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empathy)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며느리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환자인 것처럼 며느리 증상에 대해 의사에게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다 받아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답니다. 그러면서 며느리가 워낙 예민해서 그런 것 같다고 며느리 탓을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환자와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나가 계시라고 시어머니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말을 꺼냈습니다.
“시집살이가 힘드시죠? 저런 시어머니와 사시느라 숨이 막히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감의 힘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공감적 이해’(empathic understanding)라고 합니다.
공감은 상대가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생각에 공감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감 능력이 떨어진 사람은 팩트를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공감을 해 주는 것입니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공감을 훨씬 잘합니다.
욥이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모두 잃고 몸은 병을 얻어 고난의 밤을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욥의 친구 세 명이 한걸음에 찾아왔습니다. 아주 힘든 밤을 보내고 있는 친구 욥과 함께하고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달려온 것입니다. 와서 보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친구 욥을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이레 동안 침묵하며 그의 곁에서 있어 주었습니다.
고난의 이유도 모른 채, 극한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 뱃속에서 유산되었다면,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면,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것을 하며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였습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극한 고통을 느끼자 괴롭고 힘듦을 토로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역설한 것입니다.
욥의 이런 말을 다 들은 친구 엘리바스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이유 없이 고난을 주었겠느냐 너의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친구의 이런 말이 욥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욥 6:25)
친구의 말 자체는 옳고 바릅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고 고통스럽고 아프냐는 것입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말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치에 맞는 소리, 논리 정연한 말로 옳고 바른말을 하면 스스로 ‘잘했다’ 생각하고 나름 ‘똑똑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고 버릴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듣는 사람은 다릅니다. “당신의 말이 다 옳고 맞는 말인데 왜 나에게는 고통스러울까요? 왜 이리도 나를 아프게 할까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죄는 네가 지었는데 왜 내가 죗값을 치르고 죽어야 하니? 자기 죄 자기가 담당해야 하지 않겠니? 내 말이 틀렸니?”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맞는 말씀이겠지요.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화려한 말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공감이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공감과 사랑이 있었다면 말과 행동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친구가 고통이 얼마나 크면, 믿음 좋은 친구가 저런 말을 다 할까? 나 같았으면 아마 더 심한 말을 했을 거야”라고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친구 욥에게 거친 말로 고통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
주변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누군가가 슬퍼하고 울면 함께 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