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가 말했다. 배움은 그만할 수 없다. 푸른색은 쪽에서 취하지만, 쪽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이 그것이 되지만, 물보다 차갑다. 나무는 곧아 먹줄 가운데 있고, 바퀴 테는 바퀴로 여기고, 그 구부러짐이 그림쇠 가운데 있는데, 비록 마르게 하고 사납게 해도, 다시 곧게 하지 않는 것은 바퀴 테가 그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나아가면 날카로워진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 매일 세 번 몸을 살피면, 지혜가 밝아지고 행동에는 과오가 없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지 알지 못하고, 깊은 계곡에 이르지 않으면 땅의 두터움을 알지 못한다. 선왕의 유언을 듣지 못하면 학문의 큼을 듣지 못한다. 간, 원, 이, 맥의 아들들은 태어나 소리가 같은데, 커서는 풍속이 다르니, 가르침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였다."(君子曰:學不可以已。靑、取之於藍, 而靑於藍;冰、水爲之, 而寒於水。 木直中繩, 輮以爲輪, 其曲中規, 雖有槁暴, 不復挺者, 輮使之然也。 故木受繩則直, 金就礪則利,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 則知明而行無過矣。故不登高山, 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干、越、夷、貉之子, 生而同聲, 長而異俗, 敎使之然也。)
이 글을 통해서 순자가 생각하는 배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는 배움을 통해 곧았던 나무가 구부러져 바퀴가 되듯, 쇠가 숫돌에 갈려 날카로워지듯 사람 또한 배움을 통해 선을 행하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성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배권과 같다. 사람의 성으로 인의를 만드는 것은 버드나무로 배권을 만드는 것과 같다."(性猶杞柳也, 義猶桮棬也, 以人性爲仁義, 猶以杞柳爲桮棬.)라고 말한 고자의 관점과 유사하다. 이러한 관점은 사람의 본성을 선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본성을 바로잡아야한다.
이때 외부적 요인에 중요한 영항을 미치는 것이 경험적 지식이다. 그래서 순자는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지 알지 못하고, 깊은 계곡에 이르지 않으면 땅의 두터움을 알지 못한다. 선왕의 유언을 듣지 못하면 학문의 큼을 듣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순자의 관점은 세계를 경험에 의하여 설명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사고와 닮아있다. 과학은 귀납적 방식으로 객관 세계를 증명하는 것이고 귀납은 경험을 통해 객관적 사실을 추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자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식을 통해 인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배움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인 지식만이 아니다. 순자가 배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그는 "그것(학문)을 하면 사람이고, 그것을 버리면 짐승이다."( 爲之人也, 舍之禽獸也。)라고 말하며 사람됨을 위하여 학문을 하려고 한다. 그는 " 예와 법을 인도하지 않고, 시와 서로써 그것을 하니, 비유하자면 손가락으로 강을 헤아리고, 창으로 기장을 절구질하고, 송곳으로서 병의 음식을 먹은 것 같으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不道禮憲, 以詩書爲之, 譬之猶以指測河也, 以戈舂黍也, 以錐餐壺也, 不可以得之矣。)"라고 말하고 " 그러므로 예를 높이면 비록 밝지 않더라도 본받을만한 선비이지만, 예를 높이지 않으면 비록 분별함을 살피더라도 흩어진 유사儒士 이다. (故隆禮, 雖未明, 法士也;不隆禮, 雖察辯, 散儒也。)"라고 말하며 예를 배움의 내용을 삼고 있다. 곧 그는 예를 배워 도덕적 실천을 하는 것을 배움으로 여긴다.
또한 그는 " 그 숫자는 즉 경을 외우는 것에 시작하고, 예기를 읽는 것에 끝난다. 그 뜻은 선비가 되는 것에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것에 끝난다.( 其數則始乎誦經, 終乎讀禮;其義則始乎爲士, 終乎爲聖人。)"라고 말하며 배움을 통해 성인이 되고자 한다.
도덕적 실천을 통해서 성인이 되고자함은 유학자들의 공통된 목표이다. 그러나 가치관과 내용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가 생긴다. 특히 본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방법적인 면에 큰 차이가 있다. 순자는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고 경험적 배움을 통해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한다. 반면 맹자는 본성을 선한 것으로 보고 본래의 본성을 되찾는 것을 배움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어떠한 가치관이 성인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 나는 맹자의 관점이 순자의 관점보다 성인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은 도덕적 실천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 공자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말하는 것이 이것고 맹자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舍生而取義)'는 것도 이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도덕적 가치와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도덕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생명을 뛰어넘는 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적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경험적 지식으로는 생명을 파악하게 되면 생존과 생명의 유지가 최고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곧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은 생명을 뛰어넘지 못하는 소극적인 도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순자는 예와 법과 같은 강제를 통해서 도덕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다.
맹자 또한 인간이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과 다른 것은 거의 없다.(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라고 말한다. 그러나 맹자는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어버리는데, 이러한 구함은 얻는 데 유익하니,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는데, 이러한 구함은 얻는 데 유익이 없는데, 구하는 것이 밖에 있기 때문이다.(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고 말하며 사람이 사람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도덕적인 것을 구해야한다고 말한다. 내 안의 도덕은 독단적인 도덕이 아니다. 맹자가 말하는 내 안에서 구하는 도덕은 보편성과 연결된다.
맹자는 "그 마음을 다 하는 사람은 본성을 아니,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여 기다리는 것은 명을 세우는 방법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말하며 내 안의 마음이 하늘이라는 보편적인 대상과 연결된다. 이는 내 안에서 구한 도덕이 보편적인 하늘과 연결되어 나로 끝나는 도덕이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 도덕이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늘과 연결된 나는 생물학적 생명을 뛰어넘게 된다. 이젠 자신의 생존만을 걱정하는 단계에서 넘어가 인류 보편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도덕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