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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4
디모데전서 2:1-7
한 분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1-4절에서 진리를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5-7절은 진리의 내용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1절).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것이 원인과 이유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에 집착하는 거짓 교사들로 인해 논쟁만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사탄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게 되니 그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첫째로”라는 말은 순서나 시간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라기보다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권하노니”의 ‘파라칼레오’는 ‘파라’(~곁에)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 ‘가까이서 부르다, 소환하다, 초청하다, 훈계하다, 권하다, 간청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이다. “간구”는 ‘데에시스’로 ‘간구, 기도’라는 뜻이고, “기도”는 ‘프로슈케’로 ‘기도, 기도처(행 16:13)’라는 뜻이고, “도고”의 ‘엔튝시스’는 ‘대담, 면접, 청원, 기도’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두 번 사용되었는데 4:5에서는 “기도”라고 번역하였다. “감사”의 ‘유카리스티아’는 ‘감사, 감사함’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4:3-5에서 ‘엔튝시스’와 같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각기 다른 의미의 말을 나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기도에는 다양한 의미가 하나의 같은 방향을 위해 필요하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란 말의 ‘판톤 안드로폰’(원형 : ‘파스 안드로포스’)은 ‘사람들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의 모든 것이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신화와 족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에서의 높아짐과 채워짐을 위한 종교성이다. 쉽게 말해서 율법의 문자와 교훈을 자기 행위로 의를 쌓아서 구원을 이루고자 함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믿음 안에서 진리가 된 아들들에게 기도하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그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들을 초청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자기 구원에 대한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쌓아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 있기에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초청하기 위해 기도할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기도하라는 뜻이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2절). 이 말씀을 보통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나라의 위정자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한다. 기도함으로 세상의 정치가들과 정부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인간의 나라나 세상을 인정하고 옹호하는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세상 나라를 존재하게 하신 이유는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왕국 복음이 주어진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도가 자신의 안위와 신앙생활의 평안을 위하여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초대교회 당시 교인들이 자신들을 핍박하는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교회가 고요하고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드셨는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핍박을 그대로 허용하셨고 교회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더욱 분명하도록 이끄셨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말은 1절에서 말씀한 것과는 달리 ‘왕들과 모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높은 지위”란 말의 ‘휘페로케’는 ‘높임, 탁월, 우수, 우월’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2:1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휘페로케)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번역하였다. 즉 철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교만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란 단순히 왕과 정치 지도자를 말한다기보다 세상의 나라를 다스리며 자기 아름다움을 자랑함으로 스스로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로 인해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는 사람들, 율법적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표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왕이 되고, 높은 지위에서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따라서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종교적 행위로 공로와 업적을 쌓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한다(참고 창 11:3-4).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신 그 십자가 앞에서 율법을 문자로 지키는 행위를 지속한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발산되는 자기 의를 위한 죄성을 생각한다면 간구와 기도, 도고, 감사는 늘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
“경건”이란 ‘유세베이아’는 ‘경건, 신앙심 깊음, 하나님을 두려워함(경외함), 거룩’이라는 뜻이고, “단정함”이란 말의 ‘셈노테스’는 ‘고귀, 존귀, 존엄, 거룩’이라는 뜻이다. 디도서에서도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딛 2:7-8a)라고 하였는데 “선한 일”, “부패하지 아니함”,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평안, 안식의) 말”은 죄인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예배와 관련된 용어이다. 베드로 사도는 성전 미문에 걷지 못하는 자를 고친 이적을 통해 이렇게 증언하였다.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유세베이아)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2, 16)
개인의 권능,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사도 개인적인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경건, 단정함”이란 우리가 예배의 태도를 취하고, Q.T(경건의 시간) 하는 외적인 형태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경외함과 존귀이며 거룩이다. 그래서 “경건의 비밀”이라고 한 것이다(3:16). 성경에서 말씀하는 비밀은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하나님 왕국의 비밀이고, 복음의 비밀로써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13:11, 고전 4:1, 14:2, 15:51, 엡 1:9, 3:3, 9, 6:19, 골 1:26). 따라서 “고요,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으로 자기 의로 높아지려는 죄성을 알기에 그 안에서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3절).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죄인의 것이 아닌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선”이어야 한다. “받으실 만한 것”이란 말의 ‘아포데크토스’는 ‘받아들일 수 있는, 동의할 수 있는, 인정할 수 있는’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받아들이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고 기뻐하신 아들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마 3:17).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4절). 흔히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지옥을 만드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든지 ‘만인 구원설’을 주장할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여기서도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의 ‘판타스 안드로푸스’(원형 : ‘파스 안드로포스’)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든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의 모든 것에서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 “진리를 아는 데에”라고 번역하였는데 ‘진리 안으로’라는 말이다. 구원이란 진리의 영에 의해 진리가 되는 것이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
그러므로 이 말씀은 권면이나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언약이다. 바울 사도는 이제 그 언약의 근거와 원인이 되는 복음에 대해 다시 또 구체적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5-6절)라고 선언한다.
“중보자”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완전한 사람이고 구원을 받을 자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번역한 ‘휘페르’는 ‘~을 위하여, ~을 대신하여, ~때문에’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모든 사람 ‘때문에’ 대속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기약이 이르러”라는 말의 ‘카이로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주셨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이루셨다는 “증거”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말씀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셨기에 기존에 사람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땅에서 사람으로 불리는 존재는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에베소교회 안에 중보자로 자처하며 높아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분 중보자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곧 하나의 진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만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7절). “위하여”라고 번역된 말은 ‘~안으로, ~로 향하여, ~을 위하여’라는 뜻이고 “세움을 입은”이라는 말은 ‘테디미’로 ‘놓다, 두다, 지정하다, 배치하다, 진열하다’라는 뜻이다.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라는 표현은 비진리가 아닌 ‘진리의 말씀’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나님 왕국에 비진리가 아닌 ‘진리의 말씀’으로 제대로 배치되고 진열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라고 선언하였다. 즉 거짓 교사들과 대비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사로 세워진 것은 믿음과 진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도”, 즉 보내심을 받은 자나 이방인이나 진리가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동일한 구원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2024101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