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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纓先生年譜 下
탁영선생<휘일손>연보 하(2/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二年丁卯
1507년 정묘 (중종 2년, 선생 사후 9년)
夏五月甲辰有 旨還給家産
<1507년> 여름 5월 갑진(2일) : 가산환급(家産還給)의 교지 내리다.
是年春 上御朝講領事成希顔奏曰戊午史禍士林至今危懼父子兄弟相戒勿言其時推官皆死惟臣與子光在耳臣若不言 殿下何由知之盖金宗直爲儒生時作吊義帝文其意不知何所指而金馹孫輩敷衍之可誅然此事之發實有所由 成宗朝李克墩爲兵曹判書以成俊爲北道節度使俊怒辟克墩子世經爲評事其後金馹孫爲獻納李冑爲正言上箚論之克墩及俊怨二人欲中傷之後克墩監春秋修 成宗實錄見宗直之文欲發其事魚世謙曰此文不可盡信宜於洗史草時幷去之不可漏洩也韓致亨尹弼商柳子光等聞其語上達成獄推官等欲幷罪宗直門徒獨盧思愼以爲若爾則恐成漢時黨錮之禍此戊午事之大槩也
이 해 봄 어느 날 주상이 아침 강(講)에 임했을 때 영사(領事)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아뢰기를, “무오사화 이후 사림(士林)은 아직까지 위구심(危懼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자형제 간에 서로 조심하라고 말을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추관(推官)은 모두 죽고 오직 신(臣)과 유자광(柳子光,1439∼1512)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일 신이 말씀 올리지 않으면 전하께서 어찌 아시겠습니까. 그 대강을 말씀드리면,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아직 유생일 때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이 이를 펴냄으로써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발달의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즉, 성종조(成宗朝)에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병조판서를 하고 있을 때 성준(成俊,1436~ 1504)을 북도 절도사(節度使)에 임명하였는데, 성준이 노하여 극돈의 아들 세경(世經)을 평사(評事)로 징소해갔습니다. 그 뒤 김일손이 헌납(獻納)을 하고 이주(李冑)가 정언(正言)을 하고 있을 때 상소하여 논박한 일이 있었는데 극돈과 준은 이 두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중상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극돈이 춘추관 감사(監事) 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할 때 김종직의 글을 보고 그 사건을 발단시키려 했는데 어세겸(魚世謙,1430~1500)이 말하기를, ‘이 글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사초(史草)를 닦을 때 아울러 삭제함이 마땅하다. 사초 내용을 누설함은 불가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치형, 윤필상, 유자광 등은 그 말을 듣고 곧 주상에게 상달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켰습니다. 추관(推官)들은 종직의 문도들도 아울러 벌주려 했는데 유독 노사신(盧思愼,1427~1498)만이 반대하면서 한(漢)나라 때의 당고(黨錮)의 화와 같이 될까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오사건(戊午事件)의 대강이옵니다.”라고 하였다.
至是藝文館奉敎金欽祖鄭忠樑待敎李希曾金瑛檢閱李抹尹仁鏡鄭熊尹止衡{一云權橃}等上疏曰書契作而有史學有史學而後是非明是非明而後天下萬世之公論不泯故虞夏之史不諱瞽䏂伯鯀商周之史不諱桀紂幽厲衛完鶉奔之醜聖人著之於經唐宗塵聚之亂史氏特書於策未聞有一人以史事見誅禍及後嗣者也
한편 이때에 예문관 봉교 김흠조(金欽祖), 정충량(鄭忠樑), 대교 이희증(李希曾), 김영(金瑛), 검열 이말(李抹), 윤인경(尹仁鏡), 정웅(鄭熊), 윤지형(尹止衡;일설에는 權橃) 등이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주청하였다.
“글자를(書契)를 만듦으로써 사학(史學)이 있게 되고 사학이 있음으로써 후세에 시비(是非)가 밝혀지고 시비가 밝혀짐으로써 천하 만세에 공론(公論)이 없어지지 않사옵니다. 옛날 우하(虞夏;堯舜帝의 국호)의 사기(史記)에 고수(瞽䏂 : 舜임금의 父)와 백곤(伯鯀 : 禹임금의 父)의 부끄러운 사실들을 기록하는 데 꺼리지 않았으며 상(商), 주(周)나라의 사기에는 걸주(桀紂)와 유여(幽厲)(모두 폭군과 망국 군주의 전형)의 사실을 꺼리지 않고 기록했고 위(衛)나라의 공자완(公子頑)의 음탕한 추태를 다스린 사실을 성인들은 경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당나라에서는 여취(麗聚)의 난을 사씨(史氏)가 특별히 책에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기에 관한 일로 형벌을 받고 그 화가 후계자들에게까지 미쳤다는 전례는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恭惟我 朝列聖繼作尤重史學至於廢朝二三奸臣導君爲惡史事變亂古所未聞 殿下承大亂之後祛廢朝新法復 祖宗舊章死者封爵亡者表閭萬姓欣欣相慶而至於金宗直等事臣竊痛之昔者 成宗大王親覽吊義帝文尙不以嫌者意必有在也厥後大臣乃反挾私嫌不顧公議挑怒柳子光與二三大臣同議密啓終置大逆是則陰欲掩過而卒不得掩更使暴揚於後世累及於 先王其禍蔓延於甲子盡殱士流 宗社傾危國運中絶如此基禍之奸罪當不原而賞反及焉深恐史家筆法從此盡廢而萬世之公論泯滅無傳
삼가 생가하옵건대 아조의 역대 성상(聖上)께서는 사기(史記)를 계속하여 기록하시었고 사학(史學)을 매우 중히 여기시었는데, 폐조(연산조) 때 두세 사람의 간신이 임금으로 하여금 사학을 혐오하게 유도하여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대란의 뒤를 이으시어 폐조의 신법(新法)을 폐기하시고 조종(祖宗)의 구장(舊章;옛 법조문)을 회복하시어 죽은 사람들에게 관작을 봉하고 표창하시니 만백성이 매우 기뻐 서로 경하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종직 등의 일에서는 신 등은 남몰래 절통해하고 있습니다. 옛날 성종대왕께서 「조의제문」을 친히 읽어보시고 가상히 여기시며 혐오하지 않은 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대신들이 도리어 사사로운 혐오심을 품고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분노를 부추겼습니다. 유자광이 두세 대신과 같이 모의하여 밀계(密啓)함으로써 결국 대역으로 처치하였는데, 이는 곧 그들의 허물을 엄폐하려는 음흉한 욕심에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엄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널리 후세에 폭로하게 하였습니다. 그 누(累)는 선왕(成宗)에게까지 미쳤고 그 화는 갑자사화에까지 만연되어 선비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종사가 위태하게 기울고 국운이 중도에 끊어질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화의 근본인 간신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며 내려진 상은 도로 회수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심히 우려되는 것은 사가(史家)의 필법(筆法)이 이 일로 해서 모두 폐하여지고 만세의 공론이 민멸(泯滅)하여 전해지는 바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願殿下更立科條亟收賞賜家産各還其主變亂史法者隨輕重以正刑章以史事被誅者幷皆封贈以快公論則 殿下此擧卓冠千古矣於是政院臺諫相繼言史事至嚴不得漏洩而邪慝之人泄於中外遂成戊甲之禍宜明正其罪大臣朴元宗等亦言宗直等其時求正律不得論以反逆誠過重也
전하, 원하옵건대 과조(科條 : 법규, 명령 등의 조항)를 세우시어 상으로 하사하였던 가산을 속히 환수하여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시고 사법(史法)을 범하여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경중에 따라 형법을 바르게 집행하시며 사기(史記)일로 형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봉작을 높여주어 공론의 법칙이 쾌유하게 하여주소서. 전하, 이러한 조치는 천고(千古)에 뛰어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에 정원(政院)과 대간(臺諫)에서도 서로 연이어 아뢰기를, “사기에 관한 일은 지극히 엄중하고 누설할 수 없습니다. 간사한 사람들이 안팎으로 누설하여 마침내 무오(戊午)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는 마땅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대신 박원종 등도 또한 아뢰기를, “김종직 등에 대하여 당시 정당한 법률 조항을 찾을 수 없었는데도 반역으로 논의한 것은 참으로 과중한 처사였습니다.”라고 하였다.
上乃命辭連被罪者復其爵李克墩追奪官秩金宗直金馹孫權五福權景裕李穆許盤姜謙等幷還給家産推官尹弼商盧思愼韓致亨柳子光等賞賜田宅伴倘亦幷還收明年戊辰三司交章復劾子光罪惡削勳爵流湖南而死
이에 주상은 곧 명하기를, “글로 해서 죄를 입은 사람들의 관작을 회복하고 이극돈의 관작을 추탈(당시 이미 죽었음)하라. 김종직,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강겸 등에게는 가산을 다시 돌려주고 추관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유자광 등에게 상으로 내렸던 전답과 종복을 모두 환수하라.”하였다.
그 이듬해(戊辰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교대로 글을 올려 유자광의 죄악을 탄핵함으로써 그는 훈작이 삭탈되고 호남에 귀양가서 죽었다.
子光屢起大獄賊殺忠良反正時以子光歷事多謀遣人召之父子並錄勳人以爲元宗等墮子光術中至是三司劾其罪惡子光見元宗而恐動之曰吾與公俱是武人唇亡則齒寒元宗笑曰朝廷切齒久矣恨公不早退也子光破膽而去是日子光將入直摠府軒從已具整服束帶而坐索新扇把之見扇面細書奇禍立至四字大驚異黙然良久將出忽吏報臺啓請罪遂竄湖南兩目全盲數歲死子軫房皆竄北道朝廷許其歸葬而軫忘哀暱色不赴喪房亦對客飮酒托病不奔三司論之並不得其死
유자광은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많이 해쳐 죽였다. 중종반정 때에도 많은 일에 관여하고 모의에 참여하여 논공행상할 때 사람을 보내 밝혀 부자(父子)가 나란히 유공자로 책봉되었다. 생각건대 이는 박원종 등이 유자광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그의 죄악을 탄핵하였는데 자광은 원종을 찾아가 떨면서 말하기를, “나와 공은 다 같이 바른 무인(武人)인데 입술이 망하면 이빨이 시리게 마련(唇亡則齒) 아니오.”라고 하였다. 이에 원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를 간 지 오래요. 공이 좀 더 빨리 물러가지 않음이 한 될 뿐이오.”라고 했다. 자광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이날 자광은 총부(摠府) 청사에 입직(入直)하려고 나가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부채를 찾아 쥐고 보니 부채 면에 가는 글씨로 ‘기화입지(奇禍立至 : 기이한 화가 곧 다다른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잠시 후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관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대간에서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했다.
마침내 그는 호남에 귀양 가 두 눈이 완전히 멀어 몇 년 살다가 죽었다. 이때 그의 아들 유진(柳軫)과 유방(柳房) 모두 북도에 귀양 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돌아와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유진은 슬픔을 잊은 채 여색을 가까이 하고 거상(居喪)에 임하지 않았으며, 유방 역시 손님을 상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병을 칭탁하고 달려와 상을 치르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는 그들을 논죄하여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다.
○三年戊辰
1508년 무진 (중종 3년, 선생 사후 10년)
秋八月丙子返葬于水也山戌坐之原
<1508년> 가을 8월 병자(11일) : 수야산 술좌의 언덕에 반장(返葬)하다.
在先兆東岡○先生舊墓碣書曰濯纓先生金公之墓至是夫人墓所未得同遷因以其碣竪于夫人墓前
장지는 선영(先兆)의 동편 언덕이다. 선생의 구묘(舊墓) 비석에는 ‘濯纓先生金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지금 부인의 묘소를 같이 옮길 수 없으므로 인하여 그 비석을 부인 묘 앞에다 세워두었다.
○七年壬申
1512 임신 (중종 7년, 선생 사후 14년)
秋九月癸丑有 旨贈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兼藝文館應敎 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1512년> 가을 9월 계축[1] : 통훈대부 홍문관 직제학 겸 예문관 응교, 경연 시독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증직하는 교지 내리다.
[1]1512년은 5월에 윤달이 들어 있으며 이를 감안하더라도 癸丑은 10월 13일에 해당
先是 上御經筵知事申用漑奏曰近來史官之直筆無如金馹孫而戊午以後史筆不公請加褒贈以勸秉筆之臣 上敎曰史官直筆以垂千載君臣作爲勸戒自經史禍人皆以直爲戒其論操史筆者凡君之善惡臣之忠奸無不直書以矯隱諱之弊遂有是 命
이에 앞서 주상이 경연(經筵)에 임했을 때 지사(知事) 신용개가 주청하기를, “근래에 사관의 직필이 김일손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무오 이후 사필이 공변되지 못합니다. 청하옵건대 증직으로 포상하시어 사필을 잡은 신하들을 격려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하교하기를, “사관은 직필하여 천년 후세에까지 전함으로써 임금과 신하가 그 사실(史實)을 통하여 권장 또는 경계할 바를 스스로 헤아리도록 하라. 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은 모두 직필하여 그것을 경계하였다. 사필을 잡고 쓰는 사람에게 이르노니 무릇 임금의 선악과 신하의 충간을 직필하지 아니하고 허위, 은폐 또는 기피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고 마침내 이 증직 교지를 내렸다.
冬十月壬午有 旨求遺文
<1512년> 겨울 10월 임오(11월 12일에 해당) : 유문(遺文)을 구하는 교지를 내리다.
上與筵臣語及東人詩文曰予嘗聞華人以金馹孫之文比諸韓愈而未之見焉其文果何如參贊官趙元紀對曰不獨其文章可愛讀其辭想其人其學問節行不愧爲一代名流也 上卽命校書館求遺稿於其家而禍後散失殆盡所存者僅千百之一二也
주상이 경연의 신하들과 동인(東人;조선)의 시문(詩文)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중국 사람으로부터 김일손의 글이 당나라 한유(韓愈)의 글과 비견된다고 들었는데 내 아직 보지를 못했다. 과연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참찬관 조원기(趙元紀;趙光祖의 叔父)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비단 그 문장뿐만 아니고 글의 사상 또한 애독할 만하며 그 사람됨과 학문, 그리고 절행은 일대의 명류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즉시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그의 가정에서 유고(遺稿)를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사화 이후 거의 전부 산실(散失)되고 남은 것이라고는 겨우 천백(千百)에 하나 둘 정도였다.
○十三年戊寅
1518년 무인 (중종 13년, 선생 사후 20년)
春二月庚辰有 旨錄用子孫
<1518년> 봄 2월 경진(11일) : 자손을 등용하는 교지 내리다.
上御朝講語及黨錮副提學趙光祖對曰桓靈之時朝廷無公論故宦官乘時煽動然非特亂世而已宋仁宗賢主也司馬光輩猶不得免於黨目盖自古小人欲斥君子必以黨字羅織然後人主信聽得售其術也我朝 成宗好賢納諫一時善士謂以堯舜之治可復致也盡言不諱不避權勢凶險大臣陰懷憤懣及遇廢主卒逞積憾仁人善士無遺者至于戊午甲子而極矣又曰小人芟夷君子終亦不保其身亦云愚哉古人言欲加之罪何患無辭欲䧟君子亦豈無可執之辭乎
주상이 아침 강(講)에 임했을 때 당고(黨錮)에 관하여 말이 미치자 부제학 조광조(祖光祖)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조정에 공론이 없는 까닭으로 환관(宦官)들이 그 기회를 타서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난세(亂世)때뿐만 아니었습니다. 송나라 인종(仁宗)은 어진 임금이었는데도 사마광(司馬光) 등이 오히려 당인(黨人)이란 명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대개 예로부터 소인들이 군자를 배척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당(黨)’자로서 죄를 엮은 다음 다른 사람과 임금이 믿어 행하도록 하는 것이 술책이었습니다. 아조의 성종(成宗)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어 한때 착한 선비들이 요순의 치세가 가히 다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극진한 간언에도 꺼리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세도를 휘두르는 흉험(凶險)한 대신들은 분하고 답답한 심정을 은밀히 품고 있다가 연산주(燕山主)를 만나게 됨에 그동안 쌓였던 한을 모두 풀었습니다. 어진 사람과 착한 선비는 한 사람 남김없이 무오(戊午)와 갑자사화(甲子士禍)에서 다 없앴습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소인들이 군자들을 풀 베듯 베어 없앴습니다만 종내 그들 역시 일신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대접이 돌고 도는가 봅니다. 옛사람의 말에 ‘죄를 씌우려 들면 무슨 화근인들 꾸며댈 말이 없겠는가?’ 라고 했습니다.
昔李承健爲翰林嫉金宗直金馹孫之徒書于國史曰南方之人師弟子互相推譽自作一黨李克墩常曰將吾直筆來其後某之徒比肩就戮又曰記事直筆史臣之職也戊午之變亘古所無金馹孫首被慘禍而尙無顯贈以慰九泉之寃以副士林之望請加封贈 上曰已贈直提學仍問有子否光祖以繼子大壯對 命 宣陵參奉作窠調用
예전에 이승건(李承健,1452∼1502)이 한림을 하고 있을 때 김종직, 김일손 등을 시기하여 국사에 ‘남쪽 사람들이 스승과 제자들 서로가 칭찬하고 밀어주어 스스로 일당을 꾸몄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극돈이 항상 말하기를 ‘언젠가는 내손에 직필이 들어올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 후 아무개의 문도들은 나란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직필로서 기사(記事)함은 사신(史臣)의 직분이옵니다. 무오의 변은 옛날까지 더듬어 올라가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써 김일손은 이 변에서 으뜸으로 참화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저한 증작으로서 항천(黃泉)의 원혼을 위로한 바 없습니다. 사림의 소망에 부응하여 봉작을 더해주시기 청하나이다.”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이미 직제학(直提學)으로 증직하였다.” 하고 이어서 “자식이 있는가?” 물음에 광조(光祖)가 자식이 없어 조카 대장(大壯)으로 계자(繼子)하였다고 아뢰니 주상은 선능(宣陵) 참봉 자리를 비우고 거기에 그를 등용하라 명하였다.
夏四月庚戌淸道章甫建紫溪祠
<1518년> 여름 4월 경술(5월12일에 해당) : 청도의 유생들이 자계사(紫溪祠)를 세우다.
本郡士林慕先生之遺風以先生故宅雲溪精舍爲祠宇名之曰紫溪盖取先生被禍時溪水血流之異也
본군(本郡)의 사림이 선생의 유풍을 흠모하여 선생의 옛집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사우(祠宇)로 쓰기로 하고 이름을 ‘자계사(紫溪祠)’라 하였다.
이 이름은 선생이 화를 입을 때 앞 시냇물이 혈류(血流)로 바뀐 이변이 있었는데 거기서 취한 것이다.
○十四年己卯
1519년 기묘 (중종 14년, 선생 사후 21년)
春二月乙巳刊行文集成
<1519년> 봄 2월 을사(3월12일에 해당) : 문집(文集)을 간행하게 되다.
大有搜輯先生遺稿得若干卷付諸本祠經始鋟刊觀察使金慕齋安國捐廪以相其役爲文以序之
대유(大有)가 선생의 유고를 찾아 모았는데 몇 권을 얻어 본사(本祠)에 주어 침간(鋟刊 : 목판에 새겨 발간하는 일)을 시작했다.
관찰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넉넉하게 출연(出捐)하여 이 일을 도왔고 또 서문을 지었다.
○世宗皇帝嘉靖二十七年{我 明宗大王三年) 戊申
1548년 무신 (명종 3년, 선생 사후 50년)
春正月辛丑年譜草本成
<1548년>봄 1월 신축(24일) : 연보 초본을 완성하다.
大有就先生手筆日記參以見聞編爲年譜○右卽我先季父濯纓先生年譜也先生以間世之才遊佔翁之門力探性理之淵源優入文章之閫域與寒喧一蠹朱溪爲道義交再思忘軒爲文章交東峰秋江安亭篠叢爲山林交茂豊秀泉爲音律交觀於先生之所從遊可以知先生之大略矣先生天分豪邁倜儻性度剛正簡亢禀公輔之器抱經濟之策
대유는 선생의 수필일기에 따르고 견문한 바를 참고하여 선생연보를 편찬하였다. 지금까지 위에 적은 것이 바로 나의 돌아가신 계부 탁영 선생의 연보이다.
선생은 세상에 드문 재주를 타고나시어 점옹문(佔翁門)에서 교유하면서 성리학의 연원을 힘써 탐구하시었으며 문장 영역에서는 뛰어나셨다. 한훤(寒暄,김굉필1454∼1504), 일두(一蠹,정여창1450∼1504, 주계(朱溪,이심원1454∼1504)와는 도의(道義)의 교유를 하였으며 재사(再思,이원?∼1504, 망헌(忘軒,이주1468∼1504)과는 문장(文章)의 교유, 동봉(東峰,김시습1435∼1493, 추강(秋江,남효온(1454~1492), 안정(安亭,?), 조총(蓧叢,?)과는 산림(山林)의 교유, 무풍(茂豊,이총?~1504), 수천(秀泉,이정은?)과는 음률(音律)의 교유를 하시었는데, 이러한 교유하신 바를 보면 가희 선생의 대략을 알 수 있다.
선생은 호탕하고 영매(英邁)하며 뜻이 크고 기개가 있는 성격과 도량을 타고나셨고 강직하고 정직하며 대범하고 고고한 천품을 타고나시어 재상의 그릇(公輔之器)이었고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經世濟民)할 지혜를 품고 계신 분이었다.
早歲立揚際遇 成廟期回世道致君堯舜正色立朝盡言不諱奸黨已多有側目而㫄伺者不幸邦運中否弓劒忽攀二三奸凶變亂史筆其禍至於滔天仁人志士之痛愈久而益深鳴呼惜哉鳴呼慟哉迨我 中廟改玉之初首洗誣寃亟復官爵旣貤贈之又廟亭之於是而先生之道學文章氣節行義炳人耳目如日星江漢矣
이른 연세에 입신양명할 즈음 성종(成宗)을 만나 세상의 도의를 회복하고 요순의 반열에 오르게 하려고 기약하셨다. 입조하여 정색을 하고 극언을 다하심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데 한편으로 간사한 무리들은 눈을 흘기고 기회를 엿보며 벼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불행히도 나라의 운수가 중도에 막혀 기강이 풀어지니 홀연히 기회를 타고 두세 간흉이 사초 일로 변란을 일으켰고 그 화는 하늘에 사무치어 어진 이와 뜻있는 선비들의 통분을 더욱 오래, 더욱 깊게 하였다. 아, 애석하도다! 아, 애통하도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초기에 맨 먼저 모함으로 입은 원통함이 씻어지고 곧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중직이 더하여졌다. 또 이때 묘(廟)에 향사(享祀)하게 되었다. 선생의 도학과 문장, 기절과 행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에 해와 별과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다.
不肖亦以先生之故坐謫湖南才賜環又屢經士禍杜門屛居者四十年餘今已老且死惟先生之實蹟泯沒不傳是懼謹取先生手筆日記之掇拾於禍燼之餘者若干片修述之參以見聞所及編年成譜付諸卯君藏之巾衍以俟後之立言君子云爾旹
불초 또한 선생의 일로 연좌되어 호남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겨우 풀려났고 또 누차의 사화(士禍)로 두문불출, 숨어 산 지 40여 년, 이제 이미 늙었고 곧 죽을 것인즉 선생의 실적(實蹟)이 없어져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오직 이것이 걱정일 뿐이다. 그래서 사화 때 불타고 남은 선생의 수필일기를 수습하여 이를 취하고 힘 미치는 데까지 견문한 바를 참고로 약간의 부분은 다듬어 기술하여 편년체로 연보를 완성하였다.
이제 이를 동생에게 주어 상자에 간직하였다가 훗날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릴 뿐이다.
嘉靖二十七年戊申之 竹醉日從子大有謹識于雲門之愚淵精舍
1548년 무신(명종 3년) 죽취일(竹醉日;음력 5월 13일) 종자(從子) 대유가가 운문의 우연정사(愚淵精舍)에서 삼가 기록하노라.
神宗皇帝萬曆六년{我 宣祖大王十一年} 戊寅
○ 1578년 무인 (선조 11년)
秋以紫溪祠爲書院
<1578년> 가을 : 자계사(紫溪祠)를 서원(書院)으로 하다.
本郡儒林因祠宇之重修廣其規模爲書院
본군 유림에서 사우(祠宇) 중수를 계기로 그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으로 세웠다.
○三十六年戊申
1608년 무신 (선조 41년)
春重建紫溪書院
<1608년> 춘 : 자계서원(紫溪書院) 중건(重建)하다.
壬辰倭奴之變祠宇燬于兵燹至是士林合謀重建並享節孝公三足堂兩先生
임진왜란 때 병화로 훼손된 후 지금에 이르러 사림(士林)에서 의논을 모아 중건하게 되었다. 1615년 을묘(광해군 7년)에 절효공과 삼족당 두 선생도 함께 향사하게 되었다. <상향축문(常享祝文)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찬하였다.>⇒추록
○毅宗皇帝崇禎甲申後十七年{我 顯宗大王元年} 庚子
1660년 경자 (현종 1년)
春二月慶尙道儒生李光鼎等上疏請書院 賜額
<1660년> 봄 2월 : 경상도 유생 이광정(李光鼎) 등이 서원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를 올리다.
同春堂宋文正公浚吉時爲吏曹判書因儒疏 筵奏先生道學文章精忠直節冠冕一世而遭遇燕山慘被史禍合施院額以豊士林 上曰已令該曹禀處當待回啓施行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당시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유생들의 상소에 인하여 경연에서 주청하기를, “선생의 도학과 문장, 정충과 직절이 일세의 으뜸이었는데 연산(燕山)을 만나 참혹한 사화를 입었습니다. 원액(院額)을 내리시어 사림을 교화함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라고 했다. 주상이 대답하기를, “이미 해당 조(曹)에 명하여 조처를 품신하라 하였으니 회계(回啓)를 기다려 시행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夏六月禮曺回 啓請 賜額蒙 允
<1660년> 여름 6월 : 예조에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회계(回啓)를 올려 주상의 윤허를 바다.
判書宋浚吉參判尹絳參議趙復陽正郞金壽興等回 啓 上批曰三賢之實行名節予所尊仰特爲賜額大提學李一相次知
판서 송준길(宋浚吉), 참판 윤강(尹絳,1597-1667), 참의 조복양(趙復陽,1609~1671), 정랑 김수흥(金壽興,1626∼1690) 등이 회계(回啓)를 올렸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삼현(三賢)의 실행(實行)과 명절(名節)에 대하여 나는 존경하고 추앙하는바 특별히 사액(賜額)을 베푸노라.”라고 하였다.
○十八年辛丑
1661년 신축 (현종 2년)
夏四月特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仍 宣額紫溪書院 遣承旨賜祭
<1661년> 여름 4월 : 특별히 명하여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에 증직하고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승지(承旨)를 보내 사제(賜祭)하다.
大提學以紫溪擬額號以進 上命知製 敎工曹參議李殷相製進侑文 遣左承旨洪處亮往祭之
대제학이 액호(額號)를 자계(紫溪)로 상신하니 왕은 지제교 공조참의 이은상(李殷相)으로 하여금 유문(侑文)을 짓게 하고 승지 홍처량(洪處亮)을 보내어 향사하게 하다.
○二十一年甲辰
1664년 갑진(현종 5년)
春三月配享木川竹林祠
<1664년> 봄 3월 : 목천 죽림사(竹林祠)에 배향(配享)하다.
祠在縣東一遠東之磻谷初寒岡鄭文穆公逑得石刻竹林二字於磻谷感朱夫子精舍之名因其地建祠享朱夫子至是學者以先生刊行小學集說校正綱目大有功於斯文亦杖屢遊息之地也遂奉以綴享
사당은 현동(縣東) 일원(一遠) 동쪽의 번곡(磻谷)에 있다. 처음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선생이 번곡에서 ‘죽림(竹林)’ 두 자가 새겨진 석각(石刻)을 발견하였는데, 주자의 정사 이름과 같음을 알고 거기에 사당을 세워 주(朱)선생을 향사(享祀)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학자들이 선생께서 『소학집설(小學集說)』 간행과 강목교정(綱目校正) 등 사문(斯文;儒敎文化)에 끼친 공이 크고 또한 그곳이 관직을 사직하였을 때 휴식하던 곳임을 알고 마침내 같이 받들어 향사(享祀)하게 된 것이다.
○謹按土人士相傳以爲祠卽先生所居竹林精舍之遺址而石刻二字亦先生之筆云竊意寒岡之建祠但知其偶合於滄洲精舍之舊名而不知爲先生依仰朱子之遺蹟及其配享也亦但以有功斯文而不能闡揚先生宗師朱子之本意豈非文獻無徵先生事實泯沒不傳而致然歟然其建祠也必於是配享也必於是若有使之然者尤可見先生之道未嘗不顯於冥冥之中矣
삼가 살피건대 토착 인사들이 전하는 바로는 사당을 세운 곳은 선생이 거처하던 죽림정사(竹林精舍)의 옛터이고 석각의 두 글자 역시 선생이 쓴 것이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강(寒岡)이 사당을 세운 것은 다만 창주정사(滄洲精舍)의 옛 이름과 우연히 합치한 것만 알고 선생이 주자(朱子)를 의탁하고 추앙하여 생긴 유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또한 배향하게 되었을 때도 다만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것만 알았지 선생이 주자(朱子)를 으뜸 스승으로 추앙한 본의는 널리 밝혀져 전해지지 못했다. 문헌을 없애고 징표가 없는 마당에 선생의 사실(事實)이 어찌 민몰(泯沒)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겠는가?
그러나 사당의 건립이 이제 이루어졌고 배향 또한 이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필연을 있게 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선생의 도가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타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二十五年戊申
1668년 무신 (현종 9년)
夏五月重刊本集成
<1668년> 여름 5월 : 문집(文集)을 중간(重刊)하다.
先生文集刊本久多刓缺搢紳章甫合謀重刊尤菴宋文正公時烈撰序文
선생의 문집 간행본이 오래되고 많이 닳아서 관원과 유생들이 함께 의론을 모아 중간하였는데 그 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 썼다.
○三十三年{我 肅宗大王二年}丙辰
1676년 병진 (숙종 2년)
春忠淸道儒生疏請竹林祠 賜額蒙 允
<1676년> 봄 : 충청도 유생들이 죽림사(竹林祠)에 사액(賜額)토록 상소하여 윤허 받다.
本縣章甫以鄕賢鄭寒岡逑黃朽淺宗海追配仍陳疏請額
본 현 유생들이 향현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공과 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1579~1642)공을 추가로 배향하고 곧 청액의 소를 올렸다.
秋 宣額道東書院 遣承旨賜祭
<1676년> 가을 : ‘도동서원(道東書院)’ 이란 현판이 하사되고 승지가 파견되어 향사(享祀)하다.
○八十二年{我 英宗大王元年}乙巳
1725년 을사 (영조 1년)
秋九月神道碑銘成
<1725년> 가을 9월 : 신도비명 완성하다.
屛溪尹先生鳳九宰本郡與士林謀刻石樹之墓道禮曹參判尹圃菴鳳朝撰弘文館副提學金退漁堂鎭商書本道觀察使兪知守齋拓基篆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8)선생이 본 군 군수로 있으면서 사림과 의논하여 비석을 새겨 묘도(墓道)에 세우기로 했다. 비명은 예조참판 포암(圃菴) 윤봉조(尹鳳朝,1680∼1761)가 찬하고 홍문관 부제학 퇴어당(退漁堂) 김진상(金鎭商,1684∼1755)이 쓰고 본도 관찰사 지수재(知守齋) 유척기(兪拓基,1691∼1767)가 전(篆)하였다.
一百八十七年{我 純祖大王三十年}庚寅
○ 1830년 경인 (순조 30년)
春二月慶尙道儒生金相閏等疏請先生及節孝公三足堂兩先生 贈諡未徹
<1830년> 봄 2월 : 경상도 유생 김상윤(金相閏) 등이 선생과 절효공, 삼족당 양 선생의 시호(諡號)를 소청하였으나 관철하지 못하다.
秋八月三道儒生李浚等疏請三先生 贈諡 命下吏曹禀處
<1830년> 가을 8월 : 삼도(三道)의 유생 이준(李浚) 등이 세분 선생의 증시(贈諡)를 소청하였는데 주상은 이조(吏曹)에 조처를 품신하라 명하였다.
九月吏曹回 啓請議大臣 判書徐能輔回 啓依 允
<1830년> 9월 : 이조에서 회계(回啓) 올리기를 대신회의에서 의결하도록 주청하였다. 판서 서능보(徐能輔,1769∼1835)가 윤허를 받다.
冬十一月大臣獻議請先 贈先生爵諡蒙 允
<1830년> 겨울 11월 : 대신들이 의논한 결과 선생의 증작과 증시를 먼저 하도록 건의, 윤허를 받다.
領議政南公轍左議政李相璜右議政鄭晩錫請加 贈賜諡又 啓以濯纓先宜許施之意上允之
영의정 남공철(南公轍,1760~1840), 좌의정 이상황(李相璜,1763∼1841), 우의정 정만석(鄭晩錫,1758∼1834)이 증작을 더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또 탁영선생을 먼저 시행함이 마땅하다는 의견도 같이 계진하여 윤허를 받았다.
十二月加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世孫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
<1830년>12월 :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춘추관 및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세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으로 증직되다.
○一百八十八年甲午
1834년 갑오 (순조 34년)
夏六月 賜諡文愍
<1834년> 여름 6월 : ‘문민(文愍)’으로 시호(諡號)를 내리다.
博聞多見曰文使民悲傷曰愍原任奎章閣直提學趙雲石寅永撰諡狀太常議諡以文愍文簡文貞擬報吏曹入 啓蒙 點
‘견문이 깊고 넓으심에 일컬어 文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슬프고 상심하게 하였으니 일컬어 愍이다).’ 이 시호는 규장각 전 직제학을 한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지었다. 태상(太常;제사와 諡號 일을 맡은 관청)에서는 문민(文愍), 문간(文簡), 문정(文貞) 3개안을 의논하여 이조에 보고하였고, 이조에서 결국 임금으로부터 문민(文愍)으로 낙점을 받았다.
○一百八十九年{我 憲宗大王元年} 乙未
1835년 을미(헌종 1년)
夏五月延諡 上遣禮官賜祭
正郞張龍八行
<1835년> 여름 5월 : 선생 시호(諡號)를 배수하다. 주상은 예관으로 정랑(正郞) 장용팔(張龍八)을 파견 하여 시호를 내리고 제를 지내게 하였다.
○一百九十五年 戊戌
1838 무술(헌종 4년)
春正月重刊文集成
<1838년> 봄 1월 : 문집 중간을 완성하다.
戊辰後孫垽以先生文集舊本有遺漏文字使族孫再玉往性潭宋先生煥箕添入遺文校正編次丁亥趙雲石按嶺南聞而跋之始刊行
무진년(1808년)에 후손인 은(垽)이 선생 문집 구본에 누락된 글이 있어 족손(族孫) 재옥(再玉)으로 하여금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선생에게 보내 빠진 글을 보태어 넣고 편집(編輯) 차례도 교정하게 하였다. 또 정해년(1827년)에 영남관찰사인 운석 조인영(趙寅永, 1782~1850)에게 발문을 청하여 받아 간행을 시작하였다.
○二百二十九年{我 當宁九年} 壬申
1872년 임신(고종 9년)
冬十月改修墓貞夫人金氏返祔
<1872년> 겨울 10월 : 정부인 김씨(金氏) 묘를 반장(返葬)하여 개수하다.
貞夫人墓在於木川鵲城山至是返祔于先生墓右從地形也
정부인 묘는 목천 작성산(鵲城山)에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수야산 선생 묘 오른편에 이장하였는데 지형에 따른 것이었다.
<翌年竪碣 : 그 이듬해에 비석을 세웠다.>⇒追錄
二百三十一年甲戌
○1874년 갑술 (고종 11년)
夏六月新刊年譜成
先生年譜之藏于家已三百餘年始用活字印行于世
<1874년> 여름 6월에 새로 간행하는 연보가 완성되었다. 선생의 연보는 집안에서 보관해 온지 300여년이 지났건만 비로소 활자를 사용하여 간행하니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참고 : ⇒변경 추록된 내용
夏四月先生年譜始現于三百年後自京中先刊
여름 4월, 선생의 연보가 처음 나타난 지 300년 후에 서울에서 먼저 간행하였다.
秋七月十七日請先生前 配安人禹氏追 贈貞夫人
가을 7월 17일 선생의 전부인인 안인우씨를 정부인(貞夫人)에 증직하기를 청하였다.
冬十一月本郡士林會于紫溪排任重刊
겨울 11월 본 군의 사림들이 자계사에 모여 교정하고 다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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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跋>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 연보발문)(1)
鳴呼濯纓先生精忠大節有足以撑宇宙光日月而士林之哽涕齋恨至屢百年靡已余先祖恭肅公於先生同師而罹史案故尤悲之切而慕之篤焉
아! 탁영선생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충성과(精忠) 위대한 절개는 우주와 하늘의 빛을 지탱하기에 충분함이 있다. 사림이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리는 한을 경험한 지가 수백년이 지났다. 일찍이 나의 선조이신 공숙공(趙益貞, 1436∼1498)이 선생과 같은 스승을 모셔서 곤란함을 겪으신 일을 생각하니 더욱이 비참하고 애절하며 그리움이 더해진다.
嗟呼先生事行非不尡輝史秉而遺文實蹟百不存一於禍燼之餘幸有三足公所著年譜始出于今先生之出處本末可按而如雲仍合謀將入梓屬余文
아! 선생의 행적이 역사에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남겨진 글이나 사적이 사화의 여파로 백가지 중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다행히 삼족당공이 저술한 연보가 비로소 지금 나타나 선생의 일에 대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후손들이 의논하여 장차 인쇄하기로 하고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噫先生以天挺英豪經世才猷學有淵源蓄積甚富蜚英 明時庶幾展布萬一而 邦運中否禍至滔天命耶時耶丹書旣雪 貤贈賜諡又廟享之 朝家崇報可以無憾
아! 선생은 하늘로부터 받은 빼어난 귀인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로서 학문을 꾀하고 근본이 있고 축적된 풍부한 재주로 세상이 밝을 때는 나라안에 펼치고 떨쳤다. 화가 하늘에 까지 흘러넘쳤을 때의 붉은 글은 이미 치욕을 벗었으며 이에 더하여 시호를 내리고 또 사당에 배향하고 조정에서는 은덕을 갚았으니 서운함은 없어졌다 할 것이다.
而 頒額之文袞褒煌煌前後儒賢所發揮炳若日星余何敢贅言而特因尊仰之誠竊以托名爲幸云爾
그리고 반포된 현판의 글에는 임금의 칭찬이 빛나고 있고 전후의 선비들의 훌륭한 글들이 해와 별과 같이 많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군더더기 같은 말을 덧붙이겠는가마는 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살며시 나타내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上之十一年甲戌重陽後學豊壤趙成夏謹跋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중양(2월) 후학 풍양 조성하[1]근발
[1]趙成夏; 1845(헌종 11)∼1881(고종 18). 조선 말기의 문신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 연보발문)(2)
濯纓先生與余先祖再思堂公爲道義交同遊畢齋之門同被戊午之禍世之論史禍之慘者莫不痛寃而悲憤况以兩家之裔講百世之好者耶
탁영선생은 나의 선조 재사당공(李黿, ?∼1504)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고 점필재(김종직)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셨으며 무오의 화 또한 같이 입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화의 참상은 원통하고 슬프고 분하기가 더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영원히 우호관계를 강구해야 할 양가의 후예로서야 그 슬픔이 어떠하겠는가?
噫先生道學之純粹文章之宏博言議之正大見識之高明槩見於名碩撰述之文南秋江曰希世之才廟堂之器曹南溟曰生有凌霜之節死有通天之寃華人稱之以東國昌黎斯已盡之更何贅焉
아! 선생의 도학은 순수하고 문장은 웅장하고 넓으며(宏博) 언론은 정대하고 식견이 고명하셨음은 유명한 분들의 저술에서 대강 볼 수 있다. 추강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쓰기를 “세상에 드문 재사(才士)요 재상의 그릇(廟堂之器)”이라 했으며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살았을 때에는 서릿발보다 매서운 절개가 있었고 사후에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있었다.” 라고 했다. 또한 중국 사람들은 동국의 창려(韓藰, 768~824, 당나라의 문인)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인데 다시 군말을 붙여 무엇 하겠는가.
先生遺集之行于世者止若干編間經兵燹存者無幾殆同鄧林之一枝崑山之片玉若其請復昭陵三疏可以建天地不悖與日月爭光而見漏遺集年譜又從而佚焉
선생은 유집을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 몇 편에 그치었는데, 그 간 병화를 겪고 남은 것이라고는 등림(중국 襄陽縣의 큰 숲)의 나무한가지(一枝)요 곤산(곤륜산, 중국 북쪽의 산)의 한 조각 옥이라고나 할까? 거의 없었다. 소릉(昭陵, 문종의 정비, 단종의 생모)의 복위를 청하는 세 번의 상소는 가히 천지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 일월과 다투어 빛날 일인데 만약 유집과 같이 연보에도 누락되었다면 아주 묻히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近因其後孫晋炯家藏之年譜出而三疏具焉乃先生猶子三足堂所手輯而編錄者此寔先生行治本末之一部悖簡也
최근에 그의 후손인 진형(晋炯)의 집에서 보관해 오던 연보가 나옴으로써 세 번의 상소를 찾게 되었는데, 이는 곧 선생 조카 삼족당공이 손수 편집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는 실로 선생의 정치행적 본말의 일부로서 (그 내용이) 도타우면서도 간명하다.
第其世級寢遠雲仍零替而斯譜之保有今日若有先蔭之攸庇先生之直聲義烈其將不泯於千百代之下吁其盛矣
다만 세대가 점차 멀어지고 후손들이 가난해져서 이 연보를 오늘날까지 보유만 하고 있었다. 만약 선조들의 음덕이 있다면 선생의 곧은 소리(直聲)와 의롭고 장렬함(義烈)은 후세에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참으로 훌륭하시도다.
謹按年譜 中廟改玉洗寃復爵問金某有嗣否趙靜庵對以金某無嗣以從子大壯奉祀特 命調用由寢郎典邑宰 先朝褒寵固已赫然
연보를 삼가 살펴보니 중종반정 후 억울한 죄를 씻어 주시고 작위를 복권하여 주시며 주상이 묻기를 “김모(김일손)는 사자(嗣子)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하니 조정암(趙靜菴;조광조)이 대답하기를 “김모는 후사가 없어서 조카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봉사케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다. 임금은 곧 특명을 내려 침낭(寢郎:능원관리 관원)으로 등용케 하였고 인하여 고을 수장(守長)까지 하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옛 임금(先朝)의 포상과 은총은 매우 혁혁하였다.
純祖朝庚寅請諡疏復以定嗣告職由於年譜之未現而攷實之未著也
순조 경인년(1830년)에 시호를 내려달라는 상소를 다시 올릴 때 후사를 정하고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아울러 주청했는데, 이는 당시 연보가 출현하지 않았고 또 사실을 깊이 상고하여 밝히지 않은 이유이었다.
今玆家乘有足徵信參互原集亦有所補漏而訂謬者卽未可以一家之私藏少之也余竊爲先生幸重以爲斯文幸矣本孫昌潤甫亟謀登榟要余識其後余不敢以不文辭而托斯譜亦與有幸焉云爾
이제 여기 가승(가문의 역사)이 있어서 사실의 징표로써 족하고 여러 자료를 비교하여 살핌으로써 원집(文集)도 또한 누락된 것을 보완하고 틀린 곳을 정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한 집안의 사사로운 소장(所藏)의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내 곰곰이 생각하니 이는 선생을 위해 다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문(斯文:유교계)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본손 창윤(昌潤)씨가 급히 인쇄를 의논하고 나에게 발문을 요청하여 왔는데, 서투른 글임에도 감히 사양하지 아니한 것은 이 연보에 의탁하고 참여하는 것이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月城後學李龍雨謹跋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월성 후학 이용우 근발
濯纓先生年譜跋(탁영선생연보발) (3)
戊午之禍尙忍言哉濯纓金先生以畢翁高弟道學文章冠冕一世職掌史事惟直筆是信賊子懼而吾道賴而扶焉
무오의 화는 차마 말 못할 일이다. 탁영 김선생은 점필재의 제자(高弟)로서 도학과 문장이 일세의 으뜸이셨고 국사를 관장하는 직무에 있어서는 오직 직필로써 올바르게 밝히시어 불충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였으니 우리 도(道:유교)가 힘을 입고 어려움을 견디며 유지(扶持)되었다.
邦運不幸大禍撗流先生首被東市之慘當時名賢碩德誅竄相繼學舍肅然士氣沮敗至今談者膽掉而髮竪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큰 화가 가득히 흘러넘쳐 선생이 첫 번째로 동시(東市)의 참화를 입으시고, 당시의 이름나고 덕있는 선비(名賢碩德)들이 연이어 처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으며, 학사(學舍)는 쓸쓸하여졌고 선비들의 사기는 허물어 졌었다. 지금에 와서도 이 말을 하는 사람은 화가 치밀어 간담이 떨기고 머리끝이 선다.
鳴呼先生挺天鍾之氣早聞爲學之大方與寒喧一蠹諸老先生義同道合得千載不傳之緖動合規矩發言成章立朝讜直不避權貴反爲克墩輩之所擠陷參天橡樟一斫斯倒天不欲平治天下而然歟先生之早被登庸非幸也抑不幸耳
아! 선생은 하늘이 내린 정기를 타고나시어 일찍이 대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으시고 한훤(寒喧;김굉필, 1454~1504), 일두(一蠹;정여창, 1450∼1504) 등 선배[1] 선생과 더불어 의기를 같이하고 도를 함께 하시어 천년동안 한번도 없던 좋은 인연(계통)을 얻으시었다. 그의 거동은 법도에 합치하고 발언은 문장을 이루며 조정에 들어가서는(立朝) 이치에 맞게 직언하시어 권세있고 지위높은 사람들의 반대를 피하지 않으시었다. 그리하여 이극돈(李克墩;1435∼1503) 무리들의 모함에 빠져 하늘에 닿을 거목이 한번 찍어 넘어지는바 되고 말았으니, 이 천하가 태평하게 다스려지는 것을 하늘이 원하지 않으심인가! 선생의 조기 등용(登庸)이 다행이 아니라 정말 불행일 뿐이었다.
[1]김일손의 생몰은 1464~1498
先生猶子三足堂公手錄先生年譜一糾(弓+冫)藏之也衍先生之師友淵源立朝奏疏居家孝友等嘉言善行無不畢載與本集尤詳備矣
선생의 조카 삼족당공(김대유)이 선생의 연보 한권을 지어 보관하여 선생의 사우(師友)관계의 근원과 조정에 들어가서(立朝) 주청하고 상소를 올린일, 가정 안에서의 효도와 우애 등 아름다음 말과 선한 행동이 두루 실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문집과 더불어 더욱 소상하게 갖추어졌다.
其中 中廟朝靜菴先生之建白 除其嗣子爲 宣陵郎以酬其危忠直節者大爲後世衛道者勸而新經大禍惟文字是懼子孫流落江湖矣恢公起廢史無如趙先生者訖今三百年餘無一人顯其世者世道之上下亦可慨也
그 가운데 중종 때에 정암(靜菴;조광조, 1482∼1519)선생이 건의하여 사자(嗣子;김대장)에게 선능랑(宣陵郎;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을 지키는 관직)으로 임명한 것은 높은 충성심과 곧은 절의에 대한 보답으로써 이는 도를 지키려는 후세의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되고, 큰 화를 겪으면서 문자를 두렵게 생각하고 자손들이 여러 곳에(江湖) 흩어져 몰락한 상황을 일신하려는 조치였다. 공의(公議)를 회복하고 더렵혀진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있어서 조선생과 같은 분은 다시는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300여년이 되었으나 그 당시와 같은 사람 한 사람 나오지 않았으며 세상의 도덕 또한 상하할 것 없이 개탄스러운 지경이다.
不佞遊宦泮邸日先生後孫昌潤甫千里踵門泣而告曰此乃三足堂公手錄年譜而今始出於春川族姪晋炯家藏天也夫將得名公大人之言惟不朽是圖祖寒喧者於是役也不可無言可言者又莫如子也盍識其尾
재주 없어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나에게 하루는 반저(泮邸;성균관)로 선생 후손 창윤(昌潤)씨가 천리 길을 달려와 문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족당공이 손수 기록하신 연보인데 지금에야 비로소 춘천에 사는 조카뻘인 진형(晋炯)의 집에서 보관하던 것이 출현되었으니 참으로 천행이다. 이에 명공대인의 좋은 말씀을 얻으려 하니 생각하건대 이 계획은 길이 빛날 일이요 한훤당(寒喧堂)을 조상으로 모신 사람이 이 일에 한 말씀 없을 수 없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그대만한 사람이 없다. 어찌 끄트머리에 한 말씀 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雙手擎讀不獲辭迺言曰先生之蹟於是備矣三足之功於是大矣子之家發矣而是書基之矣乎集例有年譜爲開卷第一義亟謀剖劂公諸世也
이에 두 손 받들어 읽고는 사양할 수가 없어 내가 말하기를 “선생의 행적이 여기에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삼족당공의 공이 매우 크다. 그대의 가문이 발전하는데 이 서책이 한 계기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문집의 예가 연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책을 펴내야 할 첫째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하루속히 간행을 도모하여 온 세상에 공포하여야 할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瑞興後學金錫輔謹跋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서흥 후학 김석보 근발
濯纓先生年譜後叙(탁영선생연보 후서) (1)
余嘗讀濯纓先生遺集有可恨者二可疑者亦二焉復 昭陵一疏先生之大節也見於朝野僉載及 莊陵誌中者其蹟可据
나는 일찍이 탁영선생의 유집(遺集)을 읽고 한 되는 점 두 가지와 의문되는 점이 또 두 가지 있었다. 소릉복위(昭陵復位)에 대한 첫 번째 상소는 선생의 대절을 온 조야에 보여 준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장릉지(莊陵誌) 중에 실려 있어 그 행적을 알 수 있다.
而疏本無傳焉是可恨也四十八詠 成廟所以寵予也必當賡進而但錄其跋詩什不槪見此又可恨也
그런데 소장의 본문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한이 되고 48영(詠;시)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갱진(賡進 :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지어 올리는 것)한 것인데, 지금은 다만 그 발문만 수록되어 있고 시는 다 볼 수 없으니 이 또한 한 되는 일이다.
先生之遭慘禍蓋以錄吊義帝文故也是作也在佔畢齋先生韋布之時先生雖柄史管何以載此文於國乘也大賢作爲必有意義而有未敢知也
선생이 당한 참화는 대체로 조의제문을 기록했기 때문인데 이는 점필재(佔畢齋;김종직,1431~1492)선생이 가난한 선비시절(韋布)에 지은 것이다. 한데 선생이 비록 국사를 관장하고 계셨지만 무슨 까닭으로 이 글을 국사에 실었는지? 현명한 선비가 그렇게 한 것에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었을 것이나 감히 알 수가 없다.
先生雖無血胤伯氏直提學公有子四人長子三足堂賢而幹家豈忍使先生不祀忽諸然而神道碑及文集序文皆有無嗣之歎是又可疑也余以是四者懷恨齎疑者宿矣
또 선생은 비록 혈윤(血胤:낳은 아들)은 없으나 형님인 직제학공(김준손)이 네 사람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삼족당공(김대유)이 어질고 집안일을 주관하였으니 어찌 차마 선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지 아니 했겠는가? 그런데 신도비와 문집서문에 다 같이 후사가 없음을 한탄하는 글이 있으니 이 또한 의문스러운 점이었다. 나는 이 네 가지 문제를 가지고 의아해한지 오래되었다.
今年夏因事在京日金斯文天翼與其宗君淸道昌潤春川晋炯訪余於頖舍䄂示一冊子曰此吾濯纓先祖年譜也將付剖劂氏而願得子一言余愕貽曰先生年譜何自有之而今乃云爾也昌潤指晋炯而言曰吾與此族俱祖濯纓而距今十餘世不相聞知似此遺墨藏弆於彼久矣而今始得見甚矣吾宗之熸也不肖等竊不勝愴幸之私不量工費亟圖所以刊布也
그런데 금년 여름 일이 있어서 서울에 체재하고 있을 때, 유교의 선비(斯文)인 김천익(金天翼)이 그의 종친인 청도의 창윤(昌潤)씨와 춘천의 진형씨(晋炯)와 같이 반사(泮舍;성균관)로 나를 찾아와 소매속의 한 책자를 보이면서 “이것은 우리 탁영선조의 연보이다. 장차 인쇄하러 보낼까 하는데 그대의 한 말씀을 얻고자 한다.” 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묻기를 “선생의 연보가 어디에 있었기에 지금에야 말하는가!” 라고 했더니 창윤씨가 진형씨를 가리키며 “나와 이 종친은 탁영을 조상으로 모시는데 지금까지 10여 세대가 지나도록 서로를 알지 못했다. 이 유묵(遺墨)은 저 사람(진형)이 소장하고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얻어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우리 일가가 쇠잔한 탓이다. 불초등이 남몰래 슬픔과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비용이 얼마나 들든지 간행하여 배포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晋炯備述其古其古笥世傳之由因出示其舊本果塵蠹古冊也余未及辭謝而急於一見得以擎翫焉乃先生從子三足堂公手劄本之以先生日記參之以耳目所逮先生之始終本末無不該備於乎異哉
진형씨가 오래된 그 낡은 상자가 전해진 유래를 자세히 말하면서 구본(舊本)을 꺼내 보이는데 과연 먼지가 앉고 좀이 친 고책(古冊)이다. 나는 미처 사양하지 않고 급하게 한번 얻어서 받들어 보니, 선생의 조카 삼족당공이 선생의 일기를 기본으로 하고 보고들은 바를 참고하여 손수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다. 선생의 처음부터 끝가지의 여러 가지 일들이 두루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정말 기이하다.
生就其所嘗疑恨者攷之則 成廟庚戌先生在館草史錄弔義帝文至戊午禍作先生進爰辭有曰史所以記君上之善惡人臣之忠幹垂勸戎於後世者也臣師之作此文實有感於 魯山事而臣之編此欲以示公論於千載也先生之言已盡矣有非後學所敢贅也
먼저 일찍이 의문되고 한 되던 곳을 살펴보니 성종 경술년(1490년)에 선생이 사관(史館)에 있을 때 초록에 조의제문을 실어 마침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이 여기에 덧붙여 한 말이 역사라는 것은 임금의 선악과 신하들의 충성심등을 기록하여 그 줄기가 드리워져 후세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의 스승이 지은 이 글은 실제로 노산군(단종)의 일에 대한 느낌으로서 신이 이를 편찬하여 기록하는 것은 영원토록 일반적이고 공통된 의견으로서 나타내고자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였다. 선생의 말씀은 다 지나가고 없어졌으나 후학으로서 감히 군더더기 말을 할 바 못된다.
其請復 昭陵則聯劄一獨疏二而年月官啣錯錯可攷疏辭皆明白剴切激昻感慨令人三復而涕下永有辭於天下萬世者也四十八詠不但賡詩有之並與 成廟庸作之雲章而燦然俱載何其盛也惟以卷糾{弓+冫}太重別爲一冊在焉
소릉복위를 청한 일은 연차(聯箚: 여러 사람이 연대하여 올리는 약식 상소) 한번, 독소(혼자 올리는 상소) 두 번이었는데, 올린 연월과 올린 사람의 직함 들을 하나하나 알 수 있고, 소장에 실린 말씀은 모두 명백하고 아주 적절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이 복받치고 사무치게 하여 세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천하 만세에 영원히 남을 말씀이다. 48영(詠)은 비단 시 뿐만이 아니라 성종이 지은 고귀한 글(雲章)도 찬연히 함께 실려 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책은 매우 귀중하므로 별도로 한 책을 만들었으면 한다.
至若嗣續則庚申七月二十七日先生詳闋之日也淑人金氏召從子三足堂告之曰吾今死矣願以汝弟大壯奉汝季父祀又托以祔葬遺骸言訖痛哭更衣脩然而逝至 中廟戊寅靜菴趙文正公爲先生筵奏請封贈 上曰已贈矣仍問有子否靜菴以嗣子大壯對仍 命 宣陵參奉作窠調用於是乎
대(代)를 이음(嗣續)에 있어서는 경신년(1600년, 연산군 6년) 7월 27일 즉 선생 탈상일에 숙인 김씨가 조카 삼족당을 불러 이르기를 “나도 이제 죽을 것인즉 원컨대 너의 동생 대장(大壯)으로 하여금 너의 계부 제사를 받들게 하여다오. 또 한 가지 부탁은 <내가 죽거든> 유해를 계부 옆에 부장하여 주기 바란다.” 라고 하시고 통곡한 다음 옷을 갈아입으시고는 서거하셨다. 중종 무인년(1518년)에 정암(靜菴) 조문정공(趙文正公;조광조)이 선생을 위하여 증작을 주청하였을 때 임금이 이미 증직하였다 하시고 이에 묻기를 자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니 정암이 대장으로 후사를 이었다고 대답하였더니 임금은 곧 명하여 선능참봉(宣陵參奉) 자리에 등용하게 하시었다.
昔之所疑恨者段段昭晰怳然若發蒙蔀而覩白日矣其餘本集中所無而此譜中所有者多至數十條莫非可驚司欽可尙可異之蹟則覽者當自得之而至今談先生者無貴賤無賢愚仰之若日星山斗者有以也
예전에 의심되고 한 되던 점이 하나하나 분명해지니 마치 덮개를 열고 밝은 햇살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외에도 본집(本集) 가운데는 없으나 이 연보 가운데 있는 것이 대단히 많아 수십 조항에 이른다. 행적은 놀랍고 공경스러우며 고상하고 기이하지 않음이 없어 보는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선생을 말하는 사람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막론하고 해와 별, 태산과 북두성 같이 우러러보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夫鳴呼此譜之作在於 明廟戊申而埋沒於塵箱敞簏之中者歷年三百二十七世十有三而始出於今日其顯晦之奇直與航頭之見古文尙書無異
아! 이 연보를 지은 것이 명종 무신(1548년)년 이었는데 먼지 앉고 헤어진 상자 속에서 327년, 13세대를 묻혀 있다가 오늘 비로소 출현하였는데, 세상에 나타나고 감추어짐(顯晦)의 신기함이란 바로 대항두(大航頭)가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발견한 것과 다를 바 없다.[1]
[1]동진(東晉) 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대항두(大航頭, 큰 뱃머리라는 뜻의 지명)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었다는 말이나, 이 고문상서는 위조라는 설이 있다.
噫古文尙書出而王范所補之舜典馬融所疑之泰誓不廢而自廢則自今以後中世所撰附錄之掇拾斷爛於龍蛇之後者自當勿論而一從此譜爲正可也
아! 고문상서가 나타나자 왕범(王范)[1]이 보충한 순전(舜傳)과 마융(馬融)[2]이 의심한 진서(秦誓)는 없애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다. 지금 이후로는 중간의 선조세대가 편찬한 부록 즉 선생이 돌아가신 후(龍蛇之後)에 조각조각 모여진 것에 대해서는 의당 가타부타 하지 말아야 하고 이 연보를 올바른 것으로 삼아 한결같이 이에 따름이 옳으리라.
[1]왕범(王范); 북송(北宋) 시대에 어진 재상이었던 왕단(王旦)과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2]마융(馬融); 79~166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학자
抑又有一說焉先生嗣子旣蒙錄用之典而至宰郡縣其後再傳若三傳或以遺逸稱或以道義文章著濯纓之世蓋未艾也
또 일설이 있으니 선생의 사자(嗣子;김대장)가 은혜를 입고 벼슬을 하여 군과 현의 수령을 지냈고 그 후 2대 또는 3대를 전하여 오면서 혹은 유일(遺逸)로써 일컬어지고 혹은 도의와 문장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으니 탁영의 세계(世系)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夫何一經兵燹分散流離居者有廣陵之歎行者有雍門之悲所以建院竪碑及文集重刊之役皆士林尸之而不待本孫之宣方此可見先生之德八人之深而諸賢文字誤認爲無嗣者職此之故也嗟乎中衰之極一至此乎
그러다가 병란(兵亂;전쟁 등)을 거치면서 흩어지고 헤어져 집에 있는 사람들은 광릉(廣陵)[1]의 탄식이 있었고 밖에 다니는 사람들은 옹문(雍門)[2]의 슬픔이 있었다. 그래서 서원을 건립하고 비를 세우고 또 문집을 중간하는 일을 모두 사림(士林)이 주관하고 본손(本孫)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이로서 선생의 덕이 사람들을 깊이 감화시켰음을 가히 엿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여러 선비들이 쓴 글이 후사(後嗣)가 없는 것으로 오인하게 된 근원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아! 중간 세대의 쇠퇴함이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1]광릉(廣陵); '광릉'은 양주(揚州)의 옛날 지명. 지금의 강소성 강도현에 해당한다.
[2]옹문(雍門);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거문고의 명인, 옹문주(雍門周. 옹문자(雍門子)라고도 한다. 거문고를 잘 타 맹상군이 그 소릴 듣고 울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凡物之理極則必飛今見金氏諸君子各自其鄕邂逅於京師得此譜於三百餘年之後者已不偶然而得之不日又能合謀鋟榟以廣其傳先生之後其將興矣
무릇 사물의 이치는 극에 달하면 반드시 떨어져 나가게 마련이다. 지금 김씨의 여러 군자들을 만나보니 각자 그들의 고향에서 와서 서울에서 만나 3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이 연보를 얻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의논을 모아 책으로 간행함으로써 그 전승(傳承)을 넓히게 되면 선생의 후손이 장차 흥할 것이다.
斯理也愚於先生所著中興策大統之後必有中衰中衰之後必有中興之說證之矣
이것이 이치로서 선생이 지은 중흥책에 ‘국가 통일의 대업(大統) 후에는 반드시 중간의 쇠퇴함이 있고 중간의 쇠퇴함 뒤에는 반드시 중흥이 있다.’는 설이 바로 이를 증명할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後學驪江李在喜謹撰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학 여강 이재희 근찬
(후서2, 보형)
人有一善一能爲子孫者莫不欲闡揚以傳於後若夫先祖之道德文章行義事業可以耀後世而無愧則必思所以闡而顯之不俟終日者固性分內一事
사람에게는 한 번의 선으로 하나가 가능해지는 것이 있으니 능히 자손된 자로서는 이를 후세에 전하여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선조의 도덕과 학식과 행의와 업적이 후세에 빛날 수만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나 반드시 생각하고 있는 바가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일의 성질이 내부의 일이기 때문이다.
竊惟我 濯纓先生佔門高弟也博學鉅文卓節高行載在 國乘赫人耳目而不幸燕山戊午首被慘禍鳴呼尙忍言哉由此而先生之遺藁實蹟散逸殆無餘存矣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탁영선생은 점필재의 수제자로서 학문이 높고 절개와 행동이 탁월하여 나라의 역사책에도 실려 있고 사람들의 이목에도 밝게 빛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에서 그 우두머리로서 참화를 당하였다. 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선생에 관한 것은 없어져 버리고 실제의 자취는 흩어져서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다.
及 中廟改玉特 旨求遺文于家先生從子三足公收拾若干篇以獻晩以先生年譜付諸季氏昌寧公諱大壯而深藏之其微意盖可想焉
또 중종반정 이후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탁영선생이 남기신 글을 구하라고 하여 선생의 조카인 삼족당공이 몇 편의 자료를 모아서 늦게나마 바치니 선생의 연보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동생인 창녕공 휘대장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것인데 이렇게 깊숙이 간직한 뜻을 대략 상상할 수 있다.
往在戊午三足公父子兄弟俱謫南原旣賜環昌寧公因留月谷而林隱公諱致九卽先生曾孫也自月谷遊學湖西受業于趙文烈公憲時値倭寇大侵避寓嘉林未幾淸道南原盡被賊燹遂隱居于烏樓山中
옛날 무오사화가 있던 해에 삼족당공의 부자형제는 모두 남원으로 유배를 갔었고 먼저 사면을 받고 돌아온 창녕공(대장)이 월곡(月谷)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임은공 휘치구, 즉 선생의 증손께서 월곡으로부터 호서(湖西)로 공부하러 떠나 문열공 조헌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이때 마침 왜구가 침입하여 홍주(洪州) 가림(嘉林)으로 피신하여 거처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도와 남원이 모두 왜적들로 부터 피해를 입어 마침내 오루산(烏樓山) 속에 숨어살게 되었다.
嘗有詩戒子孫曰孤蹤畏約隱山林不說先人只說金爲恐遺文重召禍故敎藏護更深深此乃申先訓也盖自帶方分散之後流離南北不遑寧處旣湖而圻荐遭丙丁之難又渡漢而東守義自靖韜光晦迹子姓子子若不保而仍與二南諸族聲聞永阻世遂不知先生之有是孫吾家之有是祖矣
일찍이 시를 지어 자손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고종(孤蹤;고독 단신)은 두려워하며 산속에 숨어살되 선조에 대해서 말하지 말 것이며 단지 김(金)자만 말하여도 두려움이 따르니 남기신 글은 소중하나 화를 부를 수 있으니 이것을 깊이깊이 간직하라고 가르쳐라.’ 고 하였으니 이는 선조의 가르침이다. 대개 대방(帶方?)이 분산된 후로부터는 서로 떨어져 남북이 편안하게 살 곳이 없었다. 이미 호서와 경기지방에서 거듭하여 병자년과 정묘년의 난[1]을 만나 또 한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서 의로움을 지켰다(?). 나라가 조용해지고 부터는 이를 감추어 알리지 않고 종적을 감추었으니 후손들이 이를 보존하지 못했고 더욱이 영남과 호남의 친족들이 서로의 소식은 들었으나 세대가 멀어지다 보니 마침내 선생에게 이런 손자가 있었고 우리들에게는 이런 선조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1]병자년(1456년)의 死六臣의 上王복위 모의사건과 정축년(1457년)의 魯山君(단종) 사망사건
<※ 위 문단의 뜻풀이가 어려우므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
今年春家兄晋炯客于漢師聞道州族叔昌潤來赴會闈卽進族次語到三足公所撰 濯纓先生年譜則曰無有矣及閱書中所載乃曰此有前所未聞而今始知者凡四條一則先生元配安人丹陽禹氏之失傳也二則先生諱辰在於七月二十七日而誤認以十七日也三則三足公遵先生繼配淑人禮安金氏遺命使其第二弟昌寧公奉祀而靜菴趙先生 筵奏調用也四則先生復 昭陵三疏不說顚末也
금년 봄에 형님인 진형(晋炯)이 서울에 갔을 때 청도에 사는 아저씨뻘인 창윤(昌潤)씨가 부회(赴會;覆試)에 왔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나 종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삼족당공이 쓴 탁영선생의 연보에 대해서 말했더니 <창윤씨가 하는 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하면서 책에 기록된 글을 보고는 말하기를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 듣지 못했다. 지금 비로소 알게 된 것이 4가지인데 첫째는 선생(탁영)의 첫 부인이 단양우씨라는 것은 전해지지 않았고[1], 두 번째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 7월27일 인데 17일로 잘못알고 있었고, 세 번째는 삼족당공이 선생의 다음번 부인인 예안김씨[2]의 유언을 지켜 그의 둘째 동생인 창녕공(대장)에게 선생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고 또 정암 조선생(조광조)이 임금께 주청하여 대장에게 관직을 준 일이며, 네 번째는 선생이 소릉의 복위를 간청한 세 번의 상소에 대한 전말이다.” 라고 하였다.
[1]병조참판을 지낸 우극관(禹克寬)의 女
[2]참봉을 지낸 김미손(金尾孫)의 女
十有三而尙未能布諸人者不料其不傳於二南宗中而惟期祖訓之是守也早知其如此寧不圖所以傳世永後而至于今泯黙已也
13세대가 지났으나 아직 여러 사람들에게 아직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은 영남과 호남의 종중에 <이 연보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며[3] 이는 생각해 보면 선조의 교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일찍부터 <연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와 같이 된 것은(즉 알리지 않은 것은) 정녕 세상에 전하여 영원히 후세까지 알려지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3] 영남과 호남의 종중에서는 이 연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 연보를 가지고 있던 춘천의 진형씨는 ‘영호남의 종인들이 이런 연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보가 있다고 알릴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는 뜻.
竊意刊事不容少緩卽與謀及剞劂氏因續修建院 宣額貤贈賜諡之前後事實于後以成完譜
곰곰이 생각하면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은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판각하는 사람과 계획하고 계속해서 사당을 세운 일, 액호를 받은 일, 거듭해서 증작을 받은 일과 시호를 받은 전후의 사실들을 수정한 후 완전한 연보를 완성하였다.
不肖雖不敢以布揚 先蹟自居四百年泯沒之道學淵源貞忠大節庶幾復顯于世則其所慶幸奚但爲一行一能之闡揚而止哉不肖於是深有所愴感焉
불초는 비록 감히 이 연보를 배포하지 못하겠으나 선조의 자취를 드높이고, 돌아가신 후로 400여년 동안 잊혀져 사라진 도학의 연원과 곧고 큰 충절을 모두 회복하고 세상에 나타내려 함이니 이러한 소임이 어찌 경사스럽고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만 한번 이를 행함으로서 조상을 드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불초는 이것에 아주 슬프게 느끼는 바가 있는 바이다.
崇禎紀元後五甲戌季夏十三代孫普炯謹識
숭정기원후 5갑술(1874년) 계하(6월)13대손 보형근지
(후서3, 창윤)
不肖奉閱先祖文集未嘗不慨歎飮泣盖當戊午之禍子孫奔竄於嶺湖之間文蹟盡入於搜沒之中逮夫
불초가 선조의 유집(遺集)을 받들어 열람하면 항상 개탄하고 눈물을 삼킨다. 무오의 화를 당하여 자손들이 호남과 영남 각지에 달아나 숨고 선생의 문적은 모조리 수색되어 압수당하였다.
中廟改玉洗寃復爵特下求遺文之命慕齋金先生按嶺撰序印行而所存者十不能一二且經壬辰之燹又多遺失矣
그러다가 중종반정이 이루어져 억울한 죄가 씻어지고 작위가 회복된 다음 특별히 유문(遺文)을 구하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모재(慕 齋) 김안국(金安國) 영남 안찰사가 서문을 지어 인쇄하여 발행하였으나 남은 것이라고는 열에 하나 둘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를 거치면서 또 많은 것들이 없어졌다.
今於赴會之日偶逢春川族姪晋炯卽吾同祖之親也晋炯問曰年譜之漏於原集何也家有 濯纓年譜藏在篋笥鳴呼異哉三百餘年而後始現於今日豈非顯晦有時耶參攷始終乃是三足公所著也先生再朞之日夫人金氏面命三足堂曰願以汝第二弟大壯續汝季父之後言訖而沒
그런데 다행하게도 이번 회시(會試;覆試)에 나온 날 우연히 춘천의 조카뻘인 진형(晋炯)을 만났는데 진형은 나와 선조가 같은 친척이다. 진형이 묻기를 “원집에서 연보가 누락되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집에 탁영연보가 대나무 상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아! 기이하다.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출현되다니 어찌 나타남과 감추어짐(顯晦)이 다 때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참고하여 살펴보니 삼족당공이 작성한 것이다. <탁영선생이 돌아가시고 1년 후인> 첫 제사 때 부인 김씨가 삼족당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원하건대 너의 둘째 동생 대장(大壯)을 너의 숙부의 후사로 삼아라.’ 고 말을 마친 후 돌아가셨다고 되어있다.
中廟朝經筵次對問金某有子否靜菴趙先生以其嗣子大壯對特除 宣陵參奉 朝家崇報之典如是昭著
중종때에 아침 경연 때 김모는 자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물으니 정암 조선생이 대장이 뒤를 이었다고 대답하니 특별히 선능참봉에 임명하셨다. 조정에서 <명신을> 숭상하고 포상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나타났다.
而年譜深晦文獻無徵玆故撰先生事實而或稱無嗣 純廟時請諡之疏復告以從子繼嗣者皆未見年譜而然也就此譜而記實正本不可少緩遂與族姪昆季及遊京族人天翼永薰共謀剞劂以壽傳世若夫道學忠節之卓越有非不肖之所敢贅說謹略記顚末云爾
연보가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문헌상으로 뚜렷한 증거가 없어 선생의 사실을 찬술할 때 간혹 무사(無嗣)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순조임금 때 <1830년> 시호를 청하는 상소에서 다시 조카 대장을 후로 잇도록 고한 것은 모두 연보를 보지 못한데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연보(발견된 연보)를 가지고 정본(인쇄본)으로 만드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라 드디어 조카(진형)의 형제들과 서울에 사는 친족인 천익(天翼)씨, 영훈(永薰)씨와 논의하여 판각하고 도학과 탁월한 충절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다. 불초가 간략히 일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나 감히 군더더기 말이 있지 않을지 모르겠다.
聖上卽阼之十一年甲戌季夏後孫昌潤謹識
임금(고종)이 보위에 오르신지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손 창윤근지
(후서3, 천익)
鳴呼此三足堂公所著濯纓先生年譜也先生之文章節行固已炳烺史策而其學問之實出處之蹟經禍散逸爲後生之所齎恨者久矣何幸今年春始與族從晋炯合得此書于三百年之後泣血盥讀得其所不聞焉
아! 이것은 삼족당공이 저술한 탁영선생의 연보이다. 선생의 학문과 절개있는 행실은 진실로 역사책에 빛나고 있으나 그 학문의 실제 자료들은 화(무오사화와 임진왜란 등)를 겪으면서 흩어지고 없어져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한이 오래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금년 봄에 비로소 조카뻘인 진형으로부터 이 책을 얻고 나니 300여년 후의 일이라 피눈물을 씻고서 들어도 보지 못한 것을 읽어 보았다.
蓋先生之學術本之小學而宗師紫陽實行本之純孝而尙友藍田儀度方嚴有周規折矩之美胸襟灑落有超世出塵之致立志大於經濟後樂先憂制行高於出處難進易退憂世道則必欲興學校而闢異端當言路則必欲進賢能而遠侫人掌史筆而錄弔義帝之文所以扶大倫也
대개 선생의 학문의 근본은 소학(小學)으로서 주자(紫陽, 朱子)[1]를 숭상하여 행실의 근본은 순수함과 효도로서 친구를 위하고 의례의 법도가 엄격한 주례의 규범이 있었다. 형식을 거부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흩어져 떨어지고(?) 경영하고 다스림에 큰 뜻을 세워 나중에는 즐기되 먼저 근심하고 제도와 행실은 나타난 곳이 고상하고(?)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서기는 쉬운 세상의 도리를 근심하여, 즉 분명히 학교를 부흥시켜 이단을 피하게 하고 언로를 담당하여 현자들을 진출시켜 아첨배들을 멀리하고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조의제문을 실은 것은 이러한 도리 때문이었다.
[1]자양(紫陽);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즉 주자(朱子, 1130~1200)를 말함. 평릉 주희(平陵朱熹), 단양 주희(丹陽朱熹), 오군 주희(吳郡朱熹), 신안 주희(新安朱熹), 자양 주희(紫陽朱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議廟禮而上復 昭陵之疏所以明大義也且夫請立 魯陵後改撰六臣傳皆足以有辭於天下萬世其精忠大節動天地而撼山岳格言至論質鬼神而光日月此皆他書之所闕而昭載無遺然則求先生之全而得先生之眞者莫此書若也
조정의 회의에서 소릉의 복위를 상소한 것은 대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고 또 노릉(노산군 단종의 능)을 세우기를 청하고 사육신전을 다시 쓴 것은 모두 천하 만세에 그의 말이 있어 충성과 절개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산을 뒤흔드는 말과 귀신을 질책하는 지론은 해와 달같이 빛나고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책에 기록되어 소상히 실려 있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은 없어 선생의 모든 것을 구하고 선생의 진실을 얻는 것이 이 책이 아니겠는가.
淸道宗君昌潤適來漢師遂與共圖壽傳付諸鋟刊雖以不肖之無似亦猥有聞於參訂之役畧掇譜中所錄正學高行淸風峻節後賢之未及發揮者十餘事以備立言君子之栽擇云爾峕
청도에 사는 일가인 창윤씨가 서울로 오게 되어 마침내 같이 의논하여 인쇄하여 전하게 되었다. 비록 불초가 미천하고 함부로 이 연보를 수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간략하게 연보 속에 이를 기록하여 바른 학문과 높은 행실과 맑은 풍속과 높은 절개 등에 대해서 후세의 선비들이 알지 못하는 10여건의 선생이 하신 일을 준비하여 두니 군자들이 판단하여 선택할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不肖後孫天翼再拜謹識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불초 후손천익 재배근지
(후서5, 영훈)
先生早襲庭訓少負聲望博學宿德爲百代之所宗特立獨行亘萬世而不顧鳴呼痛矣戊午之事尙忍言哉尙忍言哉
선생께서 일찍 계승한 가정에서의 훈계와 젊어서 얻은 명성과 학문과 덕망은 영원히 종친들에게 모범이 되는 바이고 특히 혼자서 행하신 일은 만세를 지나도 다시 볼 수 없다. 아! 원통하다. 무오사화는 차마 말로서 표현할 수 없다.
先生富於文學平日著述不爲不多而慘毁之餘且經兵燹 經筵應製之作師友講磨之文散佚無徵後所蒐輯不無掛漏之嘆寔爲後昆之齎恨千古者而世之相去也已爲三百有餘年于玆矣
선생의 문학에서 풍부하여 저술하신 것이 많을 것이나 무참히 훼손되고 남은 것이 또 전쟁을 거치면서 경연(임금과의 회의)에서 지은 것과 스승과 친구들 간에 배우며 닦은 글들이 흩어지고 없어져 자료가 없으니, 이후에 이것을 모으는데 눈물과 탄식이 없지 아니하다. 후손들이 가진 한은 아주 오래되어 세대가 바뀐 것이 300여년이 지났다.
歲甲戌春幸我族人普炯甫藏弆于鸞飄鳳泊之中者今始出焉乃先生之年譜及四十八詠詩什也寔三足堂公親自校輯而兼有篇終之跋於是乎先生之終始遺蹟略已備矣此豈但一門之慶幸而已哉
갑술년(1874년) 봄에 다행히 우리의 일가인 보형(普炯)씨가 보관해 오던 것이 란표봉박(鸞飄鳳泊)[1]중에 지금 비로소 나타나니 선생의 연보와 48영시이다. 이는 삼족당공이 친히 교정하고 편집하여 몇편으로 만들고 마지막에 발문까지 실은 것으로서 선생의 일생과 유적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단지 한 가문만의 경사이겠는가.
[1]鸞飄鳳泊(란표봉박) : 헤어지고 흩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임. 한유의 구루산시(岣嶁山詩)에 "蚪蝌拳身虀倒披 鸞飄鳳泊拏虎螭"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구루산 신우(神禹)의 비가 산중에 자취를 감춘 것이 마치 난봉이 표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임.
至若先生之道學文章讜直論議固非後生小子之所敢私自讚揚何敢贅說乎亟謀鋟榟功未數月而告竣後之覽此者庶可以觀感而尊慕焉
선생의 도학과 문장과 곧은 의견은 진실로 후생인 소자가 감히 자찬하여 드높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감히 군더더기 설명을 할 수 있겠는가. 재빨리 인쇄를 결정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완성됨을 보고하니 이후에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다 존경과 숭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後孫永薰謹識
지금임금(고종) 11년갑술(1874년) 계하(6월) 후손영훈 근지
<濯纓先生年譜下卷終>
- 출처를 밝히지 않고 무단 전재하는 것을 금함 -
첫댓글 잘 읽었읍니다..
많은 참고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