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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티, 해밀턴 (Hamilton Harty 1879~1941)
북아일랜드 다운 군 힐즈버로에서 태어났다. 오르가니스트인 부친에게 음악 교육을 받고, 12세 때부터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독립하였다. 1900년 런던으로 가서 피아노 반주자를 하면서 작곡을 시도하였다. 1904년 이름 높은 영국의 소프라노가수 아그네스 니콜즈(1877∼1959)와 결혼하였다.지휘를 시작한 것은 상당히 늦었으나 1920∼1933년 맨체스터의 할레 관현악단의 상임을 맡아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5년에 나이트로 서위되었다. 그의 프로그래밍은 고전파와 낭만파의 균형이 잘 잡힌 것이었는데 베를리오즈를 즐겨 연주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아일랜드 교향곡]을 비롯하여 작곡한 것이 상당히 많았다. 그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하는 것은 헨델의[수상의 음악]과 [왕궁의 불꽃놀이]의 뛰어난 편곡일 것이다.최근에는 오리지널 판이라고 하는 전곡 연주도 나타나고 있는데, 적절히 발췌하여 근대적 관현악법을 잘 살린 하티 판은 지금도 그 생명이 살아 있으며 여전히 애호되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간 하티의 [관현악 작품집](샨도스 2매조 / 컬럼비아 분매)가 발매되고 [아일랜드 교향곡][바이올린 협주곡]등이 처음으로 전곡 녹음되었다.
크나퍼츠부슈, 한스 (Hans Knappertsbusch 1882~1965)
독일의 엘버펠트에서 태어났다. 양친의 반대로 음악가에의 길을 걷지 못하고 처음에는 본과 뮌헨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동시에 쾰른 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배웠는데 '가장 재능이 없는 생도'로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바그너에 심취하였다. 1909년 이래 바이로이트에서 한스 리히터의 조수를 수년간 하였고 1922턴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는데 여기서 뮌헨은 그의 제2의 고향으로서 강한 유대를 가지게 되었다. 나치스에게 추방당해 1938년부터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및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였는데, 전후에는 다시 뮌헨에 복귀하였고 1951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처음으로 나타나 뮌헨에서 운명할 때까지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보여 주었다. 크나퍼츠부슈는 그의 활동 무대를 뮌헨과 빈 그리고 바이로이트에 한하였고, 연주 횟수와 레퍼토리가 적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인기에는 못미치지만 푸르트벵글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천재적 음악가였다. 시대의 흐름이나 청중에 동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믿음과 신념의 길을 따랐던 순수한 대 예술가였던 것이다. 만년에는 연주회의 사례를 대부분 받지 않았고, 그 대신 원할 때에 원하는 곡목만을 지휘했던 것 같다. 그는 매스컴에 쫓기고 명성만을 갈구하고 스케줄을 소화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크나퍼츠부슈는 그의 풍모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휴머니스트가 아니다. 외견상 냉정함과 심술궂음이 체내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물론 그것은 따스함과 선의 대립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갈등이 그의 예술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바그니의 [지크프리트의 목가](웨스트민스트)를 들으면 따스하고 평화롭기만 한 발터에 비해, 외면은 사귀기 어렵고 소박하기만 한 크나퍼츠부슈의 표현이 그 내부에 뜨거운 정애와 인간미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연주에서는 템포가 빠르고 미친 사람처럼 솟구치는 정열에 지배되어 극단적으로 흔들렸다. 근래의 지휘자들은 30대, 40대에서 이미 정리된 연주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격렬한 정신과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만년의 크나퍼츠부슈는 현저하게 템포가 느려지고 스케일의 크기와 품격의 높이가 거인의 음악을 생각나게 하며, 충분한 리듬과 함께 곡을 풍부하게 숨쉬게 하고 있다. 작곡자가 쓴 모든 음표가 실재적인 존재로서 울리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 깊이에서 솟아나는 듯한 격렬한 감동을 안겨 준다. 외면은 시골 무지렁이 같고 딱딱하지만 그것마저도 표현의 한 요소화하여 정신적인 예술에 봉사하였다. 영화에서 보는 그의 지휘 모습은 악마처럼 무섭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초인으로까지 상상되는 것이었다. 크나퍼츠부슈는 바그너와 브루크너를 가장 장기로 삼았다. 푸르트벵글러와 뵘의 바그너는 음색의 관능미가 부족하여 고전적인 조형으로 스케일을 작게 한 데 비하여, 세부를 꽉 채우고 이를 도려내고 또 도려내면서 밀어붙이는 그의 방식은 참으로 이들 두 작곡가에 걸맞는다. [발퀴레 (제1막파 종막)](런던)에 그의 특징이 집약되어 있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웨스트민스트]도 근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인생의 적적함과 자연의 위대함을 브루크너처럼 진실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지크프리트의 라인에의 여행]파 [장송 행진곡](런던)의 훌륭함도 바로 여기에 연유하고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8번],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이상발터 협회), 소품으로서는 콤자크의 [바덴 아가씨]에서 그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칠러의 [빈의 시민], J.슈트라우스의 [빈 숲속의 이야기] [안만 폴카], 슈베르트의 [군대 행진곡], 베버의 [무도회에의 권유](이상 런넌) 등토 다른 지휘자가 감히 따를 수 없는 초대형급의 명연이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 한스 (Hans Schmidt Isserstedt 1900~1973)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의 고등음악학교와 대학에서 공부는데, 학위 논문은 {모차르트 초기 오페라에 있어서의 악기 용법에의 이탈리아의 영향}이라는 제목이었다. 졸업 후에는 부퍼탈, 로스 토크, 다름슈타트 등의 극장에서 근무했으며, 1935년에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악장으로 취임했다. 이 지위는 1942년까지 계속되었고,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오페라 감독을 거쳐 1944년에는 총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에는 함부르크에 새로 생긴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상임 지휘자로 1971년까지 재임했고, 1972년 이후에는 명예 지휘자로서 이 악단과 인연을 맺고 있다. 슈미트 이셰르슈테트는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의 연주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이는데 기여했으며,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로서는 다른 사람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수완을 보였다. 그는 북독일방송교향악단과 함께 파리를 비롯한 에버러, 미국 등지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스톡홀름 필하모니의 수석 상임 지휘자를 겸하기도 했다. 물론 그 밖의 다른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도 많이 했는데, 120개 이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슈미트는 특히 북부 독일에 많은 팬이 있었으며, 그의 이름이 레코드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베를린 시절인데, 그 무렵에는 주로 파퓰러 뮤직의 소품을 많이 녹음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이 슈미트의 본질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함부르크 시절에는독일에서 비교적 냉대를 받았던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등의 음악 보급에 주력했다. 슈마가 제일 사랑한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였으며, 모차르트의 관현악곡,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을 자주 연주다. 슈미트의 음악은 격렬한 열기를 내세운다기보다는 정리, 정돈된 것으로서, 언제나 온화한 격조를 지니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그의 착실하면서도 무겁고 두터운 울림은 참으로 독일 감성이 주류를 이루는 지휘자란 느낌을 준다. 녹음은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두드러지게 의욕적인 활동을 보였는데, 표현에도 적극성을 보인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레코드는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8번], 북독일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등이 돋보인다.
벤다, 한스 폰 (Hans von Benda 1888~1972)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군인을 지망하여 유년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 현역 장교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음악은 뮌헨과 베를린에서 배웠으며, 1926년 베를린 방송국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30년 자신의 실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는데, 단원으로는 젊고 우수한 주자들을 기용하였다. 그중에는 후에 파퓰러계의 스타가 된 바이올리니스트인 헬무트차하리아스도 있었다. 후에 이 악단은 베를린 실내관현악단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2차 대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활약하였는데, 벤다의 은퇴와 함께 해체되었다. 그는 1945년 스페인에 가서 발렌시아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는데, 1952년 베를린에 돌아왔다. 레코드는 스테레오로 녹음된 L.모차르트의 [장난감 교향곡]과 모차르트의 팬터마임을 위한 극음악인 [레 프티 리앙](텔레푼켄)이 유일한 음반인데, 친근한 접근방법에서 베테랑다운 교묘함이 엿보인다. 1972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슈나이트, 한스-마르틴 (Hans-Martin Schneidt 1930~)
키친겐에서 태어난 독일의 교회 음악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성가대의 멤버가 되고 토마스 학교에서 라민에게 배웠다. 그 후 1952년까지 뮌헨에서 K.헤라헤그너, 아이히호른, 슈터데르만, 피크너 등을 사사했고, 뮌헨의 에를레제 교회에서 칸토르와 오르가니스트를 맡았다. 1955년에 베를린의 슈팡다우 교회음악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이 곳에서 슈팡다우 칸토라이와 베를린 바흐 콜레기움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1963년에는 그 공으로 베를린 예술원상을 받기도 했다. 베를린에서는 요하네스 슈티프트 복음 교회의 칸토르와 오르가니스트를 맡았고, 카이저 빌헬름 게데히토니스 교회의 바흐 합창단을 새로 조직했다. 1963년에 부퍼탈로 옮겨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1973년부터 함부르크의 호흐슐레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이미 베를린 시절부터 객원 지휘를 맡은 바 있으며, 오르가니스트, 쳄발리스트로서 이름이 높아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고 있다. 바흐의 [요한 수난곡](아르히프)과 몬테베르디의 [베스펠레](아르히프) 등이 중후하고 견실한 대표적인 연주에 속한다.
홀라이저, 하인리히 (Heinrich Hollreiser 1913~)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뮌헨의 음악예술 아카데미에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 감독이기도 했던 예르멘도르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32년 비스바덴을 시작으로 하여 다름슈타트, 만하임, 뒤스부르크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42년에는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후임으로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독일의 명우 구스타프 그륀트겐스의 감독 시절의 뒤셀도르프의 음악 감독을 거쳐 1952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1961∼1964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다. 이 동안 1947년 함부르크에서 브리튼의[피터 그라임스]독일 초연을 지휘한 외에, 1969년에는 보리스 블라허의[20만 탈러]의 베를린 초연도 지휘하였다. 1964년 이후는 특정 단체에 적을 두지 않고 객원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베르크의[보체크], 힌데미트의[화가 마티스], 바르토크의[푸른 수염 영주의 성]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얻었는데, 같은 고향의 R.슈트라우스와 바그너 연주에 정평이 있으며 1973년, 1974년, 1975년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참가하고 있다. 하라시에비츠와 협연한 쇼팽의[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2번](폰타나)에서 겨우 그의 지휘를 접할 수가 있다.
발베르크, 하인츠 (Heinz Wallberg 1923~)
서독의 베스트팔렌 지방에서 태어났다. 도르트문트와 쾰른의 호흐슐레에서 배우고, 1946년에 졸업 직후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 이후 뮌스터, 하겐, 함부르크등의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로서 수업을 연마한 다음, 1954년부터 아우크스부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는 브레멘의 음악 감독으로, 1961년부터 비스바덴의 음악감독과 각지의 오페라 극장을 전임하였고, 이 동안 아르헨티나의 테아트로 콜론의 독일 부장을 역임하였다. 또 1960년 이후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빈 톤퀸스틀러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75년 이래 에센 주립극장의 음악 감독과 바이에른 방송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겸임하였다. 현재도 에센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을 비롯하여 국내외에 널리 객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레코드는 플로토의 오페라 [마르타] 전곡(오이로디스크)이 견실하게 정리된 대표적인 음반인데, 오페라적 분위기가 넘치고 있다. 그 밖에 멘델스존의 교향곡[이탈리아](세라핌)가 있다.
빈셔만, 헬무트 (Helmut Winschermann 1920~)
오보에 주자이기도 하며, 독일 뮐하임에서 태어났다. 에센과 파리에서 오보에를 배우고, 1939년에 오버하우젠 시립관현악단에 오보에 주자로서 입단하고, 1945년에서 1951년까지는 헤센 방송교향악단의 독주 오보에 주자가 되었다. 그 동안인 1948년부터는 데트몰트 음악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였고, 1951년부터는 그곳의 오보에와 실내악의 마스터 클래스를 담당하였고, 1956년부터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쿠르트 레델, 레히너 등과 콜레기움 프로 아르테라는 실내악단을 조직하고, 1954년에 이 단체가 콜레기움 인스트루멘탈레 데트몰트로 개칭하고 나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 더욱 카펠라 코로니엔시스, 리스텐바르트 실내관현악단, 슈투트가르트 실내관현악단의 멤버로서도 활약하였고, 이러한 단체와 함께 또는 독주자로서 널리 연주 여행도 나갔다. 1960년에는 독일 바흐 졸리스텐을 조직하였다. 빈셔만은 오보에 주자로서도 지휘자로서도 독일 바로크 음악의 권위자이고, 특히 바흐의 작품을 지휘하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독일적인 리듬감이 있는 견실한 구성의 음악을 창출해 낸다. 레코드는 바흐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그 중에는 [푸가의 기법]처럼 독특한 견해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대표음반으로는 [관현악 모음곡] 전 4곡(RCA)을 들고 싶다.
크리프스, 헨리 (Henry Krips 1912~)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요제프 크리프스의 아우이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에서 공부했다. 1935년 인스브루크 시립극장의 어시스턴트를 한 다음,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잘츠부르크 시립극장의 음악 감독,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빈의 폴크스오퍼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나치스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기 때문에 1939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겨 치르소와 발레단의 지휘자, 작곡가로서 그리고 그 밖에 실내악과 합창 콘서트를 열고 이를 지휘하였다. 전후는 1948년 창설된 파스의 서부 오스트레일리아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고, 1949년에는 애들레이드의 남부 오스트레일리아에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이 무렵부터는 유럽 각지에도 자주 객원 지휘를 하였고, 1967년부터는 런던의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현재 내셔널 오페라)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1969년 빈으로 되돌아갔으며, 1970년에는 브레겐츠 음악제에도 초대되었다. 또한 1969년에는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교향악단에서 종신 지휘자의 칭호를 받았다. 작곡가로서도 오페라, 발레, 기악곡, 가곡, 영화 음악 등을 발표하고 있는 크리프스는 1978년 내한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향을 지휘하였다.
치즈, 헨리크 (Henryk Czyz 1923~)
폴란드의 구르존지에서 태어났다. 토른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배우고, 포즈나니 음악원에서 지휘와 작곡을 전공하고, 1952년에 졸업하였다. 지휘자로서는 재학중인 1948년에 폴란드 국립방송 오케스트라를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동안 아무런 활동이 없었다. 1962년 바르샤바 오페라에서 드뷔시, 오네게르, 스트라빈스키를 지휘하게 된 것이 본격적인 데뷔라고 할 수 있다. 1965년에 펜데레츠키가 뮌스터 대사원 창립 700주년 기념을 위해 작곡한 2시간 가까운 대작 [성 누가 복음에 의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폴란드에서의 초연 및 그 레코딩(무자)에 성공하였다. 그 이래 현대 음악에 강한 지휘자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1971년부터 1974년에 걸쳐 뒤셀 도르프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작곡가로서는 뮤지컬과 오페라 부파 등 기지에 찬 것이 많다.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Herbert von Karajan 1908~1989)
외과 의사 에른스트 폰 카라얀과 슬로바키아 출신인 그의 처 마르타 사이에서 차남으로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12년에 레트빙카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서 피아노를 쳤다.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권유에 따라 지휘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927년에 처음으로 연습 지휘자를 하였는데 그 작품은 베토벤의 [피델리오]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1929년 3월 2일에 울름 시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고,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35년에 아헨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27세로 독일에서 가장 젊은 음악 총감독이었다. 1937년 6월 1일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을 들었다. 1938년에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함으로써 최초의 연주회를 열었다. 같은 해 9월 30일에 처음으로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를 하였는데 작품은 [피델리오]였다. 1939 년에 독일 그라모폰 사와 최초의 계약을 맺었다. 1941년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국가 지휘자 슈타츠카펠마이스터의 칭호를 받았다. 1946년에 빈 악우협회(樂友協會)의 종신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1월 18일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최초의 연주회를 열었다. 1948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있어서의 독일 오페라 담당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50년에 영국의 레코드 회사 EMI가 녹음용으로 창설한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1951년에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초의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지휘를 하였다. 작품은 [니벨룽겐의 가락지]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였다. 1956년에 베를린 필하모니 의 종신 예술 감독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이후 4년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예술 감독을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같은 해 6월 14일 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예술 감독에 취임하였다. 1964년에 텔레비전을 위한 영화 개발과 제작, 거기에 대한 판매를 주된 목적으로 한 회사 코스모텔을 설립하였고 그 첫째 작품으로서 이탈리아의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 연출, 카라얀 지휘에 의한 [라보엠]을 완성하였다. 이어서 프랑스의 영화 감독 앙리 크루조와의 협력에 의해 콘서트 영화를 만들었다. 1967년 3월에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의 제1회를 개최하고, [발퀴레]를 카라얀 자신의 연출, 지휘로 상연하였다. 1968년 10월에, 더욱 음악적인 감각을 획득하기 위한 과학을 장려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동시에 젊은 지휘자를 위한 콩쿠르를 개최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 재단'의 발족을 베를린에서 발표하였다. 1969년 2월에 프랑스의 문화상 앙드레 말로의 제창으로 1967년에 탄생한 파리 관현악단의 예술감독에 2년 계약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에 잘츠부르크 성령강림제 콘서트를 시작하였다. 1977년 5월에 13년만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 복귀하여 [트로바토레] [피가로의 결혼] [라보엠]을 지휘하였다. 1984년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고 한국에 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 지휘했다. 카라얀의 특질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라얀이 이른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큰 지휘자라는 것을 간가 할 수는 없다. 카라얀이 베를린이라는 화려한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울름 또는 아헨이라는 독일의 중소도시의 오페라 극장에서, 큰 오페라 극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조건과 싸우면서도 여러 작품을 다루었다. 거기서 젊은 카라얀은 가수나 오케스트라의 단원을 상대로 지휘를 한다는 것이 어떠한가를 십분 체득한 것이 틀림없다. 현역의 지휘자로서 카라얀과 같이 중소의 오페라 극장에서의 지휘 경험을 맛본 지휘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왕년의 지휘자의 대개는 눈물겨운 수업 시절을 맛본 경험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카라얀은 옛 타입의 지휘자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의 지휘자는 콩쿠르에서 우승한다든가, 또는 어떤 행운의 찬스를 잡았다든가 하여 이렇다 할 수업기간도 없이 세상에 등장하는 일이 많다. 한편 카라얀은 그의 연령을 가진 연주자로서는 이례적인 일인데 그는 레코드의 유효성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1939년에 독일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은이후, 오늘날까지 실로 엄청난 수의 레코드를 녹음해 왔다. 지금도 그 생각이 전혀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1960년대경까지는 연주가 사이드에서 레코드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없지도 않았다. 그러한 시대부터 카라얀은 쭉 레코딩을 계속해 왔다. 레코드에 수록되는 연주는 완전해야 한다는 것이 실제의 연주회장의 연주 이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레코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레코드 녹음을 다른 여하한 지휘자보다도 적극적으로 해왔다는 것이 카라얀의 연주에 미묘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두 가지 면, 요컨대 카라얀이 중소 오페라 극장에의 쓰라린 경험을 맛본 지휘자라는 점과, 오래 전부터 적극적으로 레코딩을 해온 지휘자라는 점을 무시하고는 카라얀의 연주를 생각할 수가 없다. 카라얀의 특질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섬세하고 치밀하며 흐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연주를 하게 되는 필연성이 원래 카라얀의 내부 세계에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적극적으로 레코딩함으로써 비로소 조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제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는 많은 화제들을 뿌리면서 산 이 시대의 큰 별로 1989년 그 명을 다했다. 카라얀은 이미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하고 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이 각각의 시점에서의 카라얀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므로 대표적 레코드를 든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의 세 종류는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다. 최초의 것은 1951년에서 1954에 걸쳐 녹음된 필하모니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이고(에인절), 두번째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1961년부터 1962년에 걸쳐 녹음한 것이고(그라모폰), 세번째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녹음한 것이다(그라모폰) 물론 이 3가지를 듣고 카라얀이라는 연주 작품이 매우 다양한 지휘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1950년대의, 그리고 1960년대의, 더욱 1970년대의 카라얀의 연주의 성격의 일단은 알 수 있다. 또 각각 내용이 아주 충실한 연주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시 찾은 핸드백 198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카라얀은 이틀 동안 지휘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눈을 감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장님 지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음악사를 보면 장님 연주가가 더러 있지만 카라얀은 지휘할 때만 눈을 감기 때문에 일시적인 장님이 되는 셈이다. 애처가 카라얀은 이번 공연에도 엘리에트 부인을 데리고 왔다. 카라얀은 척추의 이상으로 걸음걸이가 매우 부자유스러워서 부인이나 매니저가 늘 부축하고 다녔다. 그러나 무대 왼쪽에서 걸어나올 때만은 혼자서 걸어나왔다. 어떤 때는 쓰러질듯이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걱정스러운 표정들을 지으며 바라보고만 있을 뿐 부축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부인과 매니저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부축을 부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카라얀은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인지 이번 공연을 주최한 신문사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신문사의 회장이 베풀겠다는 파티도 물리쳤고, 게다가 독일 문화원 원장이기도 한 독일대사가 만나자고 하는 데도 모두 뿌리쳤다. 그리고 리허설(연습)을 할 때에도 만일 한 사람이라도 엿본다면 중지하겠다는 날카로운 선언을 했다. 소문에 듣던 대로 독재를 한 러시아의 무서운 이반 뇌제(雷帝)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가 끝나고 카라얀이 엘리에트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호텔로 가려고 차를 탈 때 부인이 들고 다니던 핸드백을 얼결에 땅에 떨어뜨렸다. 마침 길을 지나던 한 처녀가 그 핸드백을 주워서 카라얀 부부가 묵고 있는 호텔로 전달했다. 그 때까지 부인과 카라얀은 어디서 분실했는지 몰라서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혹시 소매치기 당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만일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에 떨어뜨린 그 핸드백을 누군가가 주워서 가졌더라면 카라얀 부부는 한국 방문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받았을지도 모른다. 카라얀은 이틀 동안의 연주회에서 한국 청중이 매우 엄숙하고 조용한 마음으고 감상한다고 흡족해하며 한국을 떠날 때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핸드백 사건도 결국 그의 호감에 한 몫을 한 셈이다. 알고보니 핸드백을 주워준 그 여성은 그전부터 카라얀의 열렬한 팬이었다. 카라얀은 어떤 사람과도 만나주지 않으면서도 핸드백을 주워준 여성에게는 특별히 무대 위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함께 사진을 찍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음악은 너무나도 위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절찬을 받은 것이다
슈타인, 호르스트 (Horst Stein 1928~)
독일의 라인 강 근처의 부퍼탈 시에 속하는 엘버펠트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음악 김나지움을 거쳐 쾰른의 음악고등학교에서 피아노, 오보에, 타악기, 성악을 공부하였으며 1949년에 부퍼탈 시립극장에 합창 지휘자로 들어가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극장에서 1951년까지 재직했으며 그 후 1955년까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4년 동안은 바이로이트의 음악제에서 크나퍼츠부슈, 크라우스, 카일베르트, 카라얀 등 유명한 지휘자 밑에서 지휘자로서의 식견을 넓혔다. 1955년에는 동베를린의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악장이 되어 1961년까지 활동했다. 이와 함께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을 비롯하여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등 명문 오케스트라도 지휘하여 명성을 높였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는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 대리로 지냈고 1963년부터 1970년까지 만하임 시의 음악 총감독 및 만하임 시민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지냈다. 1970년에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제1지휘자로 취임했으나 1973년에는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슈타인은 1978년부터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1980년에는 음악 감독이 되었다. 각지의 오페라 극장이나 관현악단 또는 음악제에 객원 지휘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1977년부터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바이로이트 음악제에는 1962년 바그너의 [파르지팔]로 데뷔하였고, 1970년에는 [니벨룽겐의 가락지]를 지휘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음악제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에도 객원 지휘를 하고 있다. 슈타인의 지휘 활동은 매우 정력적이며 그가 만들어 내는 음악도 힘에 충만한데, 연주회는 물론 오페라의 경우도 레퍼토리를 좁게 한정시키는 일이 없으며 폭넓게 작품을 다루고 있다. 예컨대 오페라의 경우, 오직 독일 작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나 프랑스, 러시아의 작품도 다루고, 몇 개의 현대 오페라까지 초연하고 있다. 슈타인의 음악은 조형이 착실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오페라 지휘에 경험이 풍부한 경험자답게 감정의 기복을 두고 있어서 브루크너 같은 대곡에 이르면 전체적인 설계의 감미로움이 나타난다. 오페라의 전곡을 담은 레코드가 없는 점이 서운하긴하나, 굴다와 협연하고 빈 필하모니아를 지휘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런던)은 5곡 모두가 슈타인의 선천적인 지휘자의 탁월함을 돋보이게 한다. 교향곡의 경우는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런던)이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작품에 빠지지 않고 이성적인 정리를 보이고 있는 점이 슈타인의 특징이라 하겠다.
수당, 위배르 (Hubert Soudant 1946~)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철도원이긴 했으나 아마추어 지휘자로서 트럼펫도 불었기 때문에 5세 때부터 트럼펫을 좋아하게 되었고, 마스트리히트 음악원에서 트럼펫과 호른, 그리고 지휘법을 배웠다. 졸업한 뒤에는 마스트리히트 관현악단에 입단하여 제1호른 주자로 근무했다. 21세 때 힐베르슴의 네덜란드 국영방송 주최의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수한 재능을 인정 받아 네덜란드의 4개의 방송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경험을 쌓았고, 힐베르슴에서 장 푸르네를 사사했다. 또한 그 사이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프랑코 페라라의 하기 강습도 받았다. 1971년에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1위를 차지했고, 로테르담 필하모니, 헤이그 레지덴티 교향악단 등 네덜란드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었다. 1973년에는 카라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2위, 1975년에는 칸텔리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1위 등으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의 3개의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에 입상했다.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에이레, 영국, 독일 등의 각지로 초청되었다. 레코드는 영국의 파이와 계약을 체결하여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 제6번], 캄파넬라와 협연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2곡 이외에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곡과 협주곡 등을 런던 필하모니와 녹음했다.
길레스베르거, 한스 (Hans Gillesberger 1909~)
오스트리아 중부의 에벤제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소년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후 인스브루크와 빈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더욱이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빈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교회 음악과 음악 교육학을 전공하였는데, 그때부터 1939년까지 빈의 피아리스텐 교회의 합창 지휘자가 되었다. 바흐 협회 마드리걸 합창단의 지휘를 하였으며, 1942년부터 빈 소년합창단의 악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1945년부터 1953년까지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제2합창 지휘자와 병행하여 1946년부터 모교 아카데미의 합창 지휘와 발성법의 교수도 겸임하였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는 빈 징크 아카데미와 빈 실내합창단의 지휘를 맡았고, 1968년부터는 다시 빈 소년합창단의 악장으로 취임하였다. 길레스베르거는 이처럼 합창만을 위해 살아 온 사람으로서, 힌데미트를 비롯하여 그 밖에 같은 시대의 작곡가들로부터 합창 음악의 헌정도 받고 있다. 레코드는 거의 빈 소년합창단을 기용한 것인데, 오케스트라도 사용한 종교 음악을 주로 하였다. 소년합창단이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추어적인 면이 없지는 않으나 견실한 음악 구성은 이 지휘자의 인품을 느끼게 한다. 그중의 베스트로는 모차르트와 「레퀴엠」을 들 수 있으며, 슈베르트의 「미사곡 제6번」(이상 RCA)도 빈의 정서가 가득 흐르는 연주라 할 수 있다.
히르슈, 한스 루트비히 (Hans Ludwig Hirsch 1937~)
작곡가이기도 하다. 독일 메밍겐에서 태어났다. 뮌헨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마리아 - 란데스 힌데미트에게, 작곡을 겐츠머에게 배운 다음, 로마와 시에 나에서 페트라시에게도 배웠다. 또 산초뇨, 레헬, 자발리슈 등의 조수를 역임하여 지휘의 경험을 쌓고,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뮌헨 음악대학의 어시스턴트를 하였다. 마니에라 노바 성악 앙상블을 결성하고 그 지휘자가 되었고, 르네상스와 현대의 성악 작품을 연주하였다. 더욱 뮌헨에서 뮌헨 성악 졸리스텐, 프롤리레기움 무지쿰 실내관현악단을 창설하였고,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 각지의 실내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를 하였다. 그밖에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베네치아의 페니체 오페라의 극장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1975년부터는 베네치아의 국제 몬테베르디 협회의 예술 감독의 자리에 있으면서 몬테베르디와 그 주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레코드는 이제까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걸친 작품이 많다. 필하모니아 훙가리카를 지휘한 2집의[베토벤 무곡집](텔레푼켄) 등도 있다. 또 작곡가로서도 1964년 이래 실내악, 성악곡, 무대 작품 등 상당한 수의 작품이 있다.
슈타틀마이어, 한스 (Hans Stadlmair 1929~)
오스트리아의 노이호펜 근교의 클렘스에서 탄생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로서 오랫동안 뮌헨에서 살고 있다. 린츠, 빈, 슈투트가르트 등에서 지휘 공부를 하고 오페라의 지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한 뒤 1956년 뮌헨 실내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에 취임했으며 세계 각국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의 연주는 억제된 무거운 지휘가 특징이라 하겠는데, 레코드로는 바로크 고전파의 협주곡으로써 많은 명연주가들과 공연하고 있다. 플루트의 아드리얀, 하프의 밀도니안과 협연한 모차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덴온) 이외에 홀리거와 협연한 모차르트의 [오보에 협주곡](아르히프), 비발디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집](아프히프) 등이 있다. 1990년 뮌헨 실내관현악단과 내한, 세종문화회관에서 헨델의 [오르간 협주곡] 등을 연주했다
헨체 한스 베르너 (Hans Werner Henze 1926~)
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의 귀테르슬로에서 태어났다. 1942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의 국립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타악기를 배우고, 1946년 하이델베르크의 종교음악학교에서 포르트너를 사사하였다. 1947년, 1948년에는 다름슈타트의 하계 음악강좌에 참가하여 12음기법을 배웠다. 1949년 콘스탄츠의 독일 극장의 발레 지휘자가 되었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비스바덴의 헤센 국립극장의 음악 감독을 맡았는데, 그 이후는 거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다. 작곡가로서의 헨체는 전후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곡 기법적으로는 언제나 전위(前衛)의 입장에 있었다. 극적 음악을 특기로 하고 있고, 주요 작품에는 [촌 의사](1953), [사슴의 왕](1955), [젊은 연인들에의 엘레지](1961), [바쿠스의 무녀](1965) 등 여러 오페라가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학생 운동 등의 신좌경 사상에 접근하여 쿠바의 혁명가 게바라에게 바친 오라토리오[메두사 호의뗏목](1968), 쿠바의 늙은 흑인의 생활을 다룬 [엘 시마론](1970), 칠레의 쿠데타를 접하여 고뇌를 그린 [트리스탄](1973) 등 이른바 앙가주망(engagement ; 사회 참여)의 음악을 발표하고 있다. 지휘자로서의 실력과 그 신선한 음악관은 에셴바흐와 함께 만든 베토벤의[피아노 협주곡 제2번](그라모폰)에 잘 발휘되어 있다. 기타 자작 자연의 [콤파스]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이상 런던), [트리스탄](그라모폰)이 있고, 후자는 1977년도의 레코드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파버먼 헤롤드 (Harold Farberman 1929~)
미국의 뉴욕에서 태어났다. 타악기 주자로서 연주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의 쇼 드라마로서 주목을 받았다. 장학금을 받아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한 다음, 20세 때에 사상 최연소 단원으로 보스턴 교향악단에 입단해 팀파니 주자로서 1963년까지 활동하였다. 그사이 1953년 작곡한 [Evolution]이라는 작품을 통해 코플랜드에게 인정을 받게된 파버먼은 그의 권유로 뉴 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땄다. 그 후 뉴 아트 관현악단을 결성하고 뉴욕(타운 홀과 카네기 홀)을 비롯하여 각지에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1963년에 작곡과 지휘 활동에 전력하기 위하여 보스턴 교향악단을 퇴단했다. 그리고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로열 필하모니, 런던 교향악단,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니 등 유럽과 미국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여 성공했다. 1968년에 덴버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 콜로라도 스프링스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1971년부터 8년간을 오클랜드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면서 활약하여 종신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작곡가로서도 오페라,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을 발표했고 상당한 수가 녹음되었는데 지휘자로서의 레코드는 자작을 포함하여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바르토크 등의 작품을 여러 음반 회사에서 녹음했다.
본가르츠, 하인츠 (Heinz Bongartz 1894~1978)
독일의 라인 강 기슭의 크레펠트에서 태어났다. 이곳의 시립음악원에서 수학했으며, 에리 나이, 나이첼, 슈타인바흐 등에게 배웠다. 1919년 합창단 지휘자로서 독립하였고, 1923년 멘헨글라트바흐의 시립극장 지휘자가 되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교향·관현악연주회의 지휘자로 취임, 이어서 1930년까지는 마이닝겐의 주립극장 지휘자로 활동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고타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는 카셀 국립 오페라 극장의 악장이 되었으며, 1939년부터 자르브뤼켄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는데, 1944년 전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대전 종전 후인 1947년부터는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1963년에 그 자리를 사퇴하였는데, 이 동안 오페라의 지휘를 많이 하였다. 그 후 본가르츠는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동독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동독에서는 장로격 지휘자로 꼽히는 사람으로서 확실하고 명쾌한 음악 조성에 의해 호감을 샀으나, 작품을 추구하는 방법과 표현 등이 소극적이어서 그다지 주목을 끌진 못했다. 레코드는 많은 양이 아니며, 베토벤의 [에그몬트]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으로 그의 견실한 지휘를 느끼게 한다. 드레스덴 필하모니와 공연한 브람스의 [세레나데 제1번](에인절)은 폐반이지만 참으로 좋은 연주였다.
코흐, 헬무트 (Helmut Koch 1908~1975)
독일의 바르멘(현재 부퍼탈)에서 태어났다. 쾰른의 음악학교, 에센의 폴크방 학교에서 F.레만 등에게 배웠다. 그 밖에 헤르만 셰르헨에게도 배웠는데,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31년부터 베를린에서 노동자의 합창 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38년부터 1945년까지는 린토슈토렘 사(현재 엘렉트롤라)에서 레코드 프로듀서를 맡았다. 전쟁 후인 1945년 베를린 방송국의 음악 부장으로 취임하자, 같은 해에 동 방송교향악단의 우수한 단원들을 모아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했고 1948년에는 합창단도 창설하여, 이 두 단체의 지휘를 국을 때까지 하였다. 뛰어난 독일 고전 음악의 연구자이고 합창 지휘자이기도 했던 코흐는 베를린 방송실내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인솔하여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중심으로 바흐, 하이든등의 합창곡에서 뛰어난 연주를 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부터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도 매 시즌마다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헨델이나 바로크의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또 1963년에는 독일의 가장 오래된 합창 협회인 베를린 징크 아카데미를 부흥시켜 그 음악 총감독도 겸하였다. 그 밖에 합창위원회 의장,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 국영 레코드 회사인 독일 샬프라텐의 고문 등의 요직도 겸했다. 레코드도 독일 바로크에서 고전, 낭만파에 이르는 관현악 작품과 합창곡 등이 상당히 많으나 특히 헨델과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에 정평이 있다.
릴링, 헬무트 (Helmutb Rilling 1933~)
합창 지휘자이며 오르간 주자이기도 하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슈바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에서 배운 후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슈투트가르트의 음악 호흐슐레에서 카를 게로크에게 오르간을, 요한 네포무크 다비트에게 작곡을, 한스 그리슈카트에게서 합창 지휘를 배웠다. 이어서 1955년부터 1957년까지는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배웠는데, 오르간을 젤머에게 배웠다. 또한 1967년에는 번스타인에게 지휘를 배우기도 했다. 그전에 이미 호흐슐레의 학생이었던 1954년에 40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합창단인 게힌겐 칸토라이를 결성하여 세계 연주 여행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57년 슈투트가르트의 게데히토니스(기념) 교회의 합창 지휘자 및 오르가니스트가 되자 여기서도 피그랄 합창단을 설립했다. 1963년에는 교회 음악 감독의 칭호를 받고, 같은해부터 1966년까지는 베를린의 슈팡다우 교회 음악 학교에서 합창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그는 여기서도 슈팡다우어 칸토라이를 재편성하였다. 한편으로 1965년에는 슈투트가르트 바흐 콜레기움(슈투트가르트 바흐 관현악단)을 설립하고, 그 지휘자로서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더욱 1969년 프랑크푸르트의 호흐슐레 교수에 초빙되자, 쿠르트 토마스의 뒤를 이어 프랑크푸르트 칸토라이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이후 그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하여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0년대 말부터는 세계 연주 여행을 하였다. 릴링의 활동은 극히 폭 넓고 다채로왔으나 그 중심이 교회 음악, 그것도 바흐의 음악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바흐 연주는 이전의 대편성에 의한 낭만적이고 주정적인 연주와도, 또 그 반동으로서의 역사적 고증에 바탕을 둔 객관적인 스타일하고도 다른 독자적인 것으로, 당시의 양식을 답습하면서도 오늘날의 감각으로 새롭게 포착한 바흐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청중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살아 있는 바흐의 상(像)이며 따스함과 친근함으로 가득 차 있다. 바흐 탄생 300주년에 완결한 [교회 칸타타] 전곡 녹음(크라우디우스)은 그러한 의미에서도 그의 바흐 연주의 총결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극히 중요한 레코드일 것이다. [마태 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곡](CBS)은 극적인 면을 억제한 오히려 서정적인 표현이 특징적이다. 종교곡에서는 이 밖에 몬테베르디나 쉬츠의 극히 뛰어난 레코드가 있지만 초기 바로크에서 레거에 이르는 그 방대한 레퍼토리에 비한다면 레코드는 아직도 적다. 한편 오르가니스트로서의 레코드는 바흐의 [오르겔뷔힐라인(오르간 소곡집)] 전곡(베렌라이터 무지카폰), 코랄집, 리사이틀(이상 덴온) 등이 뛰어난 연주이고 성악곡과도 통하는 따스한 음악이다. 그 밖에 게힌겐 칸토라이를 지휘한 브람스의[집시의 노래], 슈만의 [유랑의 무리](베렌라이터 무지카폰) 등과 그 속편인 브람스의 [독일 민요집](CBS)이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연주이다.
르위스, 헨리 (Henry Lewis 1932~)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배우고, 처음에는 로스앤젤레스 필 하모니의 콘트라바스 주자로 활동했다. 1955년 병역에 복무하여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를 본거지로 하는 미국 육군의 '제7아미 심포니'의 지휘자로 유럽 각지에서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57년에 제대를 하였는데, 그 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에 되돌아와 마침 질병으로 출연이 불가능하게 된 마르케비치를 대신하여 지휘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보스턴 교향악단과 뉴욕 필하모닉 등에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는 1968년 이래 뉴저지 주의 뉴아크에 본거지를 두고, 뉴저지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하였다. 이 오케스트라는 1968년에는 연간 겨우 22회의 연주회를 한 것뿐이었는데, 수년 사이에 연간 공연 수가 놀랍게도 120회로 늘어났다. 그중에서는 카네기 홀과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에 출연한 공연도 포함되어 있다. 오페라에의 데뷔는 196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을 지휘하였는데, 1972년에 그가 흑인으로서 처음으로 메트로폴리탄에 등장했을 때도 [라 보엠]을 연주하였다. 레코드는 부인인 마릴린 혼이 노래하는 마스네의 오페라 [나바라의 딸](RCA)을 들고 싶다.
블롬슈테트, 헤르베르트 (Herbert Blomstedt 1927~)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서 태어났다. 스웨덴인 가계 출신으로, 스톡홀름 왕립음악학교와 스웨덴 우프살라 대학에서 배운 뒤 잘츠부르크에서 마르케비치를 사사하고, 또 탱글우드에서도 배웠다. 1954년 스톡홀름 필에서 지휘자로 데뷔하고, 1956년 잘츠부르크의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1위를 획득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오슬로 필의 수석 지휘자를 지내고 1968년부터 1977년까지는 코펜하겐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동안 1961년에는 스톡홀름 음악학교의 강사로 초빙되고, 1965년에는 교수가 되어 1970년까지 그 직에 있었다. 1969년에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연주회를 객원지휘하고 그 이래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1975년에는 이 오케스트라 및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 이 오페라 극장에는 [피델리오]로 데뷔했다. 물론 이 슈타츠카필레를 이끌고 다니거나 혹은 단신으로 여러 음악제와 각지에의 객원 지휘도 많았다. 극동에는 1978년에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왔다. 1988년 현재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레코드는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것이 대부분이며 베토벤의 [교향곡 제2번](독일 샬프라텐)이 대표적이다. 지적으로 정리가 잘된 음악을 만드는 타입의 사람으로, 그 속에는 어렴풋한 낭만성도 깃들어 있다.
아벤트로트, 헤르만 (Hermann Abendroth 1883~1956)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1900년 뮌헨에서 튜일을 사사했다. 1905년 뤼베크, 1911년 에센,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도 활약하였고, 1934년부터 1942년에 걸쳐서는 라이프치히 방송국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는데, 그 인기가 좋아 바이마르 국립관현악단,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주임 지휘자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유명하여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원장, 바이마르의 호흐슐레의 교장도 맡았다. 아벤트로트는 1950년대의 전반에 20매 가량의 레코드를 녹음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하이든의 [교향곡 제88번]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비창)](샬프라텐)을 들 수 있다. 전자는 다른 모든 명지휘자의 레코드를 크게 능가하는 최고의 하이든으로서, 특히 두 끝 악장의 생생한 실재감에는 놀랄 뿐이다. 후자는 제2악장 이하가 특히 훌륭한데, 이것 역시 다른 모든 레코드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2악장의 매력적인 칸타빌레, 제3악장의 아수라를 연상케 하는 전율, 그리고 피날레의 절망적인 영탄의 가락. 이야말로 굉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핸슨, 하워드 (Howard Hanson 1896~1981)
작곡가이며 교육가이기도 하다.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워프에서 태어났다. 네브래스카 대학, 뉴욕의 음악 예술원 및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에 졸업한 다음 곧 퍼시픽 칼리지의 작곡과의 이론 교수로 임명되고 1921년까지 재임하였다. 그해에 아메리카 아카데미의 로마 상을 받았다. 1924년까지 3년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해에 귀국 후, 곧 로체스터 대학 부속의 이스트먼 음악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고 1964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사이 1941년에 이스트먼 로체스터 교향악단을 창설하고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자작을 포함한 미국 금세기의 작품을 대량 레코딩하였다. 지휘자로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오케스트라에 종종 출연하였다. 음악원 원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전적으로 객원하여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작품은 6곡의 교향곡과 그 밖에[쿠세비츠키의 추억에 바치는 엘레지],[오르간과 현과 하프를 위한 협주곡], 오페라[메리 마운트]등 많다. 레코드는 모두 머큐리이다.
리그놀드, 휴고 (Hugo Rignold 1905~1976)
영국의 킹스턴 - 어폰 - 템스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왕립음악원(RAM)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오보에를 배우고, 프리랜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잭 힐튼과 협력하여 댄스 밴드에서 연주하였고, 후에 자신의 악단을 조직하였다. 지휘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44년 영국 공군에 복무중 팔레스티나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것으로 1947년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의 전속 지휘자가 되었고,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리버풀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로열 발레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1966년까지는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리그놀드는 발레 음악이 장기인데,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프로코피예프의 [신데렐라 제1, 제2모음곡]전곡(데카)이 명연이다.
그리슈카트, 한스 (Hans Grischkat 1903~1977)
서독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튀빙겐 대학에서 동물학을 배운 다음, 슈투트가르트 음악대학에서 피아노와 오르간, 그리고 음악학을 공부했다. 1924년 로이트링겐 합창단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하였다. 1931년 슈바벤 합창단을, 1936년 슈투트가르트에 그리슈카트 합창단을 조직하여 죽을 때까지 이들 합창단을 지휘하였다, 또한 1945년 로이트링겐에 슈바벤 교향악단을 설립하여 1950년까지 지휘하였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슈투트가르트의 모교에서 합창 지휘를 가르쳤는데, 1950년에는 교수가 되었고, 1968년에는 관현악의 지휘법도 담당하였다. 그리슈카트는 합창 지휘에 있어서 유럽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데, 몬테베르디와 쉬츠에서 현대 독일의 작품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졌다. 1958년부터 1970년까지 바흐의 192곡의 교회 칸타타를 슈투트가르트에서 지휘하였다. 1970년 서독 정부로부터 공로대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대표적인 레코드는 바흐의 「b단조 미사곡」 (복스)이 있다.
로스바우트, 한스 (Hans Rosbaud 1895~1962)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태어났으며, 프랑크푸르트 고등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21년 마인츠 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그 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1937년 뮌스터의 오페라, 콘서트의 음악 감독, 1941년 스트라스부르, 1945년 뮌헨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 바덴바덴의 남서독일방송교향악단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며, 엑상 프로방스 음악제, 도나우에싱겐 현대 음악제의 단골 지휘자로서도 활약했다. 1962년 12월 29일 루가노에서 타계한 로스바우트는 전형적인 독일 지휘자로서 견실한 지휘 방식을 보여주었다. 특히 현대 음악 분야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으로 수많은 세계 초연을 한 바 있다. 레코드는 그가 장기로 했던 현대곡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페트루슈카]가 있었지만 폐반되었는데, 이것은 명쾌한 리듬 감각으로 그의 면목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었다. 그 밖에 기제킹과 협연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있다(에인절).
스바로프스키, 한스 (Hans Swarowsky 1899~1975)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쇤베르크, 베베른, R.슈트라우스에게 배웠고, 슈투트가르트에 진출하여, 1932년에는 함부르크, 1934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취리히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1944년까지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드라마투르크를 맡았고,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크라코프 필하모니의 지휘자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뒤에는 1947년 빈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았고, 이어 1950년까지는 그라츠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 1957년에는 글라스고의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59년부터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1946년부터는 빈 음악대학의 지휘과의 주임 교수 및 오시아하의 '케른 텐의 여름'음악제의 세미나 강사로서 여러 해 동안 걸쳐 많은 영재들을 육성했는데, 그 중에는 아바도, 카리디스, 메타 등이 있다. 레코드는 말러의 [교향곡 제4번]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제27번]이 있다. 이 밖에 하이든의 오페라 [철학자의 영혼],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마지막 생존자](복스)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수프라폰) 등 몇몇의 주목할만한 녹음이 있다.
첸더, 한스 (Hans, Zender 1936~)
작곡가이기도 하다.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으며, 프랑크푸르트의 음악원(1956∼1959)과 프라이부르크의 음악원(1959∼1963)에서 배웠다. 프라이부르크에서는 작곡가인 포르트너와 쳄발로 주자인 피히트 - 악센펠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재학 때부터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에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본의 오페라 극장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69년부터 킬에서 독일 최연소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이후에는 자르 방송관현악단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유럽 각지에의 객원 지휘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1975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초청되어 [파르지팔]을 지휘하여 주목을 받았다. 1988년 현재는 서독 함부르크 필하모니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불레즈풍의 세련된 취미를 가진 작곡가이기 때문에 현대 작품의 지휘에도 의욕적이고, 특히 치머만의 작품은 독일 각지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적극적으로 연주하고 있다. 레코드는 바젤 교향악단과의 홀리거의 [마법의 무희](그라모폰)가 있다. 그 지휘는 견실하고 솔직하며 유려하게 마무리를 한다.
블레크, 해리 (Harry Blech 1910~)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 오브 뮤직, 왕립 맨체스터 음악원에서 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29∼1936년 할레 관현악단, 이어 BBC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를 지냈다. 1933년 블레크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였고 1950년 해산하게 되었을 때, 지휘로 전향하게 되었다. 1942년 런던 윈드 플레이어즈를 결성, 1949년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즈를 창설하고 현재까지 그 지휘를 맡고 있다. 이것은 빈의 고전 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영국에서의 첫 실내 오케스트라인데, 블레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에 생명감 넘치는 해석을 해서 많은 고정 청중을 모았다. 근년에는 연주회장도 로열 페스티발 홀로 옮길 만큼 안정된 음악팬을 확보하고 있다. 블레크의 모차르트 연주는 균형 잡힌 양식적인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내면에서 연소시켜 가는 타입이므로 뜻밖에 팬도 많다. 그 레코드는 영국에서는 다소 발매되고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뢰그너, 하인츠 (Heinz R gner 1929~)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서 지휘와 피아노를 배웠다. 1951년 졸업하자 곧 바이마르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연수를 하였다. 1954년 라이프치히 음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할 기회를 얻었고, 1958년부터 이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을 역임하였고, 그 후는 동베를린의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에 취임하여 1988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그 밖의 명문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동독에서는 신망이 두터운 지휘자의 한 사람이다. 뢰그너가 만드는 음악은 그야말로 동독의 음악관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극히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견고한 구성 감으로 작품 속에 내재된 인간적인 공감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은 결코 소극적인 것도 내향적인 것도 아니어서, 다만 듣는 사람에게 호소하는 힘에 중점을 두고 있다. 뢰그너는 베를린 오페라 극장의 지위를 사임하고 나서는 대체로 콘서트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 분야의 레코드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의 [전주곡집](샬프라텐)에서는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면목이 생생하게 들어나 있으며,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집](샬프라텐)은 진솔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뮐러-브륄, 헬무트 (Helmut M ller - Br hl 1933~)
독일의 브륀에서 태어났다. 1954년부터 1958년 사이에 본 대학에서 철학과 로마 카톨릭 신학을, 1956년부터 1960년 사이에는 본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음악학을 전공하였다. 이어서 루체른에서 바이올린 주자 볼프강 슈나이더한의 마스터클래스에 들어가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로마의 국제 실내악 아카데미의 실내악 마스터클래스를 주도하였고, 1968년부터 레코드 회사인 하르모니아 문디 사의 '무지카 사쿠라'의 프로듀서도 지냈다. 지휘자로서는 브뤼셀, 로마, 파리, 자르브뤼켄의 방송 오케스트라, 카필라 아카데미카 빈, 이 솔리스티 베네티, 프라하 합주단, 리스본의 굴벤키안 관현악단, 오스트라바 필하모니, 북서독일 필하모니, 라인 필하모니, 필하모니아 흥가리카 등 다수의 악단에 객원 지휘를 하였다. 1976년 린다우에서의 '린다우의 봄' 음악제에 참가하였다. 현재 쾰른 실내관현악단의 지휘자로서, 또 '브륄성(城) 콘서트' 주재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뮐러는 견실하면서도 발랄한 연주가 그의 특징이다. 블록플뢰테의 슈타이만과 협연한 비발디의 [협주곡집](크라베스), 클라리넷 주자인 크라인과 협연한 슈타미츠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3번](컬럼비아) 등의 레코드가 있다.
테미앙카, 앙리 (Henri Turnovsk )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스코틀랜드의 그리노크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1915년부터 로테르담에서 브리츠, 1923년부터는 베를린에서 빌리헤스, 1924년부터는 파리에서 부세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26년 미국에 이주하여 커티스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프레슈, 지휘를 로진스키에게 배웠으며, 1930년에 졸업했다. 재학중이던 1928년 뉴욕에서 데뷔하여 우수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인정을 받았다. 1932년 런던과 파리에서 독주회를 열고. 솔리스트로서 활약하였다. 1935년, 제1회 비예냐프스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오이스트라흐에 이어 제3위에 입상하였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스코티시 관현악단, 1941년부터 1942년까지는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도 맡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주로 솔리스트로서 활약하였다. 1946년 모두가 파가니니의 소유였던 스트라디바리의 명기를 사용한 파가니니 4중주단을 결성하여 그의 리더를 맡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1966년에 해산하였다. 1960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 실내교향악단을 결성하고 지휘자가 되었으며, 1960년부터 1976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지휘자로서의 테미앙카의 레코드는, 로스앤젤레스 퍼커션 앙상블과 공연한 차베스의 [타악기를 위한 토카타]와 히나스테라의 [마술적 아메리카 대륙에 붙이는 칸타타](컬럼비아)가 있다. 파가니니 4중주단의 레코드도 SP에서 스테레오 초기에 상당량 녹음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폐반되거나 또는 국내에서는 발매되고 있지 않다.
스보보다, 헨리 (Henry Swoboda 1897~)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프라하 음악원과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명지휘자 바츨라프 탈리히를 사사한 다음 빈으로 유학을 갔다. 귀국한 뒤에는 프라하의 방송국에서 지휘자와 프로그램 오거나이저로 근무했으나 1931년에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입한 이래 프라하 도이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빈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프라하와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여러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로 일을 한 뒤 프리랜서가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여러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에 객원 활동을 하였으며, 콘서트 홀 소사이어티와 웨스트민스터 레코드 회사에서 뮤지컬 디렉터로서도 활약했다. 그 후에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지휘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고 텍사스 대학의 객원 교수로도 재직했는데, 그 사이사이 객원 활동도 계속했다. 스보보다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레코드 회사의 음악 감독을 지낸 이유로 모노럴 시절엔 빈 교향악단이나 빈터투르 교향악단 등과 많은 녹음을 남겼다. 일찍부터 코다이, 바르토크, 미요 등의 작품을 발굴, 연주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한 레퍼토리로 주목을 끌었다. 지금은 하스킬과 협연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9번, 제20번](웨스트민스트) 1장만 볼 수 있다. 그런데 레코드에 수록된 작품은 그때까지 보여준 견실 일변도와는 다르며, 스타일도 정형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정감과 가심(歌心)이 풍부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케겔, 헤르베르트 (Herbert Kegel 1920~)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드레스덴의 음악학교에서 보리스 블라허에게 작곡을, 카를 뵘에게 지휘를 배우고, 피아노의 디플로마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장교로서 종군한 결과 손에 총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지휘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1946년 로스토크 국민극장의 지휘자, 1949년부터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과 라이프치히 방송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1958년 이후 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음악 감독 및 수석 지휘자로서 오래 활약하였다. 1978년 1월 귄터 헤르비히의 후임으로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공석이 된 라이프치히 방송교향악단과 합창단의 지위는 대리 수석 지휘자였던 볼프 - 디터 하우실드가 이어받았다. 레코드는 라이프치히 재임중에 녹음한 모차르트의 [고아원 미사][미사 브레비스] 2곡,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필립스)와 말러의 [교향곡 제4번], 스트라빈스키의 [카드놀이] [소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제1번, 제2번](독일 샬프라텐) 등이 있으며, 드레스덴에 옮기고 나서의 신녹음은 말러의 [교향곡 제1번](독일 샬프라텐) 등이 나와 있다.
셰르헨, 헤르만 (Hermann Scherchen 1891~1966)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음악을 배우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부뤼트너 관현악단 및 베를린 필하모니의 비올라 주자를 하였고, 1911년부터 1912년에 걸쳐 쇤베르크와 함께 연주 여행을 하였고, 거기서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1914년 리가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1919년에는 '신음악협회'를 설립하였고, 현대 음악 잡지 {멜로스}를 창간하면서 그 주간이 되었고, 더욱 셰르헨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현대 음악의 적극적인 추진자, 소개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빈터투르, 카리닌그라드 등에서 지휘자로서 활약하였고, 1933년에서 1936년까지 브뤼셀에서 {무지카 비바}잡지를 발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취리히 방송국, 베로뮨스터의 지휘자, 1959년부터 1960년에는 헤드포드의 북서독일필하모니의 지휘자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에는 스위스의 그라베사노 산장에 자신의 전자 음악 스튜디오를 건설, 항상 현대 음악의 좋은 이해자, 추진자이기도 했다. 1966년 6월 12일 심장마비로 피렌체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경력을 봐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평생 현대 음악의 투사로서의 자세를 견지하였고, 한편에서는 바로크에서 현대까지의 넓은 레퍼토리를 갖춘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특히 레코드에서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을 많이 녹음하였다. 그 중에서도 LP 초기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나 [칸타타 제140번](웨스트민스터) 등의 명연을 통해 바흐 스페셜리스트의 인상이 강하다. 야유하는 청중을 향해 지휘하다 헤르만 셰르헨은 나치즘 정권 때 유대인이라고 하여 독일에서 쫓겨났는데, 그는 신음악협회란 음악단체를 조직하여 가장 새로운 현대 음악을 지휘하여 공로를 세운 사람이다. 어느 날 그는 이탈리아의 현대 작곡가로 유명한 달라피콜라의 작품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청중들 중 일부가 수근거리는 듯하더니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며 연주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지휘자 셰르헨은 꾹 참고 연주를 계속했으나 하 도 휘파람을 시끄럽게 불어대는 바람에 참다 못하여 연주를 중단시키고 떠드는 청중에게 돌아서서 말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지휘자 면전에서까지 휘파람을 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서서 지휘봉을 휘둘렀는데 또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그는 지휘하다가 홱 뒤로 돌아서서, "자네들 한테 가르쳐 주겠네만 자네들이 부는 휘파람은 가락이 아주 엉망이야"라고 큰소리로 꾸짖으며 제대로 휘파람을 불라고 지휘봉을 휘둘렀다고 한다.
미첼, 하워드 (Howard Mitchell 1911~)
미국의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 커티스 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우고, 1933년에 최초로 수석 첼리스트로서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에 참가한 다음, 지휘자로 전향해 1946년부터 당시의 음악 감독이었던 한스 킨들러의 밑에서 부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48년 킨들러의 뒤를 이어 음악 감독이 되었고, 1970년에 사임할 때까지 22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 후에는 남아메리카 우루과이 국립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워싱턴 시절에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RCA)이 있고 그 밖에 [오케스트라의 악기](RCA)라는 교육을 목적으로 한 레코드도 만들고 있다. 이 시절의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은 청소년을 위한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1955년부터 '뮤직 포 영 아메리카'를 시작하여 합중국의 수도를 찾는 젊은이를 위해 5주간에 걸치는 무료의 연주회를 열었다. 워싱턴 지역만도 1년에 10만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그 연주회에 즈음하여 오케스트라의 개개의 멤버나 또는 합주를 통해 실시되는 독특한 실지의 교육이 하나의 인기물이 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는 그러한 활동이 구체적인 형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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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주코프, 이고르 (Igor Blazhkov 1936~)
소련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1959년 키예프 음악원을 졸업한 후, 우크라이나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캐리어를 스타트했다. 1963년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지휘자 진에 영입되어 주로 오페라와 발레의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5년간 이 자리에 있은 다음, 1970년부터 키예프 실내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을 역임하고 있다. 그는 소련의 지휘자로서는 드물게도 쇤베르크나 아이브즈라는 이른바 모던 뮤직에 정평이 있으며 또 음악 학자로서도 고명하였다. 그가 발표한 논문은 유럽에서도 정평이 있다고 한다. 레코드는 오직 1매, 그것도 소련의 젊은 작곡가 치시첸코(1939∼ )의 [첼로협주곡](멜로디아)이라는 현대 작품인데, 블라주코프의 평가를 입증하는 선곡이다. 여기서는 로스트로포비치를 독주자로 세워 협연하였는데, 치시첸코의 실내 협주곡적인 치밀한 스코어를 극히 정묘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픽업 멤버를 구사한 협주에서 그의 모던 뮤직에 대한 심취가 잘 나타나 있다.
마르케비치, 이고르 (Igor Markevich 1912~)
작곡가이기도 하며, 소련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이고르가 2세 때 러시아를 떠났기 때문에 그는 어릴 때의 대부분을 스위스의 브베에서 보냈다. 여기서 피아노와 작곡의 레슨을 받았고,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을 알게 된 코르토는 파리에 가서 더욱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1925년 파리에 간 마르케비치는 코르토에게 피아노를, 나디아 불랑제에게 화성학과 작곡을 배웠다.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1929년 러시아 발레단의 코벤트가든에서의 공연 때에 작곡자를 피아노 독주자로 하여 초연되었다. 마르케비치는 이어 발레 음악 등을 작곡하였으며, 이들 작품은 그 모더니즘과 숙달된 기악 수법에 의해 작곡가로서의 평가를 높였다. 1930년에 그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지휘자로서의 첫걸음을 걷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을 비롯하여 동시대의 작품을 차례로 지휘하였고, 또 1934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헤르만 셰르헨에게 지휘법을 더욱 배우고 심화·시켰다. 그 한편 작곡 활동도 계속하였으며, 동시에 피아니스트로서도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세 방면에 걸치는 그의 활약은 대전 발발 시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탈리아로 옮겨, 그 이후에 이탈리아의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피렌체 5월제의 음악 감독으로 1944년에 취임하였는데, 그 이후 차츰 작곡 활동보다도 지휘와 교육이 그의 일 중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객원 지휘자로서 세계 각지에 초청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는 1955년 처음으로 등장(보스턴 교향악단), 1960년에는 니혼 필하모니 의 지휘대에 올라 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같은 악단의 지휘는 그 이후 4회(1980년까지)담당하고 있다. 피렌체 5월제의 음악 감독은 1949년에 사임하였는데, 그 이후 각지의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스톡홀름 교향악단(1952∼1955), 몬트리올 교향악단(1956∼1960), 라무뢰 교향악단(1957∼1961), 스페인 방송교향악단(1965∼1969), 몬테카를로 국립오페라 극장 관현악단(1967∼1973),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관현악단(1973∼1975)이 주된 직무였다. 이들 활동과 나란히 하여 각지에서 지휘법의 강좌를 담당하였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1948∼1956), 마드리드(1965∼1969), 몬테카를로(1969년 이후)에서의 강습에 참가하였는데, 현재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지휘자는 적지 않다. 그의 레코드 중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인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필립스), 하스킨과 협연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필립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그라모폰) 등이 그의 의도를 유감없이 반영하고 있다. 또 개성적인 명연으로서 정평을 얻고 있다.
도브로벤, 이사이 (Issay Dobrowen 1894~1953)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야로셰프스키, 타네예프에게 가르침을 받고, 1911년 이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빈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고도프스키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917년 귀국하여 모교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9년 모스크바 대극장의 지휘자를 시작으로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 소피아 왕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각각 역임하였다. 특히 러시아 음악의 지휘를 통하여 호평을 받았고 일약 명성을 높이게 되었다. 이어 오슬로필하모니,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1931), 팔레스티나 교향악단(1937), 그리고 그후 스특홀름 왕립 오페라 극장과 각지의 상임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러시아 태생이라고는 하지만 그 활약의 태반은 국외에서 이루어졌다. 1953년에 오슬로에서 별세하였다. 도브로벤이 가장 자신 있게 다룬 것은 역시 오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한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전곡은 무소르크스키의 거칠고 씩씩하다고 할 수 있는 음악이 그야말로 멋지게 재현되고 있지만 현재는 폐반되었다. 레코드는 슈나벨과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제4번] 두 곡과 프랑스의 여류 바이을린 주자인 느뵈와 녹음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상 모두 에인절)이 있다.
케르테르, 이슈트반 (Istv n Kert sz 1929~)
헝거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출생지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쇼모지를 사사하면서 지휘법을 연마하였고, 또 바이올린과 작곡의 공부도 계속하였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목표로 한 그는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의 프레비탈리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제르의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는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그 후 독일에 가서 1958년부터 아우크스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1960년에는 음악 총감독이 되어 1963년까지 재임하였다. 이 동안 1960년에는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런던에도 데뷔하였고, 또 잘츠부르크 음악제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1963년 함부르크 북독일방송교향악단과 함께 북미 연주 여행을 하여 높은 평가를 얻고, 1964년 쾰른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그 해 런던교향악단의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 일주 연주 여행에 동행하였다. 1965년에는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도 겸하게 되었는데, 1968년까지 재임하였다. 또한 1969년에는 시카고 교향악단의 여름 시즌의 중심이 되는 라비니아 음악제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1973년부터는 쾰른의 귀르체니히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도 겸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의 4월 10일 이스라엘의 연주 여행중에 텔아비브의 헤르츠리아 해안에서 수영을 하다가 거센 파도 때문에 사고사를 당하고 말았다.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단원의 90% 이상이 조지 셀의 후임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할 만큼 촉망되었던 지휘자였기에 애석하기 짝이 없다. 니키슈 이래의 헝가리의 전통적인 지휘 기법을 익히고 있었던 케르테스는 극히 명석한 음악관을 바탕으로 온화한 멋이 있는 음악을 낳았고, 자주 정열적인 표현도 보여주었다. 인간적으로도 신망이 두터웠고, 폭넓은 표현력과 취미의 고상함이 하나의 큰 특질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오페라에서 풍부한 캐리어를 갖고 있으면서 그 장르에 레코드를 남기지않았다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지만, 런던 교향악단과 그 밖의 악단을 지휘한 코다이의 [하리 야노슈](런던)에는 그의 헝가리 기질과 극장 감각의 양면을 다 볼 수 있다. 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번](런던)에는 그의 민족주의적 로맨티시즘에 대한 뛰어난 감성이 표출되고 있다. 그가 사랑한 작곡가는 모차르트와 브람스라고 말해지고 있는데, 그의 마지막 해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런던)이 남아 있는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소프라노인 아멜링과 협연한 [레퀴엠](런던) 등 모차르트의 연주도 결코 잊지 못할 명연이다.
< J >
페렌치크, 야노슈 (J nos Ferencsik 1907~)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배웠고, 그 밖에 작곡을 L.라이타에게, 또 지휘를 A.프라이셔에게 배웠다. 1927년부터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 보조 지휘자로서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30년에는 그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사이에는 1930년과 1931년에 바이로이트 음악제의 부지휘자도 역임하여 더욱 연찬을 쌓았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도 겸하고, 더욱 국제적인 지위도 견고히 하였는데 1957년에는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에까지 승진하였다. 한편으로 콘서트 지휘자로서의 길도 걷기 시작하여, 1953년부터는 헝가리 국립교향악단의 음악 총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고, 또 부다페스트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도 겸하여 헝가리 악단의 중진이 되고 있다. 특히 헝가리 국립교향악단과는 유럽 여러 나라와 소련, 미국 등에도 널리 연주 여행을 하였다. 부다페스트국립 음악 아카데미의 명예 교수이기도 하며 헝가리 최고의 국가상인 코슈트 상도 받았다. 페렌치크는 견실한 연주 스타일로 민족적인 특질까지도 잘 살리고 있으며, 레코드는 헝가리 국립교향악단과의 코다이의 [하리 야노슈] 모음곡과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세븐시즈), 또 랑키와 협연한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훈가로톤) 등에서 그의 특질이 잘 나타나 있다.
페르버, 외르크 (J rg Faerber 1929~)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슈투트가르트의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배우고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슈투트가르트와 하일브론을 중심으로 하여 극장 지휘자, 작곡가로서 활약하였다. 1960년 하일브론을 본거지로 하여 뷔르템베르크 실내관현악단(정식 명칭은W rttemberg Heilbronn Kammerorchester)을 창설한 이래, 현재까지 음악 감독 및 지휘자로서 국제적으로 활약을 하고 있다. 페르버와 뷔르템베르크 실내관현악단은 이제까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미국 등 아시아를 제외한 전세계에 걸쳐 연주 여행을 하고 있다. 레코드도 미국 복스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회사에서 다량의 녹음을 하고 있다. 페르버의 레퍼토리는 바로크를 중심으로 하여 전고전파에서 낭만파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
레바인, 제임스 (James Levine 1943~)
미국의 신시네티에서 태어났으며, 피아니스트로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0세 때 신시내티 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여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 부친은 래리 리라는 예명으로 1930년대에 댄스 밴드의 리더로서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모친인 헬렌 골드슈타인 레바인은 브로드웨이의 여배우였다.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에 들어가기 전에 라살 4중주단의 리더인 월터 레빈에게 악곡분석과 악식을 배웠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는 로지와 레빈에게 피아노를, 장 모렐에게 지휘를 배웠다. 그 후에 레바인은 루돌프 제르킨, 알프레드 월렌스타인, 막스 루돌프, 파우스토 클레바에게도 배웠다. 1964년 조지 셀의 초청으로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6년 동안 활동했다. 레바인은 엄격주의자인 조지 셀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엄격주의자라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존경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셀과 토스카니니의 음악과는 다른 유연하고 부드러운 음악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점에 제임스 레바인이라는 천재의 숨은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는지도 모른다. 레바인은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부지휘자의 지위를 사임할 때쯤 이를 계기로하여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애틀랜타, 피츠버그, 덴버, 토론토, 세인트루이스, 댈러스 등, 여러 도시의 오케스트라의 지휘대에 섰다. 뉴욕 필하모닉은 1972년 3월 17일, 보스턴 교향악단은 1972년 여름 탱글우드에서의 버크셔 음악제 기간 중에 지휘하였다. 런던에서의 데뷔는 1973년 6월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에 앞선 1971년 6월 5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라 토스카]를 지휘했다. 그 해 라파엘 쿠벨리크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는데, 쿠벨리크는 그의 '오른팔'로서 활약해 주는 지휘자로 레바인을 선정하였다. 그 후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으며,1975년부터 1988년 현재까지 음악 감독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전 개하고 있다. 레바인에 대한 구미의 음악 비평가들이 쓴 문장에는 반드시 라고 할 수 있을 만 큼 'versatile musician'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versatile에는 '다재 다능한, 다 방면의'라는 의미가 있다. 현대 지휘자의 대부분은 취급하는 작품에 대하여 지나치다 할 정도로 매우 조심스러운데, 레바인은 예외적 존재인 것이다. 오페라나 심포닉 레퍼토리에서도 다방면의 많은 작품을 취급하고 있는데, 그 연주마다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래서 레바인에게는 연주가로서의 독자적인 강한 개성을 엿 볼 수가 있다. 레코딩 레퍼토리에 대해서도 같은 면을 볼 수 있는데, 말러의 심포니를 정교하면서도 유연한 부드러운 연주로 수록한 음반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스코트조플린의 래그타임 뮤직을 즐겁게 피아노로 연주한 음반도 있다. 레바인의 이런 면모는 그야말로 versatile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레바인은 무엇이든지 해내는 만능가는 아니다. 여러 가지 성격의 작품을 취급하면서도 두터운 얼음의 가장 밑바닥에는 언제나 도도히 흐르고 있는 물줄기가 있는 것처럼 레바인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 혼이 통하고 있다. 그의 레코드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것인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을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제5번](RCA)을 들 수 있다.
호렌슈타인, 야샤 (Jascha Horenstein 1899~1973)
러시아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조국을 떠나 1907년부터 쾨니스베르크(현재 소비에트 카리닌그라드)에서 막스 브로데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1년부터 빈에서 아돌프 부슈를 사사하면서 1918년부터 빈 대학에서 철학을, 또 슈레카와 마르크스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0년 이후 베를린에서 살았으며, 1922년부터 이곳의 합창단의 지휘자를 맡았다. 이듬해 1923년 빈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말러의[교향곡 제1번]을 연주하였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니의 상임의 한 사람이 된 뒤 뒤셀도르프 시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된 다음 1933년까지 재임하였다. 같은 해 나치스의 박해를 피하여 유럽 각지를 전전하였으며, 팔레스티나 교향악단의 4인의 상임 지휘자(토스카니니 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0년에 미국에 건너갔고, 전후 1949년에 다시 유럽 악단에 복귀하여 1950년 베르크의 [보체크]의 파리 초연을 지휘하였다. 그 후 전적으로 객원 지휘자로서 널리 구미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였다. 만년에는 스위스의 로잔에 살면서 런던을 중심으로 지휘 활동을 계속 하였다. 레코드는 호렌슈타인의 장기인 브루크너(제7번)와 말러[교향곡 제1번, 제3번, 제6번]의 LP가 주목되는데, 닐센의[교향곡 제5번](노사치) 등도 이제는 볼 수 없다. 제2차 대전 전의 폴리도르의 SP로 시작하는 호렌슈타인의 디스코 그래피는 상당한 분량이 있다.
파이야르, 장 - 프랑수아 (Jean - Francois Paillard 1928~)
프랑스의 비트리 - 르 - 프랑수아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다음, 파리 음악원에서 노르베르 뒤푸르크를 사사하여 음악학을 배웠다. 또한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마르케비치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파리 음악원 졸업 후에는 프랑스 등의 도서관에서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프랑스 음악의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는 작품의 연구와 발굴에 힘썼다. 1953년에 12인의 현악기 주자와 쳄발로 주자로 구성되는 장 - 마리 르클레르 기악앙상블을 조직하여,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음악의 연주와 녹음에 착수하였다. 그의 연구는 저서 『프랑스 고전 음악』(원서는 1960년 초판 간행)에 집약되고 있다. 1959년 그는 그때까지의 기악 앙상블을 파이야르 실내관현악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프랑스 고전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 음악도 레퍼토리에 짜 넣었다. 또 모차르트, 하이든의 교향곡을 비롯한 고전파의 작품도 취급하게 되었는데, 실제 연주 활동의 프로그램의 중심은 바흐, 헨델, 라모 등의 바로크 음악이었다. 연간 100회를 넘을 만큼 많은 연주회를 열었으며, 프랑스의 명수들(앙드레, 라리외, 랄데, 라스킨, 알랭 등)과의 협연도 매우 많다. 음악제에의 출연과 국외 연주 여행이 많은 반면, 파리에서의 연주는 비교적 적었고 정기적인 연주는 하지 않았다. 그의 레코드 중에서 최초로 주목된 것은 랑팔, 라스킨과 협연한 모차르트의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의 빛나는 연주인데, 이것은 르클레르 기악 앙상블이라 칭하고 있던 시대의 녹음이다. 그 후의 녹음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련의 프랑스 고전 음악의 녹음일 것이다. 라모의 [6성의 콩세르], 오페라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 쿠프랭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 [릴리 찬가] [르 파르나스(코렐리 찬가)], 샤르팡티에의 간주곡 [밤], 드비엔의 [플루트 협주곡] 등은 파이야르의 해석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는 뛰어난 연주로서 최근의 고악기에 의한 연주와는 아주 대조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프랑스 고전 음악에 이어지는 것은 이탈리아 의 바로크 음악일 것이다. 비발디의 녹음은 많지는 않으나 [사계]는 명연주의 하나이고, 더욱 코렐리의 [합주 협주곡 작품 6]의 전곡은 그만의 독특한 표현이 뛰어난 연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역의 녹음에 있어서도 프랑스의 명수의 독주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많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도 정평이 있는데, 헨델의 여러 작품의 장려한 연주([수상 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오르간 협주곡] [합주 협주곡] 등)도 훌륭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한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교향곡도 주목할 만하다(이상 모두 에라토).
마리, 장 - 밥티스트 (Jean-Baptiste Mari 1912~)
알제리아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지휘법 등을 배우고, 귀국하여 알제리아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동안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연주를 하였으며, 1962년 라무뢰 관현악단의 지휘자의 되었으며, 그 후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이 동안 유럽 각지와 루마니아, 아르헨티나 오페라 극장 공연의 지휘도 하였다. 1977년 이후는 프리가 되어 각지에서 지휘 활동과 레코드 녹음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지휘는 색채감과 음색을 선명하게 이끌어 내고, 밝고 신선한 연주를 하는 점에 최대의 특징이 있다. 그의 리듬감과 병합되어 효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 일련의 프랑스 작곡가에 의한 발레 음악의 녹음일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피에르네의 [시달리즈와 목양신] (발레 음악)에 의한 두 모음곡을 중심으로 한 녹·음과 들리브의 [실비아] 전곡과 [코필리아] 전곡일 것이다. 샤브리에의 [관현악곡집]도 같은 방향의 해석을 들을 수 있다. 이들 녹음 중에는 유머러스한 표현과 명쾌함을 강조하고, 종래의 연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로페스 - 코보스, 헤수스 (Jes s Lopez - Cobos 1940~)
스페인의 사모라 주 토로에서 태어났다. 마드리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닥터 칭호를 받고 2년간 가르친 경험이 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모교 합창단의 지휘자로서 경험을 쌓은 뒤 1966년부터 빈으로 유학하여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에스테리이허와 슈미트에게는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배웠다. 1968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니콜라이 말코 콩쿠르에서 제3위에 입상, 1969년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같은 해 프라하에서 영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데뷔했다. 1970년 베네치아 페니체 극장에서 [마적]을 지휘하여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고, 상임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그 이래 베를린을 본거지로 전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1972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빈 필을 지휘한 것 외에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에서 비버리 실즈가 주연한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로 미국에서도 데뷔했다. 1973년부터는 더욱 활동 영역을 넓혀 뮌헨과 함부르크의 양국립 오페라 극장을 비롯해서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 런던의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파리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 외에 볼로냐, 팔레르모, 트리에스테 등에서 종종 객원 지휘하는 것 외에 구미 각지의 오케스트라에도 초빙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부터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런던 필의 수석 객원 지휘자도 겸하고, 1980년 11월에는 런던 필과 함께 처음으로 극동 공연을 가졌다. 로페스 - 코보스는 1988년 현재 신시내티 교향악단과 스페인 국립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활동중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경력이 나타내듯 프뤼베크 데 부르고스 이래 스페인이 낳은 가장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지휘자이며, 앞으로의 활약이 크게 기대되는 지휘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레코드는 카발레와 카레라스가 주연을 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오리지널판에 의한 첫 전곡 음반으로 데뷔한 이래, 로시니의 [오텔로](필립스) 등의 대작에서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오페라 이외에서도 아리아가의 [교향곡](필립스), 레스피기의 [류트를 위한 고풍의 무곡과 아리아] 전곡(런던), 앙드레와 협연한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펄만과 협연한 브루흐의 [바이올린협주곡](에인절)도 뛰어난 것이다. 오페라의 레퍼토리는 데뷔 후 약 5년만에 카발리에서 베리스모에 이르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중심으로 모차르트와 비제의 [카르멘]도 장기로 하고 있다. 조각을 빚는 듯한 교묘한 왼손 놀림 1980년 11월 27, 28일 이틀 동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다. 1969년 처음으로 우리 나라를 찾아왔던 이 관현악단의 이번 공연은 40세의 젊은 스페인 지휘자 헤수스 로페스 - 코보스의 지휘로 베풀어졌는데 매우 감동적이었다. 일반 청중의 눈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보다도 지휘자의 모습에 쏠리게 마련이다. 객원 지휘를 맡은 로페스 코보스는 오른손으로는 연방 지휘봉으로 박자를 헤아리면서, 왼손으로는 매우 재치있게 표정을 살려 나갔는데 마치 조각가가 석고로 여인상을 빚듯이 교묘하게 움직이는 손 모양새는 유달리 인상적이었다. 그는 석고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써 이를데없이 아름다운 비너스를 빚고 있었다. 아니, 음악의 여신 뮤즈를 빚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이 젊은 지휘자는 키가 늘씬한 데다가 얼굴 모습이 우아하고도 아름다워 음악의 남신 아폴론이나 또는 그리스 신화의 시인이며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느껴졌는데 이렇듯 용모가 빼어난 지휘자가 조각가와 같은 솜씨로 왼손을 교묘하게 놀리는 모습을 보며 청중은 넋을 잃고 있었다
발드한스, 이르지 (Ji Waldhans 1923~)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브르노 음악원에서 보프밀 리스카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47년 오스트라바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합창 지휘자로 출발, 후에 동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 승격했다. 1955년 오스트라바 야나체크 필 창설에 참여하고 스스로 수석 지휘자로 취임, 1962년까지 이 지위에 머물렀다. 1962년 브르노에 돌아가 브르노 국립 필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67년부터 소련에 초청되어 레닌그라드 필의 지휘자도 지낸 적이 있다. 현재는 브르노 음악원, 야나체크 음악원에서 지휘과 교수를 지내고 있다. 발드한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중견 지휘자로서 특히 장인적인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콘체르토 지휘에 기용되는 경우가 많다. 레코드로는 후흐로를 독주자로 한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이나, 포코르나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등을 들 수 있다(이상 수프라폰). 참으로 위험한 데가 없는 확고한 서포트 솜씨여서 그의 지휘 테크닉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가디너, 존 엘리어트 (John Eliot Gardiner 1943~)
영국의 폰토메천 매그너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와 아라비아어의 학위를 딴 다음,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서스턴 다트에게 음악을배웠다. 그 후 2년간의 프랑스 유학 스칼라십을 받아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를 사사하였다. 또한 안탈 도라티와 조지 허스트에게도 지휘를 배웠다. 그는 이미 15세 때 지휘를 하였으며, 케임브리지에 재학중이던 1964년에는 자신의 합창단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몬테베르디 합창단이 되었다. 1966년 위그모어 홀에서 이 합창단을 지휘하여 공개 데뷔를 장식했다. 1967년에는 몬테베르디의 탄생400주년을 기념하여 그 자신이 새로 교정한 판에 따라 [베스페레]를 연주하여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다음해 런던의 프롬나드 콘서트에서도 재연되어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이때 프롬스의 가장 젊은 지휘자로서 데뷔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그는 합창단과 더불어 몬테베르디 관현악단을 조직하였고, 그 이후 그 양자의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1973년부터는 라모의 많은 오페라를 소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1976년에는 코벤트가든에 데뷔하여 글루크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를 지휘하고, 다음해에는 베를린에서 헨델의 [예프타]를 지휘하는 등, 극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가디너는 바로크 시대의 합창 음악과 오페라의 지휘자로서 근년에 갑자기 주목을 모으고 있는데, 그 레퍼토리는 바로크에 한하지 않고, 고전파 시대의 음악까지 넓혀 모차르트의 [마적] 등도 지휘하고 있다. 레코드는 아찍 적고, 그것도 퍼셀과 헨델 중심이지만 극히 충실한 내용으로 되 어 있다. 퍼셀의 [메리 여왕의 탄생일을 위한 송가]와 헨델의 [디키시트 도미누스] 등이 대표적인 음반이다. 최신의 녹음에는 바흐가 있는데, 특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주목된다.
월리엄스, 존 (John Williams 1932~)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NBC와 CBS의 방송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주자였는데, 1948년에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전신하였다. 7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존은 트럼펫, 트럼본, 클라리넷도 마스터하였고, 할리우드에 옮기고 나서는 카스텔누오보-테데느코에게 작곡을 배웠다.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다음, 병역에 복무하여 공군 밴드의 지휘자·피아니스트·편곡자로서 활약하였다. 제대 후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로지나 레빈에게서 배우고, 또한 작곡과 관현악법도 배웠다. 1956년 할리우드의 영화 스튜디오와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1959년 빌리 와일더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어레인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1960년부터 독립된 음악 감독의 일을 시작했다. 1971년 초기에 아카데미 상을 받고 나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타워링 인페로 노> <조스> <미지와의 조우> <스타 워즈> <슈퍼맨>과 같은 대작을 차례로 손댔다. 그리고 1979년부터 아서 피들러가 죽은 다음 보스턴 팝스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고, 본격적인 지휘자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했다. 레코드는 아직 두 장밖에는 내놓지 않았지만 첫번째 앨범인 [팝스 인 스페이스](필립스)에서는 자작인 영화 음악을 신선한 편곡으로 들려 주어 전임자와는 다른 맛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다.
카일베르트, 요제프 (Joseph Keilberth 1908~1969)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다. 첼로 주자인 부친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25년에 카를스루에 국립극장의 연습 지휘자가 되고, 1933년에 그곳의 제1지휘자, 1935년에 음악 총감독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프라하의 도이치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1945년부터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 1950년부터는 함부르크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의 지위를 역임하였고, 1951년부터는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것과 병행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화를 피해 독일에 되돌아온 프라하도이치 필하모니의 멤버를 중심으로 1945년에 새로 결성된 밤베르크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도 취임하였다. 카일베르트는 다른 교향악단이나 오페라 극장, 그리고 음악제에서도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였다. 베를린 필하모니와 쾰른 방송교향악단에는 여러 번 객원 지휘를 하였으며 1952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첫 출연하였고, 또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을 인솔하여 에든버러 음악제에도 참가하였다. 바이로이트에는 1956년 이후 거의 매년 연속 출연하였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도 레귤러 출연자가 되었으며, 루체른 음악제의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였다. 1959년부터는 프리차이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에 취임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재건에 있어서 카일베르트는 음악적으로 유익한 조언자의 입장에 있었다. 이 새로운 극장에서 본격적이고 정력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이 극장의 정성을 한층 더 높였지만, 1968년 8월 20일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는 도중에 심장병으로 쓰러져 애석하게도 운명하였다. 카일베르트는 독일 음악의 전통을 한 몸에 젊어진 지휘자였다. 뼈대가 있고 중량감 있는 직접적인 강한 표현력을 가진 음악이라는 점에서도 그랬고, 연주회와 오페라에서도 독일계 작품을 특히 잘 소화시켰다.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힌데미트의 교향시 [화가 마티스], 프피츠너의 [팔레스트리나], R.슈트라우스의[아라벨라]와 [인테르메초] 등은 극히 높은 평가를 얻었다. 오페라에서는 가수에의 지시에 그 숙달성을 보였다. 그래서 모차르트와 바그너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렸으며, 또 가수들로부터의 평판도 좋았다. 레코드에는 먼저 베버의 [마탄의 사수](에인절)를 들고 싶다. 이것은 이 오페라극의 최초의 전곡 음반인 동시에 엄청난 박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독일적인 것을 넘쳐 흐르게 한다. 그 밖에도 역시 바그너 것을 들 수 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런던)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세븐시즈)의 각각의 전곡 음반은 바그너 팬에게는 매우 고마운 프레젠트이다.
샨도르, 야노슈 (J nos S ndor 1933~)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음악가로서의 출발은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의 최초의 타악기 주자로서 시작했다. 다시 음악원에 들어가 배웠는데 헝가리의 대표적 지휘자였던 라슬로 쇼모지, 안드라슈 코로디 두 사람을 사사하여 지휘법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다시 이탈리아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연구를 거듭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불가리아의 음악 감독 겸 지휘자를 1963년까지 지냈고, 1968년부터는 제르 필하모니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발탁되었다. 소피아 발레단의 유럽 공연에는 여러 번 동행하기도 했다. 레코드는 부다페스트 필하모니를 지휘한 바르토크의 [무용 모음곡]과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지휘한 바르토크의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협주곡](이상훈가로톤)의 2장이 있는데 같은 헝가리 사람이 민족색을 풍긴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약간 단조로군 느낌을 준다.
위르겐스, 위르겐 (J rgen J rgens 1925~)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의 음악 김나지움에서 쿠르트토마스에게 배우고, 이어서 프라이부르크의 자르 고등음악대학에서 콘라트 레히너를 사사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옛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이탈리아 합창단'을 조직했다. 방송 일을 위해 함부르크로 옮기고, 1955년 이탈리아 협회의 협력을 얻어 함부르크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창립하여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이 합창단을 이끌고 유럽의 주요 도시, 근동, 미국 등지에서 연주하였다. 현재도 이 지위에 있으면서 1960년부터 함부르크 대학의 음악학의 강사 및 콜레기움 무지쿰의 지도자를 하였고, 1966년에는 이 대학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레퍼토리는 오케겜, 조스캥 데 프레에서 헨체, 달라피콜라까지로 그 범위가 넓고, 오페라 역사의 초기에 속하는 마르코 다 갈리아노의 [다프네]의 부활 연주, 모차르트의 [카이로의 거위]의 부활 연주를 통해 호평을 얻었다. 음악 학자로서 {오르페오}와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의 원전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마드리갈레} 등의 논문도 있다. 또 몬테베르디, 스카를라티의 신전집의 교정도 보았다. 레코드는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마르코 다 갈리아노 [다프네}, 몬테베르디 [마드리갈레집]과 [가이스트리헤 콘체르테](이상 아르히프) 외에도 다수가 있다.
로프런, 제임스 (James Loughran 1931~)
영국의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으나, 한편으로는 음악에 강한 흥미를 갖고 지휘 경험을 쌓고 있었다. 1958년 독일에 건너가 본 오페라 극장의 연습 지휘자가 되었고, 다시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오페라 극장에서 견습하면서 경험을 쌓은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1961년 클렘페러를 심사 위원장으로 하는 필하모니 아 관현악단의 지휘자 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하여, 본머스 교향악단의 실베스트리 밑에서 보조 지휘자로 3년 반쯤 지내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 후 1965년 글래스고의 BBC 스코티시 교향악단 수석 상임 지휘자로 초빙되었고, 1971년에는 타계한 바르비롤리의 후임으로 맨체스터의 할레 관현악단 지휘자 및 음악 고문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79년부터 자주 객원 지휘하였던 밤베르크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도 겸임했다. 로프런은 레퍼토리가 폭 넓은 지휘자로서 연주회 외에 오페라도 많이 지휘하고 있으며, 새로운 영국 작품의 소개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과장이 안 되는 범위에서 전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 신경을 써서 매우 정성스런 음악을 만들어 낸다. 대표적인 레코드로는 할레 관현악단을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빅터)이 있다. 로프런은 그 곡에 있어서의 가장 알맞은 템포를 설정해 음악을 끌고 나가, 매끄러운 촉감을 느끼게 하는 특유의 개성이 있다.
카사드쉬 장 - 클로드 (Jean - Claude Casadesus 1935~972)
작곡가이기도 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인 카사드쉬가의 한 사람으로서 여배우였던 모친 지젤의 부친(외조부)은 피아노의 거장로베르의 부친의 형이다. 파리 음악원에서 타악기를 배우고 1959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밖에 화성, 대위법, 푸가, 작곡도 배웠다. 또 에콜 노르말에서 피에르 데르보에게 지휘를 배웠으며, 거기서 제1위로 선발되었고 피에르 불레즈에게도 지휘와 악곡 분석을 배웠다. 처음에는 타악기 주자로서 활약하였는데, 로베르 카사드쉬 부부와 협연한 바르토크의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CBS) 등도 녹음하고 있다. 지휘자로서는 프랑스 각지에서 활약 후, 1969년부터 파리의 오페라 극장과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현재까지 파리 오페라 극장에는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1971년부터 루아르 지역교향악단의 부주제자가 되고, 1976년부터는 릴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다. 소련, 유럽, 체코슬로바키아, 엑상 - 프로방스 음악제 등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레코드는 베토벤의 교향곡부터 졸리베와 베리오의 작품까지 상당히 광범위한데 작곡자가 "작품의 정신에 충실하다"고 칭찬한 뒤티외의 [교향곡 제1번](카리오페)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푸르네, 장 (Jean Fournet 1913~)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1930년부터 1936년에 걸쳐 공부하였고, 필리프 고베르와 그 밖의 지휘자에게 지휘법과 플루트 주법 등을 배웠다. 이동안 1932년에 플루트로 '프리미에 프리'를 얻었다. 졸업하던 해인 1936년에 루앙에서 데뷔하였다. 2년 후에 루앙의 오페라 극장과 최초의 계약을 체결하였고, 그 후 마르세유 오페라 극장과도 계약을 체결하였다(1940). 1944년에 푸르네는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였고, 그 이후 13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같은 해인 1944년에 그는 파리의 에콜 노르말 음악 학교의 지휘과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데 1962년까지 계속되었다. 1961년에 푸르네는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영입되었고, 1968년에는 역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및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이동안에도 푸르네는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 활동을 계속하였다. 유럽, 남북아메리카, 이스라엘, 일본 등지에서도 특히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레퍼토리는 넓은데 그중에서도 드뷔시, 라벨, 베를리오즈 등의 프랑스 작품에서는 그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레코드에 녹음된 체코 필하모니와의 드뷔시 연주와 NHK 교향악단을 지휘한 프랑스 음악의 연주는 높이 평가되었다. 어떤 오케스트라로부터도 프랑스 음악의 특징적인 표현을 이끌어 내는 데는 뛰어난 능력을 구사한다. 레코드도 당연히 프랑스 음악의 녹음이 대부분이고 각각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체코 필하모니 를 지휘한 드뷔시의 [바다](수프라폰), 아멜링을 독창자로 받아들인 네덜란드의 오케스트라, 합창단과 녹음한 포레의 [레퀴엠](필립스), 체코 필하모니와의 프랑크 [교향시집](수프라폰) 등이 대표적 녹음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방송 필하모니를 지휘한 드뷔시 [야상곡] [이베리아] 등의 녹음도 잊을 수 가 없으나 오케스트라의 테크닉에 다소 부족한 점도 있다. 또한 여러 종류의 콘체르토의 반주를 담당한 레코드도 있다. 이들 활동중, 1973년을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에서 상임 지휘자의 자리를 떠나 프랑스 문화 정 책의 일환으로서 탄생한 이르 드 프랑스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여, 그 결성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파리 주변 여러 도시에서의 많은 연주회를 이 오케스트라를 통해서 연주하고 있다.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케스트라이기 때문에 레코드 녹음은 아직 없지만, 한때의 재정적 위기를 극복한 이 오케스트라와의 앞으로의 활동이 매우 기대된다
마크시미우크, 예지 (Jerzy Maksymiuk 1936~)
폴란드의 그로드노에서 태어났으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를 겸한 지휘자이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후에 피아노로 전향하였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페르코프스키에게 작곡을, 키르야츠카와 레페르드에게 피아노를, 그리고 마디에게 지휘를 배웠다. 졸업 후는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했으며, 1964년 파데레프스키 콩쿠르에서 제1위로 입상하였는데, 특히 현대 음악의 연주를 장기로 했다. 그는 동시에 거의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여 폴란드의 젊은 작곡가로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70년에는 지휘자로서도 데뷔하여 1972년까지 바르샤바의 비에르키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동시에 폴란드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도 겸임하였다. 1973년에는 동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되었고, 1976년 미국 연주 여행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그는 1972년에 실내 오페라를 위한 소편성의 오케스트라의 창단을 의뢰 받아(이것은 이듬해 폴란드 실내관현악단으로 명명되었다) 그 지휘자로 활약하였고 구미 연주 여행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크시미우크는 현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작곡가로서도 유명하여 많은 작품이 있다. 레코드는 폴란드 실내관현악단과의 비발디의 협주곡 [사계],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집],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이상 에인절) 등 상당한 수의 음반이 있다.
비엘로홀라베크, 이르지 (Ji B lohl v다 1946~)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부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교회의 합창단에 들어가 11세 때부터 첼로를 명수 사드로를 사사하여 첼로를 배웠다. 다시 프라하 음악원에서 첼로를 로슈에게, 지휘를 리슈카와 헤르톨에게 배웠다. 더욱 프라하 음악 아카데미에서도 지휘를 전공하였다. 1967년에는 여성만의 실내오케스트라인 'Orchestra Puellarum Pragenesis'를 결성하고 그 지휘자가 되어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1968년과 1969년에 프라하와 스톡홀름에서 첼리비다케의 지도를 받은 다음, 1970년에 오무로츠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그리고 1972년까지 체코 필하모니의 부지휘자를 역임하고,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브르노 국립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브르노에 취임한 1973년에는 미국 연주 여행과 '프라하의 봄'음악제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음악제를 비롯하여 각지에 객원 지휘 초청을 받아 객원 지휘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카라얀 콩쿠르에서도 입상하여 베를린에 데뷔하였다. 1977년부터는 현재(1988)까지 계속해서 프라하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체코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1990년 가을부터는 노이만의 뒤를 이어 체코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한다.
쉴러, 요하네스 (Johannes Sch ler 1894~1966)
독일의 피츠에서 출생했다. 베를린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그리비체의 카펠마이스터가 된다. 1922년부터 1924년은 카리닌그라드,1924년부터 1928년까지는 하노버 오페라 극장의 지휘를 맡았고, 1928년에는 올덴부르크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에 할레의 주립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옮겼고, 1933년에는 에센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36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영입되면서 독일의 오페라계에 군림한다1949년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1960년까지 또다시 하노버로 옮겨 주립 극장의 음악 총감독을 계속했다. 만년의 쉴러는 1963년부터 1964년까지 베를린 도오페라의 지휘자로 지내다가, 1966년 10월 3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베를린 사대인 1942년에 방송용으로 상연한 바그너의 [리엔치](독일 메트로놈 LP로 복각되었는데 당시 독일의 일류 바그네리안들을 교묘하게 리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그의 실력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랜치베리, 존 (John Lanrhbery 1923~)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으며, 왕립음악원에서 배웠다. 1948년 25세 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잔 발레단, 1951년에는 이 해에 별세한 램버트의 후임으로 새들러즈웰즈 발레단(현재 로열 발레)의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60년에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그 사이 그는 발레 음악의 편곡이나 극영화의 작곡도 많이손대었는데, 그중에서도 에롤의 작품에 의한 [라 피유 말 가르데(말괄량이 아가씨)]와 1964년의 [드림](멘델스존의 음악에 의한 것으로 세익스피 탄생 400주년을 기념한 [한여름 밤의 꿈]), 또한 1971년에 제작된 영화 [포터 아저씨의 동물 이야기], 비틀즈의 명곡을 편곡한 [풀 온 더 힐],쇼팽 작품에 의한 [맨스 인 더 컨트리] 등은 걸작으로서 그 평가가 높다. 1972년 이후는 오스트레일리아 엘리자베스 발레와 아메리칸 발레 시음악 감독을 하면서,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폭 넓은 연주 곡목에 걸쳐서 공연의 지휘를 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고상하면서도 다이내믹한 템포로 조형되고 전형적인 로열 발레 양식을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정통적인 발레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레코드는 [라 피유 말 가르데] 하이라이트가 런던에서 나와 있고, 그 밖에 영국 EMI에 [예프게니 오네긴](차이코프스키에 의한 편곡 음반), [풀 온 더 힐], [맨스 인 더 컨트리],그리고 [돈 키호테](밍크스 작곡), [백조의 호수]의 영화에서의 사운드 트랙 음반 등이 있다. 총체적으로 잘 정리된 수준 높은 해석으로 즐길 만하다.
페를레아, 요넬 (Jonel Perlea 1900~1970)
루마니아의 오그라다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루마니아인, 모친은 독일인이었다. 뮌헨과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였다. 로스토크와 그 밖의 지휘자를 거친 다음 1928년부터 1944년까지 부쿠레슈티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1934년부터 음악 감독,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이 동안 부쿠레슈티 방송국의 음악 감독과부쿠레슈티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에 나치스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으나 종전 후 자유의 몸이 되자 이탈리아 각지에서오페라를 지휘하였고,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1949년 12월 1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데뷔하였고, 그 상임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55년부터 코네티컷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는 한편, 구미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를 하였다. 1958년에 오른손이 마비된 뒤에도 레코드 녹음을 중심으로 지휘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0년 뉴욕에서 별세했다. 레코드는 오페라 [루클레치아 보르지아]와 [아이다] 전곡 음반(RCA)과 [로시니서곡집](복스) 등이 있다.
루델, 율리우스 (Julius Rudel 1921~)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미국의 지휘자이다. 처음에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공부했는데, 17세 때 미국으로 옮겨 가서 뉴욕의 매네스 음악학교에서 배웠다.1943년 연습 피아니스트로서 뉴욕 시티 오페라에 들어갔다. 미국 시민권을 얻게된 1944년부터 부지휘자로 승격했고, 이 해에 J.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집시 남작]을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57년까지 부지휘자로서 오페라의 경험을 쌓은 다음,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여러시즌에서 뉴욕 시티 오페라의 레퍼토리를 충실하게 하였고, 또 우수한 연주를 함으로써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필적하는 단체로 육성하여 그 뛰어난수완과 재능을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국은 물론 유럽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도 자주 객원지휘하는 한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도 성공하고 있다. 1961년에는 오스트리아정부로부터 예술과 과학의 명예 훈장을 받았고, 그 밖에 독일과 이스라엘 정부로부터도 표창을 받았다 루델은 뉴욕 시티오페라의 음악 감독을 20년 이상이나 하였고, 몬테베르디와 현대 오페라를 적극적으로 상연하였다. 또 소프라노인 비버리실즈를 19세기의 프리마돈나로 육성하여, 오페라를 뛰어난 상연으로 이끌어 성공시켰다. 1970년부터는 파리, 빈, 함부르크 등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현대를 대표하는 오페라 지휘자로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미국에서도 뉴욕 시티 오페라 외에 카라머 음악제, 신시내티 5월제의 음악 감독, 워싱턴 근교의 월프 트랩 팜 파크의음악 고문 등을 겸임하였다. 1971년 창설된 워싱턴의 케네디센터의 음악 감독도 4시즌 맡는 등, 그 뛰어난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8년에 뉴욕 시티 오페라의 총감독을 비버리 실즈에게 이임하고 그 보좌를 하면서, 1979년부터는 버펄로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페라의 레퍼토리는 몬테베르디에서 현대의 히나스테라까지 매우 넓다. 레코드는 1970년대 실즈를 주연으로 한 벨리니, 도니체티, 베르디(EMI와 미국 ABC), 슈타데가 주 연한마스네의 [신데렐라](CBS) 등이 있다.
델러, 외르크 엘발트 (J rg Ewald d hler 1933~)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하머프뤼겔 주자이기도 하며,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베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운 다음, 프라이부르크의 고등음악대학에 진학하여 하프시코드를 프리츠 노이마이어에게 배웠다. 1963년 베른의 외르크 슈투키 상을 받았으며, 1964년에 뮌헨 국제 음악 콩쿠르의 하프시코드 부문에서 제3위로 입상하였다. 그 후 솔리스트로서 샹드르 베그 실내교향악단, 카메라타 베른, 바젤 스콜라 칸토룸 합주단, 플루트 주자인 페터 - 루카스 그라프 등과 협연했다. 1962년부터 베른 음악원에서 쳄발로, 통주저음주법을 지도하고 있으며 1974년에는 베른 실내합창단의 지휘자로도 취임하였다. 델러는 확실한 기교로 단정한 연주를 하는 스위스의 제1인자이다. 자신이 지휘한 것을 포함하여 레코드도 매우 많으며 그 레퍼토리도 광범하다. 바흐에서 모차르트,슈베르트까지를 버지널, 하프시코드, 하머프뤼겔을 통해 들려주는 [환상곡집],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집] [이탈리아 협주곡, 프랑스풍 서곡](이상 크라베스)등이그의 특징을 잘 전하고 있다.
에추베리, 제쥐 (J sus Etcheverry )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배운 다음 지휘자가 된 프랑스의 베테랑 오페라 지휘자이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카사블랑카 오페라 극장의 지휘를 맡은 다음 프랑스로 되돌아와, 1947년에서 1957년까지 낭시 오페라 극장, 1957년에서 1972년까지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1972년부터는 낭트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프랑스 각지를 비롯하여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도 자주 객원 지휘를 하고 있다. 이동안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주요한 레퍼토리인 19세기에서 금세기 전반의 프랑스의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전곡, 또는 발췌 음반을 많이 녹음하였다. 라무뢰 관현악단을 지휘한 들리브의 발레 음악[코펠기아]와 [실비아] 모음곡과 구노의 발레음악[파우스트](폰타나) 등이 있다.
크렌츠, 얀 (Jan Krenz 1926~)
폴란드의 부로크라베크에서 태어났다. 우지 음악원과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배우고, 작곡을 시코르스키에게, 지휘를 바슈밀스키에게 배웠다. 1946년 음악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포즈나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데뷔하였는데, 그 성공으로 2년 후인 1948년에 포즈나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그리고 1950년 체코 필하모니 객원 지휘 이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지휘 활동을 하였다. 1953년부터는 폴란드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1967년까지 14년간이나 이 지위에 있었다. 1968년 이후에는 바르샤바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더욱이 1979년부터는 서독의 수도 본 시의 음악 감독도 역임하였는데, 이 자리는 본의 베토벤 홀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비롯하여 오페라 극장,페스티발, 콩쿠르 등을 모두 통솔하는 위치였다. 크렌츠는 현대 감각이 넘쳐 흐르는 다이내믹한 연주를 하여 현대 작품에도 뛰어난 지휘를 한다. 레코드는 루토스와프스키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리블](무자) 이외는 협주곡으로서, 이시카와와 협연한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과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수프라폰), 세링과 협연한 시마노프스키의[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비예냐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필립스) 등이 있다.
아르트망, 장 - 클로드 (Jean - Claude Hartemann 1929~)
프랑스의 오토 - 손 현의 베제에서 태어났다. 파리의 에콜 노르말과 콩세르바투아르에서 배우고 브장송 지휘자 콩쿠르에서 입상하였다.1957년부터 1963년까지 디종과 메스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고, 1962년부터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 각지와 국외의 오페라 극장에도 초대되어 주목을 끌었다.1963년부터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 1968년에서 1972년까지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1972년부터 파리의 스콜라 캉토룸의 지휘와 실내악 교수, 1974년부터 모교인 에콜 노르말의 교수도 겸하고 있다. 또 프랑스 악기의 앙상블을 결성하여 그 지휘를 하였고, 청소년 필하모니의 지휘도 맡고 있다. 코드는 프랑스의 오페레타와 근대의 극장 작품이상당히 있는데 그것들은 거의 우리 나라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레코드는 구노의 [성 체칠리아 장엄 미사곡]과 프랑스 악기 앙상블을 지휘한 J.S.바흐의 [협주곡] 등이 있다.
마르티농, 장 (Jean Martinon 1910~1976)
프랑스의 리옹에서 태어났다. 리옹과 파리 음악원에서 주로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28년 '프리미에 프리'를 얻고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였다.그 후 루셀에게 작곡을, 뮌슈와 데조르미에르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시까지 그는 주로 작곡 활동에 힘을 쏟았고, 기회가 있으면지휘를 하였다. 대전중에는 프랑스 군에 종군하였고, 1940년에 포로가 되었다. 나치스 수용소 시절의 작품인 [Stalag Ⅸ]에서는 재즈의 요소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같은 시기의 작품인 [수인들의 노래]는 1945년에 파리 시의 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도 마르티농은 1948년에 [현악 4중주곡](바르토크상 수상 작품), [교향곡 제3번](1948년), [교향곡 제4번] 등의 역작을 발표했으며, [교향곡 제4번]은 1965년 시카고 교향악단 창립 75주년 기념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지휘자로서의 활동도 활발해졌는데, 먼저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 및 보르도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며(1946년), 객원 지휘자로서 국외에서의 활동도시작하였다. 1947년 런던에서 데뷔(런던 필하모니)하였고, 다음 두 시즌은 이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57년 북아메리카에서의 활동이 시작됐는데, 보스턴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였고, 그 이후 많은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하였다. 파리의 라무뢰 관현악단과의 계약(1951∼1957)에 이어서, 이스라엘 필하모니(1957∼1959), 뒤셀도르프 시립관현악단(1959∼1963), 시카고 교향악단(1963∼1969),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1968년 이후), 네덜란드의 헤이그 레지덴티 관현악단(1974년 이후)의 수석 및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이 동안 시카고 교향악단,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과는 많은 레코드 녹음을 하였다. 마르티농은 그의 관현악 수법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중용을 띤 지적으로 세련된표현으로 마무리짓는 역량은 프랑스의 작품 외에 프로코피예프, 바르토크 등에서도 훌륭히 발휘되고 있다. 첫째로 그의 해석과 지휘에서의 특징이 표현되고 있는 레코드는 파리 관현악단을 지휘한 라바르의
[관현악곡집(피아노 협주곡 2곡을 포함)](에인절)일 것이다.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과의 연주에 의한 프랑크의 [교향곡](에라토),생상스의 [교향곡 전집(제1번, 제2번, 제3번)](에인절), 전기 전집과는 별도로 녹음된 [교향곡 제3번], 피에르네 등의 작품을 라스킨과 공연한 녹음이 있다.또한 이베르의 [관현악곡집](이상 에라토), 그리고 드뷔시의 [관현악곡 전집]도 각각 뛰어난 레코드이다.또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인절)도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외에 라무뢰 관현악단, 빈 필하모니, 시카고 교향악단 등과 녹음한 음반이 있다.
아람바리, 헤수스 (Jes s Ar mbarri 1902~1960)
스페인의 빌바오에서 태어났다. 이곳의 음악학교를 졸업한 다음, 파리로 유학하여 폴 르프렘에게 작곡을 배웠다. 에콜 노르말에서 폴 뒤카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고, 블라디미르 골슈만에게 지휘법을 배운 다음, 바젤에서 바인가르트너의 조수를 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에 귀국하여 빌바오 교향악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1938년 스페인에서 최초의 시민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다. 특히 지방 도시의 음악 단체의 조직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1953년 마드리드 음악원 교수, 마드리드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맡았고, 그 후에는 스페인 지휘자 협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아람바리는 대규모 합창곡을 잘 소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스파복스에 스페인 근대곡을 상당히 녹음하고 있다. 레코드는 팔랴의 [삼각모자] 모음곡과 피아니스트인 라로차를 독주자로 한 [스페인 정원의 밤]의 두 곡을 넣은 한 장(이스파복스)이 스테레오 초기에 소개되어 있다. 그의 표현은 온화함 속에 독특한 풍토감을 그린 것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이다.
핀카스, 이르지 (Ji Pinkas 1920~)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약력은 불명하지만 1945년에 체코 방송합창단의 지휘자 겸 예술 감독에 취임하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1955년 이래 브르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고, 1962년까지 그곳에 재임하였다. 이해 브르노 필하모니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66년부터는 오스트라바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맡고 있었는데, 현재의 동향은 자세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핀카스는 합창 지휘자로 스타트하였는데 그 후에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연찬을 쌓고 콘서트의 분야에 진출한, 이른바 유럽의 전통적인 지휘자라 하겠다. 레코드가 적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지휘자이다. 드보르자크의 [전설곡](수프라폰)을 듣는 한에 있어서는 가식이 없는 지방색에 뿌리를 박고 있는 소박한 호연을 들을 수 있다. 그의 표현에는 세련미는 부족하지만 오케스트라를 콘트롤하는 실력은 상당하다. 이 밖에 카메니코바를 독주자로 한 라흐마니노프의[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수프라폰)도 있는데 견실한 장인적 지휘 스타일이다.
바르비롤리, 존 (John Barbirolli 1899~1970)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조부, 부친 모두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조부의 대에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모친은 남프랑스의 출신이었다. 어릴 때의 이름은 이탈리아풍으로 '조반니 바티스타'였는데, 후에 '존'으로 고쳤다. 런던의 왕립 음악원(RAM)에서 첼로를 배우고, 1916년에 퀸즈흘
오케스트라의 최연소 주자가되었으며,다음해 첼리스트로서 처음으로 리사이틀을 가졌다. 바르비롤리는 1928년부터 1933년가지 런던에서 오페라와 콘서트를 지휘하여, 현장에서의 경험을 쌓았다. 1933년 글래스고의 스코티시 관현악단(현재 스코티시 내셔널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여기서 3년간 재임하였는데, 이 악단의 수석 오보에 주자였던 이블린 로스웰(1911∼ )과 1939년에 결혼하였다(이때 바르비롤리는 재혼). 1939년 가을,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함으로써 미국에 데뷔하여 호평을 받았다. 1937년부터 1943년 봄까지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서 이 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재임했는데,거장의 후임으로 앉았기 때문에 비판도 받았지만 단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여섯 시즌에 걸쳐 잘 해내었다. 1943년 맨체스터의 할레 관현악단의 간청으로 귀국하여 악단의 재건에 공헌하였다. 1949년에 KBE(sir)로 서위되고 할레 관현악단의 종신 지휘자로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자유스런 활동의 길을 바란 그는 1968년에 스스로 사퇴하였다. 악단은 그의 공적에 보답하기 위해 계관 지휘자의 칭호를 바쳤다. 할레 관현악단의 재임동안 바르비롤리는 1961년부터 1967년까지 휴스턴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도 겸임하였는데, 이곳에서의 신망은 아주 컸다. 그는 오랜 경력을 쌓으면서 성장한 대기만성형의 지휘자로서 할레 관현악단에 취임한 이래 서서히 원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영국적인 겸손한 인품 속에 이탈리아의 피가 뜨겁게 솟아나는 그 맛은 잘 숙성된 와인을 마시는 듯한 느낌에 빠지게한다. 그의 수병인 할레 관현악단의 음은 '버건디(부르고뉴) 사운드'라고 할만큼 섬세하고 달콤한 와인당이었고, 음악의 밑바닥에서는 언제나 '화이트 호스'의 맛을 느 끼게 하였다. '엑스포 70'에 참가하기 위해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과 마지막 리허설을 할 때 쓰러져 구급차로 병원에 가는 도중 애처 이블린에게 안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61년 이후 그는 베를린 필하모니에 초청되었는데, 1964년 말러의 [교향곡 제9번]을 지휘했을때그 지휘에 감동한 전체 단원들의 희망으로 이례적인 녹음을 했다. 1965년부터 빈 필하모니를 처음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전곡 녹음도 독특한 느린 템포에 의한 도취적인 명연으로서 남아 있다. 할레 관현악단과의 녹음 역사는 길고 그 수도 많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집](모두 에인절)은 그 맛이 풍부한 연주로서 시벨리우스 지휘자로서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엘가, 본-월리엄스, 딜리어스 등 현대 영국 음악에서 Sir John의 이름을 영구 불멸로 하는 명반을 남기고 있다.
프리처드, 존 (John Pritchard 1921~)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부친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후에 피아노와 비올라를 공부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지휘법을 배웠다. 1947년 재개된 글라인드본 페스티발 오페라의 연습 교사가 되었고, 1948년에 프리츠 부슈의 조수 겸 합창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49년 갑자기 병에 걸린 부슈를 대신하여 [돈 조반니]를 지휘함으로써 오페라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라인드본 오페라에 머물면서 1963년부터 음악 고문, 1969년부터 1978년까지는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다.글라인드본의 시즌은 여름이므로 프리처드는 콘서트에서도 활약했고, 1957∼1963년에는 로열 리버풀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1962∼1966년에는 런던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오페라와 콘서트의 두 면에서 활약하여, 1978년 쾰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가 되었다. 1981년 가을에는 뤼셀의 벨기에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쾰른 국립 오페라 극장과 겸무의 형식으로 취임했다. 1982년에는 로제스트벤스키의 후임으로서 BBC 교향악단 수석 지휘자가 되어 1988년 현재까지 그 지위에 있다. 그는 매우 폭 넓은 레퍼토리를 가지며 그 연주에 안정감이 있다.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CBS)이나 티펫의 [한여름의 결혼](영국 필립스)의 오페라 전곡 음반에서 그의 실력을 들을 수 있다.
크리프스, 요제프 (Josef Krips 1902~1974)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빈의 음악원과 아카데미에서 만디체프스키와 바인가르트너에게 배우고, 1918년부터 1920년까지는 바이올린 주자로서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21년에 바인가르트너의 권유로 빈의 폴크스오퍼에서 그의 밑에서 합창 및 연습 지휘자가 되었고, 곧 악장으로 승격하였다.
여기에는 1924년까지 있었는데, 마침내 엘베의 아우시히 시립극장의 오페라 부문의 수석이 되었다.1925년부터 1926년에는 도르트문트의 오페라 극장, 1926년부터 1933년까지는 카를스루에의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33년 크리프스는 빈의 국립 오페라 극장의 정지휘자가 되고, 1935년에는 빈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도 나치스가 침공하자 1938년 빈을 탈출하여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의 오페라 극장과 필하모니의 객원 지휘를 한 시즌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나치스에 의한 방해로 지휘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1945년 크리프스는빈 음악계의 재건에 나섰는데, 극장이 파괴된 국립 오페라 극장의 공연을 폴크스오퍼와 안 데어 빈 극장에서 하였고, 무지크페라인에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였다. 더욱이 1946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돈 조반니]를 지휘하였고, 그 이후도 이 음악제에 여러 번 출연하였다.그리고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이나 빈 필하모니와 함께 유럽 연주 여행도 여러번 하였는데, 이러한 일로 인해 빈 악계 재건의 아버지로서 신망을 모았다.그리고 국립 오페라 극장에는 1950년까지 재임했고, 1954년까지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는 버펄로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 1963년부터 1970년까지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 사이의 1963년에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지휘를 통해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 데뷔하였으며, 1966년부터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도 객원 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부터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로 영입되어 활동하다 1974넌 10월 13일에 운명하였다. 크리프스는 빈에서 특히 큰 경애를 받았는데, 빈과 인연이 많았던 고전파와 낭만파의 작품에서는 전후의 빈 음악 애호가들을 매우 기쁘게 하였다. 그는 표현력과 구축성이 약한 개성의 부족함은 있었지만빈 특유의 감성과 잘 직결되는 크리프스만이 창출할 수 있는 색감을 단아하게 펼치고 있다. 대표적인 레코드로서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5번] [제31번] [제35번] [제36번](필립스)을 암스테르담의 오케스트라와 공연한 음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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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체를, 카렐 (Karel An erl 1908~1973)
보헤미아의 남부 투카피에서 태어났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프라하에 유학하였는데, 부친의 뜻을 거역하여 프라하 음악원에 입학하였다.거기서 알로이스 하바에게서 작곡을, 바츨라프 탈리히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그리고 다시 독일에서 헤르만 셰르헨도 사사하고,1930년 뮌헨의 현대 음악제에서 스승 하바의 오페라 [어머니]를 초연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 제네바의 오페라 극장의 코레페피토르(가수의 코치)가 되었고, 1931년부터 1939년까지 프라하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나치치 비협력자로서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였으며, 그동안 양친과 처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는 비참한 일도 체험하였다.그러나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프라하 국립극장의 지휘자로서 악단에 복귀하여, 조국이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새로운 걸음을 시작한 1948년에 다시 프라하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이어서 1950년, 기구한 운명으로 후에 안체를 자신의 후임이 될 바츨라프 노이만(스메타나 4중주단의초대 멤버에서 지휘자로 전향)의 뒤를 이어 체코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및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전쟁으로 참담한 상태에 있었던 이 명문 오케스트라를다시 세계 제일의 악단으로 발전시켰다. 소련을 비롯하여 동서 유럽의 나라들도 연주 여행을 자주 했는데, 1968년 미국과 캐나다를 단신으로 연주 여행중 체코의 자유화를 둘러싼 프라하의 동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체코 필하모니의 자리를 사임하면서 캐나다에 망명을 기도하였다. 1969년에 오자와의 후임으로서 토론토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나 4년 후에 운명하고 말았다. 안체를은 전위 작곡가 하바나와 세르헨의영향으로 현대 음악과 젊었을 때부터 친근하였고, 따라서 그의 보헤미아 국민악파의 연주에는 현대적인 감각이 넘쳐 흘렀고, 그것이 체코의 전통적, 민족적인 표현과 멋지게 일체화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의 나라인 소련의 프로코피예프나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도 그러한 장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레코드는 빈 교향악단 을 지휘한 것도 있지만 체코 필하모니와 녹음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드보르자크의 [신세계에서]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 [타라스 불 바] [그라골 미사](이상 수프라폰)가 걸출하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메오와 줄리에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번] [교향곡 제5번] [축전 서곡],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상 수프라폰)등은 현대 음악에 관한 체를의 명성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젤트레르를 독주자로 하는 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의 [장송 협주곡](수프라폰)은 현대 독일 작곡가의 곡이 나치의 폭력에 침범 당하는 체코슬로바키아에의 애가로서 작곡된 것이라는 데서도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녹음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주목해야 할 일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뵘, 카를 (Karl B hm 1894~1981)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변호사로서 그라츠 시립극장의 법률고문이기도 하며, 아마추어이면서도 아름다운 바리톤 목소리로써 특히 베르너를즐겨 노래 불렀다. 뵘 집안은 그라츠에서 가장 부유한 명문가였다. 최초의 피아노 교사는 시립극장의 하프 주자인 바이스인데, 소년 뵘이 부친의 노래의 반주 등을 치고 있는 장면을 때마침 정가에 출입하고 있었던 지휘자 프란츠 샬크에게 인정되어, 그 인연으로 빈에 나가 음악 학자 만디체프스키에게 화성학, 대위법, 작곡을 배우게 된다. 한편 이 무렵에는 법률도 배우고, 또 육군 대신이었던 숙부의 희망으로 군인의 길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길은 그가 말에 채임으로써 간단히 결말이 나고 말았다. 그라츠에 되돌아온 뵘은 시립극장의 연습 지휘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1917년 네슬러의 오페라 [ - 킹겐의 트럼펫 주자]를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한편, 그 2년 후에는 그라츠 대학에서 법률 학위를 받았다.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지휘는 합창만도70회라는 연습을 쌓았고, 따라서 그 성과는 일약 그를 넓은 악단의 세계에 끌어내게 되었다. 특히 이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바그너에 대한 권위로 자타가공인하고 있던 무크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1921년에는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 4카펠이스터의 지위에 앉게 되었다. 이 지위는 매우 낮은 것이었지만 그는 그라츠 시립극장의 총감독의 지위도 마다하고 이 지위에 부임하였고,발터로부터는 모차르트와 바그너에 관하여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6년간의 뮌헨 시절에 뵘은 [장미의 기사], [니벨룽겐의 가락지] 등을 지휘하였다.한편으로 가수 테어 린하르트와 결혼했다.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여기서는 총감독 에베르트, 연출가 라베날트, 무대 장치가 라이킹, 사업 부장 빙크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오페라가 탐색되었다. 크르 - 네크, 힌데미트, 베르크의 작품 상연은 특히 화 - 가 되었고, 이들 현대 작곡가와의 교류 가 깊어 갔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적극적으로 열게 되었다. 1931년, 뵘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 독으로 옮겼다. 다름슈타트 시절의 현대 작품과의 만남은 여기서도 연관되어 만프레트 구를리트의 오페라 [병사들]이 여기서 초연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큰 성과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의 상연으로서 자신의 작품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에 대하여 슈트라우스는 깊은 호의를 보였고, 뵘은 지휘자 슈트라우스로부터 대단한 영향을 받게 된다. 뵘에 따르면 "모차르트에의 참다운 애정과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슈트라우스에게 힘입은 바가 실로 크다"고 했다는 것이다. 1933년의 이른 봄, 뵘은 처음으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를 하였다.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연주자로서
이 극장에 들어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고, 빈 필하모니의 단원들의 앞에 서게 된 것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연주 곡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4년 뵘은 프리츠 부슈의 후계자로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에 초대되었다. 독일 문화의 중심지이자 특히 오페라에서는 베버,
바그너 그리고 지금은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예술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뵘은 9년간 일을 하게 되었다. - 2차 세계대전 후로는 그 곳을 방문하는 일이 적어지게 되었지만 그의 예술의 이상향(유토피아)으로서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1934년 상연한 [장미의 기사], 1935년 초연의
[말 없는 여자] 등의 역사적 상연과 신작의 상연 그리고 바그너의 수많은 상연, 또한 1938년 슈트라우스가 그에게 바친 [다프네]의 초연 등, 그들에게는 당시의 일류 가수가 동원되었으며, 무대상의 앙상블의 훌륭함은 뵘의 마음에 뜨겁게 남아 있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기록적 명무대를 최후로
1943년, 뵘은 빈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옮겼다. 드레스덴 역에는 그를 전송하는 수백 명의 인파가 있다 한다. 빈에서의 일은 1945년 3월 12일,오페라 극장이 와해되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더구나 음악인으로서만 살아온 그에게 전후에 부당하게도 연주 금지의 처분이 내려졌다.
1947년에 그 처분에서 해방된 뒤, 그라츠, 잘츠부르크, 그리고 빈에서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이 재개된 것은 1955년 11월의 일이었는데,그 때까지의 그의 활동 마당은 테어터 안 데어 빈이었고, 국립 오페라 극장 재개의 주인공은 물론 뵘이었다. 뵘의 국 - 적 활동은 이미 드레스덴 시절의 초기에 이 오페라를 이끌고 영국을 방문한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대전 후의 빈 시절에 들어와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1950∼1953)을 비롯하여 해외에서의활약이 급증하였다. 그 사이에 빈에서는 음모가 기도되어, 1956년 그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이 음모에 휘말려 일단 이 극장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하여 뵘의 활동 무대는 잘츠부르크,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밀라노, 파리로 되었고, 1957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돈 조반니]를 통해 데뷔하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1959년에 빌란트 바그너와 함께 [트리을 상연한 것이 인연이 되어1962년부터 바이로이트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1963년 봄, 프리차이를 잃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는 뵘을 맞아들이려구 손을 썼지만 이미 한 극장, 한 오케스트라에 속박되고자 하는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다. 뵘이 가지는 칭호는 매우 많다. 1967년 이래의 빈 필하모니의 명예 지휘자, 오스트리아 음악 총감독을 비롯하여 각지의 명예 시민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인데, 더욱 중요한 것은 지휘자로서의 그를 향해 시민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경애의 정으로서, 이것은 아마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뵘이 비르투오소가 아니었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뵘의 레코드에 대해서는 각각의 것이 발표될 때마다 화 - 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거의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작품은 되풀이하여
재녹음이 실시되었다. 기예에 뛰어난 젊은 독주자와 협주곡을 녹음 하는 등, 그의 레코드에 대한 의욕은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사실 그는 레코드를 위한녹음을 매우 좋아했는데, 한편로는 레코드가 완전성만을 구하는 음악 청중들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큰 위험도 느끼고 있었다 한다.
포르스터, 카를 (Karl Forster 1904~1963)
독일의 그로스크레나우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레겐스부르크의 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그 뒤 뮌헨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교회 음악을 전공하였다. 이어서 뮌헨 대학에서 음악학도 배웠다. 1934년부터 베를린의 성 헤트비히 교회의 악장에 취임하였고, 그 합창단의 지휘자로서 활약을
계속하였는데 그의 가르침과 노력으로 이 유서 깊은 성 헤트비히교회의 합창단을 명실공히 제1급의 오라토리오 연주 단체로 육성했다. 그 후 1951년부터는대주교로 임명되었고, 1952년에는 명예 지휘자의 칭호도 받았다. 59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포르스터는 합창 지휘자였지만
동베를린의 헬무트 코흐와 비견되는 독일 교회 음악의 대권위자로서 알려진 존재였다. 성 헤트비히 교회의 합창단도 그의 손에 의해 베를린의 음악계에서도 탁월한 존재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레퍼토리는 정평이 있는 바흐와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하였고, 온후하고 정감이 넘쳐 흐르는 일상의 교회적 생활과 밀착된 견실한 지휘로써 감동으로 유도하였다. 그러한 바흐의 레코드는 수병인 성 헤트비히 대성당 가대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코피 칸타타]와[농민 칸타타]의 1매 이외는 폐반이 된 지 오래다. 그 밖에 베를린 교향악단과 성 헤트비히 대성당 성가대를 지휘한 슈베르트의 [독일미사](모두 에인절)만인
것이 아쉽다.
뮌힝거, 카를 (Karl M nchinger 1915~)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의 고등음악학교에서 배운 다음에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지휘법을 아벤트로트에게서 배웠는데, 이 시기에 아벤트로트와푸르트벵글러로부터 강한 평향을 받았다.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오르간 주자 및 합창 지휘자로서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1941년 하노버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여 1943년까지 있었고 그 뒤부터는 전쟁의 극화로 음악 활동에서 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 오케스트라 단원의 방자한 행동으로 인하여 연주회가 실패로 끝난 일이 있었는데 뮌힝거는 어떻게 해서라도 단원들과의 호흡이 잘 맞을 때까지 철저히 연습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싶어 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에 뮌힝거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음악 애호가들의 협력을 얻어 16명으로 구성된 바로크 음악 전문의슈투트가르트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하였다. 악조건하에서 엄격한 연습을 거듭하여, 그 해의 9월 18일에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차츰 그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1940년 처음으로 국외로의 연주 여행이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실현되었는데, 그 이후 매년 각 국에서 이 실내관현악단을 초빙하여 연주회를 갖고 인다. 이른바 세계의 문화 도시중에서 뮌힝거가 연주회를 열지 않았던 도시는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빈 필하모니, 파리 관현악단 그 밖의 유명 관현악단에의 지휘도 하고 있어서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처음에는 바로크 음악 전문이라는 명목으로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하였지만, 객원 지휘를 거듭함으로써 더욱 큰 편성의 오케스트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1966년 실내관현악단을 중심으로 하여 슈투트가르트 고전 필하모니를 결성하였다. 레퍼토리는 이처럼 반드시 바로크 음악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고전파의 작풍에도 손을 데고 있으며 브리튼, 힌데미트, 버클리, 그 밖의 현악 합주나 실내 관현악을 위한 작품도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레코드에서 뮌힝거의 본질은 역시 바로크 음악과 슈투트가르트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에 있다 그리고 빈 필하모니를 지휘함에 있어서도 뮌힝거는 이 오케스트라의 특질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뮌힝거가 만들어 내는 음악은 아카데믹하다 할 만큼의 구성감과 전아하고 낭만적인 표현인데,그 리듬은 어디까지나 독일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 슈투트가르트 관현악단과 함께 류관순 기념관에서 연주를 했다. 대표 레코드로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런던 두 종류)을 들고 싶다.
리히터, 카를 (Karl Ricbter 1926~1981)
오르간, 쳄발로 주자이기도 하며, 독일의 작센의 프라우엔에서 태어났다. 1936년에 드레스덴의 김나지움에 들어가 이 학교의 십자가 성가대의 단원이 되었고,종교 음악에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1946년 라이프치히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카를 슈트라우베(오르간의 대가로서 토마스 교회 칸토르), 마우에르스베르거(오르간 주자, 합창 지휘자로서 바흐의 권위자), 라민(합창 지휘자, 오르간 주자이고, 뒤에 슈트라우베의 후계자로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에 취임) 등의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사사했다. 여기서 종교음악에 대한 학식을 깊게 했으며, 바흐에 대한 조예를 심화시켰다.그동안 일찍이 라이프치히의 그리스도 교회의 오르간 주자를 맡았고, 1949년에는 토마스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취임하게 되었다. 리히터는 1951년 서독의 뮌헨으로 옮겨 그곳의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동시에 마르코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이 학교의오르간교수로 취임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오르간 주자로서의 리히터의 명성이 서방 사회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연주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리히터는 1951년 자신이 의도하던 바흐 연주의 실현을 위해, 바흐의 음악에서는 합창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견지서 단원을 널리 공모하여 뮌헨 바흐 합창단을 창단하여 그 지휘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합창단은 독일에서도 바흐를 노래하는 제1급의 단체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리히터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바흐 합창단을 설립한 동일한 의도로 관현악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는데,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세 오케스트라에서 능력 있는 훌륭한 연주가를 모아 1955년 뮌헨 바흐 관현악단을 결성하였다. 이 관현악단도 통일된 특색 있는 연주에 의해 곧 유명하게 되었다. 합창단은 매년 엄격한 오디션에 의해 단원을 보충하면서 상임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관현악단은 일정한 고정 단원에 의하지 않고 인접한 여러 나라에서 방송이나 레코딩 또는 연주회 때마다 뛰어난 주자를 모으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리히터의 훈련은 엄격하기만 했다. 리히터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고 해서 그 지휘에만 전념했던 것이 아니고, 교수로서의 후진 양성과 교회에서의 임무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오르간과 쳄발로의 연주회를 열고 각지에서의 연주 여행도 하는 등, 바흐를 중심으로 한 음악에 정력적이고 헌신적인 봉사를 하였다. 또한 뮌헨과 안스바흐의 바흐 음악제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서독 외무성 협조로 수병인 합창단과 관현악단을 이끌고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다망과 과로 때문인지 1981년 2월 15일 심장발작으로 뮌헨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리히터의 오르간과 쳄발로 연주는 악센트와 리듬을 분명히 한 것으로낭만적인 맛이 있다. 그래서 그의 바흐 연주는 주관성이 강한 연주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바흐의 정신에 깊이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 후반에 들어와서는 기교의 쇠퇴 때문인지 템포의 변동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지휘도 오르간이나 쳄발로의 연주와 공통된 면을 가지고 있어서 화려한 색채를 배격하면서, 서정성과 강한 긴장력을 솜씨있게 배분하고 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예전의 격정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고,
또 완고성 때문인지 독창자나 독주자와 잘 협력되지 않는 면도 노출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연주가의 인선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정으로 표출되었다. 대표적인 지휘 레코드로는 헤플리거, 엔겐, 제프리트, 피셔 - 디스카우를 기용한 옛 녹음인 바흐의 [마태 수난곡] [b단조 미사곡](모두 아르히프), 모차르트의 [레퀴엠](텔레푼켄)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굉장한 박력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다가온다. 쳄발로나 오르간의 레코드는 아주 많지만 [바흐 오르간 리사이틀 제1∼제4집](그라모폰)이 선곡이 좋고 연주도 확고한 바가 있다. "안이한 태도는 안 됩니다" 바흐 음악의 해석자로 유명한카를 리히터는 바흐 음악의 형이상학적인 뜻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합창을 편성할 때에도 전통적인 소년합창단을 쓰지 않고 소프라노와 알토를 동원하며 대학생 나이의 젊은 여성을 뽑았다. 소년합창단으로는 가사의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리히터는 프러시아 스타일의 가혹한 훈련을 하기 때문에 가냘픈 여성들은 피눈물이 날지경이지만, "바흐 음악에 절대 필요한 순수하고도 수정처럼 청순한 뜻을 이룩하려면 안이한 태도로는 안됩니다"하고 말하곤 했다.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b단조 미사곡의 [십자가에 못박혀]를 느템포로 슬프게 연주하지만 리히터는 빠른 템포로 경쾌하고도 우아하게 연주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보다도 다가올 부활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바흐는 당시 대부분의 곡을 스스로 지휘했기에 다이나믹스나 템포의 세밀한 지시를 스코어에 쓸 필요가 없어서 표정 기호가 적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해석에 따라 훨씬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리스텐파르트, 카를 (Karl Ristenpart 1900~1967)
독일의 킬에서 태어났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배우고, 1년간 빈 음악원에서 더 공부한 다음, 베를린 오라토리오 합창단의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32년 베를린에서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하고 그 지휘를 하게 되었다. 이 지휘 동으로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1946년에는 베를린 리아스 실내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설립하고 바흐의 칸타타를 전부 지휘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1953년 자르브뤼켄으로 집을 옮기고 자르 방송실내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적극적인 레코딩과 많은 우수한 독주자를 초빙하여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이러한 활발한 활동으로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리스텐파르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바로크 음악을 단골로 하였지만,그 밖의 나라와 기타 시대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바로크 음악의 해석은 연구에 바탕을 둔 정통성을 지닌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인 레코드는 부르단, 안드레 등을 객원으로 초청한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전곡(무지디스크) 음반이 있는데, 격조 높은 기품이 스며있다. 그 밖에도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전곡(무지디스크)이 권하고 싶은 음반이다.
토이추, 카를 (Karol Teutsch 1921~)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폴란드의 .크라코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크라코프필하모니의 콘서트 마스터였다. 크라코프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는데, 재학중부터 크라코프 필하모니의 멤버로서 활약하였고 1947년부터 콘서트 마스터를 맡았다. 1959년 바르샤바 필하모니로 자리를 옮겼으며,1963년에는 바르샤바 필하모니의 단원들로 구성된 바르샤바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하였다. 또 이 악단의 지휘자가 된 이래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동안 폴란드 국내와 유럽 각지는 물론이고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각지를 연주 여행했다. 레코드는 루돌프 부흐빈티와 협연한 모차르트의[피아노 협주곡 제9번, 제27번](텔레푼켄 )이 있다.
콘드라신, 키릴 (Kiril Kondrashin 1914~1981)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던 관계로 키릴은 어릴 때부터 니콜라이 지랴예프에게 피아노와 이론을 배웠다.1931년 이미 어린이극장의 지휘자로서 캐리어를 쌓기 시작했는데, 1932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지휘과에 입학하여 보리스 하이킨의 가르침을 받았다.재학중에 네미로비치 - 단첸코 극장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34년 10월 25일 브랑케트의 [코르누비유의 종]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1936년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레닌그라드의 마루이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1943년까지 역임했다. 모스크바에 되돌아와 볼쇼인 극장의 스태프 지휘자가 되었고, 사무엘 사모수드와 니콜라이 골로바노프를 보좌하였다. 1956년 볼쇼이 극장을 떠나 콘드라신은 콘서트 지휘자로 전신하였다. 특히 1958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에서 본선의 지휘자를 하였는데, 젊은 미국인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이 우승했을 때 그 개선 연주회를 위해 미국에 초청되어 서방측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960년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75년에 퇴임할 때까지 이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수준으로까지 육성시켰다. 단신으로도 런던, 파리, 베를린 등에 객원으로 초청되었고, 소련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지휘자로서 활약했는데 1979년에 갑자기 네덜란드에 망명하여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영국 데카와 필립스와 같은 서방측 레코드 회사와 연계되어 빈 필하모니,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등 일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이렇듯 화려한 활약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1981년 3월 7일 암스테르담에서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콘드라신은 소련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말러의 스페셜리스트로서 평가가 높았으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도 정평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4번]과 [제14번(사자의 노래)]의초연을 담당하여 훌륭한 성과를 올렸던 일은 기억이 새롭다. 콘드라신은 모스크바 악파의 지휘자답게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로맨틱한 맛이 짙은 표 현에그 특색이 있다. 레코드에서도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전집](멜로디아)에서 그러한 그의 예풍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또한 근대적인 구성력에도 뛰어나며,그러한 밸런스의 우수성이 서방측에서 높이 평가받게 된 요인이 되었다. 망명 후의 레코드는 드보르자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에서)](런던),림tm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차데](필립스)가 대표적인 음반으로서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세헤라차데]는 스케일이 큰 명연이라 하겠다. 화려한 색채감과 여유가 있는 다이내미즘이 특징적이다. 콘드라신은 거장의 예술 영역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시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텐슈테트, 클라우스 (Klaus Tennstedt 1926~)
현재의 동독 영내의 라이프치히의 서독 30km, 할레의 남쪽 15km 지점에 있는 메르제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이론을 배웠다.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1948년부터 할레 주립극장의 관현악단에 바이올린 주자로서 입단하였다. 그 동안 지휘법을 공부하여지휘자로 전향하였고, 1952년 이 극장의 악장이 되었다. 그 후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54년부터 1957년까지는 카를막스슈다트 극장의 제1악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는 라데보일 주립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62년에는 슈벨린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도 취임하였다. 이러한 활동외에 동독 내의 많은 극장과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도 했다. 그러나 1971년 동독을 나와 스웨덴으로 옮기고 예테보리의 스톨라 극장과 스톡홀름의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에서 지휘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72년에는 킬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1974년 처음으로 캐나다와 미국에 진출해 토론토교향악단과 보스턴 교향악단 등의 객원 지휘를 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런던에 데뷔하였다. 그 이래 런던 필하모니 와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텐슈테트는 슈미트 이셰르슈테트의 정성스런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다음에는 모셰 아츠몬이 지휘자로 있던 함부르크의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고, 또한 미네소타 관현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를 맡게 되었다. 이 밖에 베를린 필하모니,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등에서도 종종 객원 지휘를 하였다. 또 1983년 가을부터 솔티의 후임으로 런던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오페라나 연주회에서도 그는 폭 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으며 브리튼, 헨체, 야나체크의 작품도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독일, 오스트리아의 작품을 자주 연주하는데, 특히 말러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고 그런 만큼 말러의 연주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1980년에는 전년도에 있어서의 말러의 가장 뛰어난 연주 를 실현시킨 지휘자라는 것으로 빈의 말러 협회에서 표창을 받았다. 텐슈테트는 말러 이외에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바그너 등을 좋아했다. 그의 음악은 격정을 과장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서정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섬세하게 신경을 쓰는 치밀함과 정리가 잘 된 성실한 연주가 특징이며, 더욱이 그중에서 극적인 긴장감과 서정성과의 가 멋지게 조화되고 있다. 런던 필하모니를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제1번, 제3번, 제5번](모두 에인절)의 레코드가 텐슈테트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바노프, 콘스탄틴 (Konstantin Ivanov 1907~)
소련의 에프레모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군악대의 호른 주자로서 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정식 교육을 받고 1937년 지휘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의 제1회 전 소련 지휘자 콩쿠르에서 므라빈스키와 공동으로 제1위를 차지하여 주목을 모았고, 스타니슬라프스키 기념 아카데미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 후 전소련 라디오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거쳐, 1946년에 소련 국립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그로부터 1965년에 스베틀라노프에게 인계해 줄 때까지 그는 약 20년에 걸쳐 이 악단의 육성에 노력한 결과 급속하게 그 연주 수준이 높아졌다. 그 사이 1956년에는 이 악단에게 있어서 최초의 국외 연주 여행을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 실현하였고, 1958년에는 벨기에의
브뤼셀 음악제에 초청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욱 1960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였고, 196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에 연주 여행을 하였다 극히 정력적인 지휘에 의해 호탕한 연주를 전개하고 있는데 음악의 스타일에 대한 확실한 기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코드는 많지 않지만 전에 등장한소련 국립교향악단과의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제5번](멜로디아)과 [스키타이 모음곡] 그 밖에서도(멜로디아) 그 색채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최근의 것으로서는 1976년 녹음한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과의 [주옥의 오케스트라 명곡집](멜로디아이 있다.
레델, 쿠르트 (Kuft Redel 1918~)
플루트 주자이기도 하며, 독일의 브레슬라우(현재 브로츨라프)에서 태어났다. 이곳의 음악 학교에서 플루트와 작곡 그리고 지휘를 배웠고, 더욱 클레멘스 크라우스에 의한 지휘법의 강습에도 나갔다. 1938년 마이닝겐 대성당의 제1플루트 주자가 되었고, 동시에 이 해에 브레슬라우에서 지휘자 및 솔리스트로서 데뷔하였다. 레델이 독일 국외에서 지휘자 및 솔리스트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 이후이다. 1939년에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1941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1946년부터는 데트몰트 음악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고, 1953년에는 뮌헨에 가서 뮌헨 프로 아르테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하고 그 지휘자 겸 독주자가 되었다. 도이치 바흐 졸리스텐에 속하기도 했다. 레델의 플루트는 침착한 리듬으로 부드러운 음악을 조성한다. 그것은 리듬이나 힘의 변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지휘는 대위법적 혹은 화성적인 충실감을 기초로 하여 유화함을 존중하고 있다. 또 바흐의 [음악의 헌정]과 [푸가의 기법] 등을 비롯하여 독특한
교정도 하고 있다. 레코드에서는 자신이 지휘와 독주를 겸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에라토) 전곡이 걸출하다. 단, 그중에서 제5번은 수년을 두고 2종류의 레코드가 나왔다.
아이히호른, 쿠르트 (Kurt Eichhorn 1908~)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뷔르츠부르크 음악원에서 H.칠허에게 배우고, 1932년에는 빌레펠트 시립 극장의 합창 지휘자 및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1938년에 테프리츠 - 셰나우, 1940년부터 칼스바트의 음악 감독을 하였다. 1941년부터는 드레스덴으로 옮겨, 시립 오페라 극장과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부터 출생지 뮌헨에 되돌아가 뮌헨 필하모니 의 지휘자에 취임하고, 다음해부터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의 한 사람이 된 이래 뮌헨을 본거지로 삼고 있다. 1956년부터 1976년까지는 뮌헨의 게르트너 프라츠 극장의 수석 지휘자, 1967년부터는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관현악단(동 방송국의 교향악단과는 별도의 단체)의 지휘자를 하는 한편, 1954년부터 뮌헨 국립음악대학의 교수를 하면서 1965년에 명예 교수가 되었다. 독일의 전형적인 극장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서 낭만파의 오페라나 오페레타에 견실한 장인적인 수완을 보이고 있는 반면 별로 재미가 없다. 레코드에서는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전곡(오이로디스크)이 있는데, 명가수가 모두 있었다는데도 힘입어 가장 성공하였다.
아들러, 쿠르트 헤르베르트 (Kurt Herbert Adler 1905~)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빈 음악원에서 프란츠 슈미트, A.븐델러, 아카데미에서는 오이겐 차도르 등에게 배우고, 처음으로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1925년부터 1928년까지 빈의 요제프슈타트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고, 1928년에서 1934년까지는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하였으며, 1934년부터 다시 빈에 되돌아와 폴크스오퍼의 지휘자가 되었다. 1936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토스카니니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하다가 그 능력이 인정되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시카고의 오페라 컴퍼니(현재 리릭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고, 1943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겸 합창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1953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활약하고 있다. 아들러는 장기간에 걸쳐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 운영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함으로써 인텐던트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지휘자로서도 각지에 객원 활동을 하고 있다.
마주어, 루르트 (Kurt Masur 1927~)
독일의 슐레젠의 부제크에서 태어났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브레슬라우(현재 브로츨라프)의 국민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배우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는 지휘법, 피아노, 작곡 등을 배웠는데, 그때 본가르츠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음악원을 졸업한 1948년부터 할레 주립극장에 연습 지휘자로 들어갔으며, 후에 정지휘자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951년에는 에르푸르트 시립극장의 제1지휘자로, 1953년에는 라이프치히 시립극장의 제1지휘자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5년부터는 은사 본가르츠의 추천으로 드레스덴 필하모니 에 1958년까지 머물렀고, 그로부터 주베린의 메크렌부르크 국립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60년에는 저명한 발터 페르젠슈타인의 요청으로 베를린의 코미셰오퍼에 음악 감독으로 옮겼다. 그리고 1964년 본가르츠의 후임으로서 드레스덴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다시 취임하였고,1967년에는 수석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또한 1972년까지 수석 상임 지휘자로 있으면서 1970년부터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도 겸임하게 되었다. 1972년부터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전임이 되고, 음악 감독 겸 수석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마주어는 동독의 예술 아카데미(예술원)의 회원이고, 또 국가로부터 여러 상을 받고 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또는 단신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그는 연주 여행을 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유명도, 많은 수의 음반 등으로 동독을 대표하는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마주어는 레코드만으로 추측하는 것보다는 레퍼토리가 훨씬 넓은 지휘자인데, 독일 것 외에 러시아 소련의 작품이나 동독의 현대 음악도 취급하고 있다. 그의 음악 형식의 큰 요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의 적극성이다. 의욕적으로 국외에 연주 여행에 나가서는 국제적인 센스를 갖추고, 그것을 반영시킨다.그래서 마주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라이프치히의 음악 전통에 침장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앞으로의 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그 양적인 중량감이나 서정성 등에서 엿볼 수가 있다. 레코드는 절반 이상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지휘한 것이었는데,그중에서는 슈만의 [교향곡] 전4곡(샬프라텐),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덴온),멘델스존의 [교향곡 No.4(이탈리아)](오이로디스크) 등이 대표적이다. 마주어는 1990년 현재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원숙한 자기 세계를 펼치고 있는데 1992년부터 메타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니로 영입되어 활동할 예정이다.
라프, 쿠르트 (Kurt Rapf 1922~)
작곡가이면서 피아노, 오르간 주자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으며, 1936년부터 1942년까지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배웠다.1945년에 실내악 단체인 '빈 콜레기움 무지중'을 조직하고 1956년까지 이를 지휘하였다. 그동안인 1948년에는 크나퍼츠부슈의 어시스턴트로서 취리히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모교의 교사를 지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는 인스브루크 시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다. 그 후는 빈에 정주하면서 연주 활동과 작곡을 계속했는데, 1970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동맹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라프의 작품 수는 상당히 많은 편이며,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음악집](복스)에서는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
잔데를링, 쿠르트 (Kurt Sanderling 1912~)
동(東)프로이센의 아리스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 음악을 공부하였고, 1931년에 베를린 국립극장의 연습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1935년에 모스크바로 망명하였고, 이듬해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41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부지휘자로 영입되었다. 전쟁을 사이에 두고 1960년까지 레닌그드에서 보냈다. 그리고 수석 지휘자 므라빈스키와 협력하면서 함께 이 오케스트라를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다. 전후에는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적극적으로 국외에 연주 여행을 하였다.그러나 1960년에 그는 사회주의 체제가 확립된 동베를린으로 옮기고, 베를린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악단의 연주 수준을 세계 제1급의 것으로 끌어 올렸다. 1964∼1967년까지는 드레스렌 국립관현악단 지휘자도 겸무했다. 그리고 이 두 오케스트라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등과 더불어 국외로도 연주 여행을 하게 되었다. 예컨대 1974년에는 베를린 교향악단과, 1981년에는 드레스덴 국립관악단과 함께 동양을 연주 여행했고 영국에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1970년에 처음 등장했다. 또 1973년에는 클렘페러가 사망한 후의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최초의 연주회를 지휘했다. 이와 같은 국내 및 국외에서의 활약이 인정되어 잔데를링은 동독에서 1962년과 1964년에 국가상을 받았다. 소련으로부터는 명예 예술가의 대우도 받고 있다. 그의 아들 토마스 잔데를링도 지휘자로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잔데를링은 레퍼토리가 넓은 지휘자로서, 그 중에서도 이른바 독일 것과 러시아 -소련 것, 그리고 시벨리우스 등을 장기로 한다. 러시아 - 소련 것에는 장기간의 레닌그라드 체류의 경험으로 므라빈스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당연하지만, 또 거기에는 독일적인 구축성이 가미되고 있다. 어느 곡에서도 명쾌함을 존중하면서 큰 파도와 같은 기복감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강한 서정성이 되어 호소하기도 하고, 때로는 교묘하게 긴장과 이완 을 배치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처럼 그의 해석에서는
이성과 감정의 밸런스가 멋지게 잡혀있다. 레코드로는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의 연주회용의 곡을 전으로 지휘해 왔다.그 중에는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을 지휘한 브람스의 전 4곡의 교향곡(오이로디스크)이 빛난다. 낭만적인 열기와 극히 자연스러운 서정도 깔려 있으며,흔들림 없는 견고한 구성도 엿볼 수가 있다. 어떤 오케스트라도 잔데를링의 지휘 아래 있게 되면 실감있는 연주를 하게 된다. 토마스, 쿠르트 (Kurt Thomas 1904~1973)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의 슐레스비히흘슈타인의 테닝크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에서 슈트라우베와 그라프너에게 교회 음악을 공부하였고, 이어서 다름슈타트에서 아르놀트 멘텔스존을 사사하여 작곡법을 배웠다. 21세 때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이론과 작곡의 강사가 되었고, 1928년에는 라이프치히의 교회음악연구소의 합창단의 지휘도 담당하였다. 1934년부터는 베를린의 호흐슐레의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프랑크푸르트의 음악 김나지움의 교장이 되었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삼왕 교회의 칸토르가 되었으며, 이것과 병행하여 1947년부터 1955년까지는 데트몰트의 북서독일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도 겸임하게 되었다. 1955년에는 바흐에서 유래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 및 성 토마스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61년 자유를 찾아서 서독로 망명 하였으며, 쾰른 바흐 협회와 프랑크푸르트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합창곡을 포함한 작품과 합창 지휘법 등에 관한 저서가 있고, 1925턴부터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음악의 재조사를 하기도 했다.레코드는 바흐의 [코피 칸타타]와 [농민 칸타타]의 커플링(그라모폰)이 매우 잘되어 있고, 또 아름답기만 하다.
뵈스, 쿠르트 (Kurt W ss 1914~)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태어났다.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바인가르트너와, 페르디난트 그로스만을 사사하였다. 1948년부터 195l년까지 빈 톤퀸스틀러 관현악단의상임 지휘자를 맡았고, 이 동안 미국의 레밍턴 음반 회사에 상당한 레코딩을 남겼다. 1951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NHK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
1954년까지 재임하였다. 1954년 귀국하여 즉시 톤퀸스틀러 관현악단의 상임으로 복귀하였고,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같은 해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오페라 극장과 빅토리아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였고, 1962년까지 근무하였다. 1962년에 귀국하여 린츠 주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에 임명되었는데 현재는 프리랜서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 같다. 쿠르트 뵈스는 한국에 와서 1976년 [로엔그린]을 국립극장에서 지휘, 1977년 [돈 조반니]를 국립극장에서 지휘, 1980년 서울시향을 지휘했다. 레코드는 밤베르크 교향악단을 지휘한 소곡이 2곡 있을 뿐이지만(텔레푼켄), 음악을 아름답게 듣게 하는 포인트를 잘 알고 있는 연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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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타이, 라슬로 (L szl Heltay 1930~)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956년 헝가리 동란 때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 아카데미에서 배웠는데 주로코다이와 라요스 바르도스를 사사했다. 1952년부터 망명할 때까지 부다페스트 방송국의 간부로서 일하고 있었다. 영국에 이주하고 나서는 옥스퍼드의
머튼 칼리지에서 음악학을 가르치는 한편, 코다이 합창단을 창설하였고 1957년에는 스콜라 칸토룸 옥퍼드를 결성하였다. 1962년에 영국에 귀화한 헬타이는 1964년에 뉴질랜드의 NZBC 교향악단의 준지휘자로 취임,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게 되었다. 1968년 서식스 대학의가드너센터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70년대는 런던 콜레기움 무지쿰의 지휘자를 역임하는 한편, 아카데미 실내관혁악단 소속 합창단의 지휘자도 겸하였고 영국에서도 제1급의 합창 지휘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레코드는 코다이의[미사 브레비스][판제 링과](런던) 등이 있는데, 스승에 대한 경의가 나타난 호연이다.
쇼모지, 라슬로 (L szl Somogyi )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했다.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공부했는데 코다이, 베이네르 등을 사사했다. 지휘자로서 출발한 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헝가리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부다페스트 국립극장에서 가끔 지휘도 했다. 그래서 1949년에는 페렝크 프리차이와 함께 2차 대전 때 크게 손실을 입은 헝가리 국립교향악단의 재건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부 유럽의 공산권국가에 가서 자주 객원 지휘도 했는데, 1956년부터 헝가리를 벗어나 활동 무대를 서유럽으로 옮겨 구미뿐만 아니라 중남미 각국에서 극동 제국에 이르기까지폭넓은 국제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근래에는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레코드는 바렌보임과 협연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2번]과
베토벤의[피아노 협주곡 제3번](모두 웨스트민스터) 등이 있는데 오래 전부터 페반되었다.
라이테르, 뤼도비트 (L'udov t Rajter 1906~)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빈에 유학하여 요제프 마르크스와 프란츠 슈미트에게 작곡을 배웠다. 또한 클레멘스 크라우스에게 지휘법을,도흐나니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5년까지 부다페스트 방송 교향악단과,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1949년에는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슬로바키아 필하모니 의 초대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였다. 그 후 라이테르는 브라티슬라바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도 맡았다. 그는 빈에서 음악 교육을 받고 부다페스트와 브라티슬라바에서 활약한 베테랑 지휘자이지만, 오페라의 경력이 없는 콘서트 전문 지휘자라는 것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레코드는 현재, [사육제의 음악]이라는 소품집(오퍼스)이 한 장 있을 뿐인데, 베를리오즈, 드보르자크의 대중적인 명곡에서부터 그의 스승이기도 한 프란츠 슈미트의 작품까지 다루고 있다. 라이테르는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를 잘 파악하여 장인 기질의 예술 표현으로써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연주이다.
슬로바크, 라디슬라프 (Ladislav Slov k 1919~)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그곳의 음악원에서 먼저 오르간과 지휘법을 배운 다음에, 음악 아카데미에서는 탈리히에게 배웠다. 또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레닌그라드에서 므라빈스키를 사숙(私淑)하고, 특히 러시아 - 소련 음악에의 이해를 깊이 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 브라티슬라바의 국영방송국의 프로듀서로서 체코방송합창단을 창설하였다 그는 체코 방송합창단을 높은 수준으로까지발전시켜 주목을 받았는데, 그 후 브라티슬라바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1956년부터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제2지휘자도 역임하였다.그리고 1961년부터는 슬로바키아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1972년부터 4년간은 프라하 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도 겸임하였다. 슬로바크는 확실한 지휘 기법과 풍부한 음악을 연출하고 있으나, 인간적으로 소박하고 온화한 때문인지 화려한 스타일은 아니다. 취입한 음반은 적으며, 체코 필하모니와의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제5번]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이상 수프라폰), 슬로바키아 필하모니와의 [교향곡 제6번(비창)]이나 치켈의 [슬로바키아 모음곡](오퍼스)이 그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르델리, 람베르토 (Lamberto Gardelli 1915~)
작곡가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페사로와 로마의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로마 오페라 극장의 툴리오 세라핀 밑에서 연습 지휘자를 경험했으며, 지휘자로 서의 데뷔는 1945년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로 하였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스톡홀름 왕립 오페라 극장의지휘자를 맡았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는 부다페스트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레퍼토리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중심이 되나 심포니 지휘자로서도높은 평가를 얻고 있기 때문에 오페라 이외의 작품도 레코딩하고 있다. 레코드의 수는 많지만 특히 베르디의 초기 오페라를 지휘한 것에 정평이 있다. 가르델리는 음악의 뼈대를 확실히 나타내 보이는 타입의 지휘자인데, 이것은 정서적인 음악의 표현보다는 극적인 표현에 있어서 그 자질을 발휘한다는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점을 전제로 하여 생각하면, 베르디 초기의 오페라를 지휘한 레코드에서 가르델리가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가르델리가 베르디 초기의 오페라를 지휘한 레코드는 모두 그 수준이 높은데,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바리톤 가수인 티토 고비가 타이틀 롤을 노래한 [나부코](런던)가 될 것이다. 여기서의 생기 가득한 지휘는 어느 정도 덜 닦인 데가 있는 초기의 베르디 작품에 걸맞는 것이다.
그 반면 푸치니의 오페라를 지휘한 경우에서와 같이 작품의 미묘한 맛을 나타낼 수 없는 경우도 때때로 있다. 따라서 가르델리에게 있어서는그 구조가 견고하고, 또 남성적인 표현을 하는 작품 쪽이 더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도 [라 트라비아타]와 같은 서정적인 맛이 강한 작품에서는 그 작품성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 반면 케루비니의 오페라나 종교극에서는 작품의 성격과 지휘자로서의 기질이 잘 맞아서 독자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다.
로널드, 랜던 (Landon Ronald 1873~1938)
영국의 런턴에서 태어났으며, 작곡가 헨리 러셀의 아들로 본성은 러셀(Russell)이다. 1884년부터 로열 칼리지 오브 뮤직에서 수학했다. 1891년 만치넬리에게 인정받아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반주자와 코치가 되었고, 이듬해 오거스터스 해리스가 주재하는 이탈리아 오페라 캄파니의 지휘자로 돌리 레인 극장과 미국 연주 여행을 했다. 1894년부터는 소프라노 넬리 멜바의 반주자로 각지를 여행했으며, 코벤트가든 오페라 극장에도 1896년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로 데뷔했다. 그 후 1898년부터 1902년까지 런던의 리릭 시어터에서 뮤지컬 코미디의 지휘자와 블랙풀의 하기 연주회를 중심으로영국 각지에서 활약했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는 신설된 런던 필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베를린, 빈, 라이프치히, 암스테르담에서 객원 지휘로 성공을 거두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신교향악단, 1916년부터 1920년까지는 스코틀랜드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중심으로하여 각지에 초청받아 활약하였으며, 친구인 엘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또한 1910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런던 길드홀 음악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면서 교육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 외에 비평가로서도 활약했다. 레코드는 금세기 초엽부터 당대의 명가수였던 소프라노 넬리 멜바와 아델리나 파티의 반주를 한 것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크라이슬러와 카살스와의 협주곡 등이 매우 많은데, 이것들은 현재도 LP로 들을수가 있다. 1922년에는 영국 음악계에서의 큰 공로를 인정받아 '경'의 칭호를 받았다.
포스터, 로렌스 (Lawrence Foster 1941~)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로스앤젤레스 및 바이로이트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지휘법을 배웠다. 발터와 뵘을 사사한 일도 있다. 1960∼1964년에 영 뮤지션즈 파운데이션 데뷔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로서 지휘 활동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 무렵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준지휘자도 역임하였다. 1965∼1968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에서 메타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68년 로열 필하모니와 할레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영국에 데뷔하여 호평을 받아 길이 열렸다. 1970년 로열 필하모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고, 이듬해 1971년부터1978년까지 휴스턴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지냈다. 1978년 몬테카를로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영입되었으나 곧 사임했다고 한다. 1988년 현재는 몬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오페라 지휘자로서는 1964년,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아이다]를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고즈만, 라자르 (Lazar Gozman 1926~)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소련에서 태어났다. 현재 레닌그라드 실내관현악단의 리더를 맡고 있는데, 최근까지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어시스턴트 콘서트 마스터로 활동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실내관현악단은 196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단원 중 16명으로 편성된 스트링스 앙상블로서 주로 바로크 음악이나 현대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무지휘자로 연주하는 스타일을 취하고 있어서 고즈만은 콘서트 마스터의 자리에서 활로 아인자츠를 가리키는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아카데미 실내관현악단에서의 네빌 매리너와 비슷한 점이었다. 따라서 고즈만을 지휘자의 범주에 넣는 것이 옳은가 어떤가는 미묘한 문제가 될 것이다. 레코드는 쇼tm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4번(죽은 자의 노래)」(멜로디아)가 있는데, 이 연주는 무지휘 앙상블이 가질 수 있는긴장도가 높은 연주로 쇼스타코비치의 만년의 체념을 비통한 음조로 리얼하게 재현하고 있다.
블레히, 레오 (Leo Blech 1871~1958)
독일 아헨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타계한 독일 지휘자이다.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에른스트 루돌프에게, 작곡을 훔퍼팅크에게 배웠다.1893년 아헨 시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데뷔, 1899년에는 프라하의 독일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 옮겼다. 1906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고, 1913년에는 음악 총감독(GMD) 칭호를 받았다. 1926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고, 1930년에는 R.슈트라우스 [엘렉트라]의 베를린 초연을 지휘했다. 나치의 박해로 1937년 소련 리가로 갔으며, 1941년에는 스톡홀름 국립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베를린에 돌아가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카르멘]공연에서 옛날 실력을 발휘했으나 얼마 후 노령으로 은퇴했다. 블레히의 레코드는 SP 시대에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크라이슬러와 협연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의 웅휘한 지휘는 유명하며, 현재 LP(에인절)에 복각되어 있다.
긴스부르크, 레오 (Leo Ginsburg 1901~)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1919년 노브고로드의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지휘법과 음악 이론 공부를 했고, 졸업 후 2년간은 베를린에서 더욱 연수하였다. 1924년부터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지휘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여 바쿠의 아제르바이잔 필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로 있었다. 1930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사가 되고, 1939년 교수로 임명되어 1943년까지 후진 육성에 힘을 썼다. 그 후 1948년 이래,다시 모스크바 음악원에 영입되어 지휘과의 주임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소련의 스바로프스키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 문하에서 키타옌코, 페도세예프등의 영재들이 배출되었다. 레코드는 보가티레프가 복원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7번」이라는 진귀한 곡밖에 없지만,그야말로 견실하고 아카데믹한 지휘로서 소흘한 데가 없는 반면, 재미가 없다. 역시 그는 소련의 대표적인 지휘법 교사이지, 결코 명 지휘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것도 어딘가 스바로프스키와 공통되는 점이 있다.
플라이셔, 레온 (Leon Fleisher 1928~)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아르투르 슈나벨에게 인정되어 1938년부터 1939년에 걸쳐 이탈리아 코모 호반에 있던슈나벨 집안에 들어가 친히 가르침을 받았다. 1942년에 피에르 몽퇴 지휘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뉴욕 공연에 솔리스트로서 참가하였다. 1944년에 몽퇴 지휘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회에 데뷔하였다. 1952년 브뤼셀의 퀸 엘리자베트 국제 콩쿠르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부문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제1위가 되었다. 1960년대 전반까지 조지 셀 지휘 클리블랜드 관현악단과 함께 많은 레코딩을 하였고, 1963년에는 레온 키르히너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초연을 담당하였다. 1965년 그의 오른손이 질환 때문에 쓸 수 없게 되자 라벨과 프란츠 슈미트 등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 팔을 잃어버린 피아니스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썼던 왼손을 위한 작품을 레퍼토리로 삼게 된다. 1968년에 워싱턴의 시어터 쳄버 플레이어즈의 지휘자로서 지휘 활동을 시작하고, 메릴랜드 주의 애너폴리스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거쳐 1976년부턴 볼티모어 교향악단의 보조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또 1959년 이래 피바디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레코드는 셀과 협연한 그리그, 슈만, 베토벤의 협주곡(모두 CBS)이 있다.
번스타인, 레너드 (Leonard Bernstein 1918~)
작곡가이며,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유대계 러시아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사무엘 번스타인은 1908년, 16세 때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이주하였는데, 고학을 하면서 입신하여 러시아 태생인 제니 레즈니크와 결혼했으며 보스턴에서 화장품 판매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때마침 친척들과 함께 로렌스에서 휴가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부인이 갑자기 산기가 있어 이곳에서 장남 레너드(애칭 레니)를 출산하게 되었다. 어릴 때의 레니는 병약하여 그 자신도 "나는 비참하리 만큼 마음이 약한 애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8세 때 어느 일요일에 부친을 따라 유대교의 교회에서 오르간의 연주와 합창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고모의 맡겨진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레니의 부모는 레니가 음악가가 되려는 것에는 반대하였지만 피아노의 레슨을 받는 일은 허락해 주었다. 그는 음악에 온몸과 정성을 다 쏟는 정열을 불태워, 1939년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자 부친의 의향을 반대하고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라이너의 지휘법 클래스에 나가는 한편, 작곡을 톰프슨에게, 피아노를 벤제로바에게 배웠다. 또 1940년과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한 1941년 여름에는 탱글우드의 지휘 부문의 장학금을 타고 쿠세비츠키의 지도를 받았는데, 다음해의 여름에는 탱글우드에서 이 대지휘자의 어시스턴트를 맡았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앞날에는 라이너나 쿠세비츠키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었는데도 실망과 좌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되었던 보스턴 교향악단에서의 데뷔는 이 오케스트라와 미국 음악가 조합과의 트러블 때문에 취소가 되었고,또 그 후에 이렇다 할 일도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곡 콩쿠르에 응모한 자작의 [에레미아 교향곡]도 낙선되고 말았다. 전쟁 때문에 1943년 탱글우드의 버크셔 음악 센터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 해 8월 25일 번 스타인의 25세 생일에, 그는 쿠세비츠키의 중개를 통해 뉴욕 필하모닉의신임 음악 감독인 로진스키의 면회를 요청받고, 생각지도 않게 이 오케 스트라의 어시스턴트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1월 14일의 오후 번스타인은 뉴욕 필하모닉의 정기공연에서 급병으로 출연이 불가능하게 된 발터의 대역을 맡게 되었는데, 이것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그의 이름은 일약 온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44년 1월 피츠버그에서 [에레미아 교향곡]을 초연하였고, 이어 4월 18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발레 [팬시 프리]를, 1월 28일 뉴욕 어델피 극장에서 뮤지컬 [춤추는 대뉴욕]([온 더 타운])을 초연하여 작곡가로서도 확고한 명을 수립하였다. 또 보스턴 팝스의 연주회에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의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하는 등, 1인2역의 연주를 처음으로 공연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뉴욕 시티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또 194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 출연을 시작으로 1947년부터 근동 및 유럽 여러 나라에 연주 여행을 하였고, 1953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더욱이 1951년부터 버크셔 음악 센터의 지휘과와 오케스트라의 주임을 맡았고,브란디스 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번스타인은 1957년 뮤지컬[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발표하였으며, 1958년부터 1959년의 시즌에 미트로풀로스의 후임으로서 뉴욕 필하모닉의 예술과 경영면에서도 토스카니니의 재임 시대에 비견되는 황금 시대를 연출하였다. 번스타인은 이제까지 오페라 부문에서는 앞에서 말한 스칼라 극장에서의 케루비니의 [메디아](주역은 칼라스)의 지휘가 유일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 후는 196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과 1966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의 [팔스타프], 1968년 역시 빈에서의 [장미의 기사], 1970년과1972년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카르멘], 1978년 빈의 안 데어 빈 극장과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의 [피디리아] 등으로 오페라에도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1981년 1월부터 뮌헨에서[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녹음(디지털 녹음)도 하였다. 근년에 는, 전부터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 필하모니를 비롯하여 빈 필하모니와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에의 객원 연주를 자주 하였고, 그에게 장시간 출연의 기회가 막혀 있었던 베를린 필하모니에서도 지휘를 하였다. 또한 작곡면에서도 1971년 워싱턴의 케네디 연주 예술 센터의 신축 후 최초의 개관 기념 공연을 위한 독창적인 [미사곡](가수, 연주가를 위한 극장적 작품)과 여러뮤지컬의 걸작 등을 작곡한 연대(1965년까지의 4반세기)를 능가하는 집중적인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레코드는 번스타인의 존재가 아직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만 알려져 있었던 청년 시대의 SP 음반 이후, 1982년에 발표되기로 예정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이르기까지 CBS 원판을 중심으로그 디스코그래피가 그야말로 한 권의 책을 낼 만큼 많다. 오케스트라는 뉴욕 필하모닉이 그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페라는 앞에서 말한 것 중의 [메디아]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제외한 네 전곡 음반(CBS와 그라모폰, [트리스탄]은 미발표)이 있다. 교향곡은 베토벤의 전집이 2종
있고(빈 필하모니와의 그라모폰 음반이 더욱 주목된다), 말러의 전집도 역시 대단하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에서]는 이 곡을 초연한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였다는 점에서도 잊을 수가 없다. 번스타인 자신의 3곡의 교향곡은 이스라엘 필하모니와의 새로운 녹음(그라모폰)이 나왔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번스타인은 모차르트(3곡), 라벨과 쇼스타코비치(제2번)의 [피아노 협주곡],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모차르트의 [피아노 4중주곡], 슈만의 [피아노 5중주곡], 말러의 [가곡집](독창 피셔 디스카우) (모차르트의 제15번은 런던, 그 밖은 CBS) 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그는 [동물의 사육제][피터와 늑대]와 코플랜드의 [제2의 태풍](모두 CBS)으로 대표되는데, <해설자>로서의 『베토벤의 '운명'이 될 때까지』『음악과 유모어』『재즈란 무엇인가』『답 없는 질문』(1976년 1월 하버드 대학에서의 공개 강좌)(이상 미국 CBS)도 중요하다. 한편 자작 의 [미사곡]이나 스트라빈스키와 그 밖의 현대곡의 레코드도 빼놓을 수가 없다. 뉴욕 필하모닉이 떠받드는 지휘자 1979년 6월 29일과 30일의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 때, 100여 명이나 되는 단원들의 한결같이 지휘자 번스타인을 받드는 정신이 무대 전면에 나타난 것은 가장 흐뭇한 정경이었다. 번스타인이 쉬는 곳은 세종문화회관 무대 조금 아래에 있는 방인데 연주 시각이 알려지면오케스트라 단원 두 사람이 번스타인이 쉬는 이 방의 문을 공손히 두드리고 들어가서, 위대한 지휘자를 보호하는 뜻으로 그를 모시러 온 두 단원 중 한사람은 번스타인 뒤에 서서 에스코트하여 무대까지 정중히 모시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은 일반적인 오케스트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며 오직 존경하는 지휘자 번스타인을 모시는 이 뉴욕 필하모닉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두 단원의 에스코드를 받으며 무대 옆까지 온 번스타인이 이 오케스트라 왼쪽으로 나있는 단원 사이의 빈틈을 통하여 지휘대를 향해 걸어갈 때 모든 단원이 정색하여 존경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그 1년 전인 1978년 라인스도르프가 번스타인을 대신하여 왔을 때에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번스타인은 이 오스트라의 상임을 떠났으나 여전히 단원들에게서 '레니'란 애칭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어떤 때에라도 번스타인이 지휘해 주는 것을 반기는 사랑으로 맺어진 때문이었다.이같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존경과 사랑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연주는 진지하고 경건하며 온 힘을 솓아부을 수 있었다. 이 연주회장에 왔던 음악평론가 K씨는 "번스타인이 10년 동안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있을 때 무엇보다도 정신을 더 부르짖어 기술이 다소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의 드높은 덕성으로 이런 결함을 극복할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이번 연주회에서도 그러한 것을 느꼈는데 번스타인은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 지휘자의 드높은 음악 정신과 인간 정신에 모든 단원들이 영적으로 뭉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듯 기막힌 연주를 하게 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 다.
슬래트킨, 레너드 (Leonard Slatkin )
부친은 지휘자 펠릭스 슬래트킨이다. 음악을 처음 부친에게서 배우고, 이어 줄리어드 음악원에 들어가 지휘를 장 모렐에게 배웠다. 또 콜로라도 주의 아스펜 음악제에서는 월터 주스킨트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22세 때 카네기 홀에서 뉴욕 청년교향악단을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1968년부터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79년에는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77년부터는 뉴올리언스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을 겸임하였고, 같은 해부터 미네소타 교향악단의 하기 음악제의 예술 감독도 하게 되었다. 워싱턴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으며, 객원 지휘자로서 시카고교향악단을 매 시즌마다 3주간씩 객원 지휘하였다. 그 밖에 뉴욕 필하노닉,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피츠버그 교향악단 등 미국의 주요한 오케스트라를 거의 지휘하였고, 유럽에서도 로열 필하모니,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빈 교향악단 등에 폭넓게 출연하였다.레코드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1번, 제2번, 제3번](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 복스)가 소개되었다. 이것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식으로음악 감독에 취임하기 전의 음반인데, 오케스트라의 통솔력이 특히 뛰어났으며, 중후한 곡에 중량감을 주지 않고 신선한 감각을 살려서 맛보게 했다. 그는 1990년 현재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있는데 1989년 2월 동 악단과 내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을 이성주와 협연, 국내 음악 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크로이처, 레오니드 (Leonid Kreutzer 1880~1953)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제정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독일인을 양친으로 하여 태어났다.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아네트 에슈포프에게,작곡을 글라주노프, 지휘법을 니키슈에게 배웠다. 일찍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알려졌고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는데, 1911년 라흐마니노프가자작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모스크바에서 협연했을 때의 크로이처의 지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이 되었다. 1906년 독일에 이주하여 라이프치히에서 지휘, 피아노, 음악 평론, 교사로 다방면에서 활약하였으며, 1921년에는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 동안 작곡자로서 명성을 얻었는데,1933년 나치스의 탄압 때문에 퇴직하였고 1935년에는 일본에 이주하였다. 1937년부터 1953년까지 도쿄 음악학교와 도쿄 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8년에는 국립 음악대학의 최고 기술 지도자로 취임하여 교육자로서 수많은 준재들을 길러냈다. 또 피아니스트로서 각지에서 연주하였고 도쿄, 오사카에서는 지휘자로서 알려졌으며, 일본 악단에 대한 그의 공헌은 지대하다. 크로이처는 피아니스트로서 독자적인 음악관을 가졌으며, 개성적인 로맨티즘이 넘쳐 흐르는음악으로써 전시중과 전후의 그의 애호가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하거, 레오폴트 (Leopold Hager 1935~)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49년∼1957년에 걸쳐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지휘를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 게르할트 빈베르거에게, 작곡을 체자르 브레스겐에게 배웠다. 그 밖에 요한 네포무크 다비트와 그 밖의 스승에게서 오르간, 피아노도 배웠다. 1957년에 마인츠 시립극장의 코레페티토르(오페라의 연습 피아니스트)가 된 다음 제1지휘자로 승격하였다. 1962년∼1964년에 린츠 주립극장의 제1지휘자, 쾰른 시립극장의 지휘자를 지냈고, 1965년 프라이부르크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1967년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과 객원 지휘를 계약하였다. 1967년부터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 이 악단과 세계 주요 도시에 연주 여행을 하였고, 1967년부터는 잘츠부르크 음악제 감독을 하였다. 1981년부터 룩셈부르크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모차르트를 중심한 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1988년 현재 룩셈부르크 방송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있다. 레코드로는 잘츠부르크에서 거행된 모차트 주간에서의 모차르트 초기 오페라 시리즈 연주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목자의 왕] [루초 실라] [바스티앙과 바스티엔]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구원받은 베투리아] [시피오네의 꿈] [가짜 여자 정원사](모두 그라모폰) 등이 있다.
루트비히, 레오폴트 (Leopold Ludwig 1908~1979)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라비아의 비트코비츠(현재 오스트라바)에서 태어났으며, 빈음악원에서 배웠다. 즈데텐 지방의 트로파우(현재 오파바)와그 밖에 독일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1936년 올덴부르크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며,이어서 슈미트 이셰르슈테트가 음악 감독을 하고 있는 베를린 시립 오페라 극장(현재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제1지휘자가 되었다. 전후에는 동서 베를린의 오페라 극장에 게스트로서 출연하였고, 1951년에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그 이후 19년간, 렌네르트, 티첸, 리버만의 3대에 걸친 인텐던트 밑에서 헨체의 [혼부르크의 왕자](1960)와 그밖의 많은 현대 오페라를 초연하여 이 오페라 극장에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한편 오페라 이외의 지휘 활동도 그 범위가 넓어져 1969년 바젤 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는데, 병으로 수개 월만에 사임하였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도이치 오페라를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이 무렵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별세하였다. 레코드는 베버의 [아뷔 - 하산], 베르크의 [룰루]의 전곡 음반(EMI), 길렐스와 협연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에인절)과 그 외에도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에인절) 등이 있다.
스토코프스키, 레오폴드 (Leopold Stokowski 1882~1977)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폴란드인으로서 가구 제조업자이고, 모친은 아일랜드인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퀸즈 칼리지를 졸업한 다음,음악 공부는 런던의 왕립 음악원에서 하였다. 이곳을 졸업한 다음 1900년 먼저 피카데리에 있는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여기에서 5년간의 재직중에 바흐의 음악에 친숙해지고, 또 그것을 철저히 연주한 것은, 그 후에 그의력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스토코프스키가 바흐의 음악 속에 풍부한 가능성을 찾아내고, 현대의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을 함으로써 그들을 선명하게 재현한 출발점이 이 시대에 있기 때문이다. 1905년에 스토코프스키는 미국에 가서 뉴욕의 파크 애버뉴에 있는 성 바솔로뮤교회 합창 지휘자 겸 오르가니스트가 되는데, 이 시기에도 그가 바흐에 심취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09년에는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여기서 3년간의 재직중에 이오케스트라의 실력을 현저하게 향상시켰다. 그리고 1912년 30세 때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여기서 빛나는 영광의 시대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스토코프스키가 영입될 때까지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의 오케스트라였었는데, 그의 노력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쿠세비츠키 지휘의 보스턴 교향악단, 토스카니니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미국의 3대 오케스트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시기의 스토코프스키는 미국 음악계의 총아인 동시에 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지휘자이기도 하였다. 그 이유의 하나는 스토코프스키가 당시로서는 진귀한 곡을 적극적으로 취급한 일로써, 말러의 [대지의 노래]와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를 연주회 형식에 의해 미국에서 초연한 것을 비롯하여, 쇤베르크 초기의 대작 [구레의 노래]를 취급한 것도 그의 기념할 만한 업적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밖에 스크랴빈, 스트라빈키, 프로코피예프 등도 연주했는데, 이들 신작을 연주할 때는 작곡가의 의지를 제일 먼저 존중하였다. 따라서 현대 작 의 경우 특히 중요한, 오케스트라의 음색에 관해서는 스트라빈스키, R.슈트라우스, 팔랴 등에게 직접 그 의견을 물어 충실히 파악하여 작품 해석을 했다.또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작곡가인 경우, 작곡가가 만일 현존했다면 바랬을 것이 틀림없는 오케스트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살리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고전의 작품에서는 곡의 개변이 아닌가하고 받아들이게도 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듣는 이의 귀를 선명한 색채감으로 즐겁게 해주는 것이 되었다. 24년간이나 재임한 다음, 1936년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을 떠나게 되었다. 스토코프스키가 그 후 할리우드에서 출연한 영화 [오케스트라의 소녀]와 [팬타지아]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940년에는 전 미국 청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때문에 해산의 쓴 잔을 마시게 되었다.그 후 1944년부터 1945년까지는 뉴욕 시립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뉴욕 필하모닉을 미트로풀로스와 함께 지휘 하였다.또한 1955년부터 1960년까지는 휴스턴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1962년 사재 6만 달러를 희여 워싱턴에 아메리카 교향악단을 설립하고, 1973년에 아키야마(秋山和慶)에게 이임할 때까지 11년간을 이 젊은 오케스트라의 육성에 헌신하였다. 1973년 이후에는 출생지인 런던에 되돌아갔는데,그의 풍부한 경험을 살려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였고, 레코딩에도 적극적인 의욕을 보여주었으나, 1977년 9월 13일 영국 햄프셔 주의 자택에서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놀랍게 95세였던 것이다. 레코드로 스토코프스키는 SP 시대부터 왕성한 활약을 하였고, 특히 그의 편곡에 의한 J.S.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나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에서)]은 큰 인기가 있었다.이들은 [황금 시대의 스토코프스키와 필라델피아 관현악단](RCA)에 집대성되어 있고, 그 밖에 LP 시대가 된 후에도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많은 히트를 냈다. 특히 나이가 많아지면서 내셔널 필하모니와 함께 차례로 신녹음 을 발표하여, 그 노익장에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 중에는 비제의 [교향곡 제1번]과 모음곡 [아를의 여인], 차이코프스키의 [오로라의 결혼](이상 CBS) 등이 있다.
마젤, 로린 (Lorin Maazel 1930~)
프랑스의 파리 근교의 뉘이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러시아인인 부친과 헝가리와 러시아의 혼혈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어린 로린은 피츠버그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4세 때 절대음감과 발군의 기억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로린은 지휘에 비상한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8세 때 이미 아이다호의 대학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그 당시 대평론가인 오린 다운즈에게 인정되어, 1939년 9세 때 뉴욕 세계 박람회에 출연하여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지휘함으로서 신동 지휘자라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또 10세인가 11세 때 NBC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였고, 이어서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마젤은 그대로 학업을 계속하여,고등학교를 16세 때 졸업한 다음 피츠 버그 대학에 들어가 어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 한편 블라디미르 바칼레이니코프에게 바이올린과 지휘법을 배웠다. 이 동안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를 맡았고, 아트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는데, 1949년에는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51년에 풀브라이트 국비생(장학생)으로서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주로 공부하였으며, 보스턴의 버크셔 음악 센터에서는 지휘법을 공부했다. 1953년에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성공하였다. 그 이래 세계에서 가장 젊은 지휘자로서 유럽 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음악제에 게스트로 초청되어 대활약을 시작하였다. 더구나 1960년 30세의 나이로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음악제에 [로엔그린]를 가지고 등장하여 실력과 경력을 인정받았다. 마젤은 그 후에도 1968년과 1969년에 바이로이트에 초청되어[니벨룽겐의 가락지] 전4부작을 지휘하였다. 1965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에 취임하였으며 동시에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도 겸임하여, 서 베를린의 인기를 카라얀과 양분하게 되었 다. 오페라 활동은 1971년까지 했고, 방송교향악단은 1973년까지 지휘하였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런던의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에서 클렘페러를 보좌하는 준지휘자를 맡았는데, 1972년에는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76년부터는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의 상임 객원 지휘자도 겸임했으며, 1982년 시즌부터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레코드는 베를린필하모니를 지휘한 것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멘델스존의 교향곡 [이탈리아]와 [종교 개혁], 라벨의 [어린이와 마법](이상 그라모폰)등이 유명하다. 30세 전 마젤의 젊은 무사로서의 활약이 충분히 발휘된그것은 자기 주장의 강한 매력이 넘치는 연주였다.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시대의 레코드에서는 소프라노인 안나 모포를 주역으로 한 비제의 [카르멘] 전곡(오이로디스크)이 인상에 남는다. 이것은 알코어판의 원전을 철저하게 해석한 것으로, 이 오페라의 강한 생명력을 재발전시켰다.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시대는 필립스에서 바흐를 비롯해서 바로크음악을 상당히 중점적으로 녹음하여 [b단조 미사곡]등에서는 마젤다운 자기 주장을 보였는데, 오히려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마음에 남는다. 클리블랜드 재임 후는 초기에 거슈윈의 [포기와 베스]전곡, 프로코피예프의 [로메오와 줄리에트](이상 런던)에서 공전의 명연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대작의 브람스, 베토벤 두 교향곡 전집(런던, CBS) 등은 지나치게 정통적인 표현으로써 마겔다운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약간 유감이다. 최근의 것에는 베를리오즈의[환상 교향곡](CBS)이 오랜만에 정교한 표현을 통해 그다움을 다시 되찾은 것만 같다. 1988년 가을부터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마젤은 그동안의 음악적인 성숙으로 생의 깊이를 밀도있게 음악으로써 그릴 것이다. 부러진 지휘봉 1978년 9월 13일에 열린 클리블랜드 관현악단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 관현악단이 몇 해 전에 왔을 때엔 조지 셀이 엄격한 지휘로써 빈틈없는 다부진 연주를 들려 주었지만, 이번엔 40대의 천재 지휘자 로린 마젤이 신비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마젤은 지휘를 매우 부드럽게 하면서도 강인한 표현을 하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곡인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제4악장 중간 부분에서 너무나도 열띤 지휘를 하느라고 두 팔을 휘두르다가 지휘봉이 왼손과 부딪쳐서 그만 두 동강이가 나서 3분의 2길이의 끝부분은 무대 위에 떨어졌다. 그는 부러진 그 짧은 지휘봉을 휘두르면서 바로 앞의 비올리스트에게 지휘봉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리자 이 비올리스트는 준비하고 있던 새 지휘봉을 꺼내서 손을 뻗쳐 조용히 내밀자, 마젤은 약간 허리를 구부리는가 하더니 날쌔게 받아서 그대로 지휘를 계속했다. 지휘봉이 부러지는 것도 극적이지만, 부러진 손잡이 부분을 내려뜨리지 않고 오른손으로 살그머니 모우닝 코우트의 안호주머니에 넣어 두는 것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신경질이 심했던 토스카니니는 리허설 때 자뜻대로 안되면 지휘봉을 꺾어버리는 것이 일쑤였다고 한다. 따라서 금방 화가 가라앉으라고 일부러 꺾어지기 쉬운 나무로 특별히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린 마젤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지휘봉을 자기의 목숨처럼 생각하는 듯이 애지중지한다. 제2회 대한민국 음악제 때 출연했던 유고슬라비아의 지휘자도 지휘에 너무 열중하다가 지휘봉을 부러뜨린 일이 있지만, 지금 세계 최고의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는 신비적인 지휘자 로린 마젤이 지휘중에 지휘봉을 부러뜨렸다는 것은 길이 남을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체크나보리안 로리스 (Loris Tjeknavorian 1937~)
이란 서부의 브르젤드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아르메니아인으로서 1915년의 대학살 때 이란으로 망명했으며, 8세 때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작곡 등을 거의 독학으로 배웠다. 16세 때 테헤란에서 합창단을 결성하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1954년부터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지휘법은 스바로프스키에게 배웠다. 1961년 귀국하여 테헤란의 음악 아르히프의 부장을 역임하면서 작곡 활동을 하였다. 1965년 굴벤키안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에 입학해 박사 학위를 얻은 다음, 콘코디아 대학 부속의 작곡가, 무어헤드 주립대학의 준음악 교수 등을 거치고, 1969년부터는 센트럴 미네소타 하기 음악 아카데미의 학장도 역임했다. 1972년 이란에 돌아와, 테헤란 오페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시작하였다. 1974년 할레 관현악단에 초청되어 영국에 데뷔하였고, 자작의 피아노 협주곡과 그 밖의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1975년에는
런던에서도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RCA와 전속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런던을 비롯하여 각지의 주요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하였고, 1975년부터는 런던 퍼커션 비르투오지의 음악 감독도 겸하게 되는 등, 런던을 제2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1978년 가을 런던에서
체크나보리안을 중심으로 한 아르메니아 음악제 개최중에 이란에서 동란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체크나보리안은 아르메니아인인 만큼 하차투리안이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색채적인 작품에 독특한 수완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밖에 고전파나 낭만파의 작품도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 최근에는 베토벤의 [운명]의 귈케판에 의한 최초의 녹음(빅터)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또 작곡가로서도 타악기(60명)와 트럼펫을 위한 교향곡 [학살된 사람들을 위한 레퀴엠] [아르메니아의 바가텔], 발레곡 [시모르그] 등의 녹음(영국 유니콘)이 있다.
오리아콩브 루이 (Louis Auriacombe 1917~)
프랑스 남서부 포에서 태어났다. 툴루즈 음악원에서 배우고, 1931년에 바이올린, 1937년에 노래, 1938년에 화성학에서 각각 '프리미에 프리'를 획득하였다. 1951년부터 1956년에 걸쳐 잘츠부르크의 국제 지휘자 강습회에서 마르케비치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56년 린츠에서 잘츠부르크 하기 아카데미의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통해 데뷔하였고, 그 후 마르케비치의 지휘법 강습회의 어시스턴트로서 잘츠부르크 외에 멕시코, 마드리드 등지에서 근무했다. 1953년에 12명의 현악기 주자와 쳄발로 주자 한사람으로 구성된 툴루즈 실내관현악단을 결성하고, 바로크 음악과 현대 음악을 중심으로 한 지휘를 시작했다. 이 실내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부쿠레시리에프와 리제티의 작품의 초연을 하였다. 그와 그 실내관현악단은 단기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다수의 레코드 녹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실내관현악단뿐만 아니라 툴루즈의 카피톨 극장 관현악단(시립관현악단 이라 불리는 일도 다),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 파리 음악원관현악단 등의 지휘도 하였는데 1970년대 중엽 이후는 병 때문에 실제적 지휘 활동은 중지되고 있다. 그의 지휘는 바이올린 주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데서 오는 엘레건트한 음향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비발디의 [4계]와 [플루트 협주곡작품 10](모두 에인절), 사티의 [파라드](에인절) 등은 그의 해석, 개성이 잘 발휘된 명연주라 할 수 있다. 푸레스티에, 루이 (Louis Fourestier 1892~1976) 작곡가로서도 활약했으며, 남프랑스 몽페리에에서 태어났다. 몽페리에 음악원에서 첼로와 화성학을 배우고, 그 후 1909년부터 파리 음악원에서 룰루와 제다르즈를 사사했다. 1925년 [아도니스의 죽음]에 의해 로마 대상을 수상하고 신진 작곡가로서 로마의 빌라 메디치에 살게 된다. 프랑스에 돌아온 뒤는 곧 오페라 코미크(파리)의 지휘자(1927∼1932), 1938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1946∼1948년에 걸쳐서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를 했다. 그동안 프랑스 내외를 거듭 연주 여행했다. 1945년부터 1963년까지 파리 음악원 지휘법 교수를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명솔리스트와 많은 레코드 녹음을 했고, 특히 프랑스 음악 연주에는 정평이 있었으나 거의 두 폐반되었다. 1974년 포레 서거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지휘했다.1976년 9월 30일 파리 교외 불로뉴 비앙쿠르에서 타계했다.
프레모, 투이 (Louis Fr maux 1921~)
프랑스 북부 파 드 칼레 현의 엘 - 쉬르 - 리에서 태어났다. 북프랑스의 바랑시엔 음악원에서 배우기 시작했으나 전쟁 때문에 중단했다.이때 프레모는 프랑스에서의 레지스탕스 운동, 극동에 있는 군단에 투신했다. 이 기간을 통해 프레모는 두번에 걸쳐 대전십자훈장을 받은 바 있다 1947년부터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재개하고 같은 해 파리 음악원에 입학, 루이 푸레스티에에게 지휘법을 배우고, 자크 샤이에에게 음악 이론과 음악학을 배웠다.1952년에 지휘로 '프리미에 프리'를 받고 졸업, 이듬해 1953년에 데뷔했이때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의 연주회 성공 때문에 프레모는 각지로부터 객원지휘자로 초빙 되었으며 파리의 콜론 관현악단, 파들루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로마 성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 지휘자를 거쳐 1956년, 모나코 몬테카를로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고 이 지위를 1965년까지 유지했다. 그 동안 1959년에는 모나코 왕궁의 콘서트 지휘자도 지내게 되었으며,
또 몬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중심으로 한 레코드 녹음을 적극적으로 하게되었고, 이들 녹음 중에는 레코드 상을 받은 명반도 적지 않다.1967∼1968년 영국과 극동으로 최초의 객원 연주 여행을 한 뒤, 리옹의 론 - 알프스 필 음악 감독이 되었는데 1971년 이 오케스트라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현재의 리옹 관현악단의 기반) 보도에게 새로운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맡길 때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969년에는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의음악 감독이 되었는데, 이 지위는 197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1979년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지내고 있다. 프레모는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을 거의 무명의 존재에서 제1급의 실력을 갖춘 오케스트라로 육성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7년 이래 수차에 걸쳐 극동 공연을 갖고 프랑스 음악에 치우치지 않는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해석은 절도를 잃지 않는 가운데 날카롭고 다이내믹한 변화에 넘쳐 있으며,동시에 섬세함과 세련된 표현에도 특출하다. 그의 이와 같은 해석이 최고의 결과를 낳은 레코드로는 먼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몬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녹음한 것(에라토), 버밍엄 시립교향악단과의 오펜바흐 [서곡집](세라핌), 토르틀리에를 독주자로 맞이한 생상스와 랄로의 [첼로 협주곡](세라핌)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도쿄도 교향악단에 객원했을 때 녹음된 무소르크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라벨 편곡, 덴온)은
세련된 해석이 들을 만하다.
마타치치, 로브로 폰 (Lovro von Mata I 1899~)
유고슬라비아의 북부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 빈으로 이주하여 9세때 빈 소년합창단에 입단한 다음,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26년 쾰른 오페라 극장에서 하였고, 그 후 1936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 의 지휘대에 서기도 했다.그러나 1938년부터는 모국에 돌아와 자그레브 오페라 극장과 베오그라드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활약하였고, 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쟁으로 폐허 상태에 있었던 조국의 악단 부흥에 진력하였으며, 1954년부터 다시 서유럽에서 지휘 활동을 시작하였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하여 뮌헨, 슈투트가르트, 밀라노의 스칼라 오페라 극장, 로마 등에서 객원 지휘 활동을 계속하여 명성을 얻었다. 1956년부터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으로 1958년까지 활동했다. 그 한편으로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도 종종 객원 지휘를 하였는데, 1958년 지휘자가 되었다. 다음해 1959년에는 [로엔크린]을 지휘하여 바이로이트 음악제에도 진출하였고, 또 베로나에도 등장하였다. 1961년부터 1966년에 걸친 5년간은 프랑크푸르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을 역임하였고, 유럽 각지를 비롯하여 폭넓은 객원 지휘를 하였다. 그 후 모국의대표적 오케스트라인 자그레브 필하모니 의 예술 감독이 되었고,또 1970년에 사임한 에두아르드 반 르모텔의 뒤를 이어 몬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에도 영입되어 겸임하였다.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1978년에 로렌스 포스터에게 승계시키고 사임하였는데, 그 후에 고령을 이유로 은퇴하였다. 마타치치의 지휘는 풍격이 풍부한
스케일이 큰 것으로 내면에의 깊이와 함께 중후하고 설득력이 강한 연주를 한다. 베토벤, 브루크너, 바그너에서는 심원한 명연주를 이끌어내는데,그중에서도 브루크너는 장대한 스케일의 공감이 흘러 넘치는 연주로서 감동적이다. 레코드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5번, 제7번]의 2곡이 있는데, 마타치치의 대표 적인 음반 중 하나이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제6번]도 참으로 훌륭한 개성적 연주로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이상 수프라폰)도 마찬가지 이다. 리히터와 협연한 그리그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에인절)도 인상 깊은 연 주였다.
베리오, 루치아노 (Luciano Berto 1925∼)
작곡가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의 제노바 근교의 오네리아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음악원에서 파리베니, 게디니에게 배웠으며,쿠세비츠키 장학금을 얻어 미국에 건너가 버크셔 음악 센터에서는 달라피콜라에게 배웠다. 1953년 밀라노 RAI(이탈리아 국립방송)의 전자 음악 스튜디오의건설에 즈음하여 초빙된 마데르나와 함께 그 건설에 참가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 스튜디오의 주임을 역임했으며, 1957년부터 1962년까지는 평론 잡지『인콘토리 무지칼리』를 편집하였고, 같은 이름의 콘서트 시리즈를 지도하였다. 그 후 미국에 가서 탱글우드와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치고, 1965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2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폰피도 센터의 신연구소,
IRCAM의 일렉트로 어쿠스틱 부문의 주임과 이스라엘 실내 오케스트라와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카 로나의 예술 감독을 역임하였다. 베리오의 작품은 전위적 수법과 자기 감성과의 밸런스를 중요시한 독특한 것으로 그 작품은 ,세계 현대 음악제에서 상연되어 왔다.그때 자작의 콘서트의 지휘를 하는 일이 많고, 런던 교향악단, BBC 교향악단,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이스라엘 필하모니,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프랑스 국립관현악단과 공연하고 있다. 레코드는 RVC에 2종의 작품집과 자신이 직접 지휘한 [아 론네](런던) 등이 있다.
포스, 루카스 (Lukas Foss 1922~)
독일 출신의 미국의 피아니스트이면서 작곡가이기도 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고, 일찍부터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배웠다. 1933년 파리로 옮기고,라자르 레비에게 피아노를, 노엘 갈로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리고 1937년에 미국에 가서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피아노와 작곡에 더하여 라이너와 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을 배웠고, 힌데미트에게 작곡도 배웠다. 1944∼1950년에 걸쳐서 보스턴 교향악단의 피아니스트를 지냈고, 1950∼1952년에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탔으며 이탈리아에 유학한 후에는 작곡과 지휘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1952년 UCLA의 교수로 취임하였고, 1957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현대음악 연주의 실내 앙상블을 조직한 것을 비롯하여 1963∼1970년에는 버펄로 필하모니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또 미국, 유럽의 주요 오케스트라에 자주 객원 지휘를 하여 호평을 받았다. 1972년부터는 이스라엘 필하모니에서도 정기적으로 초청받고 있다. 작곡가로서는 이미 15세 때부터 작품을 발표하였고, 피아노곡에서부터 관현악곡, 무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장르의 다양한 작품을 썼다.지휘자로서 또 피아니스트로서 자작을 비롯하여 현대 작품을 녹음하고 있는데, 피아노 솔로를 담당한 번스타인과의 [교향곡 제2번](그라모폰)이 있다.어린이의 울음 소리에 미소를 1977년 6월 미국의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루카스 포스의 객원 지휘로 서울시향의 정기 연주회가 있었을 때 생긴 이야기 한 토막.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불새]를 연주할 때, 1층 관람석에서 어린이의 크나큰 울음소리가 들렸다. 갓난아기의 울음이라면 애교로 들어줄 수도 있겠으나 이 어린이는 비명과도 같이 요란하게 울음을 계속적으로 터뜨렸기 때문에 청중들은 자연히 그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쏠렸다. 이때 1층 맨 앞줄 왼쪽 자리에 앉아 있던 음악평론가 K씨는 숨을 죽이고 자리를 뜨더니 어린이의 울음 소리가 연방 들리는 쪽으로 마치 도둑의 걸음과도 같이 몸을 움추리고 살금살금 기어갔다. 그 우는 어린이를 안은 아버지 인 듯한 젊은 남 자가 벌써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물론 안내양이 두어 명 달려와서 울음을 멎게 하라고 그 아버지인 듯한 그 남자에게 타일렀으나 그 어린이는 연방 악발을 하며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장내가 더욱 소란해졌다.웬만한 지휘자라면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는데 그렇듯 시끄러운 울음소리를 들으면 짜증이라도 내겠지만, 루카스 포스는 그 어린이가 울음을 터뜨리는동안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지휘봉을 휘둘렀다. 그것은 물론 철없는 어린이의 울음이라 그 소리가 아무리 요란하더라도 사랑스럽게 보아주는 것이었다.
어느새 우는 어린이를 안은 그 남자는 로비로 나갔는데 이 세종문화회관의 남자 직원이 달려오더니 안내양들에게 "왜 입을 틀어 막아서라도 울음을 금방 끊게 하지 않고 이런 소란아닌 난동을 부리게 했소!" 하고 나무라자, 음악을 듣지 않고 이 어린이를 꾸짖기 위하여로비로 나온 음악 평론가 K씨는 그 어린이를 데리고 나온 그 남자에게 화를 버럭내며 "보아하니 고등 교육을 받으신 분 같은데 어떻그렇게 오래도록 어린이를 울리게 한단 말이요! 썩 나가시오. 이 신 때문에 완전히 잡쳤소"하고 나무랐다이 남자는 한참 동안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K씨며 많은 청중들은 화를 냈으나 지휘자 루카스 포스는 도리어 어린이의 울음을 축복이나하는 듯이 연방 미소를 머금고 지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