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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원리와 기법
“일반적인 성질의 사건 대부분은 둘러싸고 있는 하늘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텍스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헌정하고 있는 미확인 인물인 ‘시루스’에게 연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두 가지 유형의 천문학 연구를 구별한다. 천문학적 주기와 운동을 발견하는 첫 번째 연구(본래적 천문학)과 이러한 운동이 일으키는 변화를 탐구하는 두 번째 연구(점성학). 그는 각각이 자신의 과학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는 “두 번째와 결합하여 주어진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천문학과 점성학이 상호보완적인 연구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점성학이 덜 자족적이고 덜 사실적이지만, 점성학을 사용하면 천문학을 더 유용하게 만들 수 있다. 비록 천문학과 점성학이라는 용어가 고대 문헌에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이 또한 프톨레마이오스가 두 개의 별도 저작에서 자세히 논의한 구별된 두 주제의 초기 정의를 보여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이미 전자의 주제(천문학)를 다루었으므로 “이제 두 번째이자 덜 자족적인 방법에 대해 적절한 철학적 방식으로 설명하겠는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두 번째의 인식을 첫 번째의 정확성과 비교할 수 없다.” 여기서,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서론적 언급에서 그는 점성학적 예측이 극히 어렵고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필요한 능력과 경험을 소유한 사람들은 만족스럽게 얻어낼 수 있으며, 단순히 때때로 실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무시하기에는 너무 유용하다는 견해를 밝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철학적 논증
2장과 3장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주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방어하는 데 중요하다. 프란츠 볼(Franz Boll)은 논증이 특히 스토아 철학자 포시도니우스의 논증과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서사는 요하네스 케플러와 같은 후대의 철학자와 천문학자들이 이용했는데, 그들은 일부 점성학적 주장의 물리학적 기초를 설명하기 위해 유사한 예와 동일한 논증 절차를 사용했다. 현대의 한 주석가는 “과학적으로 말해서 완벽하게 칭찬할 만하다”고 서술했지만, 다른 주석가는 이 장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식, 지성 그리고 수사학적 능력”이 가장 “오용”된 곳으로 비난했다.
1장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연구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두 가지 주요 반대 논증을 확정한다.
1. 주제의 복잡성으로 인해 신뢰할 만한 예지를 주는 주장을 얻을 수 없다.
2. 신뢰할 만한 예지(만약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는 예지를 얻으려는 사람의 목적을 무용하게 만드는 운명론을 암시한다.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면 발생한 사건은 무엇이든지 예측하든지 못하든지 발생할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프톨레마이오스는 다음 두 장에서 이 두 가지 비판에 답한다.
점성학의 신뢰성 정도에 대한 논증
2장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적 수단으로 얻은 지식은 획득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적” 논리학에 따라 그 한계를 정의하려 시도한다. 그는 어떻게 태양이 지구의 계절과 나날의 순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자연에 있는 대부분의 사물이 달과 동시성을 갖는지를 지적한다.
“…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로서 달은 일상적인 것들에 가장 풍부한 영향력을 부여합니다. 일상적인 것 대부분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달에 공명하고 달과 함께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강은 달빛과 함께 그 흐름을 늘이고 줄이며, 바다는 달의 뜨고 짐과 함께 자신의 조수를 바꿉니다. 식물과 동물은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달과 함께 성장하고 쇠퇴합니다.”
그는 날씨 변화를 일으키고 지구상 생명체의 생물학적 패턴을 조정하는 이러한 능력을 항성과 행성으로까지 확장하여 성장주기 또는 행동 양식을 경험하는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천구의 순환에 반응하도록 한다. 천구의 순환은 원소의 근본적 변화(따뜻하고, 바람불고 눈이 오거나 비가 오는 등)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는 태양이 주도하고 달이 활성화하며, 행성의 배열과 항성의 출현이 조력한다. 우세한 기상학적 성질은 기질(특정 장소에서의 시간적 순간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질은 특정 장소에서 그 순간에 발아 또는 발현되는 모든 것의 씨앗에 일종의 시간적 각인으로 새겨지는 것으로 가정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기질에 대한 분석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지만, 자료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인 추측으로” 고찰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떤 사람이 천구의 순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일반적인 날씨 패턴과 그 날씨 패턴이 농작물의 종자와 동물에 미치는 영향을 신뢰할 만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 왜 그 사람이 개인과 관련하여 출생 당시의 환경에서 기질의 일반적인 성질을 알아내고 … 그러그러한 환경이 그러그러한 기질에 조응하여 번영에 유리한 데 비해, 다른 사람은 그렇게 조응하지 못해 해를 끼친다는 사실로써 우발적인 사건을 예측할 수 없단 말입니까?”
그러한 논증이 점성학의 타당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제안하면서도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성학을 실천하는 데서 많은 실수가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일부는 적절한 지식 없이 점성학을 실천한다고 공언하고 자연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예견한다고 속이는 “명백한 악당들” (때때로 진정한 점성학 연구에 맞지 않는 실천에 대해서도 ‘점성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때문이고 정통 실천가들은 제한된 수명 내에서 상당한 양의 지식과 경험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연구가 신뢰할 만한 지식은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요약한다. 점성학의 조언은 환영받아야 하지만 결점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점성가는 비난받아서는 안 되지만, 천체와 관련되지 않은 정보(개인의 인종적 배경, 국적 및 부모의 영향에 대해 알려진 것 등과 같은 것)를 판단을 내리는 데 결합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점성학이 자연적이고 유용한지에 관한 논증
3장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성학적 예측이 자연적이고 유익하다고 논증한다. 12세기 이러한 사상이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기독교 내에서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보다 더 우호적으로 점성학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먼저 예측이 임박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지는 않더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에 대해 예측하는 것이 “무용”하지는 않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키케로의 저서 점술에 관하여(De Divinatione)에서 유명해진 잘 알려진 고전적 비판 중 하나인데, 임박한 재난에 대한 경고가 그것을 회피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 경고로부터 어떤 좋은 것도 결과할 수 없다는 논증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성학을 “우리가 인간과 신에 관한 완전한 지혜를 얻는” 과목으로 평가하면서 점술에 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그 과목이 “각 기질의 능력에 적합하고 적절한 것”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제공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점성학을 향상된 자기인식을 촉진하는 과목, 즐거움과 웰빙의 원천으로 평가해야 할 과목으로 본다. 점성학이 부나 명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그렇다. “더 큰 이익”에 관심이 있는 모든 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사건의 경우,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성학적 예측이 여전히 유익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예지는 미래의 사건을 마치 현재에 있는 것처럼 경험함으로써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조용하고 침착하고 안정적으로 영혼을 적응시키고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다음 논증은 예측의 실천이 결정론적인 필연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일 때 가해지는 비판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중세 종교 교리는 개인의 영혼이 자신의 선택과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 점은 이후의 신학적 수용에 매우 중요했다. 펠트르의 제라드(Gerard of Feltre)가 쓴 13세기 저서 항성론(Summa on the Stars)은 점성학적 결정론이 신학적 논증에 대해 일으키는 문제를 제시한다. “별들이 어떤 사람을 살인자나 도둑으로 만든다면, 이를 행하는 자는 제1 원인, 즉 신이기 때문에 이것을 제안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비판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논평은 천구의 순환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신성하고 불변의 운명에 따라 영원히 수행”되지만, 모든 지상의 것들은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운수에 종속되어있으며 그것을 넘어 제1 원인의 도출에서는 우연과 자연적인 배열이 지배”한다고 제안함으로써 이러한 비판에 맞선다. 따라서 그는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게 운명지어진 것은 없으며, 우리는 “사건이 어떤 다른 원인의 가능성 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운명인 것처럼 천상적 원인의 결과로 인류에게 수반된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다.
이러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는 후대의 많은 점성가가 소환했던 “더 작은 원인은 항상 더 강한 원인에 양보”한다는 요점을 지적한다. 그는 개인이 더 넓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더 큰 순환에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천궁도가 이득을 나타내는 사람도 그의 공동체가 자연재해나 역병에 휩싸이면 죽을 수 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또한 “인간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어도 구제책이 적용되지 않은” 때와 같이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대응 조치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재앙적인 사건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운명 대 자유 의지의 논쟁에서 어떤 것들은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많아서 피할 수 없는 반면, 다른 것들은 점성학적 예측 행위로 피할 수 있다는 균형 잡힌 관점을 취한다. 점성가의 입장은 어떤 질병이 항상 치명적이며 어떤 질병이 도움을 허용하는지를 사전에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의사의 입장과 비교된다.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평가에 따르면, 지배적인 기질과 미래의 기질이 어떻게 선천적인 기질을 번성하게 하거나 쇠퇴하게 하는지에 대해 인식하고 행위를 조절하거나, 점성학적으로 활동에 적합한 시간에 행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는 바다에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별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는 것, 성공적인 번식과 파종을 보장하기 위해, 혹은 고통을 덜 받기 위해 극단적인 열로부터 우리 자신을 식히기 위해 달의 순환에 대한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과 같다.
원리 소개
당대의 점성학 텍스트 중에서 테트라 비블로스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제1권에서 기본 점성술 원리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따라 연관성의 배후에 있는 추론을 종합하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4장은 온이나 습의 창조적인 체액 성질 혹은 냉이나 건의 감축 성질의 연관성을 통해 “행성의 위력”을 설명한다. 따라서 화성은 과도한 건조함 때문에 파괴적인 행성으로 묘사되는 반면, 목성은 온화하고 비옥한 행성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궤도가 지구를 중심으로 측정되는 지구 중심적 관점에서 인식되는 태양에 대한 행성의 배열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시티움의 제노와 피타고라스가 채택한 널리 퍼진 그리스 철학과 결합하여 다음 세 장은 행성을 대립 쌍으로 배열한다. 그것들은 유익한 것(적당히 온하거나 습함) 또는 해로운 것(과도한 냉각 또는 건조)일 수 있고 남성적(건) 또는 여성적(습)일 수 있으며, 능동적이고 주행성일 수 있고(낮의 성질에 적합하고 태양의 성질과 일치) 또는 수동적이고 야행성(밤의 성질에 적합하고 달의 성질과 일치)일 수 있다. 이러한 체액 연관성은 태양과의 상대적 배열(성위)에서 파생되기 때문에, 8장에서는 어떻게 그것들이 각 행성의 태양과의 회합 주기 단계에 따라 미묘하게 변경되는지를 설명한다.
9장에서는 “항성의 위력”을 논의한다. 여기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직접적인 체액 연관성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신이 이미 정의한 행성의 그것과 같은 “온도”를 설명한다. 따라서 알데바란(성화라고 불리는 거성)은 “화성과 같은 온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히아데스성단에서 다른 별들은 “토성의 온도와 같고 수성의 온도와 비슷하다.” 이 장의 끝부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이것이 그의 제안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이 만든 별 자체의 효과에 대한 관찰”이라는 역사적 출처에서 가져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10장은 체액 문제로 돌아가서 황도대가 계절에 맞춰져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불러일으킨) 습, 온, 건, 냉을 통해 중점이 이동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마찬가지로 차트의 네 각은 그것들이 정렬된 방향으로부터 불어오는 네 가지 기본 풍향의 효과와 연관되어 체액에서의 중점을 나타낸다. 제1권의 나머지 부분(행성의 위상과 애스팩트의 적용에 관한 마지막 두 장까지)은 황도십이궁의 지배권, 분할 그리고 성위를 제공하는데, 그 대부분은 천문학적 정의, 계절 효과, 물리학과 기하학에 관련된다. 기하학적 원리는 황도에서의 행성과 십이궁의 각 관계를 기반으로 점성학적 애스팩트의 우호적 혹은 비우호적 성질을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황도십이궁의 경계는 그 이름이 붙은 눈에 보이는 별자리의 경계에 가까웠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황도대의 시작점이 별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계산된 춘분점에 이르기까지 고정된 것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두 체제 사이의 이론적 차이가 드러난다. 이것은 그리스어 τροπικός(트로피코스 : ‘회귀하는’)에서 이름을 따온 계절을 기초하는 회귀 황도대를 결정한다. 계절의 전환으로 설정되고 세차의 대상이 되어 보이는 별자리를 통해 느리고 점진적 회전을 겪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태양의 하지점과 동지점을 표시하는 궁(게자리=거해궁과 염소자리=마갈궁)은 태양이 하늘의 위도에서 방향을 ‘바꾸는’ 위치이기 때문에 ‘회귀 궁’으로 서술된다. (이에 따라 거해궁의 회귀와 마갈궁의 회귀로 알려진 지구의 위도권이 정의된다.)
다른 고대의 점성학 저술가들이 그러한 정의의 점성학적 해석을 강조했던 반면(예를 들어, 어떻게 회귀 궁이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할 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초점은 현저히 다르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점성학적 의미보다는 정의의 기초가 되는 천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황도대의 정의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황도십이궁의 자연적 특성”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접근 방식은 천궁도를 배열하는 논리(예: 행성의 궁 지배권 배후에 있는 철학적 원리)를 논증하지만, 그렇게 명백하게 타당하지 않은 점성학적 요소와 관련해서는 무관심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신화적 또는 상징적 연관성에 의존하는 점성학적 측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피하는 방식, 그리고 그가 다른 것보다 한 체계에 대한 개인적 선호를 드러내지 않고 상충하는 점성학적 제안의 배후에 있는 추론을 개괄하는 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일부 주석가는 점성학상의 논쟁점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비교적 냉정한 접근 방식을 그가 점성학의 실제 실천보다 이론적 원리에 더 관심이 있다고 가정하는 이유로 보았다. 반면에 그의 스타일을 나타내는 객관적인 기조, 즉 주제를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한다는 자신의 주장(일부 동시대인처럼 학생들에게 비밀 유지 서약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그가 자신의 실천과 다를 수도 있는 다른 저자를 비방하지 않고 대안적 견해를 존중하는 언급을 나타내는 방식 등이 모두 지적으로 우월한 것이라는 텍스트의 역사적 명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전 학자 마크 라일리(Mark Riley)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점성학의 주제에 천문학, 지리학 그리고 그가 쓴 다른 과학서에 적용한 것과 똑같은 이론적 성향으로 접근했다고 평가하면서 이것을 제기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독특한 스타일로 인해 라일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후대의 모든 점성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업적에 존경을 표한 것은 실천가에게 유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점성학과 과학의 공평한 종합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