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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민족자벌의 경제적 압력과 그것에 의한 자기의 경제적 와해를 방어하려는 노력과 그것이 환기하는 강한 부정적 반항의 정신이 물결칠 것이다. 그러나 이 `암흑한 무덤'에서 그들은 전진할 길을 지시하는 광명을 발견치 못하였다.
역사적 발전의 필연적 도정에 대한 그들의 무이해와 무자각은 이 반항의 정신을 단순한 소극적 부정에 억류하고 이른바 `무이상성'의 제약 앞에 정돈케 하고 말았다.
이 커다란 조건은 곧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예술적 발전을 불가능케 제약하고 그들 소시민 고유의 협애성과 전대로부터 유전된 예의 일면성 등에 의하여
이 약점은 일층 확대되어 편중주의화한 불구적인 객관성에의 집착을 낳아 내종에는 명확이 트리비알리즘 가운테 침전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국의 자연주의 문학과 동양으로 현실의 단편과 지엽에 집착함에도 일층 축소되고 정신화된 세계의 형상을 묘사하는 데 시종케 하고 말았다.
이것이 이 나라의 자연주의 문학으로 하여금 졸라등의 수준에 까지 도착치 못하게 한 한개 주요 (물론 이외에도 기개의 원인이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이며 또 이곳에서 매거치 않는다) 한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조선문학사, 특히 그 예술적 발전의 간선을 이루는 리얼리즘 발전상에서 점령하는 바 놓은 지위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재능에 풍부하고 높은 생활적 관심과 정열을 가진 소수의 작가는
단편소설 [제야] (상섭)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성격 및 심리묘사의 높은 리얼리즘을 획득하였으면 비록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그 이외의 어느 작가도 가능치 않았던 당대 지식 청년의 심리,사상,생활을 그때의 역사적 사회적 분위기 중에서 묘사 개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섭의 장편소설 [만세전]은 정히우리가 당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사실 상섭은 프로문학 십년의 고투사가 [고향]의 작자 이기영을 발견하기까지 조선문학사상 최대의 작가이었다.
이곳에는 또한 우수한 단편 <태형>(김동인)에 보는 것과 같은 당시의 옥내 생활을 상당이 정확한 수법으로 지적한 아름다운 역사적 풍경화의 일폭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든것은 20년대 조선 자연주의 문학이 소유하는 예술적 보옥으로 써 그 뒤에 올 프로문학에 물려준 최량한 문학적 유산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은 자연주의 문학의 이미 트리비알리즘화 한 예술적 약점은 곧 형식주의와 예술지상주의로 발전(?)할 길을 열었다.
이것은 곧 조선 고유의 제사정으로 말미암아 풍부화된 예의 협애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현실의 지엽과 현실의 단면을 현실의 전체로 확대하는 환상을 낳고 이것은 또 묘사는 문학의 전부인 듯한 확대재생산된 환상이 이르렀다. 그리하여 내종에는 문학을 한개 언어,문자의 기술로 환언시키는 형식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경지로 전화된 것이다.
일찍이 이들 작가의 대부분이 연애를 `생' 그것으로 확대하였다는 것을 상기하여 연상한다면 그다지 이해에 곤란함이 적을까 한다. 자연주의의 후기 혹은 그 와해 쇠미기에 생산된 대부분의 작품은 이 경향의 트림없는 반영이었다.
그러나 자연주의의 부정의 태도는 비평적 정신과 연결되어 수입된 실증사상과의 결합 위에 미미하나마 문학비평적 관심이 대두하고 사실상 조선 문학사상 비평의 배태는 이때에 구할 것이라는 일점을 암시함에 그치고자 한다. 이 다음에 오는 이른바 낭만적 세기말의 잡다한 경향을 --허무주의.다다이즘.낭만주의.유미주의. 악마주의.감상주의 등등 --이 암담한 현실감과 무이상의 일층의 확대 발전이었다.
그러므로 이 혼란한 현상의 표면만을 관찰한 제, 단순한 혼돈 (이종수) 단순한 검색(팔봉)으로 표현되며 혹은 이러한 피상관을 비판함에 이 시대 작가 시인들이 각기 자기의 생각을 한개 `주의'에 까지 형성하였는지를 의문 (신남철)에 부 하는데 그치고 만다.
이곳에는 이미 우리가 개관해 온 바와 같이 문학적 발전의 역연하고 일관된 법칙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음' 온다는 시대적 구분을 가지고 이 조류를 관찰할 때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부당하다는 비난을 살지도 모른다. 자연주의와 이들 제경향의 문학은 사실 동시대의 공서자로 아니 볼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지극히 근소한 차이나마 약간 선후가 있었고 그보다 자연주의 문학의 하향적 피곤 가운데 있었을 때 이들의 번영이 왔었다. 뿐만 아니라 이 과히 크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한개 문학현상의 세대교체적 입장에서 취급하며는 춘원 이후 전 신문학 발달상 예술사적 또 정신사적 발전의 객관적 법칙성에 의하여 이것은 엄연한 존재 사실일 뿐더러 지극히 필요한 사실이므로 필자는 이 시간적 구분의 의견을 갖는 것이다.
하나 이조류가 자연주의 하향기에 본류로써 번영하였다는 즉 한개 주의를 요하는 것으로 그것은 이 시기야말로 자연주의가 신문학사에서 그 갖는 바 진보적 역할의 종언과 신경향파 문학이 교체되는 황당한 국면이었다는 그것이다. 한데 자연주의가 주로 단편의 양식ㅇ체 의거하였으면 이 조류는 자기 표현의 주요양식으로 시를 택하였다.
이것은 전자에서와 같이 그 본래의 세계관적 성질상 당연한 것이었다. 자연주의가 호불호간 사실과 직접 관계하였다면 이 조류는 암담한 현실 가운데서 발생하는 절망의 `감정'과 `정서'를 취급하였다.
바야흐로 조선문학은 이조류 (이상화.회월.홍노작.박월탄.임노월. 나도향 등등[백조]를 중심으로 한 시인 ,소설가)에 이르러 사실상 `현실의 부정'으로 부터도 `폭로의 정열'을 경주할 `현실의 단편,지엽'에서 까지 격리하여 오로지 감상하고 단식하고 절망하고 고민하면서
`허무'라든가 환상적 혼미라든가의 세계로 승화하여 버린 것이다. 일방 자연주이 문학의 형식주의. 예술지상주의적 변이의 격력한 도정이 산문의 세계에서 이화 보조를 합하여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신문학은 잡다한 형태의 예술지상주의에로 변화되며 이 ?까지 `민족적'이란 사상적 (분위기만으로라도!) 특질 가운데서 물러서는 `신문학'의 통일적 개념은 와해되었었다.
사실 그들을 민족적이란 개념 가운데 포괄하기엔 너무나 많이 비민족적이었다. 즉 그들은 현실생활의 무엇을 위하여 자기의 문학을 준비한다느니 보다는 더 많이 예술상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려던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조선의 신문학은 현실로부터 떠나 자기의 묘굴을 파기에 급하였고 통일된 방향은 방기되었다.
[백조][영대]등, 이 경향을 대표하는 간행물이 족출되고 [폐허] 이후 [개벽] 기타에서 후기 자연주의는 잔존하여 보들레르. 베를레느. 와일드 등이 수입되어 세기말적 경향의 각색 조류가 범람하였다. 그러나 이 조류는 조선 신문학발달사상 희유의 시적 예술의 융성기를 초래한 원동력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대는 사실 조선 신문학발달사상 낭만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을 만치 낭만적 정열이 창일하던 때로 젊은 시인들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낭만적 훈향 높은 시가로써 조선문학계의 하늘은 화려하게 장식 되었었다. 이것은 육당, 충원의 발아기 이후 자연주의 문학시대에 와서 그 기초를 잡은 근대 조선시의 일 개화 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잠깐 붓을 멈추어 자연주의가 공헌한 커다란 업적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경의와 함께 던져야 할 것이다. 자연주의는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시가에 있어서도 김석송. 주요한. 김소월. 춘원. 김억등의 사업위에 강한 영향을 주어 언문일치의 구어시의 언어적 음률적 개척을 보게 하였으며 근대시상에 사실적 경향을 발전케 한 것이다.
이들은 다 조선 근대시상 진정한 의미의 창시적 건설자이 명예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백조]를 중심으로 한 세기말적 낭만시인들은 이들의 귀중한 업적 --주로 언어적--의 계승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절망의 어두운 동혈을 사의 신음같이 노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발전상 일정의 공헌을 한 것은 당시 현실이 전하는 깊은 고민을 기분간 이라도 정확히 노래하였고 그 참을 수 없음을 표현하였다는 일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시집 [흑방비곡]의 작자 박월탄이나 양 시집 [오뇌의 무도]에서 서구의 데카당스를 소개한 김억이나 그 특유의 고혹인 장시형으로 [나의 침실로] 기타의 시편에서 암담한 고민을 넣은 낭만적 정열을 가지고 노래한 이상화 등은 실로 이 시대가 생산한 최량의 시인들이다.
더욱이 이상화에 있어서는 긴 시를 조금도 리듬의 저조. 이완에 빠뜨림이 없이 조선어을 강한 열정이 표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시어로 창조하는 데 일 전형을 여한 가장 높게 평가될 시인이다. 이 시인의 유산으로 부터 그 위 프롤레타리아 시가 받은 경향은 적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들의 시는 감상에 울고 절망에서넘어질려 하고 탄식에서 한숨지으며 이것을 발 ㅗ못부르고 상징하고 허무에서 얼굴을 가리고 공포에 떨었음에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비통한 고민의 시가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우수한 시가들이 격력한 낭만적 리듬을 가지고 노래 되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상징주의 시인으로 불려지는 낭만주의의 대표적 시인의 하나인 박월탄은 1922년 1월 잡지 [개벽]에 실린 어떤 논문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다.아니 이렇게 부르짖었다.
앞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술은 `역(力)의 예술'이다. 가장 강하고 뜨거웁고 매운 힘있는 예술이라야 할 것이다. 헐가의 연애문학, 미온적인 사실문학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고뇌를 건질 수가 없으며 시대적 불안을 위로할 수 없다. 만 사람의 뜨거운 심장속에는 어떠한 욕구의 피가 끓으며 만 사람의 얽혀진 뇌 속에는 어떠한 착란의 고뇌가 헐떡거리느냐? 이 불안, 이 고뇌를 건져주고 이 광란의 핏물을 눅여 줄 영천의 파지자는 그 누구뇨? `역의 예술'이며 `역의 시'를 읊는 자이다.
이곳에는 그들이 침통한 고민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곳에 즉철 하려는 태도와 그들이 벌써 춘원이 인도주의나 자연주의의 자유연애, 현실주의 등의 안티테제로서 자기를 확인하려는 한개 적극적 정신을 찾을 수가 있다. 요컨대 이 논문의 필자도 정직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 제 문학으로 만족하기에는 그들의 `오뇌'나 `시대적 불안'은 보다 더 심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연애의 자유는 `헐가'의 것이고 `인권사상' `현실폭로'등은 `미온적'인 것이었다. 비록 관념적 방법으로나마 그들의 시가, 소설에는 전대 문학이 표혀난 그것보다는 더 심각한 것을 탐구하려는 열정과, 시대의 불안과 오뇌를 해결할 그 무슨 `역'을 검색 발견하는 성실한 노력과 고민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개의 노선에서가 아니라 각양각색의 방향에서 자기의 길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또 그 몸을 맡긴 것이다. 이곳에 소위 세기말적 조류의 다양성은 원인한다. 이 `역의 예술'을 고민 가운데서 찾는 곤란한 암중모색의 정열의 일단이 신경향파 문학에로 통한것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박영희, 이상화 등의 시인, 특히 박영희가 이 조류 가운데로 부터 신경향파 문학 건설의 가장 영예있는 창시자의 길을 개척한 것은 조선 낭만주의가 갖는 최대의 명예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요소를 다분이 함유하 면서 그 요절로 말미암아 길을 끊긴 재능있는 작가로서 우리는낭만주의 시대의 거의 유일한 소설가인 도향 나빈을 들 수가 있다. 도향은 낭만주의 시대가 갖는 유일의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근대 소설가 가운데 희유의 재질을 가진 작가이었다.
하나 그의 소설 특히 이 시대에 쒸어진 (그이 초기의) 장편 [환희] 단편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니]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등은 그 제명이 표시하는 것과 같이 낭만주의적 감상적인 것으로 그의 만년의 작품과는 약간 달라 소설로서는 너무 시적인 작품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소설적인 것보다는 더 시적이었고 자기 표현의 주요 양식으로 시를 고른 이유는 외국의 영향(주로 불란서 데카당스가 많이 시적이었다는 것과 구체적으로 보들레르.베를레느 등등)도 있지만 당시의 시의 대부분이 서사저긴 것보다 서정적이었다는 사실로써 일층 명확해진다. 즉 이 시인들이 서사적인 여기는 `자기의 사실'을 가리지 않고 오직 감상, 비애, 절망하고 고민하여 모색하는 흥분된 감정과 상기된 기분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것이 그들을 시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 급격히 몰락하는 소시민과 지식청년의 시대적 모색의 고민 등의 부정적 반면을 반영하여 한편 하자(何者)이고 미래와 현실의 이상을 환상하는 정열이 배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의 조선문학을 그 표면의 무질서와 혼도, 방향이 상실된 비참한 상태라든가 후기 자연주의의 예술지상주의, 형식주의적 퇴화만을 보고 예술자적 발전의 객관적 본질 운동을 파악치 못하는 것은 일개 무력한 피상론이다.
5. 신경향파 문학의 사적 가지
물론 이때의 상태는 사실 무질서, 혼돈 그것이고 통일된 방향이 상실된 참상을 정 하였음은 필자도 지적한 바이며 또 이대로 방치되고 그대로 진화 된다면 조선문학의 사멸 그것이리라.
그러나 모든 역사적 문화적 달성은 그대로 역사도정 가운데 유기되는 법은 없다. 반드시 자기의 쇠망 가운데는 일 대립자, 자기 부정적 요소를 포함하여 계기적으로 생성하는 정당한 사적 계승자가 위에 적극적인 모든 것이 재생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사상 사적 소장의 자기 발전의 변증법이며 역사도정 일반의 객관적 법칙성이다. 이것의 이해를 결 할 제 예술사의 각개의 계단은 편편히 분리되며 이러한 과도기를 그 본질적 견지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현상론적 견지에서 표현의 무질서한 나열 소묘에 시종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혼돈'을 일층 `혼란'(?)케 하는 격화 시키는 한개 문학적 조류가 자기의 존재를 강렬히 주장하며 출현하였다.
이 문학적 조류란 지금까지 보아온 여러가지 신문학상 유파 경향의 소장성쇠와는 한개 본질적 차이를 가지고 자기를 과거의 일체의 문학유파로부터 구별하는 당시 신경향파 문학이라고 불려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그것이다. 당시 여사한 무질서와 혼돈의 교류 가운데서 `신경향파 문학'의 대두와 함께 제기된 훤소와 파문은 능히 상상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러나 일층 격화된 혼돈이란 실상, 진정한 의미로 본다면 혼란이라느니보다 신세계의 영아가 탄생키 위한 구 세계의 고통 그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혼란하는 신경향파 문학이 자기를 확립하느 영웅적 과정에서 표현된 구문학의 유상무상의 저항으로서 특징되었다.
이러한 저항이란 문학적 현상의 세대교체 및 유파 대립에 있어 문학사가 항상 경험하고 또 번복하는 바이나 신경향파 문학의 형성과정 가운데서 당면한 저항이란 조선이 신문학사상 최초의 심각하고 또 본질적인 상극의 표현 그것이다. 위선 신경향은 현존한 문학 전부를 그적으로서 가졌었다. 춘원류의 낡은 이상주의도 상섭, 동인의 자연주의, 세기말적 데카당스 모두가 신시대의 문학적 표현자의 출발을 방해하려 하였다.
즉 이제까지 무질서, 혼돈, 무방향적 현상 가운테 있던 `신문학'은 그 수습된 통일적 방향으로 한개 적대자를 택한 것이다. 이것이 그 `저항"의 특징이다. 다음으로는 이들은 마치 문화 및 예술의 침해자를 대하는 것과 같이 예술 및 문학의 옹호하는 이름 아래 일치한 것이다.
즉 예술은 예술 그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순수히 신성한 그것이고 하등 실생활적인 무엇과 관계를 맺으며 그것에 봉사할 것이 아니라는 구호로써 문학은 현실생활의 반영 표현이어야 한다는 신경향파 문학에 도전한 것이다. 이곳에서 지금까지의 우리가 읽어온 문학적 발전의 논리로부터 한개 반성적 질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즉 민족적이라던가, 근대적이라던가, 연애 및 인권의 자유라든가의 현실적 목적을 추구하던 춘원적 문학은 어떻게 되었는가?
혹은 암담한 현실을 부정하고 그것을 폭로하며 소시민 지식적의 연애, 학문, 기타, 자유를 절규하며 묘장과 같은 현실을 증오하던 자유주의의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 또 고민하고 감상하고 발버둥치며 `오뇌를 건지고 시대적 불안을 위로'라도 할 `역의 시'를 열구하던 낭만파는 어디 갔는가?
그러나 벌써 신경향파 문학에 대한 예술지상주의적 통일전선에서 `이상'`폭로'`역'등의 형태로써 표현되는 일체의 현실적(진보적) 정신은 일편의 공문으로서 역사적 도정중에 방기되었다. 춘원,자연주의,낭만파 등이 가졌던 일체의 관념적 비관적인 요소는 이곳에 자기의 사적 결론을 맺은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해 시대의 문학적 현상을 일관한 발전도정 가운데서 성찰하여 온 데서 그 부정적 반면과 함께 그 역사적 변천의 연선을 따라온 적극적인 요소의 일체는 그 새로운 계승자 신경향파 문학위에 상속된 것이다.
춘원으로 부터 자연주의 문학에 자연주의로부터 낭만주의 문학에로 그 근소한 일맥을 보전해 내려온 현실의 역사적 유동에 한 성실성과 진보적 정신은 한개 비약적 계기를 통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춘원으로부터 낭만파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제경향이 전대의 단순한 대립표로서 일면적으로 이것을 계승하였다면 신경향파 문학은 그 모든 것의 전면적 종합적 계승표 이었었다.
이것은 신경향파 문학이 의존하는 바 사회적 계급의 역사적 지위의 전체성,종합적 통일성에 유래하는 것이나 문학적 발전에 있어 그것은 심히 명확한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물론 이곳에는 우리 많은 사가 및 논객, 학도들이 모순, 혼란, 무질서로 이해할 만틈 정치 사회사에 보는 것 같은 그런 소박한 직선을 그을 수는 없다. 문화 및 예술사의 발전에는 원칙적으로는 토대적인 것에 제약을 수 하면서 일응 그것과는 구별되는 관념형태 그것이 갖는 고유의 객관적 법칙성을 갖는 것이다.
신경향파 문학은 국초, 춘원에서 출발하여 자연주의에서 대체의 개화를 본 사실적 정신과 동일하게 국초, 춘원으로부터 발생하여 자연주의의 부정적 반항을 통과한 뒤 낭만파에 와서 고민하고 새로운 천공으로의 력의 비상을 열망하던 진보적 정신의 종합적 통리자로 계승된 것을 무한의 발전의 대해로 인도할 역사적 운명을 가지고 탄생된 자이다.
낡은 문예학의 개념을 빈다면 이것은 신문학이 가지고 있던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의 역사적 종합,통일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두뇌가 상상하는 것과 같이 신경향파 문학은 자연주의의 사실적 요소와 낭만파의 정신의 단순한 계승자 이거나 혹은 신경향파 문학이란 전혀 이 양자 가운데서 생탄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기의 모든 문학 현상이 그리하였던 것과 같이 조선의 경제적 발전의 토대위에서 여냉하는 사회계급적 분화와 그 투쟁이란 현실적 제 도정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위선 이러한 제 사정 가운데 최초로 매거 해야 할 기본적 특질은 조선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연적 소산인 근대 노동자 계급의 자각과 그 정치적 사상적 영향력의 증대 그것이다.
기미를 치르고 20년대의 소위 윌슨류의 민족사상을 대신하여 노도와 같이 우리 청년들의 두뇌를 점거한 `사회주의 사상'의 분류와 이미 노동자운동의 최초 계급의 형태이었던 `사상단체'의 족생은 이 기본적 사실의 사상적.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자각'의 수준이 얕은 상태는 이 운동의 성질및 형태를 제약하였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허나 이 역사적 사실의 예술상 반영인 신경향파 문학은 겨우 대정 12.3년 경에 근근히 형성된 것으로 전기의 토대적인 제 운동보다 상당히 후행적이었다. 이곳에는 상상 문하게 대하여는 선행적인 사회적 사정의 우위성과 또 그 시간적 상거의 양은 이 계급적 `자각'의 저도한 데 기인한 한개 개연적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은 일면 조선 프로문학의 전역사적 약점으로써 금일까지 문학이 현실에 뒤떨어진 장면이 있음도 역시 기억될 사실이다. 이것은 다 주관적 세력에도 의존하지만 그 생활시 부터 가졌던 기초적 사정의 `저도의 자각'이란 조선적인 특수성이었음도 아울러 명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경향 문학이 자기의 적에게 공연한 도전의 화살을 던지기 전 이미 문학 외의 일 논객에 의하여 낡은 세대의 문학이 비판의 조상에 올랐음은 심히 시사깊은 사실이다. [개벽] 1923년 7월호로부터 9월호 까지 2회 연재된 임정재의 <문사제군에게 여 하는 일문>은 신경향파의 선구자들이 겨우 클라르테 운동을 소개하고 (팔봉), 혹은 비참의 예술, 생활의 문학을 이야기 하며, 새로운 이상을 도입하려는 검색적이고 소극적인 한계에 머물렀을 때 최대의 명확,직절한 말로 (당시의 수준을 보아)
그는 예술이 대중의 것이어야 하며 인간사회의 진화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의미의 긴 원칙을 논술한 다음, ``그러나 우리 조선의 유산계급의 문사나 무산계급의 문사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발달과 귀족생활의 형식상 발달로 현대생활 요식을 조성하고 각 방면으로 성숙하고 고착하며 [무산]민중의 생활을 무시하는 자본가의 사익으로 지배당하며 중간계급의 자유주의적 사상과 정치적 압박으로 민족적 자유주의 사상과 혼란하여 생활의식을 무의식간에 형성하고
통일을 실 하는 동시에 중간계급의 자유주의적 사상에 동요, 지배되는 상태에 재 하여 필연적으로 타락적 세기말적 절망의 데카당적으로 되었다. ---중략 ---문화사 일파의 데카당적 경향과 문인회 일파의 저널리즘적 경향과 사사적으로 초월하려는 중간계급적 사상 경향은 조선 사회사정의 적라한 산물이다"라고
당시 [백조]를 중심으로 낭만주의적 작가.시인을 망라하고 있던 `문화사 그룹'과 후기 자연주의 작가들로 말미암아 구성되었던 `문인회' 그룹을 비판하면서도 모든 것으로 부터 초월하려는 `지상주의'적 조류를 정당히도 그때 사회적 혼란의 산물로써 평가하였다.
그런 다음 동 논자는 다시 하등 `사회성' 또 현실생활에 대한 `총의'적 책임도 없는 단순한 `낭만적 비애의 독백기'에 대하여 `참으로 시대의식과 계급의식에 자아를 확립시킬 것은 조선문사의 박한 문제'라고 무사상성과 형식주의적 전화의 노상에서 헤매이는 조선문학이 나아갈 한 개 길을 지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기의 인용에도 약간 암시 되었지만 다시 그 다음 구절에서 이 준비된 새로운 예술적 노선을 다음과 같이 관망하고 있다.
이 운동내 (무산운동)의 일부인 계급예술은 이러한 참담한 생활을 하는 무산문사가 부르조아 계급 및 예술에 대항하며 모순의 사회현상을 타파하며 신 인생의 광명을 욕 하려는 것이 그들의 운동이며 예술이다.
이곳에는 우리들이 감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실로 소바가고 기다의 논리적 불분명,불충분을 가졌음에 불구하고 전체운도의 일환으로써 예술운동 그것을 규정하였으며 운동의 전사상적 핵심으로 당파적 원칙을 설정한 것이다. 이 짧고 소박한 일문의 가치라든가
의의에 관하여 이 이상의 머무름을 피하고자 한다. 오직 당시 그들의 전운동에 속한 시대적인 제약 때문에 비록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정확한 표현을 가지고 구체인 제부분을 밝히지 못했음에 불구하고 이 일 소논문은 경향파 문학의 창시자들이
아직 완전 명화간 역사적 자각의 계단에 이르기 전, 예술적인 그것에 선행된 부분에 의하여 표시된 문화예술상의 의견으로써 심히 가치있는 것이다. 실로 이 견해란 우리 조선의 문학 예술에 관한 노동자 운동의 높은 관심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명기할 논문이다.
모든 부르주아적 예술가, 문학자들의 악의에 찬 선동과 `비방'에 불구하고 조선의 신흥계급과 그 운동은 다른 어느나라의 그것에 지지않게 높은 예술적 관심을 가진 가장 문화적인 것이었다.
사실 신경향파 문학은 그들이 의존해 있는 바의 사회적 토양인 현실적 운동이 매뉴팩푸처적인 분산된 사상운동의 초보계단으로부터 자기를 전 목적 통일의 고처로 발전시키고 그 궁극적 이해를 가장 정련된 방법으로 집약한느 바 정지척 행동의 통일적 핵심이 형성된 그때 비로소 그 최초의 계몽적인 제일보를 내어디딘 것이다.
이 가운데는 시간적으로 보아 약 3,4년의 선후를 갖는 것으로 근로자층이 경제적 욕구의 영역에서 자연성장적이고 분산적인 제일보를 내디디기 비롯한 1920년 전후로 부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들의 운동을 명확한 일개 사상체계를 가지고 통일을 기도하고 광범한 계몽사업을 비롯하던 잡지 [공제](조선노도공제회의 기관지로 1920년 4월 창간) [신생활](1922년 3월 창간)등의 발간으로 부터 약 2,3년의 간격을 갖는다. 물론 이 3,4년 혹은 2,3년이란 세월을 심히 짧은 것이고 또 시간적 장단의 표준이 될 신경향파의 문학적 출발년대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약간 고구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나 이 가운데 시간적 선후의 존재는 이선 부동의 것이므로 먼저 낭만주의 문학을 말하 ?와 같이 곧 이에도 필자는 연대적 선후를 인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2년 내지 3년의 시일이란 그 의미하는 바 사회적 내용에 있어 타시대의 기십년에 해당하는 풍부한 내용의 것이므로 이 시간적 차이의 평가란 2중으로 조선의 문화발전의 특질을 이해함에 지극히 필요한 것이다.
조선의 근로자 운동은 상술한 바와 여히 문학 및 예술상에 있어 자기의 자각된 행위의 출발을 보기에는 `약간의 ' 시간을 필요한 것이다. 이 `시간'은 사회적 모순이 원생적인 초보계단으로 부터 명확이 `적대'관계의 형태를 가지고 전국적 규모에까지 발전할 그동안 다시 말하면 자기의 정치적 사상적 영향을 상당히 광범위의 인민생활중에 확대시킬 만큼 ㅇㅇ적인 성숙을 이루었을 그? 비로소 자기층의 문학 예술의 대오를 정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신경향파 문학적 시발기로써 보편화된 연대인 1924년 대의 조선의 사회정황을 살피어 봄이 가장 유의의 할 것이다. 이해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내용의 특질로써 우리는 위선 근로자 운동이 분산된 계몽적 사상운동으로 부터
정치행동의 전국적 통일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과 한편 민족주의의 민족개량주의에의 급격한 전화와 그 통일적 전진에의 기운의 대두를 들 수가 있다.
이것은 곧 조선의 계급적 모순이 그 전형적인 대립에로 발전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기미'전후에 까지 식민지적 특수성에 의하여 은폐되었던 계급적 모순이 비로소 본래의 성질을 가지고 기본적 국면에 상극하게 된것이다.
즉 모든 사회적 모순은 일체의 은호물의 암영으로부터 자기의 계급적 본질을 드러내어 계급적이란 개념이 모든 과거적 개념에 대신한 가장 명확하고 최종적인 인간적 개념으로써 조선사람의 생활 가운데 확립된 것이다.
이해 4월에 `노총'이 노동조합운동과 농민운동의 통일적 기관으로 성립하고 청년운동의 통일적 조직으로 `청총'이 창립되었다. 그뒤 얼마안가 `민중운동자 대회'가 소집되면 또 그 `ㅇㅇ대회'가 소집되어
조선사람의 사회적 생활 위에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신사상을 가진 ㅇㅇ적 운동의 격량이 밀려왔다. 이 속에서 조선 근로층은 비로소 불충분하나마 자기의 운동을 한개 통일된 정치적 핵심 결성의 고처에 까지 끌고 갔으나 또 처음으로 그 자기를 국제의 결류의 일우에 붙잡아 매인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근로층의 사적 가장 높은 자로적 표현이며 현실적 제문제를 가장 철저한 해결의 길 위에서 종합한 것이다. 이때 (1924)까지 대부분의 사람의 정치적 사상적 대변자로 자타가 인정해 오던 신문 [동아일보] 1924년 신년호에는 과거 전민족을 대표한다는 부분의 심히 의의깊은 정치적 의견이 발표되었다.
[동아일보]는 이해 1월1일부터 수삼일 연재하던 장문소설 [민족적 경륜]이란 것 중의 하나인 `정치운동과 결사' 가운데서 그들은 ``우리는 조선내에서 허 하는 광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라"는 주목할 제안을 하였다.
이 단소한 언구는 일견 우스운 듯도 하나 그러나 곧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가운데는 과거 민족주의 운동의 한 개 간과치 못할 행동상의 전향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노자의 평화적 협조를 말해옴도 짧지 않으나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운동, 그것의 제한을 기도한 일은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공기 가운데는 명확한 민족주의 운동의 합법주의화와 철저한 욕구 대신에 개량주이적 정견이 `당면목표'라는 명목하에 대치된 것이다.
당시 이 의견에 대하여 민중은 여태까지 붙어오던 신망을 방기함은 물론 사면팔방에서 의혹의 시선은 집중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해 3월경 소위 `각파 유지연맹'이란 데 모인 국민협회 .소작인 상조회. 청림교. 대정친목회,
유민회, 동문회, 유도진흥회, 동민회, 조선경제회,상애회, 교풍회 등 잡다한 세력이 `관민일치' `대동단결' `노자협조' 등 3대표치 하에 성히 움직이고 있던 사실과 전자의 신경향 그것을 전연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던 때문이다.
이렇듯 불분명하던 과거의 사회적 제 관계가 특이한 역사적 긴장 가운데서 한개 전기를 넘는 해에 신경향파 문학은 명확히 자기의 깃발을 올리었다. 이 시기는 ? 전술한 자연주의 문학의 퇴화와 세기만적 혹은 데카당적인 낭만파주의 문학 등의 분화 발전과
신경향파 문학과의 세대교체기에 해당한다. 이 시간적 간격은 현실적 발전이 상층구조 위에 그 발전의 질도를 반영하는 전달의 소요시간이었으며 한편 새로운 사회적 세대가 자기의 문화 예수를 형성함에 있어 과거적인 그것과의 간에 잔재한 역사적 재산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하한 역사상의 신세대도 평무지로 부터 자기의 문화 예술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근소한 시간적 차이를 지리함을 무릅쓰고 장황히 말하는 연유가 이곳에 있다.
주지와 같이 신경향파는 1923년 경부터 팔봉의 논문 [금일의 문학과 명일의 문학]이나 불란서 `클라르테 운동]의 소개, 박영희의 논문 [조선을 지나는 뷔너스]등을 위시로 거의 잡지 [개벽]을 근거로 하여 예술과 생활의 불가분의 관련과 생활적 현실에의 예술의 종속을 강렬한 구조로 절규하면서 낡은 문학에 도전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신경향파 문학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경제적 사정의 추이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위에서도 약간 논술한 것솨 같은 자연주의 문학과 낭만주의 문학의 퇴화가 직접으로 이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차로 생활로 부터 유리하고 예술지상주의로
전화하는 퇴화된 자연주의나 관념적인 비관과 절망이 독백으로 시종하고 말려는 낭만파적 시가에 대하여 그들이 투쟁자의 입장에 선 것은 필연의 순리 이었다. 그들은 문학
예술에 대한 극히 초보적인 유물론적 계몽을 전개하고 한편 소설,시가에 대하여 새로운 사회적 기준을 가지고 성히 비평활동을 가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출발점을 장식한 것은 과거적 문화에 대한 철저한 역사적 비판자로서의 그들의 본질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사실 신경향파 문학의 가장 주요한 활동영역은 계몽적 혹은 비평적인 이론활동으로써 조선 문학사상 최초로 비평다운 비평이 쓰여진 것도 이 시기이며 잘되나 못되나 문학이론 이라는 것이 체계를 가진 사상으로 말해진 것도 이때이었다.
이것은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신경향파 문학 본래의 성질에 의존하는 것이나 한편 이 사실은 조선 근대문학의 특질, 특히 시민문학의 발전이 얼마나 얕고 빈약한가를 설명하는 주목할 현상의 하나이다.
다른 대부분의 나라의 시민적 문학은 각각 다 체계적인 문학이론과 비평을 봉건적 중고문학과의 투쟁과정에서 수립한 것이었음에 불구하고 조선의 시민문학은 여사한 정상한 발전의 노선을 걷기에는 너무나 특이한 과정 가운데서 고갈된 빈약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근대문학은 언어, 양식, 내용, 이론등 전영역에 있어 봉건적인 문화에 대한 철저한 비판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향파 문학이 던지 문학사적 파문은 일찍 경험한 바가 없던 심각한 것이었고 또 가장 통렬,철저한 것이었다.
조선문학은 비로소 한개 혁명적인 세대교체를 경험한 것이었다. 봉건적 소설류로부터 이인직에 이르는 계기나 또 이인직으로부터 춘원, 춘원으로부터 자연주의, 자연주의로부터 낭만주의에 이른 전 과정은 역사도정에 본래의 성질로 보면 한 개 문화력신적 선풍 가운데 성숙되는 격렬한 도정이었음에 불구하고 그럴듯한 현상을 발견키 우리는 곤란하다.
단지 봉건적 문학과 한문학의 전통으로 부터 이인직에 이르는 사이가 한 개 르네상스적 형태의 그것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인직의 모든 업적을 최대한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그 빈약, 불철저,중도반단성을 들여다 볼때 오오 ! 무엇이라고 말할 초라한 르네상스인가! 하고 탄식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조선의 시민과 그 문학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초라한 것이었으며 또 빈약, 불철저한 것이었다. 이 발전의 전도정은 쟁목할 비약 대신에 지지한 점진성의 완만한 곡선이 그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경향파 문학이 그 전의 시대에 버금하여 교체하는 형태란 실로 한개 르네상스이었다. 신경향파는 사실상 문화사상의 순서로 당연히 조선의 시민적 문학이 해결해야 할 것을 미해결채로 남긴 과제까지도 계승받아 실로 모든 영역의 개척자로서 운명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이것은 저 가련한 조선의 시민문학이 채 자기의 과제도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과 또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본래의 역사적 본질에 의존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로 본다면
조선의 프로문학은 과거의 문학으로 부터 적극적인 문학적 재보에 속하는 유산보다도 오히려 부채를 더 많이 계승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르조아 문학의 비평을 한 것이 역사적 순서로 보아 중세적인 것과의 항쟁에서 수립될 것임에 불구하고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의 대립에서 급급히 작조 되었다는 고소할 사실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과거한 문학의 모든 적극적인 유산 가운데서 형성된 것은 확호한 것이다.
그들의 유물론적 문학정신, 그것은 이인직등의 초기 시민문학과 주의 문학이 단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실증사상의 연장.계승이라는 것은 단순히 긍정할 사실이 뿐만 아니라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이 갖는 한개 역사적 명예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이 갖는 한개 역사적 명예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치열한 비평정신. 그것도 이인직의 봉건적 문학에 대한, 춘원의 이인직에 대한 또자연주의의 춘원에 대한 낭만주의의 그전의 모든 것에 대한 칼날같은 비판적 사상의 장구한 발전 가운데서 형성되어온 것이며 그 한개 비약적 종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주의 문학이
가졌던 적극적인 것으로의 자연과학적인 실증사상 = 실험실적 태도와 낭만주의가 가진 관념화된 전체성에로 지향된 비판정신의 한 개 역사적 종합인 동시에 그것은 이 단순한 종합으로 부터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일층 고도계급으로의 비약적인 고양이었다.
그러므로 신경향파의 이론적 비평적 활동의 기초에는 이 두 조류에서는 전연 발견할 수 없는 높은 사적 유물론의 세계관이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신경향파 문학이 그들의 직접의 선행자의 문학세대와의 관계를 표시하는 최대의 사실로써 우리는 신경향파 문학 가운데 두 개의 상이한 경향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것은 신경향파 문학의 창작적 실천상에 구분할 수 있는박영희적 경향과 최서해적 경향 그것이다. 이때까지의 대부분의 논자들은 프로문학의 자연성장적 계단이라든가, 혹은 빈궁문학, 기아와 개인적 복수의 문학이라든가 관념의 문학이라든가 하는 잡다한 규정을 가지고 이 차이를 무시하여 왔다.
물론 이러한 유상무상의 형용사가 신경향파 문학의 반면 내지 일부분을 설명치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문학현상의 구체적 인식의 견지가 결여되 있거나 전체적 통일적 파악이 망각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시대를 전체적으로 규정한다는 `자연 발생적 계단'(신남철)이나 `관념의 문학론'(팔봉) 등은 전체를 본다고 너무 성급히 규정하는 데만 망살되어 중요한 구체적 제 사실을 인공적 방법으로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반분적 관찰이나 추상적 규정에는 신경향파 문학을 그 사상적 진보에서만 평가하려는 저주할만한 이원론이 사상적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자기의 논리에 적응하도록 문학적 현상의 구체적 특이성,차별등을 왜곡 개조하여 한 개 추상적 개념과 규정을 만드는 데만 급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상의 발전
그것과 동양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전개와 예술적 달성의 구체적인 관찰과 분석에 노력을 지불치 않는 것은 그리 이해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기 박영희의 <지옥순례><사냥개> 등과 최서해의 <홍염><기아와 살륙>등이 갖는 명백한 예술상 차이,
그리고 신경향파의 최초의 비평적 창작적 활동가들이 주로 팔봉, 조명의, 박영희였으며, 그들의 경향이 서해의 그것에 비하여 약간 선행하였다는 제 사실은 일률화 되어 무차별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위선 전술한 바와 같이 신경향파의 작가 비평가로서의 박영희,김기진은 가장 먼저이고 또 지극히 큰 존재였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부 과거의 시인이었고 또 [백조]중심의 낭만적 문학으로 부터의 전향자이었다는 것도 명백한 것이다.
사실 그들은 낭만주의로부터 신경향파에로 이상화 그외 몇시인들을 이끌고 투신하여 그 창설자의 명예를 차지한 것이다.
이곳에는 과거 조선 낭만주의 가운데 있던 전진적 열정과 진보적 정신의 명확한 발전을 볼 수가 있는 것인 동시에, 신경향파 문학중 박영의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한개 창작경향을 낳았다.
이 창작 경향이란 그들의 과거가 시인이었음에 불구하고 이 시대에와서는 전혀 소설양식상에 표현된 그것이었음을 이곳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전혀 소설양식상에 표현된 그것이었음을 이곳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낭만파적 시인으로부터 비평가로 그리고 소설가로 전이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계기는 그들의 세계관상의 비약이 개재한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실로 명확한 한 개 필연적인 현실적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들이 시인으로부터 소설가, 비평가가 된 것을 개인적 우연사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전이는 한 개 세계관으로는 신경향파 문학의 역사적 본질에 의하여 해석된 현상이다. 신경향파뿐만이 아니라 전 프로문학의 창작적 역사는 거의 소설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들의 주요한 문학적 표현의 양식으로 의거한 것은 시가보다 소설이었다.
그러나 신경향파나 프로문학이 주로 소설 형식에 의거하였다는 것은 자연주의 문학이 소설을 취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프로문학은 결코 시나 가악을 배제하는 ㅇㅇ의 예술은 아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같이 감정하고 체읍하는 시를 원하는 문학도 아니다.
이곳에는 자연주의 문학이 접근치 못한 현실생활의 전면의 역사를 예술적으로 개괄할 장대한 소설과 그 영웅적 사업과 쓰라린 희생을 기념하고 부절히 이상과 전진에의 열의를 노래하는 서사적 또 정서적인 시가를 누구보다도 많이 열구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연주의 문학의 지상주의적 퇴화와 낭만적 시가의 관념적 승화의 혼탁한 교류 가운데서 신경향파 문학이 소설을 통하여 그의 사실주의를 건설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본면 신경향파 문학의 소설은 시와 소설의 혼효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정은 신경향파 문학중에 있는 양구 경향에서 그 예술적 표현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로 보아가기를 계속한다면 박영희적 경향은 보다 시적인 소설이었으며 서해적 경향은 보다 소설적인 소설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은 일견 우스운것 같으면서도 그대로 ?시하기 어려운 점이 다분히 있다.
소위 박영희적 경향이라고 볼 소설 [사냥개] 라든가 [지옥순례]를 보면 과거의 낭만주의 문학의 고철을 소박하게 밖에 해설치 못한 역력한 유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곳에는 낭만주의의 `악한 전통'의 하나인 구체적 현실에 안일한 관념적 이상화의 방법이 신경향파의 세계관적 또 예술적 미숙과 상반하여 문학 가운데 나타난 세계관의 생경한 노출이란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낭만주의로부터 받은
신경향파 문학의 한 개 약점이면서도 반면에는 현실에 대한 전면적 파악의 지향이라든가 이상적 의욕에 대한 예술작품이 통일적 구성이라든가 하는 점은 낭만주의 문학이 자연주의의 무사상성의 비판자로 가졌던 바 그 장점의 발전임을 또한 부정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박영의적 경향이란 저도의 실진성과 주제의 적극성= 사회성과 높은 세계관에 의하여 특징화 되어 있는 보다 낭만적인 예술이었다. 그러므로 최서해적 경향이라고 부를 [홍염]이라든가 [기아와 살륙]이라든가는 보다 더 많이 상섭. 동인등의 자연주의 문학의 사실적 정신과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이인직 이후의 조선적 리얼리즘의 전발전이라고 볼 수있다. 사실 자연주의 문학에서 그 최고의 절정을 이룬 조선의 사실주의는 한설야. 이기영의 고도의 종합적 사실주의의 계단에 일는 중간적인 도정적 존재였다. 사실 신경향파 문학의 이러한 경향을 가진 초기의 이기영. 김영팔.최승일 등등의 작가 중에서 최서해의 존재는 자못 거대한 것이었다. 서해를 우리는 신경향파가 가진 최대의 작가, 또 그것이 달성한 예술적 수준의 최고저이라고 보아도 그리 과장이 아닐 것이다.
서해의 명예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경향은 자연주의 문학으로 부터 확고한 예술적 전진으로 개인적 관찰의 시각으로부터 사회적인 과도로 확대된 사실주의, 또 서해의 소설 [갈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자기박탈과 추구의 강한 객관적 정신은 문학의 저류로서의 세계관과 더불어 문학자신 가운데 표시돈 예술적 진화의 정통적인 현상이었다.
물론 이 경향을 `개인적 복수의 문학'이라는 규정을 내릴 만큼 생활적,혹은 현실상의 제 모순을 개인적 돌발행위로 결과케 한 작품이 불소한 것이나 그러나 신경향파 문학이 낡은 문학으로부터 프로문학에 이르는 한 개 과도적 문학이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 한점을 가지고 예술적으로는 퇴화했으나 사상적인 일점으로 그것은 우월하였다는
예술적 규정을 끌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결함은 신경향파 문학이 과거 자연주의 문학으로 부터 받은 악한 유산의 하나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신경향파 문학은 자연주의 문학의 낡은 제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 순수한 자기를 형성하기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유소하였었다.
전자는 낭만적인 것을 정확한 과학적 사실성 위에 통일하기엔 아직도 완전한 예술적 성숙의 지점에 이르지 못했었고 후자는 광범한 현실생활의 잡다한 제 모순을 완미한 사회적 노선위에서 그의 이상적인 수준의 중에서 해결하기에는 이 역시 너무나 지나치게 젊었었다.
그러나 조선문학은 한 번도 자기의 `낭만적인 것'을 신경향파의 그것과 같이 정당한 역사적 필연의 길에서 체현한 일이 없었으며 또한 자연주의의 여하한 작가도 신경향파 = 서해에 있어서와 같이 인간생활의 광대한 영역으로 자기이 사실적 세계를 전개한 일이 없고
또 그 객관성에 있어서도 서해에 있어서와 같이 자기추구 모든 가면의 박탈에 있어 철저치 못했으며 개인으로 사회적 전체성의 견지에서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이곳에 신경 향파 문학이 모든 것에 관절하는 조선 문학의 최량의 종합. 통일자된 특색이 이쓴 것이며 또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이 예술적 발전을 실현케 한 역연한 성과가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신경향파의 사상적 본질만을 평가하고 그 예술적 진화 달성을 방기하는 모든 이론은 무엇보다도 최서해의 문학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내릴 줄 모르는 편안자들이다.
이것은 프로문학의 고난에 찬 십년을 통하여 한설야.김남천.송영.윤기정.조명희 등의 제작가를 지나 [고향] 의 작자 이기영에 와서 프로문학의 본래적 달성의 최고의 수준을 보인 것이다.
일반으로 보아 신경향파의 문학은 조선의 신흥계급이 계급 그 자신으로부터 그 자신을 위한 계급으로 성장할 자각적인 과도기의 예술적 반영이었다. 그러므로 신경향파 문학은 그 예술성에서가 아니라 그 사상내용에서만 고거이 문학에 대하여 우월하였다는
이원적인 모든 평가는 완전히 사실과 부합치 않는 한개 추상적 허상이며 이러한 평가는 곧 김기진 씨에 있어서와 같이 프로문학의 예술적 발전을 비역사적인 애매한 상대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쉬운 것이다.
즉 프로문학은 과거의 전 문학의 발전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일면적으로 프로문학 자신의 `미미하나마의 발전'을 인정하여 겨우 박영희적 이원론에 대립(?)하고 만다. 신남철. 이종수 씨등의 신경향파의 이원론적 평가는 직접을 `프로문학'의 예술역사적 진화를 붕정하는 견지로써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박영희적 멘쉐비즘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현저한 자를 우리는 신남철 씨의 상기 논문의 신경향파 문학 이후 방향전확기,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이르는 프로문학의 창작적 실천을 기술한 심히 불분명한 논술에서 일관된 경향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씨등은 결코 박영희적 이론의 진정한 비판자는 아니었다.
문학의 예술성과 사상성을 이분하는 이원론, 신경향파 문학에서 과거한 모든 문학의 예술적 진화를 관찰치 못하고 그 세계관적 일면만을 평가하려는 모든 종류의 기도는 필연적으로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 ''라 하는 유명한 박영희적 멘세비즘과 일치하고 또 그의 사상적 발상지가 아니면 아니된다.
왜 그러냐 하면 부르조아적 문학이 프로문학에 비하여 그 내용사상에는 뒤떨어지더라도 문학적 기술적으로는 아직도 우월하다는 이론은 결국 예술과 정지체 있어서 전혀 이원적인 분리의 사상으로 일관되는 것으로 프로문학 십년의 역사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와 함께 상반하여 발전하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며 드디어는 [고향] 에 까지 이른 도정에서 사상적인 발전만을 간취하고 그와 함계 진화해올 , 그리고 그것 없이는 불가능한 예술적인 발전을 전연 무시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박영희적 이론의 비판자로 자처하는 김기진 씨나 혹은 그의 새로운 대변자인 신남철, 이종수 양씨나 모두가 박씨의 이론과는 종이 한 장 상이로 결국 한가지 이원론 사관의 모태에서 자라난 쌍아에 불과한 것이다.
더구나 신남철 씨에 있어서는 전게 [신동아] 지의 씨의 논문을 가지고 퍽이나 문헌학적인 연구로 자처하고 그곳에서 표시된 씨의 철학적 교양을 조선 지고의 것으로 자신하고 있는 모양이나 우리들이 보는 바는 한 개의 속학서생의 이원적인 사관에 의하여
재단된 비참한 죽은 역사의 형해 뿐이어서 하등의 `높은 교양'도 ` 엄정한 과학적 태도'도 또한 `풍부한 문헌'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러한 이원적인 프리체적 상대주의로 부터 끝까지 신경향파 문하과 그의 계승자인 신흥ㄴ문학 십녕의 역사를 지키려는 자이며, 동시에 이러한 평가 밑에서 현재의 문학을 발전시켜 나가려는 것을 다시금 명언하는 자이다. (을해 10월 마산 병석에서 ) 조선 중앙일보 1935.10.9 ~11.13
저자: 임화 (1908~1953) 시인,평론가,문학사가.카프 서기장역임 단편서사시로 불린 <우리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는 카프문학의 대표적인 성과로 불림, 시집 [현해탄] [회상시집] [찬가] [너 어디 있느냐] 평론집 [문학의 논리] 문학사론에 [개설 신문학사]등. 1947년 월북한 그는 전후 남로당 재판 피고 중 한사람으로 이승엽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음
# 청년 임화의 대표적인 저작으로서의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은 1935년 카프가 해산되고 대부분의 맹원들이 감옥에 수감되고 있던중. 신남철등의 속류문예학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생경한 명사, 이중부정,지루한 만연체등 일본식 문어체가 눈에 거슬리나 논점만큼은 정연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미이후의 제반 사회운동과 보조를 맞추어 전시대의 모든 문학사조의 발전적 지양이 신경향파와 이후의 카프문학이라는 관점이며 상당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