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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번지 ❏문화재지정: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0호(1984.05.17지정) 충현서원 유적-충청남도기념물 제46호(1984.07.26지정) ❏배향인물: 주 자(朱 子) 이존오(李存吾) 이 목(李 穆) 성제원(成悌元) 서 기(徐 起) 조 헌(趙 憲)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창건연도: 1581년(선조 14) ❏사액연도: 1624년(인조 2) ❏향 사 일: 음력 3월 9일 |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원으로, 이 충현서원이 세워지는 계기는 서기(徐起)에 의해 마련되었다. 서기가 노년기에 본 서원의 소재지인 공암에 정착하여 69세에 죽기까지 19년간을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공주의 사림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바로 이 시기인 1581년(선조 14)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제자들이 주도하고, 당시 공주목사로 와 있던 권문해가 쌀과 콩 50여곡(斛, 1곡은 10말)를 재정 지원하여, 서기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창설당시의 공암서원에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자가 중앙에 모셔지고, 공주의 향현(鄕賢)인 이존오(李存吾), 이목(李穆) 및 성제원(成悌元)이 제향되었다.
공암서원은 서기가 죽은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폐허화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중수했다. 이 때 중수를 주도한 인물은 서기의 문인들이다. 중수 당시 서원의 원장은 의금부 도사를 지낸 박로(朴輅)였고 그 외 박희성(朴希聖), 박희철(朴希哲), 민재문(閔在汶), 박설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공주향교 청금록에 등재되어 있는 공주의 사족들이다. 이때의 서원중수기는 서기의 문인 오중철의 부탁으로 이정구(李廷龜)가 작성했다.
공암서원이 ‘충현(忠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중수된지 14년만인 1624년(인조 2)의 일이다. 사액을 받은 충현서원은 국왕이 내려주는 편액과 함께 토지 3결에 대한 면세권 및 일정부분 관의 경제적 후원이 보장되었다. 그리하여 사액을 받은 다음 해인 인조 3년 사우의 중건을 통해 서원의 면모를 일신했고, 서원의 창설자인 서기를 남강고사(南康故事)를 모방하여 별사(別祀)하기 시작했다.
한편 1712(숙종 38)에는 드디어 임우기, 최규일 등이 연천의 임장서원에서 주자의 화상을 모사해와 신판(神板) 뒤에 봉안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충현서원사적비명(忠賢書院事蹟碑銘, 최구서 撰, 조상우 書, 윤덕준 篆)을 서원 뜰에 세웠다.
사액서원이 된 충현서원은 이 지역 사림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이 지역 명현(名賢)을 추배하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고, 그 가운에 조헌(1652년), 김장생(1674년 추배), 송준길(1686년 추배), 송시열(1713년 추배) 등의 추배가 이루어졌다.
조선후기 충현서원의 대대적인 중수는 1790년(정조 14)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밝혀지며, 1871년(고종 8) 대원구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훼철 당시, 1712년(숙종 38)과 1790년(정조 14)에 그려진 주자(朱子) 영정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봉안되었다.
서원의 철폐된 뒤, 이 지역 유림들은 1891년(고종 28)에 단을 설치하여 제향인들의 넋을 기렸고, 다음 해에 주장영정을 찾아와 연정(蓮亭)에 봉안하였다. 1917년에는 단에 제향을 드리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 옛 터에 사우를 중건하고 주자영정을 북벽정위에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현서원은 1969년에 사단법인이 결성되어 이사회를 통한 운영을 하게 되었고, 1989년에는 강당이 중건되었으며, 1994년에는 관리사가 신축되었다.
사당에는 주자를 중앙에 두고 그 좌우에 나머지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주자(朱子, 1300~1200)
주자(주희)는 남송 말의 인물로 자가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晦菴)이다. 주돈이, 정호, 정이의 새로운 학풍을 포섭하여 이를 집대성한 주자학을 이룩하였으며 사서를 중요시하여 이를 중심으로 학문체계를 세웠다.
2)이존오(李存吾, 1341∼137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 (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성균관대사성에 추증되었으며,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 의열사(義烈祠), 무장 충현사(忠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탄집≫ 2권이 있다.
3)이목(李穆, 1471∼149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옹(中雍), 호는 한재(寒齋). 개국공신 백유(伯由)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윤생(閏生)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14세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한 뒤로 학문이 크게 성취되어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는 동문수학한 관계이다. 1489년(성종 20)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는데, 언론이 정중하고 의기(義氣)가 준엄해 동료들의 많은 추앙을 받았다.
1490년 성종이 병환에 있을 때 대비가 무당을 시켜 성균관 벽송정(碧松亭)에 음사를 설치하고 굿을 하자 유생들과 함께 제단을 부수고 무당을 쫓아내니, 대비가 대노해 성종에게 고했으나 얼마 뒤 성종은 유생들을 처벌하지 않고, 성균관 대사성을 불러 “그대가 학생들을 인도해 사습(士習)을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노라.”하고 어주(御酒)까지 하사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전적(成均典籍)이 되었고,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496년 영안남도(永安南道: 지금의 함경남도) 병마평사(兵馬評事)를 거쳐 다음해 호당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때 훈구파의 모함으로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연루되어 김굉필·정여창·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신원되었다. 1552년(명종 7)에 이조참판, 1707년(숙종 33)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절의(節義)에 투철하고 시부(詩賦)에 능하였다. 특히 <다부 茶賦>를 지어 차의 미묘한 미각이 주는 오공(五功)·육덕(六德)을 설파 하였다.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전라북도 전주의 황강사(黃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재문집 寒齋文集≫·≪이평사집 李評事集≫이 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4)성제원(成悌元, 1506~1559)
조선 명종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洲)이다. 공주출신으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정통하게 되었으며 의학, 지리학, 복술 등에도 두루 능했다.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만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을 지냈으며, 퇴직 후에는 다시 공주의 옛집으로 돌아와 향리에 은거했다.
5)서기(徐起, 1523~1591)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이천이며,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孤靑), 초로(樵老), 귀당(龜堂), 이와(頥窩)이다.
서경덕(徐敬德), 이중호(李仲虎), 이지함(李之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홍천, 지리산 및 계룡산 근처로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였는데, 계룡산의 북쪽 고청봉 아래에서 강학을 하면서 충현서원을 창건하였다. 원래 충현서원에 배향되지 못하고 별사되다가, 1925년에 훼철되었던 서원의 사우가 복원되면서 다른 향현(鄕賢)과 함께 제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조헌(趙憲,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 황(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영(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 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병력이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7)김장생(金長生, 1548~1631)
중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는 호는 사계(沙溪)이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에 정통하여 우리나라 예학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다. 향리인 연산에서 주로 학문과 교육으로 많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등 예(禮)에 관한 것이 많고 근사록석의·경서변의·사계선생전서등이 전한다. 1688년(숙종 14)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 돈암서원, 공주 충현서원, 안성 도기서원 등 10여 곳의 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8)송준길(宋浚吉: 1606~1672)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으로 이이와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4년 진사가 된 수 학행으로 천거 받아 1630년에 세마(洗馬)에 제수되었고, 효종이 즉위할 대까지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 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지나지 않았다. 1649년에는 산당(山黨) 김집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올랐고, 당시 인조 말부터 정권을 장악해 오던 김자점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며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기년제를 지지하며 남인과 논란을 벌여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현종이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주장하는 남인들의 거듭된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이듬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관작을 삭탈당했고,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1756년 문묘에 제향되었고 돈암서원, 충현서원, 숭현서원, 봉암서원, 용강서원, 창주서원, 흥암서원, 성천서원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동춘당집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9)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건물의 배치 형태는 뒷편에 신문이 가설된 사당이 있고, 전면에 강당과 사당을 직각방향으로, 수직사는 강당 전면에 사당과 같은 방향으로 배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가구(架構)는 5량 가이며, 신문은 정면 3칸의 솟을 형식이고 수직사는 1995년에 건립되었는데, 콘크리트 건물에 기와를 올렸다.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사당, 재실, 충현서원사적비, 충현서원사실, 우암송선생추향기비석 등이 있다.
유적 입구에는 ‘충현서원사적비’ ‘충현서원사실우암소선생추향기’와 하마비가 있고 사적비는 대리석으로 된 비신, 보주를 얹은 팔작지붕 형태의 비개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공주시지, 2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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