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전수의 삶
1. 1784년 늦가을에 한양에서 세례를 받고, 초남이 마을 생가에 내려온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 복자의 관심사는 자신이 알게 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유항검은 마음 놓고 전교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맏아들 유중철(세례자 요한, 1779~1801)과 가족들에게 먼저 신앙을 전하였다. 그 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소나무가 우거진 자기 토지에 교리당을 지어 본격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토론하고, 세례를 주었다. 이곳에서 유항검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받은 사람들 가운데 유배된 교우들만 해도 스물다섯 명이나 되며, 잡혀간 사람들은 200여 명이 된다.
당시 호남의 큰 재산가였던 유항검은 토지와 재산과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지만, 결코 탐욕에 빠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가 지닌 덕스러운 삶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가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몸소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했으므로, 이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대거 입교했으며, 호남 지방의 수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2. 선교 사명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 유항검은, 다블뤼 신부가 기록했고 또 수많은 증거들이 보여 주듯이, 자신이 살던 전라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시간과 마음과 노력을 다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순교자들의 증언에서 밝혀졌다. 김제의 순교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 1756~1801) 복자의 사형 선고문을 보면, 유항검의 집에서 다년간 머물면서 천주교에 깊이 빠졌고 그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었다고 증언했다.
그뿐 아니라 사학징의(邪學懲義) 책의 전라도편을 보면, 사학죄인 명단 가운데 상당수가 유항검으로부터 사학을 배웠다고 나와 있는데, 전주, 김제, 영광, 금구, 무안의 순교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고창의 최여겸(마티아, 1763~1801) 복자 역시 유항검 가족에게 천주교를 배워 열심히 실천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학 척결에 앞장섰던 대왕대비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유항검에 대한 처형 내용이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유항검과 초남이 신앙 공동체의 복음 전파 운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3. 유항검은 1786년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하에서 전라도 선교 담당 신부로 임명되어 전주 지방을 중심으로 성사를 집전하며 성무 활동을 했다. 그러나 유항검은 교회 서적을 읽던 중 가성직제도의 오류를 맨 먼저 발견해 이를 이승훈(베드로, 1756~1801)에게 보고했으며, 독성죄에 해당되는 행위를 중단하도록 역설하였다. 또한 유항검을 중심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선교사들의 교통수단으로 서양의 대형 선박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위해 북경에 파견되는 밀사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드디어 중국에서 복자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유항검의 노력과 편지와 경비로 입국하자, 1795년 6월에 유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초남이로 초대했다. 이로써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미사가 거행되었다. 유항검의 주문모 신부 초대는 초남이를 호남지방의 선교 중심부로 만들려고 하였을 것이다. 또한 유항검은 아들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의 동정부부의 삶을 이룰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4. 조선 천주교회의 초창기는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을 통하여 신앙을 접하고, 연구하고, 믿음을 키우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어렵게 구한 천주교 서적을 빌려 읽고, 빌린 책을 베껴 외우고,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신앙과 신앙 공동체를 키워 나갔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복자는 감사로부터 심문을 받았을 때, 자신은 김범우(토마스, 1751~1787)의 집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極)’이라는 책 두 권을 빌려와 집에서 베낀 다음 되돌려주었다고 답했다. 또한 책의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한 다음 이를 진지하게 실천했다고 밝혔다. 권상연(야고보, 1751~1791) 복자 역시 윤지충으로부터 책들을 빌려와 읽었다고 대답했으며, 군수가 이 책들에 대해 묻자 내용을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천주교 신앙은 한문 서학서를 통해 전파되기 시작했고, 한글 번역본의 등장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또한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의 ‘성교요지(聖敎要旨)’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 복자의 ‘주교요지(主敎要旨)’도 많이 읽혔다.
이순이(루갈다)의 동생 이경언(바오로)의 심문 중에 그가 내놓을 책이 없다고 하자, 관장이 하층민도 책을 수십 권씩 가지고 있다고 반박하는 내용을 보더라도, 한글본 천주교 서적들은 신앙을 서민들에게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당시 신자들이 신앙에 관한 기본 교리 및 지식을 습득하고 신앙생활을 심화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서적들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신자들은 성직자도 없는 상황 속에서 신앙을 가꾸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5. 참된 신앙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요, 자신 안에 갇혀 지내는 것도 아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인데, 이는 구체적으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나타난다. 조선 후기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신분의 차이 또는 성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였다. 반면에 천주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애주애인(愛主愛人)의 가르침은 모든 이를 형제처럼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함을 강조했으며, 모든 이들과 화목한 사람만이 천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6.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고 말씀하셨다. 순교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천주를 공부하고 믿음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함께 영원한 진리를 알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알고, 기쁨과 희망을 더불어 누리기 위해서 천주교를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갈망했던 하느님을 알고 난 후부터는 가족과 이웃에게 천주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순교자들이 목숨을 다하여 전교한 그 열정을 본받아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전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증거할 차례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 오 성기(크리소스토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