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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13일, 화요일, Paramaribo, 수리남, YWCA Guest House
(오늘의 경비 US $37: 가이아나: 음료수 100, 택시 200, 버스 1,500, 페리 2,000, 환율 US $1 = 200 가이아나 dollar; 수리남: 숙박료 40,500, 점심 6,500, 식료품 4,600, 버스 15,000, 30,000, 환율 US $1 = 2,700 수리남 guilder)
오늘은 가이아나를 떠나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으로 왔다. 새벽 3시 15분에 일어나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4시까지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4시에 호텔로 오기로 한 미니버스가 5시가 되어도 안 나타난다. 숙소 매니저를 깨워서 사정 얘기를 하니 왜 자기에게 부탁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낸다. 자기한테 부탁했더라면 자기가 모든 것을 잘 처리해 주었을 텐데 왜 부탁을 안 하고 혼자 처리를 했느냐는 것이다.
내가 가려는 Corriverton 버스는 수리남 국경으로 가는 버스하고는 다르단다. 국경은 Corriverton을 지나서 5km를 더 가야 있단다. 나는 Corriverton을 국경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오히려 Corriverton 미니버스를 안 탄 것이 잘되었다면서 택시를 부른다. 5분 안에 택시가 오고 매니저의 지시를 받은 택시기사는 5분 안에 국경까지 가는 미니버스 앞에 데려다 준다. 택시기사는 적정요금인 200 가이아나 dollar를 받는다. 새벽이라 2배 정도는 요구할 것을 기대했는데 양심적이 사람이었다.
가이아나 3국같이 여행정보가 부족한 나라에서는 교통편을 결정하기 전에 숙소 주인이나 매니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꼭 따를 필요는 없지만 참고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미니버스가 금방 떠난다. 운전기사는 50대의 아버지고 조수는 10대의 아들이다. 아들은 버스가 떠나기 전에 손님 짐을 실어주는 등 아버지를 도와주다가 버스가 Georgetown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내린다.
시내를 벗어나자 미니버스는 100km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도로 변에는 가축들이 많이 배회하고 있는데 우리 미니버스에 부닥칠까봐 아찔아찔해진다. 도로 변에는 사람들과 함께 소, 말, 당나귀, 염소, 개, 돼지, 닭 등이 배회하고 있었다. 이들이 갑자기 차도로 들어오면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동물과의 충돌을 피하다가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와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도 손님들도 걱정하는 기색은 전혀 안 보인다. 어떻게 그렇게 강심장들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옆에는 뚱뚱한 친구가 앉아서 나를 짓누른다. 다른 옆에는 운전기사다. 두 사람 다 인도인이다. 뚱뚱한 친구는 캐나다 Toronto가 집인데 혼자 이곳에 와서 상어 지느러미를 캐나다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단다. 3개월에 한 번 정도 Toronto 집에 가서 일주일 정도 가족과 함께 지내고는 가이아나로 돌아온단다. 소위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나이는 41세인데 34년 동안 캐나다에 살았다니 7세 때 이민을 간 것이다. 애들은 5살과 8살 둘인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한단다.
이 친구에게 가이아나의 인종 문제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1960대 영국에서 독립한 후로 인도인들은 상권을 장악하고 흑인들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정부까지 인도인들이 장악하고 있단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정부의 고위직만 차지하고 흑인들은 아직도 정부 일자리의 90%를 차지하고 있단다. 특히 군대와 경찰에 흑인들이 많다는데 걱정이 안 되느냐고 물으니 군대와 경찰도 고위직은 인도인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단다. 그래도 흑인들이 수적으로는 우세한데 문제를 일으킬 소지는 있을 것 같다. 결국 영국 식민지였던 가이아나는 영국인들은 모두 떠나고 인도인들이 지배계급, 흑인들이 피지배계급인 나라가 된 것이다.
얼마를 가니 경찰이 우리 미니버스를 세운다. 그리고 인도인 기사에게 운전면허인지 영업허가인지를 요구한다. 기사가 "You abuse your authority - 당신은 직권을 남용하고 있어." 하며 화를 내고 경찰과 언쟁을 시작한다. 기사 얘기는 마약이나 무기은닉을 의심하면 짐 조사를 할 것이지 왜 매일 보는 사람의 운전면허를 보자고 바쁜 사람의 차를 세우느냐고 따진다. 경찰도 물러나지 않고 짐 조사를 시작한다. 짐 조사를 하면서 시간을 끌어서 골탕을 먹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한참 만에 보낸다. 기사와 내 옆에 앉아있는 캐나다 친구는 한참동안 경찰 욕을 한다. 경찰들은 모두 흑인이었다. 차에 타고 있던 5, 6명의 흑인 승객들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듣기만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인도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갈등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캐나다에서 온 인도 친구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Georgetown 시내에는 왜 흑인만 보이고 인도인들은 안 보이느냐고 물으니 인도인들은 대부분 Georgetown 교외에 산단다. 그러고 보니 교외에는 인도인들이 사는 집들이 많이 보인다. 교외에도 흑인들이 사는데 집만 보면 인도인 집인지 흑인 집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인도인의 집은 깨끗하고 흑인들 집에 비교하면 호화스럽다. 그리고 인도인 집 주위에는 깃발을 단 대나무들이 보인다. 대나무에 달린 깃발은 색깔도 가지각색이고 낡은 깃발도 있고 새 깃발도 있다. 깃발 숫자도 다양하다. 캐나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힌두교 종교에 관한 것인데 자기도 정확히는 설명을 못 하겠단다. 그 가정에서 무엇인가 성취하기를 원할 때나 성취를 했을 때 감사의 표시로 깃발을 단다는 정도만 안단다.
집으로만 보아서는 인도인들의 생활수준은 한국의 보통 생활수준에 못지않을 것 같다. 못사는 흑인들은 Georgetown 시내에 몰려 살고 따라서 Georgetown 시내는 엉망일 수밖에 없다. 이 양극화 현상은 아마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가이아나의 장래는 항상 불안할 것 같다.
Rosignol과 New Amsterdam이란 소도시 사이를 흐르는 Berbice 강을 페리선으로 건너고 두어 시간 더 달려서 아침 9시 반경 국경도시 Corriverton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깐 쉬는 동안에 한 흑인 젊은이가 나에게 다가와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반가워서 어떻게 한국말을 배웠느냐고 물으니 수리남에 있는 새우 잡이 한국회사에서 오래 일했단다. 한국 새우 잡이 배외에도 중국, 일본, 월남 새우 잡이 배도 탔는데 한국배가 제일 좋단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한국 배에서 기술을 제일 많이 가르쳐 주었단다. 그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많이 가르쳐주었단다. 수리남의 수도인 Paramaribo에 가면 한국 음식점도 있고 한국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한국 음식점 위치를 대강 가르쳐 주었다. Paramaribo 지도를 보니 내가 묵으려는 숙소에서 별로 멀지 않다.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그런데 그 흑인 젊은이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하다.
Corriverton에서 한 15분 더 달려서 가이아나와 수리남 국경을 이루는 New River 페리선 선착장에 도착했다. 가이아나 출국수속을 간단히 마치고 내가 타고 온 미니버스 운전기사에게 쓰다가 남은 가이아나 돈을 수리남 돈으로 바꿨다. 13대 1로 바꿔주는데 1,000 가이아나 dollar가 수리남 돈 13,000 guilder란다. 제대로 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돈 계산을 해보려 했으나 너무 헛갈려서 그만 두었다. 미화 환율은 $1에 2,700 guilder란다. $10은 27,000 guilder인데 현지 사람들은 그냥 27 gilder라고 부른단다. 천 단위는 생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1,000원을 1원이라고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리선에서 내려서 수리남 입국수속을 하는데 한 시간도 더 걸렸다. 나는 배에서 제일 늦게 내려서 줄 제일 끝에 서서 기다렸다. 내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3, 4 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입국수속을 하는 직원은 딱 한 명이다. 사무실 안에는 직원들 여러 명이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왜 입국수속을 거들어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줄에 서있는 사람들 중에 백인은 하나도 없는데 들고 있는 여권을 훔쳐보니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이다. 듣던 대로 외국에 사는 가이아나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줄에 서지 않고 적당히 수속을 마치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1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진력나는 입국수속이 끝나고 다시 미니버스에 올라서 한 시간을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가이아나 쪽은 포장도로였는데 수리남 쪽은 꼭 옛날 한국 시골길 같은 상태가 엉망인 비포장도로다. 수리남 정부는 가이아나 쪽에서 사람들이 오는 것을 싫어서 일부러 도로를 포장 안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달린 후에 포장도로가 나오고 웬 이유에서인지 다른 미니버스를 바꿔 타고 3시간을 더 달려서 오후 7시경 수리남의 수도 Paramaribo에 도착했다. 아침 5시에 가이아나 Georgetown 숙소를 떠나서 14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묵으려는 숙소 앞에서 내려준다.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주었더라면 숙소를 찾느라고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을 텐데 고마웠다.
매우 지치고 땀범벅인데 숙소에 방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숙소는 거의 텅 비어있었다. 숙소 위치도 시내 중심가에 가까워서 편리하고 방도 마음에 든다. 2층 방인데 방 앞에는 시원하고 널찍한 베란다가 있어서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내려다보이는 거리 구경하기에 딱 좋다. 방에 선풍기가 없어서 좀 후텁지근하다. 내일 사무실에 가서 선풍기를 얻을 수 있나 알아봐야겠다. 숙소가 YWCA Guest House라 어느 정도의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곳 같았다.
수리남에 들어와서 Paramaribo로 오는 동안 차도 양쪽으로 논이 지평선까지 널려있었다. 한국에서 제일 넓다는 금만평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었다. 거기다가 일 년에 2, 3모작을 할 것이니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한국 같은 나라 여러 나라를 먹이고도 남을 것 같다. 한국 농민들이 이런 나라들과 쌀 생산 경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 나라 인구가 고작 40만인데 이렇게 땅이 많다니 참 부럽다. 그런데도 빈곤이 있다니 이해가 안 된다.
수리남의 인구 분포는 인도인 35%, 흑인 32%, 인도네시아인 15%, Maroon 15%란다. 이 나라도 가이아나 못지않게 인도인들이 많은 것이다. Maroon은 옛날에 정글로 도망가서 숨어 산 흑인 노예들의 후예들이란다. 중국 사람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Paramaribo에 들어오면서 보이는 수퍼마켓은 전부 중국 사람들의 소유인 것 같았고 중국 음식점도 많이 보였다. 너무 많이 보여서 흡사 차이나타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도인들은 매우 장사 속이 밝은 듯 기회만 보면 놓치질 않는 것 같다. Georgetown에서 타고 온 미니버스 기사는 나와 헤어질 때 자기 명함을 주면서 내 이메일 주소를 달라고 요구하고 자기가 전자제품 부속품 사업도 하는데 내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한국의 전자제품 부속품에 관한 정보를 얻어달라고 부탁한다. 어제는 Georgetown의 방파제를 걷고 있는데 인도인 한명이 나에게 다가와서 한국 중고차 시장에 관해서 질문을 하면서 한국에서 중고차를 사다가 이곳에 팔고 싶다고 도와달란다. 인도인들은 항상 조그만 기회라도 포착하면 물고 늘어진다. 아마 자기네 고국인 인도에서는 이 나라에 가져다 팔 물건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수리남에도 일본 사람들이 사는가? 오늘 수리남에 들어와서 점심 식사를 할 때 음식점 주인이 동양여자여서 "Are you Chinese?" 하고 물었더니 "No, Japanese."라고 한다. 예상치 않았던 얘기라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버스가 막 떠나고 있어서 더 이상 얘기를 못했다. 미니버스에서 내 옆에 앉았던 캐나다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 여자는 Japanese가 아니고 Javanese라고 했는데 내가 잘못 들었단다. 수리남은 네덜란드 식민지여서 같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단다. 그런데 이들을 "Indonesian"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Javanese"라고 더 많이 부른단다. Javanese란 Java 사람이라는 뜻이고 Java는 섬나라인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인구가 많은 섬이다. 아마 이곳에 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Java 섬에서 온 사람들인 모양이다.
수리남에 도착해서 처음 탄 버스에서 내 옆에 앉았던 흑인 친구가 처음에는 잠잠하더니 조금 가다가 얘기를 부친다. 15년 전쯤에 "DPRK" 사람들이 가이아나에 많이 있었단다. DPRK는 북한을 칭하는 약자다. 그리고 15년 전은 1980년대 말이다. 신기해서 더 물어보았더니 그때 가이아나가 사화주의 쪽으로 나갈 때인데 북한에서 의사와 엔지니어들이 많이 와서 가이아나를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칭찬을 한다. 아마 그때 북한은 소련, 쿠바 등과 더불어 1970-80년대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신흥 아프리카 나라들 원조를 많이 했던 모양이다. 가이아나 3국은 흑인들이 많아서 아프리카 나라들이나 다름없다.
가이아나 얘기 하나 더 하자. 어제 이곳 영자 신문을 사서 읽어보았다. 전면 헤드라인 기사는 Georgetown에서 50여 년 간 의사생활을 한 가이아나 의학계의 원로인 Dr. Chin의 장례식 얘기였다. Dr. Chin의 사진은 없었지만 이름으로 봐서 중국인인 것이 틀림없다. 제문도 동료의사인 Dr. Li가 낭독했다는데 그 역시 중국인인 것이 틀림없다. 가족사진은 나왔는데 Dr. Chin의 부인은 중국 여자가 아니고 7명의 자녀들은 체격도 얼굴 생김새도 중국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을 보면 다른 인종과 피가 섞인다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알 수 있겠다. 단 한 세대에 얼굴모습이 그렇게 많이 변하다니 놀랍다.
신문의 사설은 "Exodus"라는 제목인데 읽어보니 지난 1년 동안에 가이아나 간호사 약 300명이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가이아나 의료산업은 위기상태라는 것이다. 조그만 나라에서 300명의 간호사가 외국으로 떠났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간호사들이 떠나는 이유는 가이아나 장래가 너무나 암담하고 미국과 캐나다에는 간호사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가이아나 간호사들은 영어를 한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사설은 그 책임을 정치가들에게 돌리고 있다. 어느 나라나 정치인들이 문제인 것 같다. 정치인들도 여차하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가이아나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이 나라를 떠나는 모양이다. 누가 이 쓰레기 같은 나라에 살고 싶어 할까? 오늘 같이 미니버스를 같이 타고 온 인도인 친구도 가족은 캐나다에 살고 있고 이곳에서는 돈만 벌고 있는데 여차하면 캐나다로 가버릴 것이다.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 남게 되는 것이다. 가이아나는 참 한심한 나라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여행지도
네덜란드 사람들이 쌓았다는 Georgetown의 바다 방파제
차와 사람을 싣고 강을 건너는 페리선, 이 지역에는 넓은 강은 많은데 다리는 없고 배로 강을 건너야 한다
인도인들이 사는 고급 주택에 비해서 흑인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초라하다
가이아나와 수리남을 연결하는 해안 도로, 이 나라 최고의 간선 도로다
길거리를 걸어가는 흑인 모자
가이아나와 수리남 국경에 있는 페리 선착장
국경까지 타고 온 미니버스와 인도인 기사, 인도인들은 외국인을 만나면 항상 머리를 굴려서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 한다 Copyright (c) 2004‐ By 박일선. All Rights Reserved. 이 글과 사진은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글과 사진을 수정하지 않고 저작자를 박일선으로 (혹은 Elson Park) 표시하는 조건으로 아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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