늘에서 솔가지 하나를 빼내들고 마구 휘저으며 그들의 앞을 막아선다.
“누군데 이라요! 누가 이 밤에 노무집 와서 이란다요!”
할머니의 고함이 어두운 마당을 쓸고 담벼락을 치고는 밤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잡고 있는 문고리 줄이 달달 떨리고, 문풍지도 바르르 떨고, 뒤의 동생들도 벌벌거리고 있다. 달달달, 덜덜덜, 벌벌벌, 무섭다.
한 사람은 앞에서 머리채를 잡고, 다른 두 사람은 양쪽에서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있다. 앞에서 끌던 사람이 한 손으로 할머니를 밀쳐버리자 할머니가 맥없이 자빠진다. 아버지가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무슨 말을 하는 듯하지만, 소리는 없다. 재갈 물린 소 같다. 신발도 안 꿴 아버지가 발뒤꿈치로 다시 한번 흙마당에 버팅겨본다. 할머니를 밀친 사람이 뒤를 돌아보더니 아버지의 배를 깊게 차버린다.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오래된 썩다리(나무 그루터기가 썩은 것으로, 겨울에 나무영이 나면 아이들이 괭이나 돌로 쳐 부러뜨려 집으로 지고 와 말린 다음 땔감으로 썼다.)처럼 푹 고꾸라진다.
“유제(이웃) 사람들, 잔 나와보게! 우리 *진헥남 재페 가네! 오따, 나 어차믄 조끄너으.”
할머니가 앞에 선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으며 소리친다. 뛰어나가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지만, 무섭다. 잔방에서 간신히 기어나온 엄니는, 두 팔은 문턱을 넘어 물리를 짚었지만 두 무릎은 문턱을 못 넘은 채, 네 발로 방바닥을 기어가다 놀란 아이처럼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고만 있다. 작대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염소 같다. 엄니에게도 발길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세 사람은, 반은 끌고 반은 걷게 하여 아버지를 데리고 집을 나선다. 이제 코뚜레를 당기는 고삐 없이도 아버지는 머리에 침 맞은 뱀처럼 시르죽었다.
할머니는 마당에 쓰러진 채 땅을 치며 울부짖고 있다. 마당에 내려선 나는 맨발로 살금살금 질앞으로 나갔다. 아버지를 끌고가는 발소리들은 벌써 저만치 어둠 속으로 내려가고 있다. 그제서야 이웃 사람들이 우세두세 몰려와 무슨 일이냐고 웅성거렸다.
농협 입구에는 ‘까작뿔’(Y자 모양의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것으로, 지게뿔에 묶어 위로 길게 세워 보릿뭇이나 나락뭇을 나를 때 높이 쌓는 지지대가 되게 했다.)처럼 생긴 굵다란 시멘트 기둥이 서 있었다. 꼬마는 시간만 되면 아랫동네로 내려가 농협 입구의 그 기둥에 기대거나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면 아버지가 농협에서 나와 1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었다. 아버지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나와서 주기도 했다. 꼬마는 동전을 들고 동실(동사무소) 한쪽에 세들어 있는 점방으로 달려가 주먹만큼 크단해 간신히 입에 넣을 수 있는 ‘아마다마’를 샀다. 꼬마는 그 ‘아마다마’를 사려고 거의 매일 농협의 그 까작뿔 기둥에 내려갔다.
아버지는 누런 백노지(갱지)로 일기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위 아래로 이등분한 뒤, 맨 위칸에 년, 월, 일, 날씨를 적고 그 밑에 예닐 곱의 칸을 만들어 등사한 백노지를, 앞과 뒤에 검은 까부(두꺼운 표지)를 댄 뒤 철끈으로 묶고, 앞 까부에다 ‘일기장’이라 쓴 흰 종이를 붙여 주고는 매일 검사했다. 뭍에 사는 아이들의 ‘그림일기’와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림 그릴 여백도 없고, 생긴 것도 모양새 있는 공책이 아니라 손수 만들어 투박하다는 점에서 그것들과는 달랐다. 밥 먹고, 학교 가고, 집에 오고, 소 뜯기러 가고, 빠침 치고, 딱지 치고, 다마치기(구슬치기)하고, 저수지에 가서 목욕하고, 갯가에 가 고기 낚고, 사장케에서 유희나 삼팔선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반복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꼬마들의 일상인지라 내용이 매일 똑같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하루하루가 하늘의 해처럼 똑같은 반복일지라도 일기는 매일매일 똑같으면 안 될 것 같아, 어떤 날은 방바닥에서 이리 엎드리고 저리 궁글며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참치캔만한 양철 깡통에 석유를 붓고 심지를 꽂아 불을 밝힌 초꼬지불은 희미했지만 밤을 밝히는 해였다. 저녁을 먹고 만화책을 본다며 윗목 모서리 의 등잔대에 놓여 있던 초꼬지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엎드린다. 만화책의 윗부분을 보려고 몸을 조금 위쪽으로 기어올리면 여지없이 ‘찌지직’ 소리와 함께 버버리오춘(벙어리오춘. 항렬과 상관없이 남자어른은 ‘오춘’, 여자어른은 ‘숙모’라 불렀다.)이 고랑에서 개 잡을 때 짚으로 개털 그을릴 때의 냄새가 났다. 불꽃이 조금 줄어들면 꽃이 없는 성냥개비로 심지의 똥을 긁어내 불꽃을 키우기도 하고, 동생이 토방의 요강에 나가느라 문을 열면 바람에 안 꺼지도록 두 손으로 초꼬지를 감싸기도 했다. 초꼬지는 단순히 빛을 내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사는 식구였다.
초꼬지보다는 늦게 바다를 건너온 ‘호야’는 석유 담는 깡통이 밥그릇만해서 매일 석유를 안 부어도 됐고, 심지도 퉁거워서(굵어서) 밝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유리갓이 있어 이마빡에서 개털 타는 냄새를 안 피워도 됐다. 호야는 훨씬 밝기는 했지만 그 대신 기름이 많이 들었으므로,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에서, 더구나 뭍에서 배로 실어와야 하는 섬에서 그것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었다. 멀리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이니 비쌀 것이야 당연했겠지만, 배에 실려 섬에 오면서 또 한번 뻥튀기를 해, 그것은 더욱 비싼 몸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또는 제삿날과 같은 특별한 때에만 호야를 켰고, 평소에는 우리 할머니만큼이나 오래된 초꼬지에 성냥을 그었다.
큰방 가득 아버지 친구들이 둘러 앉았다. 방 가운데는 상이 이상 거방지게 차려졌다. 어른들의 ‘계가리(계모임)’이다. 조금이라도 더 밝게 하려고 조그만 초꼬지에도 선반 옆의 호야에도 불이 밝혀져 있다. 꼬마 하나가 호야 밑에 차렷자세로 서 있다.
“언능 노래 한 재리 해봐라.”
어른들이 꼬마를 불러와 노래를 시키려는 것이다.
꼬맹이는 무슨 노래를 부를까 고민한다. 귀 너머로 배운 노래가 몇 개 있지만 좀 세련된 노래를 부르고 싶다.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노래가 준비됐는지 꼬마가 두 손을 맞잡으며 자세를 바룬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꼬마는 눈을 감는다. 자기만한 꼬마가, 엄마와 누나와 살고 있는 강변이다. 자그마한 강은 소리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강변에는 강만큼이나 예쁜 초가집이 하나 옹그리고 있다. 강은 옷고름처럼 곱게 굽이졌고, 초가지붕은 그 곡선처럼 동그맣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초가집 앞에는 허리띠 같은 모래밭이 강의 눈썹인 듯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다. 초가집의 뜰이다. 붉게 물든 석양이 모래밭에 빛을 쏘이자 하얗던 모래밭이 ‘금빛’으로 화장을 한다. 저만큼 갯물이 썰면, 예쁜 등허리를 드러낸 하얀 모랫벌에, 이제 막 바다로 들려는 해가 마지막 바알간 빛을 내려주어 온 바다와 모랫벌이 붉게 물든 아랫동네의 저녁녘 풍경과 똑같다.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감은 꼬마네 초가집의 뒤안에는 조그만 화단이 있다. 꼬마가 심은 나팔꽃이 해바라기를 타고 초가지붕까지 올라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노래 속의 꼬마는 뒤안에 갈대를 심었나 보다. 해바라기만큼이나 자란 갈대들이 바람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갑다.
“엄마냐 누나야 강변 살자.”
꼬마가 ‘엄마야 누나야’에서 배에 힘을 주며 음을 높인다. 꼬마는 누나와 함께 금모래 빛의 뜰에서 모래로 집을 지으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주께 새 집 다오’ 할 것이고, 엄마는 담 모퉁이에 기대어 오누이가 놀고 있는 모습을 그윽히 바라볼 것이다. 강 저편으로 져 내리는 노을이 노래가 그리는 풍경에 흐붓하게 빚을 흘려준다.
꼬마는 감았던 눈을 뜬다. 어른들의 모습이 호얏불 아래에 희미하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어른들은 아직 눈을 감은 채다. 꼬마가 마주 잡았던 손을 풀고는 차렷자세로 돌아와 어른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다. 그제서야 어른들이 박수를 친다. 아마도, 뜰에는 금모래가 반짝이고 뒤안에는 갈잎이 노래하는 저 먼 어느 강변을 어린날의 자기와 손 잡고 거닐고 온 모양이다.
문을 나서려는데 옆에 있던 오춘이 꼬맹이를 잡더니 동전 두엇을 쥐어준다. 꼬마는 뒤를 돌아 인사를 하고는 큰방을 나선다.
“아따, 그놈 또랑또랑하네”, “아따 누구는 아들 잘 나났구마” 하는 소리들이 꼬마의 작은 등에 와 포개진다.
농협에 다니면서 꼬마에게 ‘아마다마’를 사주고, 일기장을 검사해 꼬마를 조마조마하게 하고, 계가리에서 노래를 시켜 동전 두엇을 타게 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농협을 그만두었다.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앞둔 시점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옛날 임금만큼이나 절대적 힘을 갖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완도에서 우리 섬까지 다리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막강한 사람과 맞붙으려는 전라도 출신 후보의 섬 선거총책을 맡았다. 온 세상이 그 힘의 자장 안에 있는 현실에서 아버지가 농협에서 쫓겨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막강한 힘을 쥔 쪽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고, 그래서 한 나라를 이끌어보겠다고 훤한 대낮에 사람들 앞에 나선 한 정치인에게, 마치 아이들이 별명을 붙이듯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순식간에 ‘빨갱이’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가장 공격하기 좋은 방법으로 ‘빨갱이’ 딱지를 붙였고, 그 딱지가 붙으면 전혀 ‘빨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무렇게나 패도 되는 똥개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빨갱이’는 목숨마저 마음대로 해도 되는 무서운 문신이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가래침을 뱉듯, 아무렇지도 않게 이마빡에 붉은 인장을 찍어버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는 북새지는 여름날의 석양만큼이나 꼭두서니 색으로 시뻘건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나 엄니의 젖을 빨 때에도, 왼쪽 가슴에 ‘옷삔’으로 단 손수건으로 코를 닦으며 병아리처럼 입을 벌려 ‘병아리 떼 뿅뿅뿅’ 할 때에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후락한 교실에서 입을 뽀끔거리며 구구단을 외울 때에도, 그 후락한 교실을 세 개 터서 만든 졸업식장에서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적실 때에도, 머리를 빡빡 밀고 中자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산 중턱의 중학교에 오를 때에도, 객선을 타고 설레는 마음으로 뭍의 고등학교를 향할 때에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작달막한 키에 가끔씩 시커먼 ‘라이방’(선그라스)을 쓰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하도 오래 보아와서인지 대통령은 오직 그 사람이고, 그 사람만인 것 같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고유명사였다.
오직 자신만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과, 그 한 사람만이 대통령일 수 있다고 떠받드는 사람들이 온 세상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작달막한 사람의 반대편을 지지했고, ‘빨갱이’로 불리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며, 그러면 세상이 뒤집어질 수 있다며 온 섬을 ‘고대구리(저인망어선)’처럼 샅샅이 훑고 다녔다. 그 작달막한 사람 편에 서서 섬을 쥐고 흔드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았다. 그래서 그날 밤, ‘빨갱이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둠 속으로 개처럼 끌려갔던 것이다.
* 자식들이 결혼하여 저금나면(분가하면) 부모들은 자신이 지어준 이름으로 자식을 부르지 않았다. 보통 큰손자의 이름 뒤에, 아들에게는 ‘남’을 붙였고, 며느리에게는 ‘넘’을 붙여 불렀다. 장성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예의였을 것이다. 우리집은 내가 장남이었으므로, 할머니는 아버지를 ‘진헥남(진혁남)’으로, 엄니를 ‘진헥넘(진혁넘)’으로 불렀다. 동네 사람들끼리는 ‘누구아버지’, ‘누구어머니’로 불렀다. 결혼해 저금나서 자식 낳고 살아가는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동네에서 제삿날까지 서로 알고 사는 사람들끼리나 가능했던 호칭이었다. 나이가 든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호로자식’이라며 손가락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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