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로마까지
2000. 8. 18 (금)
12:00 서울 출발 (SU 러시아 항공) 21:00 모스코바 도착(현지시간 15:00) 00:30 출구 통과(현지시간 18:30, 3시간 30분 소요) Entar continental hotel (Mezhdunarodnaya) 투숙 tel 253-95-65 fax 253-24-00
8.19(토)
09:15 호텔 출발 표또르(peter)대제, 조각공원, 레닌의 숲, 크레물린 궁, 종, 대포, 레닌의 묘, 붉은 광장, 승전기념탑, 2차 대전 박물관, 모스코바 대 학 19:00 모스코바 출발 23:00 런던 도착 Seraton headrow hotel 투숙
8.20(일)
08:30 출발 hide park, albert 동상, royal albert hall(에술의 전당), 런던 브리지, 유령의 집, 런던 성, 국회 의사당, 빅밴 시게탑, 웨스터민스 터 사원, 버킹엄 궁전, 대영 박물관, 18:57 런던 출발(유로 스타) 22:20 파리 도착(파리 시간 23:20)
8.21(월)
00:10 Renaissance 호텔 도착 09:25 호텔 출발 개선문, 에펠탑, 앵발리드(나폴레옹 무덤), 노틀담 성당, 루불 박관
8.22(화)
07:25 르네상스 호텔 출발 08:24 리용역 출발(TGV) 12:10 제네바 도착 Mont-blanc, shamonix마을 21:35 Movenpick hotel 도착
8.23(수)
07:35 호텔 출발(버스) 12:35 Milano 도착 13:45 밀라노 관광 시작 스포르체스코 성, 두오모 성당, 스칼라좌 극장, 스칼 라 광장(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상)
8.24(목)
08:00 Quark hotel congressi 출발 11:45 Firenze 도착 두오모 성당, 세례당 건물(천국의 문), 단테의 집, 신유리아 광장, 다비드상, 페루세우스 상, 산 타크로체 광장, 미켈란젤로 언덕, 17:00 로마 向(버스) 19:53 로마 toll gate 통과
8.25(금)
09:00 Antonella hotel 출발 콜로세움, 콕스탄티누스 개선문, 포룸(로마의 황성옛터), 대전차 경기장, 팔라티노 언덕, 진실의 입, 공회당, 시청, 베네치아 광장, 통일 기념관, 트레비 분수, 포세이돈(해양의 신), 바티칸 시 국, 천지창 조, 최후의 심판, 솔방울 정원, 지구속의 지구(청동 조각), 옥타비아누스(초대 황 제), 아폴로상(태양의 신), 헬라크레스, 네로의 목욕탕 욕조, 죄 사하는 문, 피에타 (비탄, 미켈란 젤로), 天階 21:00 로마 출발
8.26(토)
08:50 주리히 도착 스위스 국립 공대, 17:39 주리히 출발 21:00 모스코바 도착 22:10 모스코바 출발
8.27(일)
05:50 서울 도착
2000. 8. 17 (목) 교원공제회 발행 신문에서 교육문화회관이 주관하는 해외여행 광고를 보고 “가볼까!” 하는 생각이 이제 바로 현실로 실현되는 날이다. 울산 개운초등학교 정옥길 교장 내외와 같이 가게 된 것이다. 아내는 제작 년이 회갑이고 나는 작년이 회갑이었지만 별다른 기념할만한 행사 없이 지나고 말았고, 또 아내는 유럽여행이 처음이라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 동안 일정이 여러 번 바뀌고 코스가 변경되고 한데다 18일이 또 사위의 박사학위 수여일이라 무척이나 망설였던 것이다. 사위는 국내 최초의 유기농학 박사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힘겹게 그리고 귀하게 받는 학위이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장인 장모인 우리가 참석해야 되겠기에 너무나 고심했으나 사위와 딸의 간곡한 요청으로 계획대로 가기로 한 것이다.
출발은 18일 오전11시 비행기이고 9시까지 김포 공항 집합이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우리는 비행장 근방에서 자고 가는 것이 미덥다는 생각으로 하루 앞당겨 17일 출발하게 된 것이다. 딸아이에게는 외손자를 우리가 돌보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알렸지만 아들들과 주위, 그리고 학교에는 일체 알리지 않고 출발했다. 모두에게 부담을 주기가 싫었고 또 홀가분하게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2시 새마을호로 출발하여 영등포역에서 내려 택시로 김포까지 갔다. 국제선 제2청사 근처에 여관을 안내해 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으나 기사도 잘 모르고 여관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을 해맨 후에야 겨우 여관 하나를 발견하고는 차를 내려 무조건 들어갔다.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한 여관이었다. 그런데 이 여관에서 하마터면 여행이고 뭐고 큰 낭패를 당할 뻔한 일을 당했다.
내일의 일과 앞으로의 여행에서의 예기치 않은 일들에 대한 막연한 근심 등으로 긴장된 가운데서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이었다. 잠결에 어렴풋이 밖에서 “손님, 손님...”하는 어떤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무엇에 이끌리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사정없이 낭떨어지로 나가떨어지면서 머리를 들이 받고 무릎과 정갱이 팔꿈치가 무엇에 심하게 부딛히며 말할 수 없는 심한 통증이 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너무나 아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그제서야 곤히 자고 있던 아내가 “뭐가 그리 급해 침대에서 앞도 안 보고 뛰어 나가노!, 아이구 무시라 성질이 저래 급해가 우짤끼고...” “어떤 여자가 안 부르더나!” “그래 여자가 부른다고 사람도 확인 안하고 문을 열어 줘 가지고 우짤라켔던고...” “아이구 아야, 불이나 좀 켜 봐라” 불을 켜보니 가당치도 않았다 정갱이(초때삐)가 너무나 심하게 부딛혀 피가 나고 있었고 팔꿈치도 매우 심하게 부딪혀서 따갑고 쑤시고 아팠다. 평소에 침대에 자지 않기 때문에 침대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밖에서 부르는 소리만 듣고 혹시 불이나 비상사태가 난 것이나 아닐까 하는 순간적 판단으로 그야말로 총알택시 마냥 사정없이 튀어나가다 침대에서 나가떨어지면서 탈의장 벽과 선반 바닥 등에 심하게 부딛힌 것이었다. 그러나 이만하기 다행이었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만약에 어깨나 다리가 부러지고 남보다 비교적 큰 코라도 다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정말 아찔했다. 하나님이 초장에 이 정도에서 만사에 조심하라고 한방 야무지게 갈겨 버린 경고였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8.18(금) 잠은 이제 틀렸고 해서 일어나 짐을 챙겨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했다. 식사는 공항에 가서 적당히 때우자는 계산이었다. 마침 이날이 50년만에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는 바로 그 시각이라 공항이 왁자지껄한 날이었다. 비행기는 SU항공으로 러시아 비행기였다. 450명 정도 탑승할 수 있는 비행기로서 꼬리 부분의 도색이 조금은 음침하고 유치하기까지 한 비행기였다. 오전 12:00경 이륙했다. 우리는 공산권 국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향하여 날아오르고 있었다. 장장 9시간이나 걸리는 긴 비행이었다. 나는 몇 년 전 교육청 장학사 시절에 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었지만 아내는 이런 긴 비행이 처음인지라 무척이나 호기심에 젖어 있는 듯 하였다. 비행기가 동해를 지나 시베리아로 접어들자 창밖으로 내다보니 매우 신기하였다. 황량한 사막과 호수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옛날 아내와의 연애 시절에 서로 읽고 감동했던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바이칼 호수가 어디쯤일까 하는 호기심이 살아났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안타까웠다. 해를 따라 비행했기 때문에 계속 백야의 하늘을 날은 셈이다. 모스크바 도착이 우리 시간으로 오후 9시였으나 현지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출국장으로 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유럽에서의 첫 번째 실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말로만 듣던 모스크바 공항의 출국 절차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 어둡고 침침하고 후덥지근한 곳에서 줄을 서서 밀고 밀리며 3시간 반 가량 실랑이를 벌였다. 경찰도 없었고 공항 공무원들은 바쁜 것도 없이 시간을 끌면서 입국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가는 문이 1미터 저 쪽에 빤히 보이는데 서로 나가려고 아귀다툼을 하니 그야 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싶었다. 그 북새통에서 아내는 시계를 털리고 말았다. 경황이 없는 중에 쓰리꾼이 설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여권과 돈 주머니를 꼭 쥐고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생고생 끝에 겨우 밖으로 나오니 몇 시간 전에 나온 사람들도 그렇게 몇 시간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0여 년 전에 모스크바에 갔다 온 사람들이 전하던 그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미련한 클레물린 바로 그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꿈에만 그렸던 모스크바, 공산주의 종주국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이제 내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었다. 우선 길이 매우 넓었다. 그리고 차도 별로 많지 않았다. 허름한 차들에다 백미러도 없는 고물차들이 더들더들 달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키가 매우 크고 껍질이 하얀 나무가 아주 많았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백양나무란다. 호텔에 오니 계약이 잘못되었는지 방 배치를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점점 실망스러워 지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쭉쭉 빠진 러시아 아가씨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동양인의 눈에는 모두가 신비롭기만 했다. 드디어 방 배치를 받았다. 매우 고급호텔이었다. 장장 9시간의 비행에다 3시간 30분가량의 출국장에서의 실랑이로 하여 우리는 곧장 깊은 잠으로 떨어졌다. 시간에 쫒기다 보니 고급호텔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잠만 잠깐 자고 가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8.19(토) 러시아에서의 첫날이다. 날씨가 초겨울 같이 제법 쌀쌀하여 소매가 긴 옷을 하나씩 걸쳤다. 제일 처음 찾아 간 곳이 모스크바 시내를 흐르는 강에 장엄하게 서 있는 표트르 대제 동상이었다. 규모가 크고 매우 장엄하였다. 러시아의 유구한 역사와 광활한 국토, 침침한 러시아의 회색빛 등과 어우러진 대제의 웅장한 동상은 러시아에서의 첫 관광 코스에서 우리를 완전히 넋을 잃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클레물린으로 겁도 없이 갔다.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며 두리번두리번하는 중에 어느새 벌써 푸틴의 집무실 맞은편에 당도했다. 50m 전방의 누리끼리한 건물이 대통령 집무실이란다.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엔가에서 우리를 겨누고 있을 기관총들의 총구를 생각하고는 등골이 오싹했다. 클레물린은 아름답고 웅장하였다. 무시무시하게만 느끼고 있었던 이 곳에서 관광을 즐기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아랍의 사원을 연상하는 둥글고 뾰족한 지붕과 노란색이 주조인 아름다운 건물들은 모두가 신기했고 아라비안 나이트의 환상에 흠뻑 젖어 들어 눈을 바쁘게 두리번거리며 구경하였다. 한 쪽 부분이 깨어져 내려앉은 거대한 종과 황제의 대포 앞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의 슬라브적인 선율과 장엄한 종소리와 대포 소리가 요란히 내 귓전을 울렸으며 포효하는 사자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대포는 금방이라도 시뻘건 화염을 내뿜을 것만 같았다.
붉은 광장은 바로 옆에 있었다. 매우 넓은 광장 이었다. 탱크와 전차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퍼레이드를 벌리는 붉은 광장, 그러나 오늘은 탱크가 아니라 방금 식을 올린 행복에 겨운 신혼부부들이 쌍쌍이 친구들과 거닐고 있었으며 많은 관광객이 붐비고 있었다. 자유의 물결 바로 그것이었다. 어시시한 붉은 광장이 아니라 파란 코발트빛의 하늘과 아름다운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비둘기들은 한가로이 모이를 쪼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셔터를 눌리기에 바쁜 마냥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이제는 곧 철거의 운명에 처해있는 어두침침한 지하에 누워있는 레닌의 묘를 찾았다. 러시아의 역사를 바꿔버렸던 사나이, 러시아를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나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 그러나 지금은 곧 철거될 하나의 밀랍에 불과하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반듯이 누워있는 그의 얼굴엔 싸늘한 조명이 비취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참배하는 유치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광장 한 켠에 서있는 바실리 성당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붉은 광장에 어울리게 주조색이 어두운 붉은색이었는데 러시아의 역사가 그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황금의 긴 사제 복장을 한 사제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승전 기념탑은 정말 웅장하였다. 까마득한 높이의 탑이 서있고 탑의 거의 꼭대기 부근에 말 탄 용사들이 하늘을 향해 달리는 자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탑의 3면에는 각종 모양의 영웅적 동작들이 아름답게 부조되어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신혼부부들이 쌍쌍이 찾아들어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새기는 것으로 신혼의 첫 행진을 하고 있었다. 같은 지역에 있는 ‘2차대전 기념관’은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생각을 깊게 가지게 하는 곳이었다. 볼만한 곳이었다. 보지 못했던 수많은 총, 거대한 대포, 그리고 사람을 살상하기 위해 고안된 각종 무기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이 과연 이런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레닌의 숲은 모스크바 시내를 환히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었다.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도 자유의 바람은 예외 없이 찬란히 불고 있었다. 레닌의 숲 광장에서 우리들은 시선을 뗄 수 없는 장면들을 발견하곤 한참동안 넋을 잃고 숨을 죽이기도 했다. 누가 보던 말 던 아랑곳없이 끌어안고 장시간 키스하며 서있는 남녀들, 앞가슴의 극히 중요한 부분만을 체면상 약간 가린 아가씨, 그 가린 것이 흡사 반창고를 붙인 듯함을 보고 우리 모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명문 모스크바대학은 레닌의 숲 근방에 있었다. 안에는 들어가 볼 수가 없고 그 웅장하고 멋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는 첨탑을 정문에서 쳐다만 볼 수밖에 없음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이 대학 도서관은 1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단다. 아쉬움을 남기고 런던으로.
8.20(일) 런던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처음 찾아 간 곳이 Albert동상. 찬란한 금칠을 한 동상이었다. 동상 뒤쪽의 넓은 숲과 공원은 두고두고 생각나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바로 맞은편에 정명훈이 지휘한 예술의 전당이 있었다. 트라팔카 광장, 템즈 강, 런던 브리지, 타워 브리지, 런던 성, 국회의사당, 빅밴 시계탑, 웨스트민스터 사원 등을 구경했다. 템즈강과 런던 브리지는 옛날 중학교 영어 교과서 표지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회의사당 옆의 공원에 서 있는 처칠의 동상은 그 표정과 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런던에서의 가장 백미는 역시 버킹엄 궁전이었다. 마침 날씨도 화창하고 좋았으며 또 근위병 교대식을 볼 수 있는 날이어서 다행이었다. 교대식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넓직한 궁전 앞뜰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테러가 시도되고 있다는 정보로 근위병 교대식을 취소한다는 정보가 흘러나오자 관광객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웅성대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그 특유의 붉은 제복과 검은 털모자를 쓴 기병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교대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빨리 울타리 쪽으로 갔다. 그러나 키 큰 코쟁이들 틈에서 아무리 뒤꿈치를 들어봐야 헛수고였다. 그래서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서 겨우 교대식을 하고 있는 대열의 일부분만 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나는 불현듯 그 붉은 멋진 기병들 위로 덕수궁이 나타나면서 곤룡포를 입은 우리의 상감마마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엄한 장면이 크로즈업 되었다. 엄청난 문화의 이질감이 가슴 깊이 젖어들었다. 뒤이어 우리 문화의 독특한 친근함이 더욱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혼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영국에서의 대체적인 느낌은 고풍, 신사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각이 나라의 정치를 책임지고 왕실을 그대로 존속시켜 모든 것이 여왕의 것이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여왕의 은덕으로 여기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그 정체성, 그것이 나의 눈에 비친 영국이었다. 파리행 유로스타를 타고 해저 터널을 지나 파리로.
8.21(월) 00:10 르네상스 호텔 도착. 바다인지 육지인지도 모르고 또 낮과 밤의 구분도 아주 희미한 상태에서 섬과 대륙을 넘나든 셈이다. 파리는 나에게는 두 번째이지만 아내는 처음이다. 개선문, 에펠탑, 나폴레옹 무덤, 노틀담 사원, 루불 박물관 등을 구경했다. 베르사유 궁전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루불 박물관은 다시 또 보아도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 길을 잃어 한 때 혼 줄이 났었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아내가 만약 혼자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지금도 아찔할 뿐이다. 몽마르뜨는 사실 우리 해운대의 달맞이 고개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건만 왜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까? 그것은 문화적 환경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진단해 본다. 달맞이는 먹자판 놀자판이지만 몽마르뜨는 예술과 자유분방함과 멋이 공존하기 때문이라고. 길가의 악사는 너무나 평화롭게 연주하고 있었고 간판들도 하나하나가 모두 예쁘게 예술 아닌 것이 없었다. 유럽이 두 번째이지만 좋은 연주회를 감상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언제 한번 여유롭게 와서 파리에 며칠 머물면서 바스티유 오페라도 보고 세느강을 거닐면서 낭만을 즐기고 쇼팽, 베르리오즈, 리스트, 포레 등을 만나봤으면 좋으련만!
8.22(화) 리용역에서 TGV로 제네바 행. 그 유명한 말로만 듣던 몽불랑을 보기 위하여 샤모니 마을로 향했다. 샤모니 마을에는 몽불랑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올 때 차 안에서 안내원이 몽불랑은 너무 높아 심장이 약한 사람은 아예 올라가지 말며 천천히 걸어라고 엄포를 놓아서 겁이 났다. 케이불카는 매우 길고 정말 높았으며 흘러내리는 빙하와 만년설 위로 지나갈 때는 정말 신비로운 나라에 온 느낌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빠졌다. 그런데 정작 종착점에 가까이 오니 케이불카는 거의 수직으로 섰고 아찔했다. 케이불카는 아주 높은 뾰족한 바위 위에 걸쳐져 있었는데 너무나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다. 힘든 숨을 할딱이며 전망대에 겨우 올라갔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아래로 위로 찾아다니다 한 곳에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고소증으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눈 덮인 알프스의 영봉들이 줄줄이 서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눈으로 덮인 칼날처럼 험난한 등성이를 타고 올라오는 하이커들이 있었다. 그 높고 뾰족한 바위 위에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설치했는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전망대에서 더 높은 곳에 또 하나의 특별히 뾰족한 전망대가 있었다. 거기는 곤돌라로 밖에 갈 수가 없는데 거기에도 사람들이 개미처럼 난간에 붙어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쳐다만 보아도 아찔하고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정작 몽불랑은 거기가 아니고 전망대에서 비스듬히 높은 곳에 있었고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몽불랑 높이 4807m, 케이불카 높이 3842m)
8.23(수) 제네바 movenpick hotel숙박 버스로 mirano로. 미라노는 찬란한 음악의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다. 융성하던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스포르체르코 성은 개인이 살기 위한 성으로선 제일 큰 성이라고 한다. 그 안에 악기 박물관이 있는데 641종의 온갖 악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내가 악기 박물관에서 혼이 나가 있는 사이 아내는 옛 왕실에서 사용하던 도자기를 보관하고 있는 도자기 박물관에서 혼이 나간 모양이었다. 서로가 자기 혼자 보기 아까와 하면서 “오데가서 머하고 그 종거 안보고... 아이고...”했다. 두오모 성당도 굉장했고 유명한 스칼라좌 앞에 왔지만 먹지 못하는 떡이었다. 스칼라 광장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8.24(목) 오늘은 Firenze. Firenze 역시 음악의 역사가 곳곳에 배어있는 도시지만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의 관광이다. 여기는 이태리 문화의 중심지다. 가죽 산업이 우수하고 중세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다. 르네상스의 중심, 예술의 중심이었다. 단테의 집을 보았다. 신유리아 광장, 다비드상, 미케란젤로 언덕 등을 보았다. Firenze는 오페라의 탄생지이며 베르디 푸치니등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라노와 피렌체를 대충 주마간산으로 보고 로마로 향했다.
로마로 가는 도로변의 산 위에 집들이 있었다. 그것은 중세 시대에 페스트를 피해서 올라간 것이라고 한다. 고속도로의 중앙 분리대에 유도화가 빽빽이 심어져 있었다. 매우 아름다웠다. 차들이 모두 낮인데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고 있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열차가 다니고 있고 유럽 전역이 기차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업의 광고 간판이 안보이고 논이 없었다. Rome는 유럽 문화의 중심이다. 정이 많은 나라, 낯을 많이 가린다. 애국심이 강하다. 뭉치는 힘이 있다. 성격이 급하다. 그러나 일할 때는 느리고 무조건 8시간만 일한다. 로마는 고대 중세 현대가 혼재하고 있었다. 찬란하던 조상들이 남기고 간 흔적과 부러진 기둥, 돌맹이들로 먹고 사는 후손들.
8.25(금) 항상 상상만 하던 로마에서 1박을 했다. 제일 처음 찾은 곳이 저 유명한 원형 극장 콜로세움. 긴 세월을 이기느라 중병을 앓고 있는 듯한 콜로세움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안을 잠깐 들여다보니 폐허 바로 그것이었다. 술 취한 네로가 질탕하게 웃어 제치고 수만 관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목숨 건 죄수들의 사자와의 사투가 눈에 보이는 듯 하였다. 그 옛날 로마의 힘이 어떠했는가를 이 건축물로 짐작 할 수가 있었다. 로마는 볼 것이 너무나 많았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우리의 황성옛터에 해당하는 포룸, 진실의 입, 로마 공회당, 로마 시청, 베네치아 광장, 통일 기념관, 해양의 신 포세이돈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영화 벤허의 대전차 경기장은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보존되어 있었다. 경기장 위로는 왕과 귀족들이 경기를 내려다보는 팔라티노 언덕이 있었다. 언덕에는 그 특유의 로마의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서니 나의 귀에는 요란한 전차바퀴 소리와 수만 관중의 함성이 귓전을 울렸다. 벤허의 그 장면은 여기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트레비 분수, 레스피기의 관현악곡에 나오는 바로 그 트레비 분수다. 하늘 높이 뿜어 나오는 분수 사이로 레스피기 그 특유의 희뿌연 색채적 음향이 각색되어 분출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티칸 시국과 베드로 성당이다. 끝까지 따르리라 맹세했던 스승, 예수가 잡히던 날, 가야바의 뜰에서, 스승이 심문을 당하는 것을 멀찍이 서서 불을 쪼이며 보고 있던 베드로, 누군가가 베드로 더러 "저 자도 예수와 한패요" 했을 때 그는 단호히 "이 여자여,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했다. 조금 지난 후 또 누군가가 "너도 저 예수와 한패지?" 하니 "나는 아니오" 하고 슬슬 자리를 피하는데 누가 또 다그치며 "맞다. 이 갈릴리 사람도 한패야" 하자 "이 사람아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소" 하며 황급히 도망치자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자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부정하리라"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밖에 나가 한없이 흐느꼈다. 이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베드로 성당으로 연결되어 있는 박물관의 천장과 벽에 그려져 있는 수많은 성화들은 그야말로 신앙의 힘이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사의 바로 그것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을 직접 내 눈으로 보면서 나는 너무나 감격했고 감사했고 또 나의 바로 옆에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살아 있음을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했다. 위대한 작품,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하나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나는 로마에 왔노라, 그리고 베드로 성당을 보았노라, 그리고 로마를 보았노라,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노라’ 이렇게 감격하며 보고 있는데 정옥길 교장 내외가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저편에서 잠깐 보이더니 순간 옆문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 인원점검을 하니 정교장 내외가 없었다. 안내원에게 정교장이 그 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아뿔사 그 분은 이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군요."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로마에서의 백미인 베드로 성당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베드로 성당! 말로 다 할 수 없는 웅장한 규모, 아름다움, 신비로움. 우리는 행운이었다. 마침 그 날 미사가 있었다. 넓고 넓은 성당의 입구 쪽에서 천사의 소리와도 같은 성가가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울려 나오지 않는가! 맨 앞에 예복을 입은 사제들이 촛불을 들고 느릿느릿 들어오고 그 뒤로 수많은 성도들이 따르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성당의 중앙에는 어떤 신비로움이 겹겹이 쌓인 듯한 단이 형성되어 있는데 각종 부조가 새겨져 있는 검은 기둥들은 높은 천장을 향해 받혀져 있었고 천장 가까이에는 또 초상 같은 그림들이 있었다. 그 단 밑이 바로 베드로의 무덤이란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느니라"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의 무덤 위에 이렇게 거대한 나라가 세워졌으니, 이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나라인 것이다. 원래는 로마에서 1박을 더하고 모스크바로 가도록 되어 있었으나 비행기 편이 여의치 않아 야간열차로 스위스 쭈리히로 가서 모스크바로 간다고 한다. 여행사 직원은 많은 충고를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호텔 비용을 줄이기 위한 여행사 측의 횡포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경비는 더 많이 든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쭈리히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8.26(토) 08:50 Jurich에 도착했다. 한국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스위스 국립 공대로 갔다. 학교 안에는 들어 갈 수가 없고 정문 앞까지 갔다. 정문은 시가지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Jurich는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곳으로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십자가가 많이 보였다. 스위스 국립 공대는 아인슈타인이 공부했던 대학이다. 스위스는 너무나 깨끗하고 잘 사는 나라였다. 어느 한 곳도 아무렇게나 버려진 땅이 없고 전 국토가 공원처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산과 군데군데의 그림 같은 주택들, 그리고 목장과 목초지들, 근면하고 검소한 국민들의 생활 모습이 환히 보이는 듯 하였다. 자연 환경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찌하여 이렇게 지상의 낙원으로 가꾸어 놓았을까.
이제 9박 10일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 갈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수배하는 데는 또 한 차례의 고생이 따랐다. 가이드양은 비행기표 때문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고 일정을 바꾼 것 때문에 극성스런 몇몇 젊은 여교사들 등살에 몹시나 지쳐 있었다.
17:39에 모스크바로 향발. 창가에 미모의 러시아 아가씨가 앉고 그 옆에 아내가 앉고 그 옆에 내가 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아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 노랑머리 러시아 아가씨와 대화를 시도했다. "I am from south korea. I am middle schoole principle. I am musician, composer. I like tchaikofsky, symphony " 하니까 자기는 러시아에 있는데 쭈리히에 있는 남자 친구에게 갔다 온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했으며 자기도 차이코프스키를 매우 좋아한다고 하면서 ‘백조의 호수’중 <정경>의 테마를 노래하기도 했다. 나도 비창의 제1주제 테마를 콧노래로 부르니 그 아가씨도 같이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주소를 주고받고 하는데 아내가 나타났다. "앗따 여기 야단났다. 주소 적고 야단이다." 내리면 그만일 테지만 그래도 여자들은 그런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메모해 둔 주소로 편지를 했더니 이내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답이 왔다. 나도 카드를 보냈지만 그 이후론 소식이 없다.
8.27(일) 돌아오는 날이다. 우리는 시차로 하여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서울에 도착하고 보니 05:50이었다. 그런데 가이드 정양이 기어코 뻗어 버리고 말았다. 혼수상태가 되어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일정 변경으로 인한 복잡한 업무로 시달린데 다 계속 다그치는 젊은 여교사들의 등살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아 혼수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9박 10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 이제 각각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가 주어진 삶에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찬란한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를 것이다. 로마의 태양이, 한국의 태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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