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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보내드리는 편지가 내 운명을 조소하는 듯한 슬픈 소식을 알려야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해보질 못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지난달 2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나는 골수에 조차 기력이 쇠진해졌습니다. 내 가슴은 산산이 부서진 채 고통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나는 어디론가 잠적해서 모든 것을 잊고 완전히 변신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겠습니다. 이 아픔을 더 이상 써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전보다 더 열심히 고귀한 선교사역에 정진해야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형편으로서는 도저히 일어날 기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비애로 인하여 쇠진되어 버렸습니다.】
이 편지는 한국 선교를 위해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s)가 최초의 선교지였던 중국의 상해에서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 고드프리(Caroline Godfrey)를 잃고 절망과 고통에 잠겨 선교 본부인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ry)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이다.
발신 일자가 4월 5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망일자는 3월 24일이요, 그들이 상해에 도착한 날이 1863년 12월 초이고 보면 불과 석달 열흘, 꼭 100일 만에 몰아닥친 불행이었다.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갓 결혼한 아리따운 신부와 함께 선교의 푸른 꿈을 안고 신혼여행의 부푼 가슴으로 낯선 이국땅을 찾아 나섰던 젊은 부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영국 땅 웨일스(Wales)의 아름다운 고향을 등지고, 박학다식하고 기량이 출중하여 밝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던 젊은이들, 그러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역만리 중국땅까지 찾아 나선 하나님의 복음의 사자들이었다. 이런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마땅한 이들이요, 하나님께선 그들의 길을 선하게 인도해주셔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무슨 칭천벽력이란 말인가. 축복은 고사하고 이 무슨 저주란 말인가. 언어와 풍토와 문화가 다른 낯선 이방땅에 적응은 커녕, 채 짐보따리를 풀어보기도 전에 밀어닥친 이 횡사의 슬픈 소식, 선교사역의 첫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아내를 잃고 망연자실 비탄에 빠져 있는 젊디 젊은 토마스 목사의 마음을 그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런 대목에서 그를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 잠기게 된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불러낸 당신의 신실한 종들에게까지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2,500여 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한 유대인이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발견케 된다. 그의 이름은 하박국(Habakuk), 직업은 선지자, 그것 밖에는 그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이 더 이상 없다. 우리는 그가 어쩌면 제사장이었으며 성전예배에 찬양을 인도하는 레위 족속의 악사요, 구약성서 기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힘직한 시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이름으로 된 ‘하박국’ 소선지서 한 권을 남겨놓고 있다. 이 책은 세 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예언의 글이지만 깊고도 오묘한 생각들과 고뇌와 번민들이 간결 명료한 언어로 되어 있다. (고무송 목사, 전 ‘빛과 소금’ 편집장)
하박국은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다. 내적으로는 부패하였고 외적으로는 신흥하는 바빌론의 세력에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하박국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이중의 악이 횡행하는 가운데 주님은 활동하시지 않고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무관심을 불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나아가서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한다고 했다. 결국 이는 신자는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세상의 어떤 위기와 재난에 직면해서라도 자신의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온전히 앙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역설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바국은 신앙 세계의 근본 질문인 “왜 악인이 번성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참아 보실 수 있는가?”와 “어떻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 자신들보다 의로운 자들을 집어삼키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가?”와 “그들은 계속해서 번성하고 그들의 그물을 채우며, 계속해서 사치롭게 살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보려고 파숫군처럼 인내하며 기다린다.(하박국 2:1).
성경학자들은 하박국의 불평을 의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는 욥(Job)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욥처럼 하박국도 아무리 세상 현상이 반대로 된 것처럼 보이고 정황이 어려워 보여도 계속해서 주님의 약속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믿음으로 사는 법외에는 달리 다르게 사는 옳은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를 조롱하지만 최종적으로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믿고 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로마서 1:17)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록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1. 개관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선교사이다. 한국이름은 최난헌(崔蘭軒), 영국 웨일즈(Wales) 출신으로 조선 선교 차 내한하였으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에 엮여서 순교하고 말았다.
※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號), 본래 영국의 군함이었으나 미국에서 상선으로 사용되어 아시아 각 나라와 통상 무역을 중계하였다. 대포 2문이 설치되어 있는 증기선으로 덴마크, 미국, 청나라, 말레이시아인 등, 총 23명의 선원 전원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1866년 대동강에서 벌어진 이 배의 격침 사건이 원인이 되어 1871년 미국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때 조선의 수비대가 성공적으로 막아 낸 이후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 정책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기독교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대동강변에서 순교하기 전 토마스 선교사가 나누어 준 성경을 읽고 후일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2. 생애
영국 웨일스(Wales) 라야더에서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했고 언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최고의 장학금을 받으며 신학과정을 마치고 1863년 24세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중국에 가서 잠시 선교 사역을 하다 돌아온 록하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부인 캐롤라인 고드프리와 함께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倫敦傳道會)와 웨일즈의 하노버 개혁교회(HANOVER United Reformed Church)의 파송을 받고 1863년 5월 결혼을 한 후, 8월 풀메이스호를 타고 중국 청나라로 떠났다. 4개월 보름의 항해 후 그해 12월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약 3개월의 신혼 기간이 지난 후 봄이 다가왔을 때 부인 캐롤라인은 동료 선교사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고 유산을 하고 말았는데 심한 하혈과 감염으로 곧 사망하고 말았다.
캐롤라인은 죽기 직전 잠시 의식이 회복되어 “주님은 나에게 고귀한 분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아내를 상해 외국인 묘지에 묻었다. 당시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제 마음을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어찌하였든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1864년 4월 5일 당신의 신실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그러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영국에서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캐롤라인의 아버지마저 충격을 받고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토마스 선교사에겐 태중의 아기와 아내와 장인을 잃는 삼중의 슬픔을 당한 것이다.
슬픔에 빠져 있던 중에 런던선교회 중국 지부장인 뮤어헤드의 사립학교 앵글로 차이니즈라는 학교의 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뒤이어 선교회 지도부와의 뜻이 맞지 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둥성 지푸로 가서 청나라 왕립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취직했다.
3. 조선 선교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방문은 1865년, 1866년, 모두 두 차례이다.
세관에서 일을 하던 중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산둥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영향 때문이었다. 또한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조선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청나라보다는 조선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 1865년, 조선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관에 사표를 낸 후 윌리엄슨이 제공한 여러 권의 한문 성경을 가지고 배에 승선했다.
1865년 9월,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에 토마스는 황해도 연안인 백령도의 두무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며 선교도 하고 천주교 신자들도 만나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약 두 달 반 후에 타고 가던 배가 심한 폭풍에 휩쓸려 만주 해안까지 표류하게 되었고 부득이 북경으로 철수함으로 1차 조선 방문은 끝나고 말았다. 북경에서 런던선교회 산하의 학교에서 학장 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의 관심은 온통 조선 선교에 있었다고 한다.
4. 순교
그는 북경 거주 시에 조선 선교를 위한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1866년 마침내 기회를 얻은 것이 당시(고종 3년) 병인박해로 인하여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1871, 카톨릭 최대의 박해 사건, 신자 8,000명이 처형되었고 이로 인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항의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주둔 중인 프랑스 함대를 보내기로 하였는데 마침 조선어를 아는 토마스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해 버리자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대신에 중국에서 출발하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으로 탑승하여 1866년 8월 9일, 조선으로 향했고 배는 8월 14일에 충남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약 500권의 한문 성경을 준비하였고 조선인을 만나는 대로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다.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관리들과 접촉하여 통상을 요구했으나, 그 당시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통상은 국법으로 금기사항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불법항해이니 신속히 물러갈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배는 이에 굴하지 않고 평안도로 올라 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경내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은 그해 봄(1866년)에 벌어진 병인박해로 인해 외국의 보복이 예견되는 가운데 관원들은 긴장과 경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자 조선의 관리들은 조심스럽게 이들과 접촉했다. 제너럴셔먼호 측은 수로를 탐사하고 통상을 요구하며, 그들이 가져온 비단, 자명종 등을 쌀, 사금, 홍삼, 호피 등과 교역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서양과의 교역은 국법에 금한 내용이라 불가하나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할 수는 있다하며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려 하였다. 아울러 더 이상의 항해는 불법이니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
8월 21일, 조선 측의 강경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너럴셔먼호는 평양의 만경대까지 올라왔고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군관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배에 감금하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배에서는 소총과 대포를 관민에게 마구 쏘아대어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9월 5일, 대동강의 높은 수위가 낮아지면서 제너럴셔먼호 선체는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배의 승무원들은 대포를 발사하는 등 폭력을 자행하여 평양 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인명피해가 일어났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화공전을 펼쳐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배에 탑승한 승무원 23명 중 상당수가 불에 타 죽었고 일부는 물에 뛰어들어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관군에 의해 모두 죽게 되었다. 당시 통역관이었던 토마스 선교사도 불이 난 배 안에서 밖으로 성경을 뿌렸고 한 권을 품에 넣고 백기를 들고 밖으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대동강 쑥섬 모래밭에서 관군에게 붙잡혀 결국 칼에 맞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 27세였다.
그는 자신을 죽인 군관 박춘권에게 한 권을 건네면서 “이 성경을 받고 나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순교 당시 그 장면을 목격한 관민들 중에는 11살이었던 소년 최치량이 있었고 그도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챙기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군관 박춘권은 후일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 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박춘권이 얼떨결에 받은 그 책이 토마스 선교사가 마지막까지 지닌 바로 그 성경이었다. 이날 토마스 선교사를 죽이고 성경을 받은 박춘권은 성경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어 보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조카 이영태에게 주었다. 그 뒤 약 30년의 세월이 흘러 60대의 노인이 되었을 때, 박춘권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읽고 감명을 받아 당시 평양 널다리골 교회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마펫선교사를 찾아 왔다.
※ 새뮤얼 오스틴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미국 장로교 선교사, 교육자.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 1890년 조선에 와서 46년간 선교사역, 현 총신대, 장신대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설립자이다.
5. 장대현교회의 설립 및 부흥
박춘권은 군관으로 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늘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리고 널다리골 교회에서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죽인 서양인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서 교회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울며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토마스 선교사 사후 33년인 1899년이었다.
그는 널다리골 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장대현교회의 부흥에 기여하였고 몇 해 뒤, 평안남도 안주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어 남은 생애를 기독교 사업에 바쳤다. 그리고 그의 조카 이영태도 널다리골 박영식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벽에 도배된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 레이놀즈의 조교가 되어 한글 성경의 2/3를 번역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한국명 이눌서(李訥瑞)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 성서 번역가, 교육자, 신학자. 1894년 조선에 들어온 이후, 호남지역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0년에 출판된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의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편 최치량은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이 무슨 책인지 몰랐고 뭔가 자신이 갖고 있기에는 꺼림직 하여 당시 평양 영문 주사였던 이웃집 박영식에게 넘겨주었다. 그 책을 건네 받은 박영식 또한 그 의미를 알지 못하여 종이가 부족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기 집의 벽지로 도배해 버렸다.
그 후 최치량은 장성하여 이웃 박영식의 집을 사서 주막 겸 여관을 열었는데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27년 후인 1893년 마펫 선교사와 그의 조사(助師)인 한석진이 널다리(板洞)에 있는 이 여관에 머물다 성경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 한석진(韓錫晋, 1868~1939) 조사(助師), 목사, 한국인 최초의 7인의 목사중 한 사람
이들은 최치량과 성경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복음을 받아들인 최치량은 1894년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웃들도 합류했는데 박영식도 신자가 되었다. 당시 토머스 선교사의 죽음을 보고 있던 20세의 여인인 ‘이신행’은 성경 한 권을 받아 읽었는데 그 후 마펫선교사의 전도로 평양 최초의 여성 신도가 되었다. 그녀로 인해 한국 최초의 기독교 여전도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고 그의 아들 ‘이덕환’은 장대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의 순교를 기념해 일제 강점기인 1927년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평양 대동강 쑥 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1933년 9월 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알파벳인 ‘T’자 모형으로 기념예배당을 건립했다.
(좌)토마스 선교사 순교 기념교회, (우)장대현교회 예배 모습 및 예전의 모습으로 새로 복원된 장대현교회
6. 희생의 열매로 새로운 부흥을 사모하며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어느덧 16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한국은 미국에 이어 전 세계 선교사 파송 2위국으로 성장했다. 구한말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복음주의 교회와 국가들로부터 진 신앙의 큰 빚들을 조금씩 갚아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서양의 선교 1세대 국가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에 희생하고 헌신했을 때 경제적 풍요와 부요를 주셔서 그들을 잘 살게 해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것이 오히려 그들의 시험대가 되어 후세대들은 과거 순수한 신앙의 열정과 사명을 망각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 염려스러운 것은 이제 한국교회마저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영적 타락과 물질적 풍요을 내세우는 기복적 신앙은 성도를 영적 소경으로 만들어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이 언제 응할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영원히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을지 알 수가 없다. 온 민족이 더불어 손잡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남북은 철저히 분단되어 있어 소망하는 선교 한국, 그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로 시작된 이래 어둠의 조선 땅에 생명의 빛이 비치고 무지에서 소생되는 영혼이 불길처럼 일어나 한때, 한반도 전체를 뜨겁게 데우고도 남을 영적 열기로 충분히 뜨거웠던 북한의 평양, 그래서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그 도시와 북한 전역의 모든 교회가 악랄한 공산주의 체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세계 기독교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영적 파멸’을 당하고 ‘신앙의 무덤’이 되어 버린 지 어언 70년도 넘는 긴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2,500년 전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과, 160여 년 전 사랑하는 아내 고드프리를 잃고 절망속에 헤매이던 토마스 선교사의 슬픔과, 지금 분단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지하로 파묻혀 버린 북한 교회의 슬픔을 우리는 애통해 하면서도 우리는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온 민족이 멸절당하리 만큼 참담하고도 혹독한 바벨론의 70년 유배 생활을 하게 하셨으나 끝내는 메시야를 보내시는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이 소망을 굳게 잡고 기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