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경전 > 사서 > 논어
『논어』는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공자(孔子)의 어록이 담겨 있는 유교의 경서이다. 『논어』의 내용은 첫째, 공자의 말, 둘째,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셋째, 공자와 당시 사람과의 대화, 넷째, 제자들의 말, 다섯째, 제자들끼리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의 대부분은 공자의 언행이 차지하고 있으며, 제자들끼리의 대화나 제자들의 말도 대개는 공자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서 “논어란 공자가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되 공자에게서 들은 것에 관한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제각기 기록해 놓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에 문인들이 서로 모아 논찬(論纂)하였으므로 그것을 논어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논어』란 공자와 관계가 있는 말을 나중에 그 문인들이 모아 논찬하여 이룩한 책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 ‘논어’의 제명(題名)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은 『논어의소(論語義疏)』의 서문에서 ‘논’ 자의 풀이에는 첫째, 음을 취하여 ‘윤(倫)’이라고 하는 것, 둘째, 글자만을 취하여 ‘논(論)’으로 보는 것, 셋째, 논과 윤이 모두 같은 뜻이라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의 경우는 다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먼저 ‘차(次)’의 뜻으로, 이 책이 사건과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리(理)’의 뜻으로 만 가지 이치가 다 담겨 있다는 것이요, 셋째는 ‘윤(綸)’으로 고금(古今)을 경륜(經綸)했다는 것이요, 넷째는 ‘윤(輪)’으로 온갖 뜻이 다 갖추어져 마치 수레바퀴처럼 원전(圓轉)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논’이라 풀이하는 것은 문인들이 자세히 토론하여 기록했으므로 ‘논’이라 했다는 주장이며, 논과 윤이 같다는 것은 지방의 말이 다른 데서 온 것일 따름으로 ‘일을 윤(倫:질서 있게 한다)한다’와 ‘일을 논의한다『論』’는 것을 각각 논과 윤으로도 말한다는 것이다. ‘어(語)’ 자에 대해서는 “곧바로 말하는 것을 언(言)이라 하고 논란하는 것을 어(語)라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이 이미 논란에 대해 대답하여 설명하는 것이므로 ‘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이 한대(漢代)에서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이르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며, 당대(唐代) 육덕명(陸德明)의 『논어음의(論語音義)』, 송대(宋代)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 등이 이러한 해설을 따랐다.
오늘날 논어라는 자의(字意)에 대해서는 대체로 『한서』『예문지』의 경우처럼 공자 사후(死後) 그 언행을 제자들이 논의하여 편찬한 것이라는 의견과, 공문(孔門)의 스승과 제자가 글뜻을 토론한 것이라고 하는 의견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원초(元初)의 하이손(何異孫)은 『논어문대(論語問對)』에서 “이는 공문(孔門)의 스승과 제자가 토론한 언어이다. 제자가 스승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있고, 스승이 제자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 있고, 제자들 자신이 서로 문답한 것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대부(大夫)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 있는데, 모두 글 뜻을 토론하는 방법이었으며, 그래서 이것을 ‘논어’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후자의 견해를 밝혔다. 청대(淸代)의 원매(袁枚)는 『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논어해(論語解)』에서 하이손의 의견을 따랐으며, 조익(趙翼)은 『해여총고(
餘叢考)』에서 『한서』『예문지』의 견해를 따랐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첫째, 자하(子夏)를 비롯한 70제자라는 설, 둘째, 자하·중궁(仲弓)·자유(子游) 등의 찬정(撰定)이라는 설, 셋째, 증자(曾子)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의 문인이라는 설, 넷째, 증자와 유자(有子)의 문인이라는 설, 다섯째, 민자건(閔子騫)의 문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한대(漢代)의 유향(劉向)은 그의 『별론(別錄)』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한서』『예문지』와 후한(後漢)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 양(梁)나라 유협(劉
)의 『문심조룡(文心雕龍)』 등이 모두 그의 견해를 따랐다. 황간은 『논어의소』에서 공자 사후 70제자가 함께 찬록(撰錄)한 것이라고 하였다. 자하·중궁·자유 등의 찬정이라는 설은 정현(鄭玄)의 『논어서(論語序)』에서이다. 진대(晋代)의 부휴(傅休)는 ‘중궁(仲弓)의 무리가 공자의 말을 추론(追論)한 것’이라고 하였으며(『傅子』), 당대(唐代) 육덕명(陸德明), 송대 육구연(陸九淵)등이 정현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세 번째 설로서 악정자춘과 자사의 무리라는 설은 당대 유종원(柳宗元)이 제시하였다. 그는 『논어변(論語辨)』에서 공자와 증자의 나이 차이와 『논어』에서 증���와 유자만이 존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같이 주장하였다. 한편 주희(朱熹)는 『논어서설(論語序說)』에서 정자(程子)의 말이라 하면서 “논어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두 사람만이 논어에서 공자와 함께 자(子)를 붙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민자건의 문인이 편찬자라는 설은 남송(南宋)의 홍매(洪邁)이다. 그는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공자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모두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오직 민손(閔損)만은 자건이라는 자(字)로 부르고 있으므로, 『논어』는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책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 밖에 청말(淸末)의 장학성(章學誠)은 『문사통의(文史通義)』『시교상(詩敎上)』에서 『논어』는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이설이 있다. 어쨌거나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쓴 글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 기록한 것임은 분명하다. 한편 『논어』의 내용에 따라 작자를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논어』20편이 그 앞 10편과 뒤 10편의 내용상 성격에 차이가 있으므로 한 시기에 한 인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댓글 論語 공자와 제자들과의 대화 잘 배우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